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
수술이 끝나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유월영은 자신이 유산으로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를 병실로 데려간 간호사는 인적 사항을 등록하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유월영 환자분, 가족들은 어디 계신가요?”유월영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간호사가 재차 물었다.“유월영 씨, 가족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이때, 약품을 정리하던 다른 간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한테 줘. 그거 내가 입력할게.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올 때 신분증이랑 카드 나한테 줬었어. 바로 등록하고 비용 결제하면 된다고. 아마 이 환자는….”유월영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저는 가족이 없어요.”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점점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수술을 마친 유월영은 홀로 병원에서 사흘간 입원해 있었다.그 동안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흘 째 되던 날, 드디어 연재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유 비서, 무단 결근 3일이면 충분히 휴식하지 않았어? 지금 옷 입고 서덕궁으로 와.”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배경 음악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까지 같이 전해져 왔다. 유월영은 지금 입원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유 비서.”낮게 깔린 중저음 목소리가 재차 전해졌다.화가 많이 났다는 증거였다.유월영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서덕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화장을 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대충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카운터로 직행했다.“해운그룹 연 대표님이 계신 방이 어디죠?”고개를 든 어린 남직원은 눈앞의 미모의 연인을 보고 수줍게 웃으며 다급히 길을 안내했다.“연 대표님은 1번 룸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할게
술자리가 끝나고 유월영은 고객사 직원들을 한 명씩 차에 태워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길가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듯이 아팠다.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파리한 입술에는 핏기 한 점 없었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연재준의 운전기사가 다급히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유 비서님, 먼저 차에 타실래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뒷좌석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리더니 밖에 연재준과 여자애가 서 있었다. 같이 타려고 했는데 유월영이 먼저 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연재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는 다급히 달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대표님, 제가 앞에 탈게요.”연재준은 짜증스럽게 문을 쾅 닫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유진이 먼저 데려다줘.”유월영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유산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니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차는 한 낡은 아파트 구역으로 들어섰다. 유월영이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연재준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골목이 어두워서 위험해. 유 비서가 유진이 집까지 좀 데려다줘.”백유진이 흑수정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대표님. 언니도 피곤할 텐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해요. 혼자 올라갈게요.”차에서 내린 그녀는 뒷좌석 차창에 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은 월영 언니 바래다줘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꿈 꿔요.”차갑기만 하던 연재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그래, 좋은 꿈 꿔.”유월영은 차에 오르고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유월영을 집에 데려다주는 대신, 연재준의 동해안 별장으로 차를 돌렸다. 그는 연재준의 가까운 심복 중 한 명으로써 눈빛 하나로도 연재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집 안으로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소리가 남녀의 신음소리를 덮었다.연재준에 이끌려 욕조에 던져진 유월영은 갑자기 3년 전 그와의 첫만남이 떠올랐다.그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작은 슈퍼를 운영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궁핍하지는 않았고 다섯 식구가 서로 이해하고 도우면서 오붓하게 살았다.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사기꾼의 꼬임에 들어 10억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들은 슈퍼와 집을 팔고 집안의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지만 그래도 6억이나 부족했다.막다른 길에 다달았을 때, 사기군은 유월영을 데려다가 빚을 갚게 하겠다고 꼬드겼다.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녀는 비 오는 밤에 살기 위해 집에서 도망쳤다. 뒤에는 오토바이 소리가 그녀를 쫓고 있었다. 맹수에게 쫓기는 이 가여운 먹잇감은 도망치는 길에 신발까지 잃어버리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어두운 대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달리다 지친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자,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녀가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절망하던 순간에 차량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섰다.차 문이 열리고 반짝이는 구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약간 들자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검은 우산을 들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었다.그리고 조폭들에게 자기 사람이라고 당장 꺼지라고 말했다.처음 만났을 때 그는 꿈에서 나타난 구원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모습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에 깊게 각인되어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대략 30분이 지나 유월영은 젖은 채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흑설탕을 따뜻한 물에 풀어 마시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재준은 아직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그녀는 유산한 사실을 그에게 알려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하지만 결국 비밀에 부치는 걸로 결론이 났다.3년 전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는 그의 곁에 남는 대가로 더 이상 귀찮은 일을
유월영이 물었다.“뭘 해명하라는 건가요?”“유진이 왜 해고했어?”유월영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한아의 계약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수점을 잘못 찍어 단가가 크게 차이 나는 실수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한아 쪽 관계자는 우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회사 이익에 큰 손해를 끼친 신입은 바로 퇴사 처리하는 게 우리 방침이잖아요. 책임을 안 물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을 들은 백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제가 원래 덜렁거리는 습관이 좀 있어요. 죄송합니다….”연재준은 그런 그녀에게 위안의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서류 가져와.”유월영은 가지고 온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연재준은 맨 마지막 장을 확인하더니 서류를 도로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날짜를 보니 유 비서가 무단결근 한 날짜에 벌어졌네. 유 비서가 무단결근만 안 했어도 이 계약서는 유 비서가 처리해야 할 서류였어. 신입인 백유진이 아니라.”유월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래서 제가 이걸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인가요?”“비서실 수석 비서로써 부하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건 유 비서도 잘 알 텐데?”연재준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했다. 백유진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유월영은 치미는 화를 꾹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유진 씨가 입사한 날에 저는 휴가를 내고 회사에 없었고요. 그리고 모르겠으면 다른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냥 방치해 둬도 되는 서류였어요. 혼자 의욕에 넘쳐 처리한다고 했다가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죠. 해운 비서실은 원래 전문 학과를 나온 탑클래스만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아니었나요? 아니면 경험이 풍부하거나 전 회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으면 모를까, 예술을 전공한 학생이 들어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연재준이 물었다.“내가 꼭 유진이를 비서실에 둬야겠다면?”유월영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비서실은 지금
유월영은 월셋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정리했다.“이제 돌아온 거야? 오늘도 안 돌아오면 시내에 있는 병원 다 뒤져서라도 찾아가보려고 했는데!”“이제 괜찮아.”유월영의 룸메이트 조서희는 그녀의 대학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같은 월셋방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내왔다.입원해 있는 동안에 그녀를 걱정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월영은 친구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감기로 입원해 있다며 병문안을 거절했다.실내화로 갈아신은 조서희는 월영의 방 문 앞에서 짐 정리를 하는 친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또 출장이야? 퇴원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연재준 그 인간 너무 직원을 부려먹는 거 아니야?”조서희는 연재준과 월영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친구를 부려먹는 악덕 상사를 줄곧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유월영은 이번에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기에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나 지방 발령 났어. 안성 지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는데 언제 끝날지는 몰라. 3개월이 지나도 나 안 돌아오면 새로운 룸메이트를 찾는 게 좋을 거야. 그때 가서 미리 나한테 연락 주면 와서 남은 짐을 가져갈게.”조서희가 순간 당황하며 물었다.“이렇게 갑자기?”“누구나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발령 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뭐.”다른 사람이었다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넘어갔겠지만 연재준과 월영의 사이를 아는 조서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너 연재준이랑 싸웠어?”월영은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없이 일어섰다. 그러다가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서희는 발 빠르게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병원 진료 기록이었다.조서희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그녀가 집을 비운 날짜와 맞물렸다.“유산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거야? 아이는 당연히 연재준 아이일 테고. 그 인간이 유산하라고 강요했어? 아니면 이제 너 필요 없으니까 멀리 꺼지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
그 직장 동료는 진심으로 유월영을 걱정해 주었다.“월영 씨, 고용 계약서가 한 달 뒤에 만기라면서요? 본사로 못 돌아오면 재계약이 힘들 것 같은데 계약이 끝나면 회사를 나가야 하잖아요. 물론 월영 씨야 유능해서 어딜 가도 환영 받겠지만 해운에 계속 남으려면 본사로 한 번 돌아와서 대표님이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재계약이 안 돼서 퇴사했다는 꼬리표가 붙는 건 재취직에도 불리하니까요.”물론 유월영은 이런 문제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와 얘기를 나눌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연재준이 안성 지사로 오는 날, 그녀는 공 들여 화장을 하고 하얀색 정장 원피스로 차려입고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가 대기했다.10분 뒤, 정문 입구로 세 대의 승용차가 들어왔다.차 문이 열리고 연재준이 차에서 내렸다. 유월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리려던 찰나, 뒤에서 내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얼어버렸다.백유진.어딜 가도 데리고 다닌다더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연재준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말없이 그녀를 스쳐지나 지사 사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유월영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늘 입던 브랜드의 검은색 정장에 위트 있는 넥타이까지 여전히 가슴 떨리게 매력적인 모습이었다.백유진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언니, 오랜만이에요.”순진한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유월영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오늘 회의의 업무 진행 보고를 맡았다.해외 고객사 임원도 참석한 자리였기에 유월영은 유창한 영어로 재치 있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자리에서 듣고 있던 임원들도 그녀의 센스 있는 표현에 웃음을 터뜨렸다.40분이나 진행된 업무 보고였지만 아무도 따분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를 마치고 내려오자 회의실 안에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연재준도 박수를 치고
그 뒤로 회의실 문은 한 시간 동안 안에서 잠겨 있었다. 격렬한 몸부림이 지나간 뒤, 유월영은 휴대하고 다니던 티슈를 꺼내 책상을 깨끗이 닦았다.청소를 끝낸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연재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가 살짝 구겨졌을 뿐, 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유월영은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집어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연재준은 평소처럼 턱을 치켜들고 그녀가 넥타이를 매줄 때까지 기다렸다. 유월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저 본사로 돌아가고 싶어요.”연재준은 여자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프로젝트 진행하는 동안만 지방에 있으라고. 이제 프로젝트도 무사히 끝났으니 돌아가고 말고는 유 비서가 결정하면 돼.”그렇게 되어 연재준의 지사 탐방이 끝나고 돌아가는 차량에는 한 사람이 더 늘게 되었다.백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연재준에게 물었다.“대표님, 언니도 이번에 저희랑 같이 돌아가는 거예요?”연재준은 서류에서 눈길도 떼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유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월영에게 말했다.“정말 잘됐어요, 언니! 안 그래도 언니가 출장 가 있는 사이 많이 외로웠거든요!”유월영은 오렌지 계열의 볼터치를 곱게 바르고 자연스러운 아이라인을 그린 소녀 느낌이 충만한 여자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화장 잘 됐네.”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듯 안 한듯한 투명 메이크업이었다.백유진은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그들을 태운 차가 신주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때가 넘은 시각이었다. 백유진을 먼저 집에 데려다주라는 연재준의 지시에 운전기사는 번화가로 방향을 꺾었다.유월영이 잠시 야경에 한눈을 파는 사이 차는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회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화 빌라 단지였다.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린 백유진이 차 창 너머로 인사를 건넸다.“대
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
“손님, 이 케이크는 당일 제조된 거라 유통기한이 짧아요. 냉장고에 넣어도 최대 3일밖에 보관할 수 없으신데, 이렇게 많이 사가시면 다 드실 수 있으신가요?”유월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연회 부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일 제조된 거라면 학생이 직접 만든 거예요?”“제가 아니고 저희 가게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한번 맛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구매하셔도 돼요. 다만 가족 인원이 많지 않으시면 한 번에 다 사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아요.”유월영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다 먹을 수 있어요.”연회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학생, 교복을 보니 신주시 고등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다녀요.”유월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아, 그러신가요.”“학생, 참 예쁘게 생겼네.”연회 부인은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고 유월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아니에요. 손님께서 훨씬 멋지고 품격 있어 보이세요.”“말도 참 예쁘게 하네요.”연회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케이크 맛있네요. 이거 전부 살게요. 계산해 주세요.유월영은 계산하며 말했다.“총 3만 6백 원인데, 3만 원만 받을게요. 맛있으시면 또 오세요.”“그럼 그럴게요.”계산을 마친 연회 부인이 케이크 포장을 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네일아트를 본 유월영이 주저하며 물었다.“차로 오셨나요? 제가 차까지 들어다 드릴게요.”“그래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연회 부인은 그녀를 차로 데려갔고 유월영은 케이크를 차에 실은 후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연회 부인이 출발하려는 찰나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옆에 멈췄다.“아빠!”유월영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연회 부인은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유월영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고해양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었고 그녀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갑작스러운 만남에 연회 부인은 몸은 얼어붙었고 혼란에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
“준비는 다 끝난 거예요? 거주지, 의사, 그리고 돌봐줄 사람까지.”연재준이 물었다.“그래. 신 씨 아저씨가 다 준비해 주셨어.”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요.”신씨 아저씨라...연재준의 어머니는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묶어놓은 족쇄에서 벗어나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됐다.하지만 아들은 비록 성숙하고 독립적으로 보이더라도 아직 고등학생일 뿐이었고 과연 그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재준아, 걱정하지 마. 너희 아빠랑 이혼 합의서에 분명히 명시했어. 그가 재혼하더라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연씨 가문과 해운 그룹은 앞으로 반드시 네 것이 될 거야.”이것이 그녀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연재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는 지금 가문과 해운 그룹에 큰 미련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필요하다면 아버지가 열 명, 스무 명의 자식을 더 낳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굳이 애쓸 필요는 없었다.그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혀 어머니를 안아주며 말했다.“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몸 잘 돌보세요. 방학 때 시간이 나면 찾아갈게요.”어머니는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상자를 꺼냈다.“이걸 네게 주려고 가져왔어.”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투명하고 맑은 옥불이 들어 있었다.연재준은 그것을 알아보았다.“외할머니께서 남기신 거잖아요.”“그래. 외할머니께서 법사에게 받은 거라 아주 영험하다고 하셨어. 평안을 빌어주는 거야.”연재준은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어머니가 갖고 계세요.”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가지고 다니면 내가 마음이 놓일 것 같아.”결국 연재준은 옥불을 꺼내 목에 걸고 어머니를 배웅했다.차가 떠난 후, 그는 옥불을 교복 안쪽에 넣어 피부에 닿도록 하고 학교로 들어갔다.평소에도 말수가 적던 그는 오늘따라 더욱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쉬는 시간에 평소 그와 친했던 몇몇 친구
아침 6시 45분.유월영은 학교로 걸어가던 중 그녀의 짝꿍을 만나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하지만 오늘 유월영의 상태는 조금 축 처져 보였고 짝꿍도 이를 알아차렸다.“너 어디 아픈 거야? 어젯밤 또 늦게까지 문제집 풀었어?”“아니야, 어젯밤은 꽤 일찍 잤는데 그냥 좀 어지러워. 왜 그런지 모르겠어.”짝꿍이 그녀의 이마를 만져봤지만 열은 없었다.“나 페퍼민트 오일 가져왔는데, 발라줄까?”“좋아, 고마워.”“뭘 이런 걸로.”유월영은 월반으로 들어온 학생이라 반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고 짝꿍보다도 두 살 어리니 마치 어린 여동생 같았다.페퍼민트 오일을 바른 후 짝꿍에게 돌려줄 때, 짝꿍의 시선은 먼 곳에 가 있었다.“저기 차 옆에서 누군가랑 얘기하고 있는 남학생이 연재준 아니야. 주변에 경호원들도 지키고 있네.”유월영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짝꿍이 아는 사람을 본 줄 알고 물었다.“그럼 가서 인사라도 할래?”짝꿍은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누가 감히 그래!”아무도 연재준에게 괜히 인사하러 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짝꿍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빨리 가자, 빨리!”하지만 유월영은 달리자 머리가 더 아픈 느낌이 들었다.연재준은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치마가 바람에 살짝 펴지며 만들어낸 곡선을 본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재준아.”차 안에서 여자가 그를 불렀다.연재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차 안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이 합쳐서 일흔 살이나 되셨는데 아직도 스스로 내린 결정에 책임질 수 없다면 그동안 헛산 거예요.”여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내가 정말 참을 만큼 참아왔어. 하지만 요즘 네 아빠가 자기 비서랑 동거를 시작했어. 더는 못 견디겠어, 미칠 것 같아. 나 정말 이혼해야겠어.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내가 진짜로 미쳐버릴 거야.”연재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몸 안에서 느껴지는 그 애매한 아픔을 완화하려 했다.이 여자는 그의 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