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이상해 보여 이승연은 마스크를 벗으려 했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못 벗게 막았고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문이 열렸다.이혁재가 고개를 돌리자 마중 나온 사람은 오성민이 아니라 가정부였다.“두 분은...”이혁재가 침착하게 말했다.“오 변호사의 사무실 동료입니다. 오 변이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아이고, 아니, 걱정돼서 병문안 왔습니다. ”가정부가 말했다.“오 변호사님 이제 여기 안 계세요.”“여기 안 계신다고요?”오성민은 비록 지병이 있다는 핑계로 보석 신청했지만 신주시를 떠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럼 지금 어디에 계시죠?”“그건...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오 변호사님은 한동안 집에 안 들어오셨어요.”이혁재가 더 물어보려 했지만 이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이혁재는 짧게 자른 머리를 만지며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어디 갔는지도 모르고...못 만나면 할 수 없지. 돌아가자.”그는 이승연이 오성민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했다.이승연은 아무 말이 없었고 이혁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가는 길에 이혁재는 이승연을 흘깃 훔쳐보았다.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길목에서 이승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로데오거리로 가.”“거긴 왜?”이승연이 대답이 없었지만 이혁재는 순간 그곳이 어딘지를 떠올렸다.“로데오 거리? 거기 누나 졸업 후에 찾은 첫 직장이잖아?”문제는 그곳은 오성민의 첫 직장이기도 했고 게다가 두 사람은 그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같이 동거를 했었다.“그럼 오성민이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이승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혁재는 숨이 턱 막혔다.“안 가!”아내를 전 남자 친구와 동거했던 곳에 데려가 전 남자 친구를 만나게 하다니,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녀의 말대로 할 리 없었다.이승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차를 세워. 나 혼자 택시 타고 갈게.”이혁재는 길가에 차를
이승연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혁재는 따라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눈을 반짝였다.“내가 여보라고 불러도 이젠 대답해 주는 거야?”이승연은 그가 왜 따라왔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길 한복판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거 놔줘.”“내가 내 여보를 안는 게 뭐가 창피해?”이혁재가 고개 숙여 키스하려 했지만 이승연은 여전히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녀가 아직 마음의 병을 이겨내지 못한 걸 알아 이혁재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이승연은 결국 그를 달래며 말했다.“내가 오성민을 찾아가는 건 나만의 계획이 있어서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이혁재는 자신이 이렇게 쉽게 달래질 줄 몰랐다.그녀의 말에 그는 곧 마음이 풀렸고 주머니에서 도청기를 꺼내 그녀의 셔츠 깃에 몰래 숨겼다.“누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대화를 들으면서 수가 틀리면 바로 구하러 갈 수 있게 해야 해.”“그는 지금 경찰의 중점 조사 대상이니까 함부로 못 할 거야.”“그건 모르는 일이야. 전에 누나를 강제로 데려가려고 한 적도 있잖아.”이승연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가 설치하는 걸 그대로 두었다.그런 다음 그녀는 길 건너편 오래된 집으로 걸어가 벨을 두 번 눌렀다.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자 이승연은 바로 전기 계량기 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열쇠를 꺼내 문에 꽂아 돌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굉장히 능숙한데, 두 사람만의 작은 비밀인가?”이혁재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껌을 하나 입에 넣어 씹었다....집 안에 누군가 살고 있는 기운이 느껴졌지만 1층은 아무도 없었다.이승연은 무표정으로 둘러본 후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이 집은 꽤 오래된 작은 복층 구조였으며 2층에는 큰 테라스가 있었다.예전에 그녀와 오성민이 이 집을 고른 이유 중 큰 부분이 바로 이 테라스 때문이었다.그들은 집에 들기 전에 이 테라스에 흔들의자 두 개와 나무 테이블 하나를 놓고 밤이 되면 야외에서 밥을 먹고 서류를 보고 이야기를 나
이승연이 반응이 없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말했다.“10년 전 우리는 비록 유명하지도 않고 돈도 없었지만 이 집에 세 들어서 살았던 그때가 진짜 행복했던 것 같아.”이승연은 그처럼 감성적이지 않았다.“우리가 그때 돈이 없었던 게 아니라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돈이 없는 척했던 거야.”그들이 처음 사귀었을 때는 서로가 어떤 배경과 신분인지 몰랐다.반년 후에야 서로의 정체가 드러났고 그는 오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고 그녀는 이씨 가문의 외동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오성민이 웃으며 말했다.“그때 일부러 당신한테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이승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민 씨도 말했었지. 부모님이 형한테만 신경 쓰셨고 자신은 그들에게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처럼 보였다고.”“그래서 가족에게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변호사를 선택했고 집안 덕을 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대학 진학부터 유학, 그리고 첫 직장까지 전부 당신 힘으로 했다고.”오성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녀가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형이 너무 뛰어나서 부모님은 온 정성을 형에게만 쏟으셨지. 날 완전히 신경 안 쓴 건 아니었지만 집안의 모든 관심과 사랑을 받는 사람과 비교하니 차이가 확연했어.”이승연이 말했다.“그래서 난 성민 씨가 지난 10여 년 동안 이렇게 변한 이유가 형과 경쟁하고 부모님께 보여주려고 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 그들에게 성민 씨가 형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던 거지.”오성민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자조적인 웃음이었다.“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신이야.”“이번 일 있고 성민 씨 부모님과 형이 뭐라고 해?”이승연의 이 말은 마치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오성민이 다시 냉소적으로 변했다.“집안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더라...마치 고씨 가문의 그 일을 내가 저지른 것처럼 말이지.”“그럼 성민 씨 혼자의 능력으로 빠져나와 봐.”이승연은 평온하게 말했다.“예전처럼 스스로 구해내서 그들 앞에 다
이승연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오성민과 함께 거리를 걸으며 산책했다.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가로등은 따뜻하게 빛났다.두 사람은 거리를 거닐면서 한가로운 대화를 나눴다.그들이 다녔던 로펌이 이제는 문을 닫고 현재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소기업이 되었다는 얘기도 하고, 올해가 모교 100주년 기념행사라서 시간이 되면 함께 참가하자는 얘기도 했다.심지어 최근 몇 년간 일어난 기묘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예를 들면, 살인을 의뢰했는데 암살자가 목표 대상에게 설득당해 의뢰인을 되려 죽인 사건이나, 아내를 살해해 보험금을 받으려 했지만 아내가 죽지 않고 보험회사와 함께 남편의 범죄 증거를 찾아낸 사건 같은 것들이다.이야기 속에서 웃음이 오갔고 분위기는 마치 모든 것이 망가지기 전으로 돌아간 듯 평화로웠다.오성민은 몇 시간 동안의 이 시간이 자신이 꾸는 환상이나 꿈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그러나 이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이승연이 3년 동안 혼수상태였던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다.이승연은 현재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 감정이 무뎌진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그것은 오성민에게 좋은 일이었다.그는 그녀가 평생 회복하지 않기를 바랐다.이승연은 자신이 3년 동안 혼수상태였던 탓에 지식이 모두 초기화된 것 같다며 말했다.이제는 법조문도 외우지 못하고 최근 건설 노동자들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한 공익 소송을 맡았는데 자료는 충분하지만 며칠을 고민해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오성민은 그녀의 얼굴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내일 점심에 다시 만날까? 그때 자료를 가져와. 내가 도와줄게. 내가 가르쳐줄게...승연아, 기억나지? 네 첫 번째 소장도 내가 수정해 준 거였어.”이승연은 고개를 숙인 채 발밑의 길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연히 기억나지. 내가 첫 재판에 나섰을 때도
이혁재는 이승연의 눈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본 그녀의 눈을 깨끗하게 씻어주겠다는 듯이.이승연은 이런 끈적거리는 애정행각을 참을 수 없어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나 화장했어. 화장품을 막 그렇게 먹어도 상관없어?”이혁재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이승연이 조금 불편해하는 걸 보고는 더 이상 키스를 하지 않고 물었다.“효과 있어?”오성민을 찾아가서 “치료”하려는 게 효과가 있느냐는 말이었다.이승연은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모르겠어.”이혁재는 단호하게 말했다.“난 효과 없다고 생각해. 그 자식 찾지 말고 나한테 치료받아.”“너는 아니야.”이승연이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법정도 너도, 나한테는 그날을 떠올리게 할 뿐이야.”...정말 불쾌한 주제였다.이혁재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귓불을 잡고 장난치듯 만지작거렸다.“저녁에 당신들이 먹은 태국 음식, 내가 만든 거라는 걸 알았어?”이승연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네가 만들었어?”“그래.”이혁재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렸다.“나처럼 현모양처 스타일의 남편은 본 적 없지? 밖에서 만든 음식이라 걱정도 되고 몸에 좋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내가 직접 요리했어.”그는 비웃으며 말했다.“젠장, 그 자식 영광인 줄 알아. 우리 엄마도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본 적 없는데.”다시 말해, 그는 오직 그녀를 위해서만 요리를 해본 것이다.아무리 이승연이라도 이런 편애를 받고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녀는 비록 말없이 있었지만 이혁재를 향해서 더는 평소처럼 차갑고 거리를 두는 눈빛은 아니었다.그리고 그가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는 손도 피하지 않았다. 이혁재는 그녀의 작은 귓볼을 만지작거리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눈 감아 봐.”“응?”이승연은 의아하다는 듯 소리를 냈다.이혁재의 높고 날카로운 콧대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
이승연이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물으려는 찰나 이혁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어깨에 걸려 있던 가방이 땅에 떨어졌고 이승연은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꼭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이혁재의 옷깃을 잡았다.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거침없는 공세를 받아들였다.이 키스는 이승연이 깨어난 이후 그들 사이에서 가장 진한 키스였다.오랜만의 스킨십에 이혁재는 허리가 뻐근했고 저도 모르게 이승연의 몸에 밀착했다. 그러다 화난 이승연의 발길질에 결국 떼어졌다.이혁재를 떼어낸 이승연은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샤워할 준비를 했다.하지만 이혁재는 부끄러움 없이 그녀의 주변을 계속 맴돌았고 이승연은 화장실 거울을 통해 그의 행동을 모두 눈여겨 보고 있었다.그런데 오늘 이혁재가 입은 회색 추리닝때문에 몸의 변화는 정말 눈에 띄었다.이승연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의 뻔뻔한 행동에 당황해 하마터면 화장품을 떨어뜨릴 뻔했다.이혁재는 결국 말했다.“난 게스트룸에서 씻을게. 혼자 해결해야지 뭐 어쩌겠어, 내 아내는 나를 안쓰러워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알아서 하는 수밖에.”이승연은 참다못해 그를 화장실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잠갔다. 드디어 눈과 귀가 드디어 편안해졌다.“...변태!”이승연이 샤워를 끝내고 꽤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침대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을 때 이혁재가 돌아왔다.이승연은 그가 엉뚱한 말을 할까 싶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오성민이 심장 질병이 있다고 주장하며 보석으로 풀려났는데 그의 상태를 보면 병이 있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어. 병원 기록도 조작된 것 같아.”“당연히 조작된 거지. 그 자식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에게 유리컵을 건네며 말했다.“따뜻한 우유 한 잔 마셔. 잠이 잘 올 거야.”이승연은 컵을 받아 들고 생각에 잠겼다.“법의 허점을 이용한다고 해도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오성민한테 일이 생기고 나서 집안과 관계가 끊겼
이승연의 머릿속은 세상에 이렇게 성가신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끈질기게 매달리고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 없는 사람.마치 계단 위의 이끼나 벽 구석의 덩굴처럼 집착하며 휘감아 오니 화가 나고 어쩔 수 없기도 해서 답답하기만 했다.재미있게도 그 시각 유월영 역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분명 당신이 나에게 물어볼 일이 있어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날 두고 그냥 떠나버렸네.”연재준이 가로등 아래 서서 양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를 발견하고 이승연에게 하려던 전화를 끊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연 대표님. 마치 내가 당신에게 무슨 책임이라도 져야 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 주세요.”그녀는 그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 또 그의 온몸을 훑어보며 물었다.“상처는 다 나았나요?”연재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잠깐 당신한테서 눈을 뗐더니 당신이 이미 귀국했다고 하지를 않나. 그래서 나도 당신 따라 귀국했지. 어차피 가벼운 부상이니 귀국해서 회복해도 마찬가지야.”유월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음, 빠른 쾌유를 빌게요.”그리고는 그를 지나치며 걸어가려고 했다.연재준은 곧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월영아.”유월영은 고개를 약간 돌려 그를 보며 다소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온화하게 마주 보며 말했다.“당신 나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물어보지 않을 거야?”유월영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어디 앉아서 얘기하죠.”그들은 결국 재즈바를 찾았다.유월영은 자신에게는 도수가 낮은 칵테일을, 연재준에게는 민트차를 주문했다.두 사람은 식당 입구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연재준은 그녀의 배려를 보며 말했다.“내 건강을 챙겨주는 건가?”유월영은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연재준이 물었다.“왜 웃어?”유월영이 답했다.“당신은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내가 당신한테 아직 감정이
“이제 확실히 알겠어. 당신은 내가 걱정되고 내가 파산해서 망할까 봐 두려운 거야. 안 그래?”연재준이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냥 내가 아파서 뭐든지 의욕이 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유월영은 그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다 미소를 지었다.“연 대표님. 내가 전에도 물어봤었잖아요. 무슨 사정이 있어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지?”“그런데도 당신은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말은 하지 말길 바래요. 그건 전부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까요.”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말 못 할 사정 같은 건 없어. 지금 보이는 그대로야.”유월영은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그에게 기회를 줬다.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인공 심장 배터리를 훔쳐 간 사람이 누구인지 말할 기회를 줬지만 연재준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유월영은 연재준에게 왜 신현우와 오성민을 감싸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도왔는지 물을 기회를 줬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면, 나중에 그가 정말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건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다.유월영은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하며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연재준은 순간 그녀의 눈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몇 초가 지난 뒤 그가 물었다.“조사해 봤어? 당신과 현시우의 관계 말이야.”“내가 뭘 조사해야 하는데요?”유월영의 시선이 차갑게 번뜩였다.“우리는 다음 달 결혼할 부부예요. 오늘 웨딩드레스를 보고 왔는데 내가 고른 드레스가 어떤 건지 알고 싶어요? 당신이랑 결혼할 때 입었던 드레스보다 열 배는 더 예쁘던데.”연재준이 끈질기게 물었다.“유전자 검사를 안 했어?”“왜 내가 그런 무례한 짓을 해야 하죠?”“만약 그가 당신을 속인 거라면?”유월영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도 기꺼이 속아주죠.”그녀는 방금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연재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그리고 세 번째 화제를 꺼냈다.“위에서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