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이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물으려는 찰나 이혁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어깨에 걸려 있던 가방이 땅에 떨어졌고 이승연은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꼭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이혁재의 옷깃을 잡았다.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거침없는 공세를 받아들였다.이 키스는 이승연이 깨어난 이후 그들 사이에서 가장 진한 키스였다.오랜만의 스킨십에 이혁재는 허리가 뻐근했고 저도 모르게 이승연의 몸에 밀착했다. 그러다 화난 이승연의 발길질에 결국 떼어졌다.이혁재를 떼어낸 이승연은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샤워할 준비를 했다.하지만 이혁재는 부끄러움 없이 그녀의 주변을 계속 맴돌았고 이승연은 화장실 거울을 통해 그의 행동을 모두 눈여겨 보고 있었다.그런데 오늘 이혁재가 입은 회색 추리닝때문에 몸의 변화는 정말 눈에 띄었다.이승연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의 뻔뻔한 행동에 당황해 하마터면 화장품을 떨어뜨릴 뻔했다.이혁재는 결국 말했다.“난 게스트룸에서 씻을게. 혼자 해결해야지 뭐 어쩌겠어, 내 아내는 나를 안쓰러워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알아서 하는 수밖에.”이승연은 참다못해 그를 화장실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잠갔다. 드디어 눈과 귀가 드디어 편안해졌다.“...변태!”이승연이 샤워를 끝내고 꽤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침대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을 때 이혁재가 돌아왔다.이승연은 그가 엉뚱한 말을 할까 싶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오성민이 심장 질병이 있다고 주장하며 보석으로 풀려났는데 그의 상태를 보면 병이 있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어. 병원 기록도 조작된 것 같아.”“당연히 조작된 거지. 그 자식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에게 유리컵을 건네며 말했다.“따뜻한 우유 한 잔 마셔. 잠이 잘 올 거야.”이승연은 컵을 받아 들고 생각에 잠겼다.“법의 허점을 이용한다고 해도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오성민한테 일이 생기고 나서 집안과 관계가 끊겼
이승연의 머릿속은 세상에 이렇게 성가신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끈질기게 매달리고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 없는 사람.마치 계단 위의 이끼나 벽 구석의 덩굴처럼 집착하며 휘감아 오니 화가 나고 어쩔 수 없기도 해서 답답하기만 했다.재미있게도 그 시각 유월영 역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분명 당신이 나에게 물어볼 일이 있어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날 두고 그냥 떠나버렸네.”연재준이 가로등 아래 서서 양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를 발견하고 이승연에게 하려던 전화를 끊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연 대표님. 마치 내가 당신에게 무슨 책임이라도 져야 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 주세요.”그녀는 그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 또 그의 온몸을 훑어보며 물었다.“상처는 다 나았나요?”연재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잠깐 당신한테서 눈을 뗐더니 당신이 이미 귀국했다고 하지를 않나. 그래서 나도 당신 따라 귀국했지. 어차피 가벼운 부상이니 귀국해서 회복해도 마찬가지야.”유월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음, 빠른 쾌유를 빌게요.”그리고는 그를 지나치며 걸어가려고 했다.연재준은 곧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월영아.”유월영은 고개를 약간 돌려 그를 보며 다소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온화하게 마주 보며 말했다.“당신 나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물어보지 않을 거야?”유월영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어디 앉아서 얘기하죠.”그들은 결국 재즈바를 찾았다.유월영은 자신에게는 도수가 낮은 칵테일을, 연재준에게는 민트차를 주문했다.두 사람은 식당 입구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연재준은 그녀의 배려를 보며 말했다.“내 건강을 챙겨주는 건가?”유월영은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연재준이 물었다.“왜 웃어?”유월영이 답했다.“당신은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내가 당신한테 아직 감정이
“이제 확실히 알겠어. 당신은 내가 걱정되고 내가 파산해서 망할까 봐 두려운 거야. 안 그래?”연재준이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냥 내가 아파서 뭐든지 의욕이 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유월영은 그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다 미소를 지었다.“연 대표님. 내가 전에도 물어봤었잖아요. 무슨 사정이 있어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지?”“그런데도 당신은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말은 하지 말길 바래요. 그건 전부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까요.”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말 못 할 사정 같은 건 없어. 지금 보이는 그대로야.”유월영은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그에게 기회를 줬다.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인공 심장 배터리를 훔쳐 간 사람이 누구인지 말할 기회를 줬지만 연재준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유월영은 연재준에게 왜 신현우와 오성민을 감싸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도왔는지 물을 기회를 줬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면, 나중에 그가 정말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건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다.유월영은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하며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연재준은 순간 그녀의 눈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몇 초가 지난 뒤 그가 물었다.“조사해 봤어? 당신과 현시우의 관계 말이야.”“내가 뭘 조사해야 하는데요?”유월영의 시선이 차갑게 번뜩였다.“우리는 다음 달 결혼할 부부예요. 오늘 웨딩드레스를 보고 왔는데 내가 고른 드레스가 어떤 건지 알고 싶어요? 당신이랑 결혼할 때 입었던 드레스보다 열 배는 더 예쁘던데.”연재준이 끈질기게 물었다.“유전자 검사를 안 했어?”“왜 내가 그런 무례한 짓을 해야 하죠?”“만약 그가 당신을 속인 거라면?”유월영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도 기꺼이 속아주죠.”그녀는 방금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연재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그리고 세 번째 화제를 꺼냈다.“위에서
이혁재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깨어난 뒤 왜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이승연은 그날 자신과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 이혁재를 줄곧 마음속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이혁재는 이승연의 힘에 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는 밀어낸 이승연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여보.”이혁재는 느낄 수 있었다. 이승연은 사랑싸움이 아닌 진심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이혁재의 팔을 꽉 잡은 그녀의 손톱이 그의 살에 파고들었다. 이승연은 그를 향해 울부짖었다.“이거 놔!”오성민도 뒤따라왔고 큰 소리로 외쳤다.“승연이한테서 손 떼!”오성민이 이승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경호원에게 가로막혔다.그 경호원들이 이혁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여기는 법원이니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하지만 사실, 이 경호원들은 유월영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이승연의 첫 재판을 걱정해서 직접 법정에 와 있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연재준도 법정에 나타났고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다.연재준은 손을 입가에 대며 말했다.“쉿.”“...”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유월영은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그렇게 회사를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날 따라다녀도 돼요?”정말 그렇게 한가하다면 병원에나 가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이혁재는 주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픔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승연을 꼭 안고 말했다.“여보, 내 말 좀 들어봐...당신은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싫다면 그땐 내가 떠날게.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이승연이 여전히 몸부림쳤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말했다.“3년 전 그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그는 또렷하게 말했다.“그때 내 자리는 방청석이었고 내 앞에는 몇 줄의 좌석과 다른 방청객들이 있었어.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 놀라 도망치기 바빴고 내 앞을 막아섰어. 난 좌석을 지나 혼란스러운
이혁재가 뻔뻔하게 말했다.“나를 봐봐. 매일 당신한테 달라붙어서 뽀뽀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하고 1분이라도 못 보면 떼를 쓰잖아. 내가 꼭 애 같지 않아? 응? 어차피 내가 연하이기도 하잖아, 나를 아들로 봐도 아무 문제 없어.”이승연은 그의 헛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이혁재는 단도직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 병 있어. 그리고 당신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 마.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할게.”“...”이승연은 더는 대꾸할 힘이 없어 그를 밀쳤다. 다만 이번엔 아까처럼 혐오감에 의한 거부가 아니라 그의 엉뚱한 발언에 기가 차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이승연은 거의 기진맥진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이혁재의 말을 되풀이했다.“당신 잘못 아니야...”이혁재가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지. 나도 완전히 억울한 피해자야. 그러니까 나를 미워하면 안 돼.”그의 당당한 태도는 마치 모든 액운을 쓸어내는 빗자루 같았고 이승연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들이 깨끗하게 지워졌다.이승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그녀는 매일 아침 이 향기 속에서 깨어났고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이혁재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헤쳐 이승연의 눈을 가렸다.“법정을 설 용기가 없어도 상관없어. 안 보면 되지. 자, 눈을 가려줄게.”그는 넥타이를 그녀의 머리 뒤에서 묶으며 말했다.“눈을 가리고 법정에 서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식물인간으로 지냈던 3년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눈앞이 깜깜해지자 이승연은 오히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이혁재는 고개를 숙여 넥타이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눈을 가려도 참 예쁘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누구 아내지? 아, 내 아내네.”이승연은 그의 황당한 발언들을
이혁재가 벌린 온갖 난리를 겪고 나니 이승연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날 어린애처럼 달래지 마.”이혁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여보와 누나 사이에서 이 변호사님은‘애기’라는 별명을 고른 거잖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애기라고 부를게.”이승연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부른다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이혁재가 히죽거리며 그녀의 입가에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져서 트고 있었다.“응.”자판기는 다른 복도에 있었고 이혁재는 복숭아 맛 음료 두 병을 골랐다.그때 갑자기 오성민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넌 말장난으로 이승연을 속이고 있는 거야.”이혁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결제하며 무심히 말했다.“내가 내 아내랑 어떻게 지내는지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오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해서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 본질을 피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이상하다 말이지. 왜 꼭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 두 병을 떨어뜨렸다.이혁재는 음료를 바로 꺼내지 않고 오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좌절이나 어려움들이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림돌인데도,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그냥 피해 가면 안 돼? 왜 굳이 쓸데없이 고통을 자처해야 하지?”오성민이 비웃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군!”이혁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때?”“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부모도 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온 가족이 형만 편애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보니 우리 상황이 조금 비슷하네. ““내 아버지도 두 명의
이혁재는 복도로 돌아와 이승연을 보자 표정을 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애기야.”이승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예쁘고도 도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이혁재는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이승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전처럼 불러.”이혁재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뭐라고 불렀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이승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결국 몇 초 후 항복하며 말했다.“여보.”이혁재는 음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다른 건 없어?”이승연은 작게 웅얼거리며 말했다.“자기.”이혁재가 바로 대답했다.“그래!”이승연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들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여보’라고 부른다더라고. 누나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나 괜찮아.”이승연은 그의 철면피에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내기도 지쳐 고개를 돌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이혁재는 바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복숭아 맛이 꽤 달콤하네. 이제 집에 가자, 여보.”이승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걸어갔다.복도의 구석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그 옆에서 연재준이 그녀를 지켜보며 물었다.“왜 웃는 거야?”유월영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달콤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연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미있네.”그녀는 벽에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혁재 씨가 연 대표님 지인들 중에서 연애를 가장 잘하는 것 같네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정반대에요. 그는 지금 자신과 승연 언니 사이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라고요.” 유월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유월영은 그의 말에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꾸하지 않았다.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44분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정말 죽음을 숫자로군. 흥미로운데.”유월영이 말했다.“혁재 씨 그 말이 오성민을 자극했어요.”“전에 말했듯이 오성민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자존감이 높을수록 더 예민한 법이죠. 혁재 씨가 그의 치부를 그렇게 쑤셔댔으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봤어요? 그는 지금 미쳐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더 재밌어질 거예요.”연재준은 그녀가 이렇게 여유롭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어느덧 늦은 밤이 되고, 집에 온 오성민은 계속해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제는 길고 긴 전화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마치 예전처럼.예전의 오성민은 이승연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었다. 그녀의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본 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며칠간 이승연과 그토록 바랬던 시간을 누렸던 그는 이제 다시 그녀를 “잃는” 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승연아,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승연아!”전화벨 소리가 끊기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활짝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그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일어나 부하의 옷깃을 잡고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혁재의 치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아냈어? 응?”이승연은 감정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단칼에 관계를 끊었고 이혁재가 여자 모델과의 소문이 났을 때도 이혼을 생각했다.이승연은 그동안의 정이 남아 있어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망설임 없이 관계를 끝냈다.그래서 그는 이혁재가
사무실에서 유월영은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혁재의 스캔들 뉴스를 보고 있었다.이혁재의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고 이미 댓글들이 폭발하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평가했다.“이 제목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네요. [해성 그룹 임원 이혁재 혼인 중 외도, 호텔에서 현장 발각]이라니. 혁재 씨의 신분에 회사 이름도 나오고,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지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네요.”“게다가 지금 해성 그룹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라 작은 움직임도 큰 주목을 받는데 뉴스 제목에 해성 그룹을 걸었으니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겠죠.”한세인이 말했다.“저도 봤어요. 댓글에선 해성 그룹이 안팎으로 온갖 나쁜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성민은 이혁재 씨를 망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요.”유월영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손을 배 위에 포개며 물었다.“부정적 여론의 최적 대응 시간이 얼마였죠?”“골든타임은 24시간이에요. 물론 빠를수록 좋습니다.”유월영이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보내요.”이혁재의 외도 스캔들은 오전 내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그는 순식간에 쓰레기 남편으로 전락했다.누리꾼들이 비난하는 와중에 점심시간 동안 갑자기 한 영상이 나타나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그 영상에는 이혁재가 정신을 잃은 채 두 명의 직원에게 방으로 옮겨지고 침대에 던져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여자 도착했어?”“도착했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중이야. 먼저 이 남자 옷을 벗기자.”동영상에서는 직원들은 합심해 이혁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있었다. 물론 노출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다.옷을 모두 벗기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에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바로 그 화영이였다.“다 됐어?”“술에 수면제를 넣었어. 해 뜨기 전까진 못 깨어날 거야.”“알겠어. 이제 나가 봐.”화영은
유월영이 멍해 있자 연재준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당신도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쳤잖아. 난 그러면 안 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연재준은 차가 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손끝에는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날 저녁, 이혁재는 배 사장을 데리고 온천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고 배 사장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이곳 공기가 정말 좋군요.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오염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이혁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장님께서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이 호텔을 고른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길 아침 공기가 더 좋다고 하네요.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산속을 걸으면서 산림욕을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배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그거 정말 좋겠군요.”“그럼 지금 마사지하러 가실까요?”이혁재가 말했다.“여기 직원분들 모두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시랍니다. 호텔 사장님이 약자를 돕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장애인분들에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배 사장이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렇게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가를 좋아합니다. 그 사장님이 누구신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이혁재가 모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나중에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좋습니다.”그들은 함께 마사지실로 향했고 두 명의 청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그들을 맞이했다.그들은 마사지를 받으며 계약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직원이 친절하게 디저트와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칵테일 도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마사지는 너무나도 편안한 탓인지 이혁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그리고 마사지사 두 명이 이내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이혁재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연재준은 차를 몰고 유월영의 사무실로 갔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유월영의 차를 찾아낸 뒤 그녀 차 옆에 차를 세웠다.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유월영은 회사에 하루 종일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주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때 회사를 나서곤 했다.유월영이라면 굳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었고 시간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쓰여야 했다.연재준은 참을성 있게 한 시간가량 기다렸고 그제야 그녀가 한세인과 함께 회사를 나서고 있었다.한세인은 차에서 내리는 연재준을 빠르게 발견하고 유월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월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월영은 오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헤어밴드로 장식했다. 그리고 하얀색 쉬폰 블라우스에 고급스러운 블랙 스커트를 매치하여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대로 연재준을 향해 걸어왔고 작은 굽의 힐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맑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그녀가 우선 입을 열었다.“이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연 대표님 만나는 게 놀랍지도 않네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이 착용한 진주 귀걸이에 향했다. 광택이 도는 고급 진주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그는 뜬금없이 말했다.“해성 그룹에 꽤 큰 거래 파트너가 있어. 성은 배 씨인데 갑자기 반년 짜리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하더군.”유월영의 눈이 반짝였다.“그래요?”“혁재가 그를 접대하고 있어.”연재준이 물었다.“당신의 생각은 어때?”유월영이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정말 저를 끝까지 도우려는 건가요?”“...”옆에서 듣고 있던 한세인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두 분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건가?’‘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지?’해성 그룹이 고객을 접대하는 일을 연재준은 왜 유월영에게 말하는지, 이게 어떻게 그녀를 돕는 것인지 한세인은 알 수가 없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끝까지 도우려고.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연재준도 힐끗 이혁재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도 이 변호사님이 널 차단하지 않은 걸 보면 그냥 널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것 같네.”이혁재는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한 놈은 아내가 옆에 없고, 다른 한 놈은 아내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고. 이렇게 감정 불화가 있는 두 놈이 나 같은 화목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네.‘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라는 속담이 딱 맞아.”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지욱을 향해 말했다.“이제 내가 법원에서 전해준 말을 믿겠지.”서지욱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3년 동안 조용히 있길래 정말 욕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완전히 변태가 된 거였네.”이혁재는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듯 찡그렸다.“짜증 나네. 오늘 밤에 회식이 있다니.”그는 연재준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넌 아내도 없잖아. 그 회식 네가 대신 가.”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널 찾아온 거지 날 찾아왔냐?”이혁재는 혀를 차며 말했다.“회사가 다 망해가고 있는데 아내와 알콩달콩하게 보낼 밤을 방해하다니 정말 죽여 마땅한 죄지.”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간 됐으니 준비하고 가. 배 사장이 신주시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잘 접대해. 그럼 너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이혁재도 그 말에 동의하며 시간을 확인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는 바로 접시를 들고 밥을 국에 말아 몇 분 만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손을 흔들었다.“간다.”서지욱은 미간을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여유롭게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 기분 꽤 좋아 보인다?”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지욱이 말했다.“마르세유에서 돌아온 이후로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내가 알기로는 아직 월영 씨랑 화해도 못 했고 월영 씨는 4월에 현시우랑 결혼 준비 중이라고 하던
유월영은 그의 말에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꾸하지 않았다.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44분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정말 죽음을 숫자로군. 흥미로운데.”유월영이 말했다.“혁재 씨 그 말이 오성민을 자극했어요.”“전에 말했듯이 오성민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자존감이 높을수록 더 예민한 법이죠. 혁재 씨가 그의 치부를 그렇게 쑤셔댔으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봤어요? 그는 지금 미쳐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더 재밌어질 거예요.”연재준은 그녀가 이렇게 여유롭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어느덧 늦은 밤이 되고, 집에 온 오성민은 계속해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제는 길고 긴 전화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마치 예전처럼.예전의 오성민은 이승연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었다. 그녀의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본 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며칠간 이승연과 그토록 바랬던 시간을 누렸던 그는 이제 다시 그녀를 “잃는” 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승연아,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승연아!”전화벨 소리가 끊기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활짝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그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일어나 부하의 옷깃을 잡고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혁재의 치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아냈어? 응?”이승연은 감정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단칼에 관계를 끊었고 이혁재가 여자 모델과의 소문이 났을 때도 이혼을 생각했다.이승연은 그동안의 정이 남아 있어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망설임 없이 관계를 끝냈다.그래서 그는 이혁재가
이혁재는 복도로 돌아와 이승연을 보자 표정을 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애기야.”이승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예쁘고도 도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이혁재는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이승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전처럼 불러.”이혁재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뭐라고 불렀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이승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결국 몇 초 후 항복하며 말했다.“여보.”이혁재는 음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다른 건 없어?”이승연은 작게 웅얼거리며 말했다.“자기.”이혁재가 바로 대답했다.“그래!”이승연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들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여보’라고 부른다더라고. 누나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나 괜찮아.”이승연은 그의 철면피에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내기도 지쳐 고개를 돌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이혁재는 바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복숭아 맛이 꽤 달콤하네. 이제 집에 가자, 여보.”이승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걸어갔다.복도의 구석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그 옆에서 연재준이 그녀를 지켜보며 물었다.“왜 웃는 거야?”유월영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달콤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연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미있네.”그녀는 벽에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혁재 씨가 연 대표님 지인들 중에서 연애를 가장 잘하는 것 같네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정반대에요. 그는 지금 자신과 승연 언니 사이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라고요.” 유월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이혁재가 벌린 온갖 난리를 겪고 나니 이승연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날 어린애처럼 달래지 마.”이혁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여보와 누나 사이에서 이 변호사님은‘애기’라는 별명을 고른 거잖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애기라고 부를게.”이승연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부른다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이혁재가 히죽거리며 그녀의 입가에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져서 트고 있었다.“응.”자판기는 다른 복도에 있었고 이혁재는 복숭아 맛 음료 두 병을 골랐다.그때 갑자기 오성민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넌 말장난으로 이승연을 속이고 있는 거야.”이혁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결제하며 무심히 말했다.“내가 내 아내랑 어떻게 지내는지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오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해서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 본질을 피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이상하다 말이지. 왜 꼭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 두 병을 떨어뜨렸다.이혁재는 음료를 바로 꺼내지 않고 오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좌절이나 어려움들이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림돌인데도,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그냥 피해 가면 안 돼? 왜 굳이 쓸데없이 고통을 자처해야 하지?”오성민이 비웃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군!”이혁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때?”“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부모도 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온 가족이 형만 편애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보니 우리 상황이 조금 비슷하네. ““내 아버지도 두 명의
이혁재가 뻔뻔하게 말했다.“나를 봐봐. 매일 당신한테 달라붙어서 뽀뽀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하고 1분이라도 못 보면 떼를 쓰잖아. 내가 꼭 애 같지 않아? 응? 어차피 내가 연하이기도 하잖아, 나를 아들로 봐도 아무 문제 없어.”이승연은 그의 헛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이혁재는 단도직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 병 있어. 그리고 당신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 마.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할게.”“...”이승연은 더는 대꾸할 힘이 없어 그를 밀쳤다. 다만 이번엔 아까처럼 혐오감에 의한 거부가 아니라 그의 엉뚱한 발언에 기가 차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이승연은 거의 기진맥진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이혁재의 말을 되풀이했다.“당신 잘못 아니야...”이혁재가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지. 나도 완전히 억울한 피해자야. 그러니까 나를 미워하면 안 돼.”그의 당당한 태도는 마치 모든 액운을 쓸어내는 빗자루 같았고 이승연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들이 깨끗하게 지워졌다.이승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그녀는 매일 아침 이 향기 속에서 깨어났고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이혁재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헤쳐 이승연의 눈을 가렸다.“법정을 설 용기가 없어도 상관없어. 안 보면 되지. 자, 눈을 가려줄게.”그는 넥타이를 그녀의 머리 뒤에서 묶으며 말했다.“눈을 가리고 법정에 서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식물인간으로 지냈던 3년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눈앞이 깜깜해지자 이승연은 오히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이혁재는 고개를 숙여 넥타이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눈을 가려도 참 예쁘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누구 아내지? 아, 내 아내네.”이승연은 그의 황당한 발언들을
이혁재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깨어난 뒤 왜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이승연은 그날 자신과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 이혁재를 줄곧 마음속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이혁재는 이승연의 힘에 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는 밀어낸 이승연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여보.”이혁재는 느낄 수 있었다. 이승연은 사랑싸움이 아닌 진심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이혁재의 팔을 꽉 잡은 그녀의 손톱이 그의 살에 파고들었다. 이승연은 그를 향해 울부짖었다.“이거 놔!”오성민도 뒤따라왔고 큰 소리로 외쳤다.“승연이한테서 손 떼!”오성민이 이승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경호원에게 가로막혔다.그 경호원들이 이혁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여기는 법원이니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하지만 사실, 이 경호원들은 유월영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이승연의 첫 재판을 걱정해서 직접 법정에 와 있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연재준도 법정에 나타났고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다.연재준은 손을 입가에 대며 말했다.“쉿.”“...”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유월영은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그렇게 회사를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날 따라다녀도 돼요?”정말 그렇게 한가하다면 병원에나 가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이혁재는 주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픔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승연을 꼭 안고 말했다.“여보, 내 말 좀 들어봐...당신은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싫다면 그땐 내가 떠날게.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이승연이 여전히 몸부림쳤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말했다.“3년 전 그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그는 또렷하게 말했다.“그때 내 자리는 방청석이었고 내 앞에는 몇 줄의 좌석과 다른 방청객들이 있었어.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 놀라 도망치기 바빴고 내 앞을 막아섰어. 난 좌석을 지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