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며 웨이터에게 와인을 따르라고 손짓했다.윤영훈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계획서를 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역시나 유 비서답네요. 일 처리가 정말 철저해요.”그는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말했다.“아, 또 깜빡했네요. 이제는 고 대표님이라 불러야겠죠.”유월영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녀의 뒤에 서 있던 한세인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지만, 윤영훈이 자꾸만 유월영에게 과거를 언급하며 그녀가 정말로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윤영훈은 유월영이 옛일을 생각하고 한순간에 돌변하여 그에게 달려들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상관없어요. 제가 비서로 일한 기간이 꽤 오래되었으니까요. 연 대표님과 신 대표님의 비서도 해봤고요, 그리고 레온 그룹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크로노스 씨의 비서로 일했으니 사람들이 저를 비서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유월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연재준은 문서를 탁자 위에 던지며 약간 냉랭한 표정을 지었고 와인 잔을 들어 마시려 했다.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사람은 오히려 연재준인 것 같았다.하지만 잔이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멈추고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내려놓고, 하정은에게 차를 따르라고 손짓했다.유월영의 시선이 연재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병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듯 보였으며 입술 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고 대표님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윤영훈이 턱을 괴고 물었다.“고 대표님 여동생 유수영 씨가 어떻게 아르사 가문의 양녀가 되었는지요? 물론, 대답하기 불편하다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유월영은 친근한 태도로 옛친구에게 설명하듯 답했다.“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불편하지만, 연 대표님과 윤 대표님이라면 말해도 괜찮아요.”그들은 확실히 오랜 친구였다. 한때는 관계가 좋았던 오랜 친구.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유월영의 이런 태도는 매우 정상적이었을 것이
순간 세 사람의 발걸음이 모두 멈췄다.한세인이 재빨리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유월영을 보호했다.곧이어 방 안에서 여자의 울음소리와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남자의 욕설과 함께 옷이 찢어지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이런 상황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유월영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서덕궁이 예전에 노 사장의 손에 있었을 때는 이렇게 어지럽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연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세요?”연재준의 표정도 차가워졌고 뒤를 흘끗 보자 하정은이 즉시 경호원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너희들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너희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유월영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장갑을 정리했다. 연재준의 시선도 그녀에게로 향했지만 유월영은 그를 무시하고 슬쩍 윤영훈의 표정을 살폈다.윤영훈의 얼굴은 이미 굳어진 채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하정은이 신분을 밝히자 남자는 갑자기 조용해지고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았다.잠시 후, 괴롭힘을 당한 여자가 하정은의 부축을 받으면서 방에서 나왔다.하정은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여자에게 덮어주었고 그 여자는 서덕궁 직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유월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요?”여자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을 떨며 두 손으로 옷깃을 꽉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연신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뺨을 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유리 조각에 베인 듯한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나고 있었다.“아까 우리 방에서 술을 따르던 직원이죠?” 유월영은 그녀를 알아보았다.여자는 고개를 재빨리 들었다가 다시 숙이며 말했다.“...네, 저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연 대표님. 감사해요. 윤 대표님도... 감사합니다.”유월영은 손을 뒤로 하고 말했다.“옷을 갈아입고, 병원에 가서 상처를 검사받으세요. 잊지 말고 증거도 남겨두세요. 이 일은 연 대표님과 윤 대표님 모두 같이 목
윤영훈은 멈칫하다가 그녀의 말에 끝내 대답하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나갔다.그는 서둘러 서덕궁을 빠져나와 대문 입구까지 걸어가서야 진정된 듯 숨을 몰아쉬었다.그는 약간 짜증이 난 듯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포장을 뜯고 입에 넣었다.단단한 사탕이었지만 그는 한 번에 깨물어 부숴버렸고 날카로운 사탕 조각들이 그의 입안을 베어왔다.그는 한동안 찬 바람을 쐬며 감정을 가라앉히고 비서에게 명령했다.“주월향이 왜 여기 있는지 알아봐.”비서가 물었다.“우연히 여기서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이었을 거라고 의심하시는 건가요?”윤영훈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공교로운 일은 없지. 뭔가 문제가 있어.”“네, 알겠습니다.”...한세인이 우산을 들고 차 문을 열었다.유월영이 차에서 내리자 연재준의 차도 길가에 멈췄다.그의 차는 람보르기니였다. 우산이 차 문 옆에 있어 운전기사가 우산을 꺼내 들고 그에게 우산을 씌우려 했지만 연재준은 우산을 받아 들고 혼자 그녀에게 걸어갔다.유월영에게 다가가면서도 그는 조용히 기침을 두 번 했다.원래 감기가 채 낫지 않은 그는 비바람에 감기가 더 심해진 듯했으며 그녀 앞에 다가와 입을 열기도 전에 계속 기침했다.유월영이 말했다.“연 대표님, 몸도 안 좋으신데 왜 굳이 오늘 나오셨나요?”유월영은 그가 윤영훈과 관련된 일을 캐물어 볼 줄 알았지만 그는 입술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물었다.“배고프지 않아?”유월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우리 방금 막 식사 마치지 않았나요? 연 대표님께서는 벌써 소화가 되셨나요?”연재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은 식사 내내 머리를 굴리고 거짓말을 꾸며내느라 바빴지. 거의 먹지도 않았잖아. 호텔로 돌아가서 차가운 음식을 먹을 바에야 지금 따뜻한 음식을 먹으면서 속을 데우는 게 낫지 않겠어?”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머리를 굴렸다고 그래요?”“주월향은 윤 대표의 옛 연인이었어. 그녀가 오늘 거기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라고
연재준은 당연히 조건이 있었다.“나랑 식사 한번 해줘.”유월영이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정말로 식사뿐인가요?”그녀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대답했다.“지금요? 그래요, 어디에서 먹을까요?”연재준의 눈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고, 그는 유월영의 어깨에 튄 빗방울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었다. 유월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물러서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한세인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연 대표님.”결국, 연재준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고 그는 갑자기 내리는 비를 보며 말했다.“비가 점점 더 거세지네. 급할 것 없으니 다음날로 하지. 다른 사람에게 팔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 비서에게 알려주세요. 꼭 제시간에 갈 테니 식사가 끝난 후에는 연 대표님께서 꼭 약속을 지켜서 고씨 가문의 옛집을 저에게 팔 수 있기를 바래요.”말을 마친 유월영은 한세인의 우산 아래로 돌아가 차에 올랐다. 그녀가 떠나고 연재준은 혼자 빗속에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차로 돌아갔다....비는 사흘 동안 계속 내렸다.유월영은 그동안 외출하지 않고 계속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그녀는 지남에게 전화를 걸어 현시우가 확인하지 않은 이메일을 자신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지남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대표님을 생각하는 건 아가씨뿐이네요.”유월영은 당연히 현시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신이 없었을 것이며 지금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그가 준 것이었다.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월영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현시우였다.그녀는 그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려 한다고 따지러 온 줄 알고,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나에게 책임을 묻고 싶으신가요, 크로노스 씨?”현시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서론 없이 바로 물었다.“고씨 가문의 옛집을 사려고 하는 거야?”“한 비서가 말했어?”현시우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그 집을 왜 사려고 하는 거야?
유월영은 창가에 서서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현시우가 고씨 가문의 옛집을 사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문득 현시우가 항상 그녀가 고씨 가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2년 전,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연회 부인에게 데려갔을 때, 연회 부인은 그녀를 “고민서”라고 불렀지만 현시우는 바로잡으며 말했다.“월영이라고 부르세요. 고민서보다 유월영이라는 이름에 더 익숙할 거예요.”하지만 사실 그녀는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었다.그날 유월영은 연회 부인에게 고씨 가문에 대한 옛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었었다. 연회 부인은 그녀의 어머니 고씨 부인의 절친이었다고 했으니 그녀는 당연히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마디 묻지도 못하고 현시우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유월영은 당연히 떠나고 싶지 않았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현시우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그때부터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했다.‘왜 시우 씨는 내가 옛일을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 거지?’현시우는 그 후 연회 부인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레온 저택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고 설명했다.유월영은 코를 문지르며 창가에서 물러났다.“한 비서님.”한세인이 나타났다.“네, 아가씨.”유월영이 말했다.“마르세유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주세요.”한세인이 놀라서 물었다.“지금요?”유월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30분이었다.“네,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요.”가장 빠른 항공편은 8시 30분이었다.유월영은 다음 날 오전 9시 30분에 다니엘 저택에 도착했다.저택의 가정부들은 이미 하루의 일을 시작하고 있었고, 유월영은 마침 가정부가 현시우의 아침 식사를 들고 계단을 오르려는 보고 다가갔다.가정부는 그녀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아가씨, 어떻게 돌아오셨나요?”유월영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주님 어디 계신가요?”가정부가 조용히 대답했다.서재에 계십니다.”“내가 가져다줄게요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차가운 느낌에 유월영은 흠칫했다.그들은 약혼 관계였지만 그가 이런 친밀한 행동을 하는 것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현시우는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사고 싶다면 사.”하지만 유월영은 그 말을 듣고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반대하더니, 이젠 또 그냥 바로 찬성하는 거야?”유월영은 손을 빼며 그의 이마를 살짝 만졌다.“시우 씨, 이럴 때 정말로 애 같다니까. 애처럼 이랬다저랬다 하고.”현시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마르세유의 아침 햇살보다 더 따뜻했다.“네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다짐했거든.”그러나 유월영의 미간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그녀는 현시우가 왜 고씨 가문의 옛집을 사는 것을 반대하는지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이제 와서 찬성하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가 전에는 왜 반대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현시우는 이 주제가 끝났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며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침 먹었어?”“비행기에서 조금 먹었어.”“나랑 같이 조금만 더 먹어. 이왕 왔으니 이틀 정도 쉬다가 돌아가는 게 어때? 신주시에 급한 일도 없잖아.”“알았어.”한세인의 그 시각에 하정은의 전화를 받았다.“한 비서님, 고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께서 고 대표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어 하십니다.”한세인이 식탁 쪽을 흘긋 보았다.“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지금 신주시에 안 계세요. 며칠 후에나 돌아갈 겁니다.”하정은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을게요.”30분 후, 하정은이 차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책상 위에 케이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연재준은 오늘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연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반달 동안 처음으로 보는 미소였다.연재준이 찻잔을 들면서 물었다.“이 케이크 어때?”케이크는 6인치 크기로 작
유월영은 현시우의 통화 내용을 더 들으려고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지만 현시우는 그녀의 모습을 눈치채고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담담하게 말했다.“이만 끊을게요.”전화를 끊고 현시우는 곧바로 유월영 쪽으로 걸어왔다.그의 모습이 유월영의 시야에서 점점 더 선명해졌고 그녀 앞에 다다랐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너를 먹으라고 수프를 준비했어. 조금 먹고 속을 달래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녁은 같이 먹자.”유월영은 외투를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누구랑 통화했어? 방금 내 생일을 말한 거야?”현시우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며칠 전에 네 매형이 물건을 한 상자 보내왔어. 너의 동생이 부탁한 거라는데 네가 파리보다 여기에 올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아서 여기다 맡겨뒀거든. 이따가 사람 시켜서 옮겨줄게.”그는 외투를 입지 않고 팔에 무심하게 걸쳤다. “아르사가 두 사람의 결혼을 계획한 데에는 물론 자기 생각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니 잘된 일인 것 같아. 안도르가 수영 씨를 위해 한국어와 수화를 배우려 하는 걸 보면 앞으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 거야.”유월영은 현시우에게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현시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수영이도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으니 이제 행복할 일만 있으면 좋겠어.”현시우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는 세 개의 계단이 있었고 유월영이 먼저 올라가고 현시우가 그녀 뒤를 따랐다.그녀가 두 걸음을 올랐을 때 현시우는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유월영은 순간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돌아보려고 했으나 허리를 감싼 현시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자 그녀는 그냥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현시우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받쳐오는 듯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월영은 그의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진 걸 들으며 물었다
유월영은 현시우의 말대로 급한 일이 아닌 것 같아 더 이상 한세인을 찾지 않았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집사와 가정부들은 들락날락하며 문밖에 무릎 꿇고 있는 한세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누구도 유월영에게 말을 걸 엄두를 못 냈다.식사를 마친 유월영은 현시우와 함께 체스 몇 판을 두다 나중에 졸려서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현시우는 의자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시간을 한 번 확인한 후에야 집사를 시켜 문밖의 한세인을 불러오게 했다.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은 한세인은 부은 무릎을 이끌고 천천히 현시우 앞으로 다가갔다.“대표님.”현시우는 느릿느릿 체스를 상자에 나눠 담았다. 체스 조각들은 모두 옥으로 만들어져서 그의 늘씬한 손가락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가 담담하게 말했다.“월영이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생각해 봤어?”“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도 대표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요.”한세인이 이어 말했다.“만약 대표님께서 굳이 이렇게 하셔야 한다면 최소한 아가씨께 진실을 알려주시고 아가씨가 계속 잘못된 길을 갈지 말지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지금은 그분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그걸 이용해 대표님 마음대로 하시지만, 만약 나중에 아가씨가 알게 된다면요? 그리고 신경 쓴다면요? 대표님, 저는 결국 대표님께서 아가씨한테 상처를 주고 대표님도 상처를 받으실까 봐 두려워요.”현시우가 싸늘하게 웃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한세인을 바라보았으며 눈에는 집착과 함께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지금 네가 나보다 그녀를 더 걱정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너무 비열하고 역겹다고 생각해?”“그런 뜻이 아니에요. 대표님...”현시우는 절반쯤 모은 체스 조각을 그대로 체스판에 던져버렸다. 와르르 소리를 내며 체스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더 이상 한세인의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어서 한 마디 던졌다.“계속 무릎 꿇고 있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