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유 비서는 내게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인 양 내게 자선기금을 설립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그래서 나도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별다른 경계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은 또 기금을 홍보하며 경마 대회를 이용해 기부금을 300억까지 끌어올렸고 그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금액이었죠.”윤영훈은 미소를 띠며 눈앞에 있는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여자를 바라보았다.“내가 더 추측해 볼까요? 그 300억 중 적어도 200억은 유 비서가 심어놓은 사람이 낸 거겠죠?”유월영은 미소를 유지한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윤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유 비서는 경마에서 졌다는 명분으로 비밀번호를 나에게 맡겼죠.”유월영은 윤영훈에게 그냥 비밀번호를 내어 주지 않았다. 그녀는 경마대회를 열어 윤영훈이 우승을 할 수 있게 준비하고 그가 우승한 뒤 자연스럽게 그에게 비밀번호를 전달했다.유월영의 모든 계획은 하나하나가 너무 자연스럽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윤영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밀번호를 나에게 맡기는 건 마치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당신은 내가 그때 빚 때문에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알았을 테고 내가 더는 방법이 없을 때 분명 자선기금에 손을 댈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유월영은 이 폭탄이 터지기 전에 신주시를 떠났다. 이는 그녀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윤영훈이 돈이 필요할 때 그녀를 찾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윤영훈은 감탄하며 말했다.“그리고 나는 꼼짝없이 덫에 걸렸어요. 빼도 박도 못하게 증거까지 있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거죠.”유월영은 그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동안 한 마디도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건 그의 추측이 전부 맞았다는 뜻이었다.그녀는 덧붙여 말했다.“그 경마 대회에서 난 연재준의 건강 상태도 확인했어요. 그리고 그의 건강이 정말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윤영훈은 더욱 크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윤영훈이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거잖아요. 내가 뭘 어쩌겠어요? 그는 내 친아버지인데 그를 고발이라도 해야 했나요? 그렇게 가족을 배신하는 건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행동이야. 난 성인군자가 아니야.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요.”유월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었다니. 이 말은 너무 비열했다!“그래서 당신은 당신 아버지를 도와 증거를 없애고 내 양부모를 죽게 만든 건가요?”“말했잖아요,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내가 장부를 찾지 못하고 예전이 했던 일이 까발리지 못하게 막지 않았더라면 결국 감옥에 가고 파산할 사람은 신해 그룹과 내 아버지였어요. 나도 그저 나를 지키려 했을 뿐이라고요!”윤영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씨 가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난 겨우 세 살이었어요. 하지만 그때부터 난 공범이자 협력자가 될 운명이었고 평생 동안 계속 잘못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참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고?’‘사람은 이기적인 존재여서 그래서 계속 잘못된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고?’유월영이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못 들어주겠어요. 다른 사람의 피눈물로 자신들은 마음 편히 살면서 잔인함을 정당화하려 하지 말아요. 당신의 그 핑계는 역겨울 뿐이에요!”“역겨워요?”윤영훈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요...”그는 갑자기 도망자들이 왜 드디어 두 발을 뻗고 편히 잘 수 있다는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물론 그들의 일부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 하는 말이었겠지만, 그들 중에는 정말로 한숨 돌리며 안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그처럼.윤영훈은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이 죄책감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유월영은 겨우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며 화를 내지 않으려 자신을 달랬다.그녀가 말했듯이, 아직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으며 꼭 윤영훈과 그의 아버지가 법정에 서서 그들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유월영은 처음으로 알게 된 내용이었다.그녀는 윤영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빛이 번뜩였고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유월영은 여전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그때, 당신은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 요소였어요. 나는 그가 연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를 도와줬죠. 그리고 오 변호사 앞에서도 연 대표와 유 비서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어요.”윤영훈이 이 얘기를 꺼낸 건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간곡하게 부탁했다.“내가 두 사람한테 그 정도의 은혜를 베푼 걸 봐서 유 비서도 주월향 모녀를 잘 돌봐주면 안 될까요?”한참 후에야 유월영은 입을 열었다.“그런 거래에는 관심 없어요.”윤영훈은 약간 초조해졌다.“그럼 원하는 게 뭐죠?”유월영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창주에 있는 김씨 가문의 김경준을 알고 있죠?”윤영훈은 빠르게 머릿속을 뒤졌다.“네. 알아요. 내 먼 사촌 여동생이 그와 결혼했어요.”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했다.“김경준 씨는 신경과 의사 심호준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심호준이 이미 은퇴해 산속으로 들어갔고 외부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어요. 그런데 김경준 씨가 올 초에 사촌 여동생을 치료하려고 그를 찾아냈어요. 윤 대표님께서 심호준 씨를 찾는 걸 도와주세요. 그리고 심호준 씨가 승연 언니를 치료할 수 있게 부탁해 주시면 제가 약속을 지킬게요. 주월향 씨와 어린 딸을 잘 돌봐주겠다고요.”윤영훈은 입술을 깨물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월영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오성민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오늘 나눈 대화 모두요.”윤영훈이 한숨을 내쉬었다.“좋아요. 모두 유 비서 말대로 할게요.”유월영이 핸드폰을 꺼냈다.“지금 바로 전화하세요.”윤영훈의 이 통화는 한 시간 반 동안 지속되었다. 유월영은 통화 내내 옆에서 듣고 있었고 그 결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김경준은 심호준의 연락처를 넘겨주었다.심호준은 김경준에게 신세를
구치소에서 떠난 뒤 유월영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의 한 디저트 가게에서 유월영은 주월향을 만나기로 했다.주월향은 미리 와 있었고 커피와 디저트를 앞에 둔 채 유월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원에서 신주시로 돌아온 뒤 줄곧 바쁘게 뛰어다닌 유월영은 배가 고파 바로 디저트를 먹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전에 구치소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왔어요.”주월향이 조용히 물었다.“그이가 제가 신고했다는 걸 알까요?”유월영이 답했다.“윤 대표가 그 신고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주월향 씨라는 걸 이미 짐작한 것 같아요. 그저 당신을 이름을 직접 듣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죠.”주월향은 작게 한숨을 쉬고 가방에서 작은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방을 정리하다가 서랍에서 이걸 발견했어요.”케이스를 보아하니 반지 하나가 들어 있는 듯했다.유월영은 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주월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이마에 있는 붉은 점조차도 그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어느 날인가 그이가 나에게 말했어요. 문득 나랑 같이 혼인신고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안 하길 잘했다고요. 나는 그이가 내가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 한 줄 알았어요.”유월영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윤 대표는 주월향 씨를 아내로 맞았다가 그가 감옥에라도 가게 된다면 당신 모녀가 연루될까 봐 그런 거예요.”전과가 있는 아버지를 둔 아이는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윤영훈은 주월향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주었으니 이미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여긴 셈과 마찬가지였다.그 작은 반지 케이스를 바라보며 유월영은 약지가 무의식적으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젓가락을 단단히 쥐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케익을 먹으며 말했다.“남자들은 다들 결혼반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네요.”주월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월영이 다시 물었다.“후회돼요?”주월향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조금은요. 하
주월향은 속눈썹이 떨리고 목소리도 메어왔다.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아니요. 알고 싶지 않아요.”말을 끝내자 그녀는 빠르게 떠났다.유월영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윤영훈은 그가 형기를 마친 후 주월향을 다시 찾아가도 되는지, 그들에게 미래가 있을지 묻고 싶어 했다.아마 주월향도 윤영훈이 무슨 말을 전해달라고 했을지 이미 짐작했을 것이다. 그녀가 “알고 싶지 않다”라고 한 것은 두 사람에게 미래가 없다는 뜻이었다.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왜 항상 식사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가 만나는 걸까요?”갑자기 옆에서 웃음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유월영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말했다. “신 교수님,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그녀는 급히 웨이터에게 그릇들을 치워달라고 했다.신연우가 자리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제 동생, 신연아를 기억하나요?”“당연히 기억하죠.”“동생이 이제 곧 결혼해서요.”유월영이 놀라 물었다.“이렇게 갑자기요?”신연우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갑자기는 아니고. 다만 고 대표님이 너무 오랫동안 이쪽 소식을 듣지 않아서 그런 걸 거예요. 연아가 약혼자와 사귄 지는 2년 정도 됐어요. 결혼 얘기도 거의 반년 동안 오갔고요. 결혼 날짜는 내년 초로 정해졌고 제가 동생 결혼 선물로 금 장신구를 좀 사주고 싶어서 오늘 시간이 나서 매장을 들렀어요.”그는 말하며 손에 든 큰 케이스를 열었고 그 안에는 얼핏 봐도 열몇 개의 금 장신구가 걸려 있었다.“하나 골라보세요.”유월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신 교수님도 농담을 참, 여동생의 결혼 선물인데 제가 고르라고요?”신연우는 난감한 듯 말했다. “제가 선택 장애가 있어서 고 대표님이 도와주길 바란 거예요. 고 대표님께 드리려고 한 건 아닌데...지금은 고 대표님이 저보다 더 돈도 많으시잖아요. 이런 건 제가 고 대표님한테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아.유월영이 오해했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신중하게 살펴보다가 마지막으로 비녀를 하나 골
윤영훈이 막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도관이 또다시 문을 열며 말했다.“접견이 하나 더 있어.”“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여기로 휴가 온 줄 알겠네요.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윤영훈이 웃으며 일어났다.교도관이 꾸짖었다. “조용히 하고 빨리 나와.”윤영훈은 교도관을 따라 다시 면회실로 나갔다.이번에는 누굴까 생각하며 들어가자 오성민이 철창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오 변이네.”윤영훈이 잡혀들어온 후 오성민은 그를 도와주려고 사방으로 애썼다.일이 터지기 전에는 돈을 빌려주어 구멍을 메꾸도록 했고 나중에 고발당하고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는 사람을 모두 동원해 윤영훈을 지키려고 했다.하지만 금액이 너무 크고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자 오성민도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오성민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나를 변호사로 고용해 줘. 내가 반드시 윤 대표를 도와 최소한의 형량을 받아낼게.”윤영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오성민이 다시 물었다. “방금 유월영이 온 거 봤어.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윤영훈은 입술을 한번 핥으며 차가운 숨을 내뱉었다. 감옥이란 곳은 언제나 그렇다. 벽이 아무리 밀폐되어 있어도 어디선가 외풍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고 몸이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오 변. 우리도 같이 자란 사이이고 하니 충고 하나 해주고 싶어.”오성민이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유 비서, 예전의 우리가 알던 그 유 비서가 아니야.”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코트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알아. 그 여자가 해성 그룹과 아르사와의 협력을 망가뜨렸을 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았지. 하지만 유 비서가 그렇게 빨리 우리한테 손 쓸 줄은 몰랐어. 갑작스레 유 대표를 끌어내리더군.”그는 다시 안경을 고쳐 썼고 안경알 위로 빛이 반사되었다. 그의 진한 갈색 눈동자가 순간 세로형 동공처럼 보였고 마치 뱀과 같았다.“겨우 여자의 몸
“네? 왜요?”유월영이 손을 내밀자 신연우는 주먹 쥔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펴자 무언가가 유월영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작은 목걸이였다.신연우가 말했다.“제가 주는 선물이에요.”“이건 여동생분의 혼수품이잖아요.:”유월영이 받을 수 없다면서 거절하자 신연우가 웃으며 반문했다.“내가 아까 골라달라고 한 그중에 이 목걸이가 있던가요?”유월영은 목걸이를 다시 확인했다. 목걸이는 가느다랗고 작은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그런 목걸이는 없었던 것 같다.신연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제가 월영 씨를 위해 특별히 산 거예요.”유월영은 펜던트의 모양을 자세히 보았다.“이거, 허물을 벗는 나비인가요?”펜던트는 나비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순간을 표현한 듯했다.신연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처음 보자마자 월영 씨가 딱 떠올랐어요.”유월영은 바로 그런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난 나비와 같았다.신연우는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청청한 하늘에 초승달이 보였다.“월영 씨가 제 안경에 비친 ‘달’을 보며 울던 그날이 기억나네요. 그때 저도 결심했죠. 꼭 월영씨를 지켜주겠다고요.”유월영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차갑지 않고 따뜻했다.신연우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경 너머로 그의 눈빛도 한층 더 부드러웠다.“지금은 월영 씨가 더 이상 저의 보호가 필요 없을지 몰라도 전 여전히 월영 씨 곁에 있으려고요. 힘든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줘요. 내가 월영 씨의 짐을 나눠 가질게요.”유월영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녀는 목걸이를 꼭 쥐었다. 목걸이는 매우 가벼웠고 금값으로 따지면 그리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신연우의 마음만은 값을 매길 수 없었다.유월영은 평소에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연우에게는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 어떻게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고마워요, 신 교수님.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당신이 함께 해주셨어요. 신 교수님의 은혜를
구급차는 금방 도착했고 들것에 실린 신연우는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그는 의식을 잃기 전 힘겹게 유월영의 손을 잡고 말했다.“...난 괜찮아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유월영은 눈가가 뜨거워졌다.구급차를 따라 병원으로 간 유월영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유월영은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신연우가 차에 치여 날아가던 장면이 반복되었고 그녀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짜내듯 말했다.“한 비서님. 가서 알아보세요.”한세인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알겠습니다!”수술은 두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고 유월영은 줄곧 수술실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손에는 신연우의 안경이 들려 있었다. 렌즈는 이미 깨져버렸고 그의 귀에 항상 걸려 있던 안경줄도 끊어졌다. 유월영은 떨리는 손으로 그 줄을 다시 이으려고 애썼다.그러다 신연우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신주대학교의 행사에서 그는 갑자기 유월영 앞에 나타나 자기를 잊었냐고 물었었다. 그러면서 유월영이 예전에 와인을 그의 셔츠에 쏟은 적 있다고 말했다.추억에서 헤어 나온 유월영은 이내 아까 신연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그녀는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앞에서는 한 번 울었던 적이 있었다.더욱이 유월영이 연재준의 방해로 일을 찾지 못했을 때 신연우가 그녀를 받아들여 그의 조교로 일하게 해주었다.딸깍, 안경 줄이 마침내 연결되었다. 유월영의 얼굴에 연한 미소가 어렸다. 안경이 고쳐졌으니 이제 그도 곧 나을 것이다.한세인이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아가씨.”유월영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한세인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경찰과 교통경찰이 현장에 도착해 운전자와 차량을 같이 데려가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초기 조사 결과는...”“초보 운전자가 주차하다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사람을 친 후, 그만 패닉에 빠져 판단력을 잃고 계속해서 차를 몰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는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