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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Author: 꿈을 좇는 나비
고하린은 문득 떠올랐다.

진우석에겐 겨우 다섯 살 차이밖에 안 나는 외삼촌이 하나 있는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쉰이 다 되어 예기치 않게 얻은 막내아들이라 했다.

늦둥이로 태어난 그 남자는 사랑을 듬뿍 받아 어릴 때부터 어지간히도 응석을 부렸고 그 결과 성격이 꽤 고약해졌다는 말도 들었었다. 그는 기분 따라 사람을 휘둘렀고 이유 없이 화를 내기도 했고 결국엔 집안에서도 감당 못 해 외국으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근데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것도 모자라서 무려 의사가 됐다고?

고하린은 살짝 놀랐다.

그때 진우석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윤준서가 걸어 나왔고 차가운 눈빛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왜 불렀어?”

진우석은 어릴 적부터 외삼촌을 무서워했다. 비록 겨우 다섯 살 차이지만 윤준서는 워낙 성격이 냉철했고 독설도 잘했다. 게다가 늘 어른 행세를 하며 자기가 잘못한 것도 진우석에게 뒤집어씌우곤 했으니 두려움이 안 생길 수 없었다.

진우석이 아무 말도 못 하자 고유진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외삼촌, 우리 언니 좀 봐 주세요. 검사 결과를 들으면 언니도 더 이상 억울해하지 않을 거 같아서요.”

그러자 윤준서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나는 죽는 게 안 무서운 줄 알아요?”

진우석은 그제야 용기를 내 말했다.

“그래도 삼촌은 의사잖아요. 설마 전문가가 약도 안 가지고 다녀요?”

윤준서는 국내에서 이름난 외과의사였다. 수술이 잦다 보니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HIV 차단제를 늘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사실 많은 외과의들이 그러하다.

“외삼촌, 부탁드릴게요...”

고유진은 다시 한번 매달리듯 애교를 부렸다.

그런데 윤준서는 그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돌려 정원 한가운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고하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예전에 고씨 가문의 큰딸은 언제나 우아하고 자존감이 높았으며 경한시의 제1 명문가 아가씨로 명성을 떨쳤었다.

그런 고하린이 인신매매범들에게 잡혀 3년 동안 끌려다니다가 이렇게 처참한 몰골로 돌아올 줄이야.

주변은 아주 조용했고 윤준서는 마치 산책하듯 유유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와 그녀 앞에 섰다.

하지만 고하린은 미간을 찌푸리고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불이 붙은 듯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식는 느낌이었다. 마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압박감이 밀려왔다.

‘의사들은 다 성인군자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살벌한 망나니 같잖아.’

“손 줘 봐요.”

윤준서는 손을 내밀고 차가운 목소리로 네 글자를 툭 내뱉었다.

그러나 고하린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감췄고 미간은 더 깊게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본 고유진은 곧바로 태세를 바꾸며 말했다.

“언니, 이분은 국내 최연소 의대 교수셔! 이름 대면 누구나 다 알아. 윤 선생님에게 검사 한 번만 받아 봐.”

고하린은 윤준서의 손을 바라봤다. 흰 피부에 손가락 마디는 뚜렷했다.

“언니, 혹시 찔리는 거 있어? 거짓말 안 해도 돼. 우리 가족이잖아. 아무도 언니를 안 미워해. 그런데 언니가 솔직하게 말해줘야 우리도 대비를 하지. 괜히 온 가족이...”

고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하린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윤준서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없이 진찰을 시작했다. 그는 고하린의 팔꿈치 관절과 피부 상태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팔에 채찍 맞은 자국이 얽히고설켜 있었는데 깊은 상처도 있고 채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었으며 방금 맞은 것 같은 흔적들도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곪은 상처나 발진, 사마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팔을 다 확인한 뒤 윤준서는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요즘 열 난 적 있어요?”

“아니요.”

윤준서는 다른 손으로 고하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가 귀 뒤로 손을 옮겨 눌렀다.

그는 고하린의 림프샘을 확인 중이었다. HIV 감염자에게 흔한 증상 중 하나가 림프샘 비대였다.

마당에 있는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고유진은 진우석의 손을 꽉 움켜쥔 채 속으로 바랐다.

‘제발... 제발 고하린이 에이즈 걸렸다고 해줘...’

그러나 윤준서는 고씨 가문 사람들을 돌아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아무 병도 없습니다.”

‘뭐?’

현장에 있는 모두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태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우리가 경찰서에서 본 자료엔 하린이가 출산했고 HIV에 감염됐다고 분명히 나와 있었는데요?”

윤준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더러 검사하라 해놓고 지금 내 말을 못 믿는 거예요? 장난합니까?”

윤준서와 고태진은 항렬로 따지면 동년배라 말투에 깍듯함 따윈 없었다.

고태진은 당황해서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고유진도 반박했다.

“그럼 아직 발병 전일 수도 있잖아요? 바이러스만 갖고 있어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러나 윤준서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설령 고하린 씨가 감염자라 해도 일상적인 접촉으론 안 옮습니다.”

그 말에 고하린은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저 감염자 아니거든요.”

“참 웃기네요.”

윤준서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바라봤다.

“왜 나한테 화풀이해요? 그쪽을 못 믿는 건 그쪽 가족들이지, 내가 아니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고태진을 돌아보았다.

“약혼식 취소된 거죠?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태진은 당황했다. 그는 혹시 윤준서가 기분 상했나 싶어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말했다.

“아이고, 윤 선생님. 그래도 식사 한 끼 하시고 가시죠.”

윤준서는 자신의 벤틀리 쪽으로 걸어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그쪽 집안 일엔 관심 없어요.”

“...”

고태진은 난감해서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세요...”

고하린은 윤준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개 숙이고 그의 비위를 맞추는 걸 보고, 또 경한시 내에서 윤씨 가문의 위세를 떠올리자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윤준서가 가진 것들은 다 허울 좋은 타이틀일 뿐이지, 권력 있고 돈 있으면 명예쯤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윤준서를 배웅한 고태진은 결국 남아 있던 손님들도 얼른 돌려보냈다. 괜히 더 망신살 뻗치기 전에.

고하린도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려던 순간 또다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하린아... 잠깐만.”

양서정은 걸음을 멈추고는 집 안에 대고 소리쳤다.

“아줌마, 얼른 방 치워요.”

도우미 조정희는 얼른 대답하고 일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양서정은 큰딸을 바라보며 혹시나 그녀가 집 안으로 따라 들어올까 봐 다급히 말렸다.

“하린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금방 다 정리될 거야.”

그러고는 둘째 딸 고유진을 데리고 거실 안으로 들어가선 속닥속닥 얘기를 나눴다. 이제 고유진은 배가 아팠던 것도 까맣게 잊은 듯했다.

고하린은 저택 대문 앞에서 버려진 고양이처럼 서 있었다.

진우석은 옆에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눈빛에 놀람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고하린은 단 한 번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후 조정희가 나와 고하린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고하린은 원래 자기 방으로 가는 줄 알았으나 조정희는 그녀를 데리고 거실을 지나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당 한구석의 자그마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 사모님께서 당분간 여기서 지내시래요.”

진우석은 고하린 뒤를 따라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얼굴이 굳었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거실 안에 있는 장모에게 따져 물었다.

“어머님,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양서정은 입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석아,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 자그마한 ‘집’은 고씨 가문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반려견을 위해 만든 개 전용 ‘별장’인데 성인 허리쯤 되는 높이에 총면적도 십여 평 남짓했다.

부잣집 강아지가 서민보다 더 좋은 집에 산다는 얘기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고하린은 그 개 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며 말했다.

“저더러... 개랑 같이 살라는 말씀이세요?”

고하린은 자조하듯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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