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 지었다.“나는 시우 씨가 나한테 물어볼 게 있는 줄 알았어. 나와 연재준이 지금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지 않아?”“그가 너에게 매달리고 있는 걸 알아.”현시우가 담담히 말했다.“약한 척, 불쌍한 척하면서 몇 마디로 널 그리워하고 사랑한다고 하겠지. 너를 달래고 배려해 주는 남자들의 수법을 내가 그걸 모를까?”유월영이 몇 초 후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그렇게 하고 있어.”상시서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럼 넌 그 사람 그런 행동들을 어떻게 생각해?”유월영은 솔직하게 말했다.“처음에는 그가 죽었으면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그 사람이 평온하게 남은 생을 보내게 할 생각은 없어. 양부모에게 빚진 것들 그리고 연씨 가문이 고씨 가문에 빚진 것들, 다 갚게 할 거야.”“신현우도 결국 재산을 다 털어내야 죗값을 치를 수 있었는데 연 대표도 마찬가지야. 연씨 가문의 상속자로, 해운 그룹의 대표로 모든 걸 토해내게 만들거야.”유월영은 연재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현시우의 질문에는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재준을 쉽게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현시우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졌다.머리를 감고 말리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현시우가 잔소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유월영이 미리 말했다.“알았어. 다음번엔 꼭 말릴게.”현시우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그때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가주님, 아가씨,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연회 부인이었다.둘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계단을 다 내려가기 전에 연회 부인이 들어와 소리쳤다.“민서야!”유월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앞서 내려가며 외쳤다.“이모!”연회 부인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는 온몸을 살피며 돌았다.유월영은 돌면서 자신에게 아무 일 없음을 보여 주었다
반 시간쯤 이야기를 나눈 후 한세인이 위층에서 내려와 그녀를 불렀다.“아가씨, 회의에 참석할 시간입니다.”예정했던 회의 시간이어 유월영이 일어서며 말했다.“이모, 잠시 앉아 계세요. 제가 일 때문에 가봐야 해서요.”연회 부인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그래, 얼른 가서 일 봐라, 아가야. 이모가 주방에서 수프를 끓이고 있을게. 일이 끝나면 바로 마실 수 있을 거야.”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연회 부인이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현시우도 전화를 끝내고 돌아왔다.그녀는 위층을 한 번 바라보며 유월영이이 내려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현시우에게 눈짓을 보냈다.“이 불효자식아, 엄마랑 정원에 가서 담배 한 대 피우자.”현시우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산책은 좋지만, 담배는 사양할게요.”“왜 그러니?”“월영이는 내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걸 알게 되면 또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분명 화낼 겁니다.”연회 부인은 드물게 침묵하며 담배를 하나 꺼냈다. 두 모자는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3월의 마르세유는 기온이 매우 쾌적했다.연회 부인이 물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뒷수습을 할 계획이니?”그녀가 묻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 듯했지만 현시우는 회사 일을 물어본 것이라 여기고 담담히 말했다.“엘리자베스 레온이 이렇게 큰 스캔들을 일으켰으니 가문 규율에 따라 그녀를 가문에서 내쫓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인 조치에요. 누구도 이의제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가진 지분은 모두 월영이 한테 넘길 거예요.”“무슨 명분으로?”“엘리자베스 부인 때문에 월영이가 피해를 입었으니 보상은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게다가, 그들은 방금 엘리자베스 레온을 제거한 상태였고 현시우의 화가 가라앉지 않은 걸 알고 있어 반박할 사람은 없었다.그가 합리적이라 말하면 그대로 따라야 했다.연회 부인은 말했다.“이렇게 되면, 유월영이가 12%의 지분을 가지게 되고, 네가 가진 36%를 더해도 총 48%밖에 되지 않아
다음 날, 유월영은 현시우와 함께 레온 그룹 본사에 갔다.현시우의 예상대로, 엘리자베스 레온을 가문에서 추방하고 그녀의 지분을 유월영에게 넘긴다는 발표에 대해 주주들은 분노는 했지만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현시우는 또한 4월에 유월영과 결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주주들은 그들이 결혼하면 두 사람의 지분이 단번에 반수를 초과하게 되고 결국 레온 그룹 전체가 크로노스의 통제 아래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들은 승산이 없었다.회의가 끝난 후, 유월영이 회의실을 나왔다.한세인이 그녀의 귀에 대고 보고했다.“엘리자베스 부인이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유월영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나를요?”“네, 대표님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는데...아가씨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어요.”한세인은 이 말을 하며 마음이 불안했다.그녀는 엘리자베스 부인이 유월영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의 그녀라면 엘리자베스 부인의 말을 숨기고 바로 현시우에게 전했겠지만...한세인은 유월영과 현시우가 함께 있는 것을 늘 바라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엘리자베스 부인이 유월영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사실대로 보고했고 엘리자베스 부인을 만나러 갈지 말지는 유월영이 결정하게 했다.유월영은 사무실로 돌아와 생수병을 열어 반쯤 마신 뒤 말했다.“가보죠. 어른이 보고 싶다는데 조카가 안 갈 수 있나요?”엘리자베스 부인은 현재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었다.전 국민이 아는 극악무도한 사건이었기에 자살을 불사할 생각이 아닌 이상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엘리자베스 부인은 종신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그녀 역시 자신이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았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옥으로 갈지언정 몇 사람이라도 더 끌고 가고 싶었다.며칠간 골똘히 생각한 끝에 오늘에야 비로소 그녀는 반격할 방법을 떠올렸다.엘리자베스 부인은 유월영의 정체와 그녀와 현시우와의 관계를 떠올렸다.
유월영은 경찰서를 떠난 후 곧바로 다니엘 저택으로 돌아가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뒤늦게 현시우도 회사에서 돌아왔다.유월영이 그에게 말했다.“내일 귀국하려고.”“오성민이 보석으로 풀려난 일 때문에 그래?”현시우도 알고 있었다.“경찰이 제기한 여러 혐의가 모두 간접 증거뿐이라 가장 강력한 증거가 부족했고, 그는 지병이 있다는 병원의 진단서까지 제출해 보석을 허가받았더군.”“알아. 오 변호사가 이런 일에 가장 능하지.”유월영이 냉소하며 말했다.“하지만 내가 방금 엘리자베스 레온한테서 흥미로운 정보를 들었어. 그래서 마침 그게 사실인지 가서 확인해 보려고.”현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유월영이 귀국하는데 현시우는 큰 의견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마술처럼 하얀 팔찌를 꺼내더니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채워주었다.유월영이 궁금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이게 뭐야?”“퇴근할 때 회사 앞에서 열몇 살 된 소녀가 만들어서 팔고 있었어. 비싼 보석은 아니지만 한눈에 보고 너에게 선물하고 싶더라고.”유월영은 보석 라인 책임자로서 이런 구슬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편이었다.“이건 천연 조가비를 연마해 만든 거네. 이런 천연 조가비들은 약간 은은한 부드러운 광택이 나지.”“마치 달빛같이.”현시우가 다정하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나는 마르세유에 남아 레온 그룹의 일을 처리해야 해. 이번에는 너와 함께 귀국하지 못하지만 네가 빨리 일을 마치고 4월에 있을 우리의 결혼식에는 돌아올 수 있길 바래.”유월영은 손목에 걸린 구슬을 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손목에 느슨하게 걸려 있어 갑갑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감정을 잘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를 향해 자연스레 미소 지었다.“응, 걱정하지 마.”다음 날 아침,유월영은 한세인과 함께 신주시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한세인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고 유월영이 그걸 알아차리고 물었다.“왜 그래요?”한세인이 코를 살짝 문지르며 말했
유월영과 조서희는 순간 놀라 이승연을 바라봤다.이승연은 음료의 빨대를 잡고 가볍게 휘젓다 입을 열었다.“나는 아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아.”“걷기 시작한 후 다시 로펌에 돌아갔어.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혼 소송 하나를 맡았지. 그런데 막상 법정에 서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한마디도 할 수 없더라.”이승연이 웃으며 말했다.“다행히 그 사건은 단지 절차상 개정만 있었고 별도의 변호가 필요 없었어.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변호사 업계의 얼굴에 먹칠을 할 뻔했지.”유월영은 침묵했다.이승연은 한때 법조계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거의 패소한 적이 없었고 전설로 여겨질 정도였다. 오성민 조차도 그녀와 비교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변호사 망신을 시켰다고 자조하고 있었다.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듯했다.유월영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심리상담은 받아 봤어?”“받아 봤지.”이승연이 말했다.“몇 가지 약을 처방해 주더라고. 그리고 내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당분간 변호사 관련 일을 접고 치료에 전념하라고 했어.”두 친구의 걱정 어린 시선을 느낀 이승연은 오히려 미소 지었다.그녀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거의 10년 가까이 변호사로 일했는데 사실 지쳤었어. 이번 기회에 은퇴하고 서류 작업만 하고 법정에는 더 이상 서지 않으려 해. 그게 오히려 좋을 것 같아.”그녀는 두 사람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내가 돈이 많잖아. 직업 하나 잃었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이제는 오히려 개인 시간이 많아져서 여행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음, 한 번쯤 땅끝마을 같은데 운전해서 여행 가고 싶어. 캠핑카에 텐트를 실어서 가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으면 캠핑도 하고, 얼마나 자유롭겠어.”이승연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그러나 유월영은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언니는 10년 전에도 이미 부자였어. 변호사 일을
이승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장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씨 가문의 미해결 사건이자 유씨 가문의 목숨으로 지켜진 장부였다. 유월영은 이승연이 두 가문을 위해 정의를 되찾아 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녀를 그렇게 믿고 있었다...이승연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유월영에게 약속할 수 없었다.법정에 서는 것도 두려워하는 변호사로서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유월영을 위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식사를 마친 후, 이승연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조서희는 이승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월영아, 승연 언니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예전의 엄격하지만 갑자기 웃긴 말을 불쑥불쑥 내뱉던 그 쿨한 언니가 더 좋아.”유월영이 고개를 저었다.“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누구도 진정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이승연은 6개월이나 품었던 아이를 잃었고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변호사라는 직업이 파괴되었다.유월영은 바로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연의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되도록 승연 언니한테서 눈길을 떼지 마세요. 지금 언니의 모습이 예전 나와 아주 비슷해서 걱정이에요.”이승연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예민하게 감지한 이유는 바로 유월영 자신도 한때 그랬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이혁재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웠다.한 모금 피우자마자 이승연이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어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는 이승연의 집 아래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안의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 또 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승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이혁재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그녀를 살폈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다정했다.이승연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그는 소파에 누웠다.그는 아침 6시에 맞춰 진동만 울리도록
“아니. 난 안 꺼져.”이혁재는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올라가 이승연을 이불째 안아 품에 안았다.그녀는 많이 말랐다.지난 3년 동안 이혁재는 갖은 방법을 다해 이승연의 건강을 최대한 지키려 했지만, 영양제로만 살을 찌우는 건 불가능했고 이승연은 몸무게가 10킬로 빠진 상태였다.그녀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로, 영양사가 일일 식단을 짜주어 회복을 돕고 있었지만 아직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봄이라 긴팔과 외투를 입고 있지만 여름에 반소매만 입으면 이승연은 뼈만 보일 게 뻔했다.이혁재는 그녀의 가녀린 팔을 만질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살을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을 정도였다.“누나랑 떨어지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랐는데 난 어디도 가지 않아.”이승연은 계속 그를 밀어냈다. 그저 가볍게 밀어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거부하며 몸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그녀는 힘이 없었고 이혁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또 악몽을 꾼 거야? 법정에서의 그 일은 이미 3년 전 일이야. 이젠 다 지나갔고 그때 당신을 때린 그 나쁜 놈도 법의 심판을 받았어...”이혁재는 약간 볼멘소리로 말했다.“난 그놈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 잘 참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내버려두었어. 누나 말을 듣고 법을 준수하는 모범 시민이 된 거야. 그런데 누나는 칭찬 한마디도 안 해 줘.”이승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지쳐 눈을 감았다.이혁재가 계속 말했다.“배후에 있던 주범, 그 악의 근원인 오성민도 이제 잡혔어. 모든 게 다 끝났으니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어.”이승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보낸 이혼 서류 못 받았어?”“못 받았어.”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이메일로 보냈는데.”“내 이메일은 오래전에 정지됐어...그리고 누나가 보내도 내가 회사를 가지 않으니까 받지 못해. 그리고 직접 줘도 소용없어. 절대로 열어보지 않을 거니까.”그는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었다.이승연은
이혁재는 이승연이 여전히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핸드폰을 꺼내 보니 비서의 전화였다.“이번 시즌 보너스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야?”“아, 아니에요!”이혁재는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그럼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하는 건 죽고 싶어서 그런 거야?”비서는 울먹이며 말했다.“그게 아니라 대표님. 어제 오성민이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이런 건 바로 알고 싶어하실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이혁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원래 피곤했던 눈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뭐라고?”“오성민이 구치소에서 나왔습니다. 지병이 있다는 핑계로 보석을 신청해 허가받았어요.”“어제 일을 지금 알려주면 어떡하자는 거야? 너 정말 보너스 가질 생각이 없는 게 맞구나?”“저, 저희도 이제 막 들은 소식이에요...이제 어떻게 할까요?”“유 대표한테 물어본 후에 결정하지.”전화를 끊고 나서 이혁재는 바로 유월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아침 일찍 잠을 깨운다고 뭐라 하던 그는 이내 다른 사람이 깨든 말든 따질 때가 아니었다.유월영도 결국 이혁재의 전화에 잠에서 깼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되어 이제 막 잠들었을 때였다.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이 대표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오성민 그 자식 왜 아직도 살아 있죠?”“그렇게 쉽게 쓰러지면 오성민이 아니죠.”이혁재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누군가 그의 핸드폰을 잡아갔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보자 이미 깨어난 이승연이었다.이승연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핸드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그가 법의 빈틈을 이용해 나올 수 있다면 나도 법을 이용해 그를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유월영은 원래 이혁재에게 자신이 엘리자베스 부인에게서 오성민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냈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승연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말했다.“그럼 좋지, 이번엔 언니한테 맡길게.”유월영은 오성민의 일이 이승연이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자극이 되길 바랬고 기꺼이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