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소흠이 눈썹을 치켜든다.루장월은 줄곧 분수를 잘 따지는 여자였다.설사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더라도 절대 그 어떤 썸의 기류도 연상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이렇게 그의 손을 덥석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 대며 죽을 힘을 다해 유일한 부목을 붙잡은듯 했다.심소흠이 그녀를 자세히 쳐다봤을때 그녀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마음 약해진 그는 조용히 탄식을 하고는 머리를 숙여 나긋하게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루장월은 바닷 바람에 저릿하게 아파오는 뒤통수 통증을 참아내며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교수님 파트너 데리고 오셨어요?”“아니요.”“그럼 형은 파트너 데리고 오셨어요?”“데리고 왔죠.”“여자 친구요?”심소흠이 적절한 대답을 골라한다.“이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무조건 아니다.여자 친구같은 신분이었다면 그의 대답은 이게 아닐거다——설마 자신의 형수를 모를까?똑똑히 말할 순 없지만 사실은 형이 교환하러 데리고 온 여자라고 에둘러 표현한걸거다.하긴 유람선에 타기까지 했는데 게임 수칙을 모를리가.모든 사람이 그녀처럼 속아서 배에 탄 건 아닐테니 말이다.루장월이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고는 유심히 심소흠을 바라본다. 이목구비 어디 하나 흠 잡을데가 없는 그는 까맣게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진 잘 생긴 사람이다. 루장월이 갑자기 입을 연다.”비운과 심씨는 동일한 목표를 두고 경쟁중이에요. 필경 이 한달동안 제가 회사 업무에 크게 참여하진 않았지만 그 프로젝트가 두 회사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건 압니다.“심소흠이 말을 끊는다.”아가씨, 제가 화사 일에 참여하지 않는 거 아시잖아요.“”알죠. 전 그저 교수님이 절 친구로 여기시고 형님께 대신 한마디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만약 절 바꿔오셔서 그 어떤 터치도 없이 절 안전하게 데리고 나갈수만 있다면 제가 형님 도와드린다고요.“도와준다?절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루장월은 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웨이터가 그들에게 커피를 가져다준다. 문연주는 작은 집게로 각설탕 하나를 집어 커피잔에 떨어뜨린다. 퐁당 소리를 내며 잔잔하던 커피잔에 하나 또 하나의 물결들이 일렁인다.그가 티 스푼으로 커피를 살살 젓는다.살짝 말려올라간 슈트 소매 사이로 공작석으로 된 화려하진 않지만 고급진 시계가 엿보인다.아래로 향한 눈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옛성구역 프로젝트는 괜찮은 프로젝트라 저희뿐만 아니라 성씨자본에서도 눈 여겨 보고 있습니다.”심회흠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그러니 저희가 양보하면 비운의 승산이 더 커지겠죠.“문연주가 티스푼을 꺼내더니 고개를 들어 담담한 눈빛으로 말한다.“심 사장님 조건 하나 바꾸시죠.”심소흠 뿐만 아니라 카페 안에 숨어있던 루장월 역시 살짝 넋이 나갔다.그럼 이건……거절한건가?그녀와 바꾸는 거절한건가?루장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 조건은 주기 어려우신가요?”심회흠이 묻는다.“아니면 다른 필요한 프로젝트에 루비서 ”힘 써주길“ 바라시는 건가요?”문연주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밤연회엔 심 사장님도 가십니까?”“그럼요.”하이라이트인데 안 갈수가 없다.문연주는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홀짝 들이키고는 예의를 갖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프로젝트 얘기는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합시다.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심회흠은 말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악수를 했다.“네.”계단을 내려가는 문연주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문연주가 떠나자 심회흠은 그제야 커피잔을 들며 고개를 돌려 루장월을 불렀다.“아가씨 나오셔도 돼요.”그제야 루장월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심회흠이 고개를 살짝 들고 말한다.“방금 한 말 아가씨도 다 들으셨겠죠?”“네.”“문 사장은 승인도, 그렇다고 거절도 하지 않았어요……제가 추측하기론 더욱 우선순위에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것 같아요. 일단 먼저 아가씨를 이용해서 가 프로젝트를 바꿀 수 있는지를 보고 그게 안 되면 다시 저와
쉴새없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 밤연회는 이번 여정의 가장 중요한 연회로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였다.문연주는 이미 몇 벌의 의상을 준비해 옷걸이 걸어놨고 루장월더러 고르게 했다. 심지어 메이크업 전담팀까지 대기하고 있었다.그가 그녀를 꾸미려고 하면 할수록 루장월의 마음 속은 더더욱 얼음장처럼 차가워져만 갔다.일종의 잘 꾸며서 높은 가격애 팔려는 느낌이랄까.기분이 별로였던 그녀는 대충 아무거나 골랐다.문연주는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다가 힐긋 그녀를 흘긴다.“이 옷은 옥비녀에 안 어울려.”아 그제야 생각났다. 어젯밤 문연주는 옥비녀를 사주며 거기에 맞는 드레스를 입으라고 했었다.루장월은 불편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다시 중식 치파오를 골랐다.연한녹색의 치파오는 발목뼈까지 오는 길이에 정면으로는 우아하고 단정해보였지만 등은 뻥 뚫려 마침 두 날개뼈를 드러내며 타고난 섹시함을 표현해냈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의 머리를 한 손에 쥐고 비녀를 꽂았다. 메이크업 역시 청순하고 단아한 느낌을 줬다.아티스트가 립스틱을 고르며 고민하고 있을때 루장월의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립스틱 하나를 골랐다. 그들이 자연스레 뒷걸음질 치는 걸 본 루장월은 거울에 비친 문연주의 모습을 봤다. 그는 이미 단정하고 깔끔한 블랙 슈트로 갈아입고 있었다.그는 립스틱을 돌려 그녀의 입가에 대고 비교해보고는 계피색 립스틱을 골라 섬세하게 그녀의 입술에 발라줬다.루장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근데 이 남자 어색해 보이지 않게 손가락으로 입가 변두리를 흐릿하게 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다.그는 단 한번도 그녀에게 립스틱을 발라준 적이 없다. 메이크업하는 모습을 본 것 조차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이리도 자연스레 하는 걸 보면 꼭 누군가한테 해준 적이 있는거다.그더러 립스틱을 발라주게 할 사람은 딱 한 명.백유였다.이건 어쩌면 그들의 순수한 사랑에 아주 어울리는 걸지도 모른다.다 바른 뒤 루장월은 낮은 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진주 귀걸이를 꺼내 걸었다.
이때 주최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연주!”문연주가 웃으며 동시에 낮은 소리로 루장월에게 말한다.“이따가 무도회 시작하면 왼쪽으로 가. 내가 너 잡을게“왼쪽으로 뭘 어쩌라는 거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중년 남성은 이미 그들 앞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큰 아버지.“문연주가 굽석 인사를 한다.60세 남짓해보이는 남성은 사람 좋은 푸근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너 너, 다들 여기 와서 즐기면서 화합해야 재물이 생기거늘 넌 도리어 사람을 놀래켜 보내버리다니!“그의 이 한마디는 질책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농담에 가까웠고 문연주라는 이 후배를 매우 좋게 보는것 같았다.문연주도 그에게 아주 삭삭하게 대했는데 루장월은 그가 이런 식으로 윗어른과 대화하는 걸 처음 보게 됐다, 그의 아버지도 포함해서.“큰 아버지 저 나무라시는거예요? 전 분명 큰 아버지를 도와 적을 대신 처단해줬는데요. 그런 잡것들이 유람선에 먹칠하지 멋하게요.”“넌 늘 이렇게 똑똑해!“상 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근데 내가 뭐하러 외부인 때문에 널 나무라겠니? 넌 반은 내 아들과도 같은데 내 팔은 당연히 안으로 굽지!“루장월이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반은 아들이라고?그럼 사위인 건가 아니면 양자인 건가?문연주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있었던 그녀는 왜 문연주가 어느 가문과 이리도 두터운 관계를 맺어오는지 몰랐던거지?문연주가 무심코 말을 꺼낸다.“시서는 돌아왔어요?”——시서!미처 준비도 못하고 그 이름을 들어버린 루장월은 무의식적으로 문연주를 바라봤다.문연주는 냉담한 옆태만 보인 채 상 회장과 얘기하느라 그녀를 보지 못한 것 같다.“……”루장월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며 이 연회가 상씨 가문에서 주최한 연회임을 깨달았다.“시서는 주장이 뚜렷해서 가끔은 아비인 나도 스케줄을 잘 모르지. 이번엔 오라고 했는데 왔는지 안 왔는지, 배에 탔는지는 나도 모르겠네.”상 회장이 탄식을 하며 말한다.“시서가 엄마랑 가까워
“……네?”루장월은 그가 왜 상시서를 언급하는지도 몰랐다.그녀와 상시서는 그때 모두 고등학생이었고 심지어 문연주와 그녀는 그때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사장님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문연주가 무표정을 하고 말한다.“진짜 못 알아듣는게 좋을거야.”루장월은 정말 문연주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궁금해하는 그녀의 시선을 차갑게 무시한 문연주는 갑자기 지긋지긋해났는지 말한다.“당분간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그는 그녀의 허리에 감쌌던 손을 빼내고는 혼자 가버렸다.루장월은 넋 너간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짜증이지?사면팔방엔 모두 낯선 귀빈들 뿐이었고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그녀는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다행히 이럼 연회 참여 경험이 많으니 인츰 적응해 나갔다.그녀는 혼자 연회장의 구석으로 가 있었다.만약 이 상태 그대로만 연회가 끝난다면 이건 루장월에게 그토록 좋은 일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오늘 밤 끝나고 내일 배에서 내리면 모레 퇴사, 순조롭기 그지 없었다.하지만 당연히 이런 일은 없겠지.순간 연회장의 모든 불빛이 꺼진다. 놀란 루장월은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았다.이때 한줄기 무대 조명이 켜지며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무대로 올라왔다.마이크를 손에 쥔 여자가 말한다.”Ladies-and-Gentlemen. 우선 이 자리를 빌어 상씨 그룹 대표로 바쁘신 와중에도 이번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1년이 지난 오늘 다시 한 자리에 모였네요!”연회장에 열렬한 박수 소리가 울려퍼진다.루장월은 그제야 이게 하나의 과정임을 알고 따라서 박수를 치며 어두컴컴한 연회장에서 문연주의 그림자를 찾아다녔다.여성 MC가 웃으며 말한다.“늘 그래왔듯 오늘 밤도 춤으로 시작해보죠. 모두 눈을 가려주시고 무대로 들어와 오직 느낌에만 의거해 자신의 파트너를 찾으세요. 저희 함께 이 춤을 통해 서로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상대의 가슴팍에 닿을락 말락 가까워진 루장월은 코끝으로 전해지는 낯설지만 좋은 향기를 맡게 된다.동틀 녘 우거진 삼림 속 줄 지어 있는 촉촉하고 차가운, 신비감을 주며 속을 알고 싶게 만드는 송백 나무 같았다.3초간 넋을 잃고 있던 루장월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두 눈은 또다시 검은 천에 가려지고 만다——남자가 떨어진 천을 주워 다시 그녀의 뒷통수에 매줬던 거다.루장월의 시야는 남자의 턱만 보일 정도까지 가려진다.가장 익숙한 문연주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수 있었다.“……실례지만 성함이?”루장월이 나지막이 묻는다.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대답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MC가 무대에서 선포한다.“3분 다 됐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파트너를 찾으셨군요. 그럼 오늘 밤 무도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은은한 관현악이 울려퍼지며 남자는 루장월의 허리를 감싼다.여자들의 민감한 촉은 상대가 자신에게 무례한지 아닌지를 단번에 캐치해낸다. 그녀는 남자가 무례한 의도는 없다는걸 깨닫고는 피하지 않고 함께 무대로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루장월은 완전히 그에 의해 “조종“당한 채 좌우앞뒤로 스텝을 옮겼다. 이건 왈츠의 기본 스텝이다,연회에 참석해본 사람이면 다 아는.그녀가 몇 번이고 눈을 가린 천을 벗어내려 했지만 남자는 줄곧 그녀의 손을 잡고 벗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다.그가 자신이 누군인지 알리기 싫어하면 할수록 루장월은 더욱더 알고싶어졌다.“……도대체 누구세요?”남자가 한 손을 잡고 그녀를 “던져버리는” 틈을 타 루장월은 다른 한 손으로 천을 벗겨내려 했지만 또 한번 남자에 의해 손을 붙잡히고 말았다.남자가 손을 움직여 그녀와 손 깍지를 낀다.둘의 손바닥이 맞붙고 남자의 온기가 느껴지자 루장월의 몸이 부르르 떨려온다.송백 나무 향도 더 짙어진것 같다.루장월은 정신이 온통 딴데 팔려 왈츠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람 도대체 누굴까?그녀는 꽤나 관심을 보이는것 같다.
심소흠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본다.“네? 저도 모르죠. 조명이 안 켜져서 저도 잘 보이진 않았는데 다시 켜졌을때 아가씨가 제일 가까이 있었으니 그럴수도 있겠네요.“루장월이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본다. 모두들 더이상 눈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그녀의 생각이 틀린게 아니라면 이 게임의 규칙은 아마도 눈을 가린 채 파트너를 찾은 뒤 천을 벗을수 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못 보게 했다.일부러 그를 못보게 한거다.애초에 조명이 꺼지면 자세히 보이지도 않겠지만 그는 조금도 자신을 볼 수 없게 했다.그 남자는 절대 심소흠일리가 없다.심소흠이 의문스러운 듯 묻는다.“아가씨?”루장월은 짐시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심소흠을 돌아봤다.“감사합니다 교수님.”땅에 떨어진 케이크는 웨이터들에 의해 신속하고 깨끗하게 치워졌고 카펫 역시 완전히 새것으로 교체됐다. 이 모든 과정은 불과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상가네 규칙과 효율은 매번 사람을 놀래키는 정도다.편안한 관현악이 다시 울려퍼지며 MC가 무대에 올라와 귀빈들을 안정시켰다. 그렇게 연회는 계속 진행됐다.계속 춤을 추고 싶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일 얘기를 할 사람들은 그 사람들 대로 각자 모여 소파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심소흠이 그녀의 주위를 살펴본다.“문 사장님은 안 계세요?”“어디 가셨는지 모르겠네요.”루장월도 딱히 그를 찾고싶진 않았다.안경 너머 심소흠의 눈빛이 빛나며 말한다.“아가씨 너무 뜬금없이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밤엔 제가 곁에 있어드릴게요. 별 일 없을겁니다.”루장월은 그의 말 뜻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문연주가 자신을 보내버리는 것이었으니 그가 곁에 있어준다면 만약의 상황이 닥쳐도 그의 보호를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다.루장월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정말 고맙습니다 교수님.““오늘 감사를 너무 많이 받아서 지금은 거절할게요. 아가씨 정말 감사인사를 하고 싶으시면.”심소흠이 새하얗고
그저 평범하게 춤을 추고 있었던 루장월과 심소흠은 당연히 손에 힘을 주고 있지 않았고 문연주에 의해 단번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문연주는 동시에 소소를 심소흠에게 밀어버리곤 루장월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준비도 없이 문연주 앞에 끌려간 루장월은 넋이 나가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이 무미건조하다.그녀는 자신이 그의 눈엔 그저 물건 같다고 여겨졌다. 갖기 싫을 땐 아무렇게나 버리고 갖고 싶을땐 냅다 뺏어오는 그런 물건.일말의 존중도 찾아볼수가 없었다.루장월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사장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왜? 너랑 심소흠 떼놨다고 이러는 거야?” 문연주가 차디찬 목소리로 말한다.“본인이 누구 물건인지 잊어나봐?”물건?그렇다, 그의 눈에 루장월은 그저 도구 아니면 물건일 뿐이었다. 단 한번도 자신만의 인격을 가지지 못한 채 그를 에워싸고 빙빙 돌아야만 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했고 심지어 생사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루장월은 그와 춤을 추기 싫었다.그를 보고싶지가 않았다.하루종일 꾹꾹 참아낸 감정이 결국 이때를 넘기지 못하고 폭발해버린다.루장월은 그를 떠나고 싶었지만 손과 허리 모두 단단히 잡혀 할 수 없이 한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쳐냈다.문연주가 그리 힘을 주지도 않은것 같았지만 여전히 밀어내긴 힘들었다.루장월이 이를 악물고 말한다.“사장님, 사장님이 먼저 저 버리고 가셨잖아요?”그는 지금 또 뭘 지적하려 든단 말인가!문연주가 말한다.“내가 왼쪽으로 오라고 했어 안 했어? 내가 너 끌어당기겠다고 하지 않았나?”루장월은 문득 그 말이 떠오른다.하지만 두서 없이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런 연회 경험이 처음인 그녀가 어찌 눈 가리는 환절이 있을줄 알았겠는가? 또 무슨 수로 그의 말이 이런 뜻임을 떠올릴수 있을까?“못 들은거야? 아님 못 알아들은거야?”문연주가 그녀를 쳐다본다.“하긴 하루 종일 정신이 딴데 팔려서 도통 뭔 궁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한 말이 귀에 들어갈리가 있을까.”“사장님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