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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Author: 꿈을 좇는 나비
양서정은 큰딸을 흘깃 보고는 계속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다. 말투 또한 마치 마지못해 입을 여는 듯했다.

“하린아... 너 혼자면 그 방도 충분하잖니...”

고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꿈에서도 상상 못 했다. 납치돼서 끌려가 돼지우리에서 3년을 살고 돌아왔더니, 이젠 개집이라니. 한 지옥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어머님, 이건 너무하십니다. 하린이는 어머님 친딸이잖아요.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진우석이 다시 입을 열었고 그의 말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러자 고유진이 곧장 눈살을 찌푸리며 진우석의 팔짱을 꼈다.

“오빠, 왜 그렇게까지 언니를 걱정해? 설마 아직도 언니를 사랑하는 거야?”

“난...”

진우석은 말문이 막혔고 고개를 돌려 고하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통을 꾹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답답한 듯 거칠어진 숨결. 그 모습은 진우석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그와 고하린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고 성인이 되어 연인으로 발전했다. 둘은 누구보다 사이좋은 커플이었다.

하지만 3년 전 고하린이 돌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그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고하린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하린은 더 이상 예전의 경한시 최고 명문가의 빛나는 아가씨도, 학교를 들썩이게 했던 천재 소녀도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는 수많은 천박한 늙은이들에게 짓밟힌 여자,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까지 앓고 있는 여자였다.

진우석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고 결국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불쌍해서 그래.”

“그렇지...”

고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심이 묻어나는 눈빛을 드러냈다.

“언니가 참 불쌍하긴 해... 하지만 언니가 불쌍하다고 우리 가족 건강까지 위험에 빠뜨릴 순 없잖아? 이렇게라도 받아준 걸 감사해야지...”

그녀는 ‘받아줬다’는 표현을 썼다. 이 집에 진짜로 ‘받아들여진’ 사람은 입양된 자신이라는 걸 완전히 잊은 듯했다.

진우석은 할 말을 잃고 고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 집 식구들은 윤준서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고 속으로 아직도 고하린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 양서정이 갑자기 고하린에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린아, 씻을 땐 1층 공용 화장실 써. 그리고 일단은 개집 별채에서 지내고 나중에 뒷마당에 조그만 방 하나 지어줄게. 거기서 살아.”

1층 화장실은 원래 도우미들이나 손님이 쓰는 곳이었고 고씨 가문 사람들은 전부 다 위층에서 생활했다.

양서정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하린은 몸을 굳힌 채 서 있었다.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갑자기 돌아와 다들 당황했을 뿐이라 믿고 싶었고 가족에게 희미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이 집 사람들은 이미 그녀를 죽은 사람 취급했고 고유진을 친딸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고유진의 ‘까치집을 차지한 비둘기’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녀는 3년 만에 고씨 가문의 첫째 딸 자리를 완벽히 꿰찼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고하린의 마음은 또다시 찢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고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 개집, 누가 살고 싶으면 살든지요. 난 거실에서 잘게요.”

“너...”

양서정은 말문이 막혔고 한참이나 더듬다가 겨우 말했다.

“네가 거실에서 자면 우리 집안 꼴이 뭐가 되니? 너 일부러 그러는 거야?”

고하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말 한마디 꺼내는 것도 숨이 막히도록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소파에 누워 식구들 앞에서 대놓고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그 장면을 본 가족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들 망연자실해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오직 고유진만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고하린이 이대로 계속 난리를 피워줄수록 부모님은 그녀를 더 싫어하게 될 테니까. 그럼 고하린은 언젠가 다시 내쫓길지도 모른다.

고하린은 그렇게 반나절 넘게 거실에서 잠을 잤고 고씨 가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종일 속을 끓였다.

그녀 몸에 남아 있는 돼지우리 냄새가 거실 안에 퍼져 모두를 인상 찌푸리게 했다.

해 질 무렵이 되어 결국 양서정이 타협했다. 그녀는 고하린의 몸에 맞는 깨끗한 옷을 들고 와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른 가서 씻어. 1층에 남은 도우미 아줌마 방 하나 있으니까 거기서 지내.”

고하린은 눈을 뜨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어떻게 이 집에서 뻔뻔하게 눌러살 것인가, 어떻게 고유진의 계획을 폭로하고 복수할 것인가, 인신매매범들을 어떻게 감옥에 보낼 것인가, 그리고 남은 학업을 어떻게 이어갈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고씨 가문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이미 그녀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으니.

고하린이 반응이 없자 양서정은 참다못해 다시 말했다.

“하린아, 엄마가 하는 말 들었니?”

그제야 고하린은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 만큼 차가웠다. 이에 양서정은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고하린은 몸을 일으키고 소파 옆에 놓인 옷을 바라보았다.

“이거 내 거 아니에요.”

“응, 유진이 거야.”

양서정은 난처한 표정으로 멈칫했다가 다시 말했다.

“네 옷은... 집 리모델링할 때 다 정리했어.”

“리모델링이요?”

고하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없으니까... 그 방은 유진이 방이랑 터서 옷방으로 썼지...”

양서정은 말을 더듬으며 설명했고 자신감 없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고하린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올라갔다.

‘정말 잘도 차지했군. 방까지 뺏은 걸 보니.’

“다들 날 죽은 걸로 쳤군요.”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

양서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고하린은 차갑게 웃었다.

“내가 죽었다 쳐도 그래도 난 엄마 아빠 핏줄인데... 날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요.”

양서정은 마음이 걸렸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쓰던 귀중품들은 다 남겨뒀지. 네 생각이 나서.”

“그럼 가져와 봐요.”

양서정은 큰딸의 당당한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거실에 풍기는 냄새 때문에 더는 언쟁하고 싶지 않아 결국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말했던 귀중품들은 고하린이 어릴 적 생일마다 받았던 주얼리 세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고유진의 소유가 되어 버렸다. 양서정은 고유진의 방 안으로 들어가 금고를 열고 그 안의 보석들을 꺼냈다.

고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엄마...”

“그냥 네 언니 주자. 괜히 또 난리 치면 더 피곤하잖니. 나중에 내가 더 좋은 거 사줄게.”

그러자 고유진은 곧장 태도를 바꿨다.

“그래요. 이것들은 원래 언니 거였으니까요. 언니가 돌아왔으니 돌려줘야죠. 같이 가요.”

양서정은 그녀의 말에 감탄했다.

“역시 우리 유진이가 제일 속이 깊구나. 네 언니는 지금 완전 딴사람이 돼서 하는 말마다 비수처럼 나를 찔러대는데.”

“엄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충격이 커서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우리 조금만 더 참아주자고요.”

“그래...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양서정과 고유진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손에 고하린의 주얼리가 십여 세트나 들려 있었다.

“언니 없는 3년 동안 내가 언니 보석들 다 잘 간직하고 있었어. 자, 이제 돌려줄게.”

고유진은 듣기 좋게 말했지만 사실은 자랑이자 도발이었다. 고하린이 없는 동안 자신이 모든 걸 차지했다는 뜻으로 말이다.

고하린은 그 보석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걸 다 팔면 얼마쯤 나올까?’

그러고는 고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었다.

“고마워, 유진아. 먹은 걸 다시 토해내는 기분이 어때? 좀 불편하지? 그래도 뭐, 이제 넌 고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니까 이런 보석쯤이야 엄마 아빠가 얼마든지 다시 사주겠지?”

“...”

그 말에 양서정은 마음에 찔려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고유진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하며 웃었다.

“언니는 어떤 게 좋아? 내가 직접 목에 걸어줄게.”

고하린은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턱으로 툭 가리켰다.

“난 네 목에 걸려 있는 그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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