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과 조서희는 순간 놀라 이승연을 바라봤다.이승연은 음료의 빨대를 잡고 가볍게 휘젓다 입을 열었다.“나는 아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아.”“걷기 시작한 후 다시 로펌에 돌아갔어.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혼 소송 하나를 맡았지. 그런데 막상 법정에 서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한마디도 할 수 없더라.”이승연이 웃으며 말했다.“다행히 그 사건은 단지 절차상 개정만 있었고 별도의 변호가 필요 없었어.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변호사 업계의 얼굴에 먹칠을 할 뻔했지.”유월영은 침묵했다.이승연은 한때 법조계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거의 패소한 적이 없었고 전설로 여겨질 정도였다. 오성민 조차도 그녀와 비교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변호사 망신을 시켰다고 자조하고 있었다.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듯했다.유월영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심리상담은 받아 봤어?”“받아 봤지.”이승연이 말했다.“몇 가지 약을 처방해 주더라고. 그리고 내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당분간 변호사 관련 일을 접고 치료에 전념하라고 했어.”두 친구의 걱정 어린 시선을 느낀 이승연은 오히려 미소 지었다.그녀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거의 10년 가까이 변호사로 일했는데 사실 지쳤었어. 이번 기회에 은퇴하고 서류 작업만 하고 법정에는 더 이상 서지 않으려 해. 그게 오히려 좋을 것 같아.”그녀는 두 사람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내가 돈이 많잖아. 직업 하나 잃었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이제는 오히려 개인 시간이 많아져서 여행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음, 한 번쯤 땅끝마을 같은데 운전해서 여행 가고 싶어. 캠핑카에 텐트를 실어서 가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으면 캠핑도 하고, 얼마나 자유롭겠어.”이승연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그러나 유월영은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언니는 10년 전에도 이미 부자였어. 변호사 일을
이승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장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씨 가문의 미해결 사건이자 유씨 가문의 목숨으로 지켜진 장부였다. 유월영은 이승연이 두 가문을 위해 정의를 되찾아 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녀를 그렇게 믿고 있었다...이승연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유월영에게 약속할 수 없었다.법정에 서는 것도 두려워하는 변호사로서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유월영을 위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식사를 마친 후, 이승연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조서희는 이승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월영아, 승연 언니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예전의 엄격하지만 갑자기 웃긴 말을 불쑥불쑥 내뱉던 그 쿨한 언니가 더 좋아.”유월영이 고개를 저었다.“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누구도 진정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이승연은 6개월이나 품었던 아이를 잃었고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변호사라는 직업이 파괴되었다.유월영은 바로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연의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되도록 승연 언니한테서 눈길을 떼지 마세요. 지금 언니의 모습이 예전 나와 아주 비슷해서 걱정이에요.”이승연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예민하게 감지한 이유는 바로 유월영 자신도 한때 그랬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이혁재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웠다.한 모금 피우자마자 이승연이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어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는 이승연의 집 아래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안의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 또 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승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이혁재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그녀를 살폈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다정했다.이승연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그는 소파에 누웠다.그는 아침 6시에 맞춰 진동만 울리도록
“아니. 난 안 꺼져.”이혁재는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올라가 이승연을 이불째 안아 품에 안았다.그녀는 많이 말랐다.지난 3년 동안 이혁재는 갖은 방법을 다해 이승연의 건강을 최대한 지키려 했지만, 영양제로만 살을 찌우는 건 불가능했고 이승연은 몸무게가 10킬로 빠진 상태였다.그녀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로, 영양사가 일일 식단을 짜주어 회복을 돕고 있었지만 아직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봄이라 긴팔과 외투를 입고 있지만 여름에 반소매만 입으면 이승연은 뼈만 보일 게 뻔했다.이혁재는 그녀의 가녀린 팔을 만질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살을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을 정도였다.“누나랑 떨어지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랐는데 난 어디도 가지 않아.”이승연은 계속 그를 밀어냈다. 그저 가볍게 밀어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거부하며 몸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그녀는 힘이 없었고 이혁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또 악몽을 꾼 거야? 법정에서의 그 일은 이미 3년 전 일이야. 이젠 다 지나갔고 그때 당신을 때린 그 나쁜 놈도 법의 심판을 받았어...”이혁재는 약간 볼멘소리로 말했다.“난 그놈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 잘 참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내버려두었어. 누나 말을 듣고 법을 준수하는 모범 시민이 된 거야. 그런데 누나는 칭찬 한마디도 안 해 줘.”이승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지쳐 눈을 감았다.이혁재가 계속 말했다.“배후에 있던 주범, 그 악의 근원인 오성민도 이제 잡혔어. 모든 게 다 끝났으니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어.”이승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보낸 이혼 서류 못 받았어?”“못 받았어.”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이메일로 보냈는데.”“내 이메일은 오래전에 정지됐어...그리고 누나가 보내도 내가 회사를 가지 않으니까 받지 못해. 그리고 직접 줘도 소용없어. 절대로 열어보지 않을 거니까.”그는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었다.이승연은
이혁재는 이승연이 여전히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핸드폰을 꺼내 보니 비서의 전화였다.“이번 시즌 보너스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야?”“아, 아니에요!”이혁재는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그럼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하는 건 죽고 싶어서 그런 거야?”비서는 울먹이며 말했다.“그게 아니라 대표님. 어제 오성민이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이런 건 바로 알고 싶어하실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이혁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원래 피곤했던 눈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뭐라고?”“오성민이 구치소에서 나왔습니다. 지병이 있다는 핑계로 보석을 신청해 허가받았어요.”“어제 일을 지금 알려주면 어떡하자는 거야? 너 정말 보너스 가질 생각이 없는 게 맞구나?”“저, 저희도 이제 막 들은 소식이에요...이제 어떻게 할까요?”“유 대표한테 물어본 후에 결정하지.”전화를 끊고 나서 이혁재는 바로 유월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아침 일찍 잠을 깨운다고 뭐라 하던 그는 이내 다른 사람이 깨든 말든 따질 때가 아니었다.유월영도 결국 이혁재의 전화에 잠에서 깼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되어 이제 막 잠들었을 때였다.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이 대표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오성민 그 자식 왜 아직도 살아 있죠?”“그렇게 쉽게 쓰러지면 오성민이 아니죠.”이혁재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누군가 그의 핸드폰을 잡아갔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보자 이미 깨어난 이승연이었다.이승연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핸드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그가 법의 빈틈을 이용해 나올 수 있다면 나도 법을 이용해 그를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유월영은 원래 이혁재에게 자신이 엘리자베스 부인에게서 오성민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냈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승연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말했다.“그럼 좋지, 이번엔 언니한테 맡길게.”유월영은 오성민의 일이 이승연이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자극이 되길 바랬고 기꺼이
이혁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누나와 결혼한 이유가 반드시 뭔가를 얻기 위해서여야 해? 그냥 누나를 좋아해서 결혼할 수는 없는 거야?”이승연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나를 좋아한다고?”“왜? 누나를 좋아하면 안 돼?”이혁재는 다시 물으며 눈에는 거침없는 야성이 서려 있었다.“누나 스스로가 못생기고 몸매가 별로라고 생각해? 아니면 남자한테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내가 가출했을 때 머물 곳이 없을 만큼 친구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학교 다닐 때 집 나간 적 있잖아. 그때도 친구들 집에서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는데 굳이 누나 집에 와서 있었겠냐고!”이승연은 그의 쏟아지는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무슨 뜻이야?”이혁재가 갑자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좁은 욕실에서 이혁재의 존재감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는 완전히 이승연을 그의 그림자 안에 가둬 버렸고 그녀의 시야는 온통 그로 가득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이혁재는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말했다,“내가 아직 미성년일 때부터 누나를 좋아했고 누나를 원했어. 누나와 키스하고 누나랑 자고 싶었다는 뜻이야.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돼?”“...”이승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그래도 못 믿겠으면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게...처음 누나를 본 건 내가 16살 때였어. 누나가 대학에 합격하고 우리 부모님이 누나네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지. 누나는 엄마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어. 그날 민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손을 뒤로 하고 걷고 있었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고 누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지.”이혁재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눈빛도 어두워졌다.“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런 꿈을 꿨어.”이승연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의사는 누나가 식물인간 상태지만 외부 자극에 반응이 있다고 했어. 이 3년 동안 매일 내가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들었어?”“...”이승연은 자
이혁재는 정말 그녀가 그리웠다.이 3년 동안 그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직 집에 돌아와 이승연의 침대 옆에 앉았을 때만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그는 아침에 뭘 먹었는지, 출근길에 뭘 봤는지 그리고 고객이 얼마나 멍청하고 오성민은 얼마나 역겨운지, 집에 돌아올 때 유리창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와이퍼에 의해 깨끗하게 닦여지는 모습이 얼마나 치유되는지까지 세세하게 이야기했다.그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고 그녀가 대답해 주길 바랐다.이혁재의 손이 이승연의 허리에 닿았고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그녀의 허리 위를 쓰다듬었다.이승연은 허리 쪽에서 무언가에 닿는 느낌이 나자 본능적으로 잡으려 했고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깨닫고 몸이 굳어져 그를 밀어냈다!그리고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세면대를 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이혁재의 입술은 붉게 물들었고 눈빛도 더욱 짙어졌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이제, 느낌이 좀 오지 않아?”“...아니!”이승연은 축축해진 입가를 닦아냈다.“괜찮아, 몇 번 더 하면 느낌이 올 거야. 어차피 난 누나한테 반응하고 있으니까.”이혁재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아내에게 감정을 느끼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만족스러워했다.“봐봐, 내가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몸이 이렇겠어?”“...알 게 뭐야!”이승연은 더 이상 그와 이 주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나가, 방해하지 말고.”“양치하려는 거야?”“당연하지.”“나도 해야 하는데, 여기 세면대는 원래 2인용이니까 각자 한 쪽씩 사용하면 서로 방해 안 될 거야.”이승연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이혁재는 그녀 옆에 머물며 따라다니고 싶어 했다.그녀가 어디로 가든, 그는 그곳으로 따라갔다.그녀가 외출하려 하면 그는 운전기사를 자처해 회사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녀가 오성민의 사건 파일을 보고 있으면 옆에서 차를 가져다주었
이승연은 이혁재가 가져온 반찬과 국을 보고 잠시 침묵했다. 그냥 요리사에게 맡기면 되는데 그가 한 시간 넘게 이 일에 매달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그녀는 물었다.“이젠 백수인 거야?”이혁재가 당당하게 말했다.“그래, 그래서 할 일도 없어. 누나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해. 만약 날 집에서 내쫓으면 나는 길에서 굶어 죽을 거야.”그는 그릇을 들고 뽀얗게 우러난 곰국을 푸기 시작했다.“여보, 따뜻할 때 먹어.”이승연은 아까 보고 있던 해성 그룹 관련 서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 서류는 최근 3년간 오성민이 담당한 업무 내용을 담고 있어 꼭 봐야 했다.하지만 글로 적힌 것보다 사건 당사자가 직접 설명해 주는 게 더 정확하다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3년 전 네가 집안이랑 갈등이 있고 난 뒤로부터 해성 그룹에 들어가서 총괄 책임을 맡았지...”이혁재가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아니, 우리 집안이랑 갈등을 빚은 후가 아니라 누나가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깨기 어렵다고 했을 때였어. 지욱이는 내가 망가질까 봐 걱정돼서 할 일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해성으로 갔던 거야.”집안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녀 때문이었다.그는 이처럼 계속 틈틈이 이승연에게 그녀가 없으면 그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알리고 있었다.이승연이 말이 없자 이혁재가 이어 말했다.“이것도 사실 월영 씨가 나에게 해준 제안이었어.”이승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월영이가?”이혁재는 밥을 먹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밥 먹으면서 들어.”이승연은 잠시 멈췄다가 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모금 맛보았다.3년 전부터 그가 요리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의 요리 실력은 더욱 발전한 것 같았다.보아하니 이 3년 회사와 집에만 있고 노는 데는 그닥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활기 넘치는 20대 남자가 술집이나 클럽에 있는 대신 긴 시간을 주방에서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연의 마음속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이혁재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
“나쁜 놈에겐 당연히 그에 맞는 방법을 써야지. 내가 월영 씨를 도와 해성 그룹을 약화하는 건 결국 오성민의 힘을 약화하는 거야. 난 오성민이 망하고 망연자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야.”이혁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이승연이 말했다.“해성 그룹은 연 대표의 것이기도 해. 해성에서 계속 문제가 발생하면 해운 그룹의 주식에도 영향이 갈 텐데.”이혁재가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재준이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이승연이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찡그리자 이혁재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반 그릇 정도 밥을 먹은 걸 보고 더욱 싱글벙글해졌다.‘오늘 반찬 맛있나 보네. 흠, 이야기를 들려주니 누나 식욕도 좋아진 것 같고, 내일도 더 노력해야지.’이혁재가 말없이 부드러운 계란찜을 떠주자 이승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너는 왜 안 먹어?”“누나가 먹고 남은 걸 먹을 거야.”그는 참 많이 변했다.재벌 집 귀공자가 남은 음식을 먹겠다니.이승연은 배가 부르자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다시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메이크업을 고친 뒤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이혁재가 급히 뒤돌아 물었다.“여보, 어디 가?”이승연이 대답이 없자 이혁재는 밥을 두 입 떠먹고 서둘러 따라가며 물었다.“어디 가는 건데? 내가 데려다줄게. 나는 지금 누나 운전기사잖아.”차에 탄 후 안전벨트를 매고서야 이승연이 입을 열었다.“오성민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혁재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오성민 그 자식을 만나러 간다고? 안 돼, 난 반대야.”그는 예전부터 오성민에게 더 이상 이승연의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 절대 없다고 말했다. 오성민은 그녀를 만날 자격도 없고 이승연도 더 이상 눈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이승연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아니라 네가 만나러 가는 거야.”“내가 그놈을 왜 만나?”“지금 같은 회사에 있으니까, 사회적으로는 동료이자 파트너야. 그가 이런 큰 사건을 겪었으니 네가 총괄 책임자로서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사무실에서 유월영은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혁재의 스캔들 뉴스를 보고 있었다.이혁재의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고 이미 댓글들이 폭발하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평가했다.“이 제목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네요. [해성 그룹 임원 이혁재 혼인 중 외도, 호텔에서 현장 발각]이라니. 혁재 씨의 신분에 회사 이름도 나오고,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지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네요.”“게다가 지금 해성 그룹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라 작은 움직임도 큰 주목을 받는데 뉴스 제목에 해성 그룹을 걸었으니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겠죠.”한세인이 말했다.“저도 봤어요. 댓글에선 해성 그룹이 안팎으로 온갖 나쁜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성민은 이혁재 씨를 망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요.”유월영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손을 배 위에 포개며 물었다.“부정적 여론의 최적 대응 시간이 얼마였죠?”“골든타임은 24시간이에요. 물론 빠를수록 좋습니다.”유월영이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보내요.”이혁재의 외도 스캔들은 오전 내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그는 순식간에 쓰레기 남편으로 전락했다.누리꾼들이 비난하는 와중에 점심시간 동안 갑자기 한 영상이 나타나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그 영상에는 이혁재가 정신을 잃은 채 두 명의 직원에게 방으로 옮겨지고 침대에 던져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여자 도착했어?”“도착했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중이야. 먼저 이 남자 옷을 벗기자.”동영상에서는 직원들은 합심해 이혁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있었다. 물론 노출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다.옷을 모두 벗기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에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바로 그 화영이였다.“다 됐어?”“술에 수면제를 넣었어. 해 뜨기 전까진 못 깨어날 거야.”“알겠어. 이제 나가 봐.”화영은
유월영이 멍해 있자 연재준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당신도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쳤잖아. 난 그러면 안 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연재준은 차가 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손끝에는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날 저녁, 이혁재는 배 사장을 데리고 온천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고 배 사장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이곳 공기가 정말 좋군요.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오염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이혁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장님께서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이 호텔을 고른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길 아침 공기가 더 좋다고 하네요.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산속을 걸으면서 산림욕을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배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그거 정말 좋겠군요.”“그럼 지금 마사지하러 가실까요?”이혁재가 말했다.“여기 직원분들 모두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시랍니다. 호텔 사장님이 약자를 돕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장애인분들에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배 사장이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렇게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가를 좋아합니다. 그 사장님이 누구신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이혁재가 모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나중에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좋습니다.”그들은 함께 마사지실로 향했고 두 명의 청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그들을 맞이했다.그들은 마사지를 받으며 계약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직원이 친절하게 디저트와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칵테일 도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마사지는 너무나도 편안한 탓인지 이혁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그리고 마사지사 두 명이 이내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이혁재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연재준은 차를 몰고 유월영의 사무실로 갔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유월영의 차를 찾아낸 뒤 그녀 차 옆에 차를 세웠다.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유월영은 회사에 하루 종일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주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때 회사를 나서곤 했다.유월영이라면 굳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었고 시간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쓰여야 했다.연재준은 참을성 있게 한 시간가량 기다렸고 그제야 그녀가 한세인과 함께 회사를 나서고 있었다.한세인은 차에서 내리는 연재준을 빠르게 발견하고 유월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월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월영은 오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헤어밴드로 장식했다. 그리고 하얀색 쉬폰 블라우스에 고급스러운 블랙 스커트를 매치하여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대로 연재준을 향해 걸어왔고 작은 굽의 힐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맑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그녀가 우선 입을 열었다.“이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연 대표님 만나는 게 놀랍지도 않네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이 착용한 진주 귀걸이에 향했다. 광택이 도는 고급 진주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그는 뜬금없이 말했다.“해성 그룹에 꽤 큰 거래 파트너가 있어. 성은 배 씨인데 갑자기 반년 짜리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하더군.”유월영의 눈이 반짝였다.“그래요?”“혁재가 그를 접대하고 있어.”연재준이 물었다.“당신의 생각은 어때?”유월영이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정말 저를 끝까지 도우려는 건가요?”“...”옆에서 듣고 있던 한세인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두 분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건가?’‘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지?’해성 그룹이 고객을 접대하는 일을 연재준은 왜 유월영에게 말하는지, 이게 어떻게 그녀를 돕는 것인지 한세인은 알 수가 없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끝까지 도우려고.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연재준도 힐끗 이혁재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도 이 변호사님이 널 차단하지 않은 걸 보면 그냥 널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것 같네.”이혁재는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한 놈은 아내가 옆에 없고, 다른 한 놈은 아내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고. 이렇게 감정 불화가 있는 두 놈이 나 같은 화목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네.‘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라는 속담이 딱 맞아.”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지욱을 향해 말했다.“이제 내가 법원에서 전해준 말을 믿겠지.”서지욱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3년 동안 조용히 있길래 정말 욕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완전히 변태가 된 거였네.”이혁재는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듯 찡그렸다.“짜증 나네. 오늘 밤에 회식이 있다니.”그는 연재준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넌 아내도 없잖아. 그 회식 네가 대신 가.”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널 찾아온 거지 날 찾아왔냐?”이혁재는 혀를 차며 말했다.“회사가 다 망해가고 있는데 아내와 알콩달콩하게 보낼 밤을 방해하다니 정말 죽여 마땅한 죄지.”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간 됐으니 준비하고 가. 배 사장이 신주시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잘 접대해. 그럼 너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이혁재도 그 말에 동의하며 시간을 확인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는 바로 접시를 들고 밥을 국에 말아 몇 분 만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손을 흔들었다.“간다.”서지욱은 미간을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여유롭게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 기분 꽤 좋아 보인다?”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지욱이 말했다.“마르세유에서 돌아온 이후로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내가 알기로는 아직 월영 씨랑 화해도 못 했고 월영 씨는 4월에 현시우랑 결혼 준비 중이라고 하던
유월영은 그의 말에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꾸하지 않았다.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44분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정말 죽음을 숫자로군. 흥미로운데.”유월영이 말했다.“혁재 씨 그 말이 오성민을 자극했어요.”“전에 말했듯이 오성민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자존감이 높을수록 더 예민한 법이죠. 혁재 씨가 그의 치부를 그렇게 쑤셔댔으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봤어요? 그는 지금 미쳐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더 재밌어질 거예요.”연재준은 그녀가 이렇게 여유롭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어느덧 늦은 밤이 되고, 집에 온 오성민은 계속해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제는 길고 긴 전화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마치 예전처럼.예전의 오성민은 이승연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었다. 그녀의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본 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며칠간 이승연과 그토록 바랬던 시간을 누렸던 그는 이제 다시 그녀를 “잃는” 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승연아,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승연아!”전화벨 소리가 끊기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활짝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그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일어나 부하의 옷깃을 잡고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혁재의 치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아냈어? 응?”이승연은 감정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단칼에 관계를 끊었고 이혁재가 여자 모델과의 소문이 났을 때도 이혼을 생각했다.이승연은 그동안의 정이 남아 있어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망설임 없이 관계를 끝냈다.그래서 그는 이혁재가
이혁재는 복도로 돌아와 이승연을 보자 표정을 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애기야.”이승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예쁘고도 도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이혁재는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이승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전처럼 불러.”이혁재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뭐라고 불렀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이승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결국 몇 초 후 항복하며 말했다.“여보.”이혁재는 음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다른 건 없어?”이승연은 작게 웅얼거리며 말했다.“자기.”이혁재가 바로 대답했다.“그래!”이승연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들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여보’라고 부른다더라고. 누나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나 괜찮아.”이승연은 그의 철면피에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내기도 지쳐 고개를 돌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이혁재는 바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복숭아 맛이 꽤 달콤하네. 이제 집에 가자, 여보.”이승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걸어갔다.복도의 구석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그 옆에서 연재준이 그녀를 지켜보며 물었다.“왜 웃는 거야?”유월영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달콤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연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미있네.”그녀는 벽에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혁재 씨가 연 대표님 지인들 중에서 연애를 가장 잘하는 것 같네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정반대에요. 그는 지금 자신과 승연 언니 사이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라고요.” 유월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이혁재가 벌린 온갖 난리를 겪고 나니 이승연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날 어린애처럼 달래지 마.”이혁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여보와 누나 사이에서 이 변호사님은‘애기’라는 별명을 고른 거잖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애기라고 부를게.”이승연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부른다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이혁재가 히죽거리며 그녀의 입가에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져서 트고 있었다.“응.”자판기는 다른 복도에 있었고 이혁재는 복숭아 맛 음료 두 병을 골랐다.그때 갑자기 오성민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넌 말장난으로 이승연을 속이고 있는 거야.”이혁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결제하며 무심히 말했다.“내가 내 아내랑 어떻게 지내는지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오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해서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 본질을 피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이상하다 말이지. 왜 꼭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 두 병을 떨어뜨렸다.이혁재는 음료를 바로 꺼내지 않고 오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좌절이나 어려움들이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림돌인데도,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그냥 피해 가면 안 돼? 왜 굳이 쓸데없이 고통을 자처해야 하지?”오성민이 비웃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군!”이혁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때?”“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부모도 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온 가족이 형만 편애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보니 우리 상황이 조금 비슷하네. ““내 아버지도 두 명의
이혁재가 뻔뻔하게 말했다.“나를 봐봐. 매일 당신한테 달라붙어서 뽀뽀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하고 1분이라도 못 보면 떼를 쓰잖아. 내가 꼭 애 같지 않아? 응? 어차피 내가 연하이기도 하잖아, 나를 아들로 봐도 아무 문제 없어.”이승연은 그의 헛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이혁재는 단도직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 병 있어. 그리고 당신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 마.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할게.”“...”이승연은 더는 대꾸할 힘이 없어 그를 밀쳤다. 다만 이번엔 아까처럼 혐오감에 의한 거부가 아니라 그의 엉뚱한 발언에 기가 차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이승연은 거의 기진맥진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이혁재의 말을 되풀이했다.“당신 잘못 아니야...”이혁재가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지. 나도 완전히 억울한 피해자야. 그러니까 나를 미워하면 안 돼.”그의 당당한 태도는 마치 모든 액운을 쓸어내는 빗자루 같았고 이승연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들이 깨끗하게 지워졌다.이승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그녀는 매일 아침 이 향기 속에서 깨어났고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이혁재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헤쳐 이승연의 눈을 가렸다.“법정을 설 용기가 없어도 상관없어. 안 보면 되지. 자, 눈을 가려줄게.”그는 넥타이를 그녀의 머리 뒤에서 묶으며 말했다.“눈을 가리고 법정에 서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식물인간으로 지냈던 3년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눈앞이 깜깜해지자 이승연은 오히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이혁재는 고개를 숙여 넥타이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눈을 가려도 참 예쁘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누구 아내지? 아, 내 아내네.”이승연은 그의 황당한 발언들을
이혁재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깨어난 뒤 왜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이승연은 그날 자신과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 이혁재를 줄곧 마음속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이혁재는 이승연의 힘에 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는 밀어낸 이승연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여보.”이혁재는 느낄 수 있었다. 이승연은 사랑싸움이 아닌 진심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이혁재의 팔을 꽉 잡은 그녀의 손톱이 그의 살에 파고들었다. 이승연은 그를 향해 울부짖었다.“이거 놔!”오성민도 뒤따라왔고 큰 소리로 외쳤다.“승연이한테서 손 떼!”오성민이 이승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경호원에게 가로막혔다.그 경호원들이 이혁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여기는 법원이니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하지만 사실, 이 경호원들은 유월영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이승연의 첫 재판을 걱정해서 직접 법정에 와 있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연재준도 법정에 나타났고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다.연재준은 손을 입가에 대며 말했다.“쉿.”“...”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유월영은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그렇게 회사를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날 따라다녀도 돼요?”정말 그렇게 한가하다면 병원에나 가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이혁재는 주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픔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승연을 꼭 안고 말했다.“여보, 내 말 좀 들어봐...당신은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싫다면 그땐 내가 떠날게.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이승연이 여전히 몸부림쳤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말했다.“3년 전 그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그는 또렷하게 말했다.“그때 내 자리는 방청석이었고 내 앞에는 몇 줄의 좌석과 다른 방청객들이 있었어.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 놀라 도망치기 바빴고 내 앞을 막아섰어. 난 좌석을 지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