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연재준이 갑자기 무대에 올라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주되던 음악이 뚝 끊기고 원래 축제 분위기였던 연회장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하객들은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연재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오직 신부만을 바라봤다. 그는 신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머리에 쓴 면사포가 두꺼워 가까운 거리에서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으며 한 글자씩 물었다.“너, 도대체 누구야?”혼주석에 있던 아르사 회장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연 대표, 당신 왜 그러는 거야? 왜 함부로 뛰쳐나가 내 딸의 손을 잡고 있어?”아르사 회장은 연재준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이러한 결혼식을 방해하는 행위는 이미 그의 눈썹을 찌푸리게 만들었다.아래에 있던 윤영훈을 포함한 세 사람도 서로 눈을 마주쳤다.사회자는 서둘러 나서며 말했다.“선생님, 신부의 친구신가요?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희 결혼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자리로 돌아가 주시고 결혼식이 끝난 후 신부와 신랑이 내려와 모든 손님들에게 인사드릴 겁니다.”연재준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고 잡고 있는 신부의 손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신부도 별다른 저항 없이 그저 머리 면사포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연재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재준아!”이혁재는 재빨리 무대로 올라가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연재준을 끌어내며 문제를 더 크게 만들지 말라고 말리면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죄송합니다. 그는 단지 신부가 죽은 친구와 닮아 보여서 조금 흥분한 것뿐입니다.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그러나 연재준은 그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신부가 정말로 유월영인지 확인하기 위해 집요하게 말했다.“면사포 벗어. 네 얼굴을 봐야겠어.”그러자 신랑이 달려와 연재준을 밀쳐냈다.“내가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해? 이 여자는 내 신부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는 거지? 당장 이 손 놓고 무대에서 내려가!”연재준
그런 소란을 일으키고 나서 연재준 일행은 당연히 결혼식장에서 쫓겨나 응접실로 이동되었다. 집사는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죄송하지만, 회장님께서 여러분이 즉시 저택을 떠나주시길 부탁하십니다.”윤영훈은 바로 소파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르사 회장이 최소한 직접 와서 상황을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바로 퇴거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그들 네 사람의 회사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500대 기업에도 손꼽히고 있었는데 아르사 회장이 직접 추방을 명령했으니, 그가 얼마나 크게 분노했는지 알 수 짐작할 수 있었다.윤영훈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이건 오해입니다. 큰 회장님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직접 설명드리겠습니다.”그러나 집사는 이전의 공손하고 온화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정하게 말했다.“이번 '오해'로 인해 큰 사모님께서 혈압이 상승하여 가정 의사를 불러 진료 중입니다. 회장님께서도 함께 계시느라 손님을 만날 여유가 없으십니다. 다만, 저보고 여러분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첫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 아르사와 해성 그룹 간의 모든 협력이 종료되는 날이 될 것이라고요.”그는 말을 마치고 바로 돌아섰다.“집사님!”윤영훈이 외쳤지만 집사는 그대로 나가버렸다.윤영훈은 얼굴이 굳어져서 냉랭한 표정의 연재준을 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연 대표님, 이번에는 너무 경솔하셨던 것 아닙니까?"이혁재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왜요? 이제 책임을 연 대표에게 떠넘기고 싶은 건가요? 당신들도 방금 신나게 주먹을 휘둘렀잖아요.”이혁재는 남은 사람들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음흉한 술수를 들춰내기 귀찮았다.“당신들도 만약 정말로 유월영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게 맞다면, 결혼식을 방해해서 유월영이 아르사에게 버림받게 만드는 것이 당신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같이 행동한 거 아닌가요? 그러다가 아르사 회장이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을 테고 일이 잘못되자 이제 모든 책임을 연
연재준의 눈은 마치 고요한 바다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일어나 큰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귀국해.”연민철의 건강은 2년 전부터 이미 무너져 있었고 각종 약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그는 병원의 병실에 누워 평생 자랑으로 여겼던 “작품”인,아들 연재준의 이름만 힘없이 내뱉고 있었다.“재준아...재준아...”평소에는 적어도 두 명의 간병인과 두 명의 경호원이 그의 병실을 지키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한 쌍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여자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재준아...재준아...”여자는 병상 앞으로 걸어갔다. 연민철은 눈을 감은 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으며 습관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여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재준 씨가 아르사와의 협력관계를 잃었어요. 아드님 곧 귀국할 거니까 연 회장님 서두르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연민철의 깡마른 몸에 힘이 들어가더니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잃었다고?”“이 2년 동안, 해운 그룹도 해성 그룹에 많은 심혈을 쏟았겠죠? 해성이 망하면 해운도 큰 영향을 받을 거예요. 비록 아르사와의 협력을 잃었다고 해서 당장 해성과 해운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큰 타격을 받을 겁니다.”연민철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병이 깊어지면서 검게 변한 안색은 더욱 짙어졌으며 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그는 힘겹게 눈을 뜨고 눈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려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몸부림치다 겨우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너...너 도대체 누구야...”여자는 비웃듯 미소를 짓고,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약간 몸을 굽혔다. “연 회장님, 아 아버님이라 해야 하나? 예전에 저를 딸처럼 여긴다고 하지
연재준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몇 초 동안 그의 머릿속은 완전히 공백이었고 병실에서 의사들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이 들었다.“연 회장님! 연 회장님!”그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병실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를 보자마자 침울하고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연 회장님...회장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연재준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 병상 앞에 다가갔다. 연민철은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었고 흐릿한 눈동자에는 더 이상 어떤 빛도 남아 있지 않았다.해운 그룹을 평생 동안 이끌어온, 그룹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 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평온하게 떠나지 못했다.의사는 연재준이 자신을 책망할까 두려워, 그가 묻기도 전에 서둘러 설명했다.“어르신께서는 어제 오후부터 다발성 장기 부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여러 차례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어르신의 몸 상태가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연재준은 손을 뻗어 아버지의 눈을 감아준 다음 그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습니다.”“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의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마지막으로 위로를 한 후 병실을 떠났다.하정은과 조형욱은 병실에 들어와 지시를 기다렸다.연재준의 얼굴은 마치 죽은 호수처럼 평온하고 무표정했다.“본가 친척들과 그룹의 주주들에게 통보하고 삼촌들에게 장례를 주관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홍보부에 부고를 발표하라고 지시해요.”“네. 알겠습니다.”하정은과 조형욱이 대답했다.“여보! 여보!”병실 밖에서부터 윤미숙의 슬픔에 잠긴 울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연재준은 그런 그녀의 연극을 볼 생각이 없어서 병실을 나섰다.윤미숙은 병상 앞에 달려와서 울며불며 말했다.“여보, 당신이 내가 만든 장어죽을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집에 가서 죽을 끓이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가버리셨어요? 우리만 남겨두면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요...”연재준은 복도의 창가로 걸어갔다. 원래는
연재준이 말했다.“본가에 빈소를 마련하여 친척분들과 지인들의 조문을 받을 겁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발인하여 화장 후 연씨 가문의 묘지에 모실거에요.”“...”윤미숙이 물은 건 당연히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건 다 정해진 절차라서 상조회에서 모두 처리해 줄 거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네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거야. 그이가 떠난 후 연씨 가문의 재산을 어떻게 나눌지 명확히 하지 않았어...”그녀는 강조했다.“물론, 나도 그이가 막 떠났는데 당장 재산을 나누자는 게 아니야. 그러나 친지들이 오면 분명히 슬쩍 물어볼 것이고 우리가 말을 맞춰야지 그렇지 않으면 서로 다른 말을 하다가 우스운 꼴을 당할 수 있어서 그래.”연민철의 시신이 아직 굳지 않았는데 윤미숙은 이미 재산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입으로 재산을 당장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연재준은 손가락으로 반지를 돌리며 윤미숙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한쪽은 복도의 불빛 아래 다른 쪽은 밤의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아버지가 매달 당신들한테 주던 용돈, 제가 계속 보내드릴 거예요.”윤미숙이 바로 물었다.“그렇다면 은서랑 지현이는 어떻게 해?”연재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그 사람들은 누군가요?”그가 그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윤미숙은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은서는 네 친여동생이고 지현이는 네 친조카야. 그들도 연씨 가문 사람들인데 유산에 그들 몫이 없다는 게 말이 돼?”연재준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연씨 가문의 호적에 그들의 이름은 없어요.”“비록 이름이 없지만 그들은 너와 혈연관계가 있어. 법적으로 혈연관계가 있으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너 지금 그들의 상속권을 박탈할 셈이냐?”연재준과 윤미숙은 이미 2년 전부터 사이가 틀어졌고 그동안 연 회장이 살아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며 연재준과 겉치레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한 번도 그
연재준은 그녀와 협상할 생각도 그녀의 위협에도 반응 없이 그냥 떠났다!하정은이 윤미숙에게 조언했다.“부인, 신중하게 행동하시길 권합니다. 연 대표님은 이제 연씨 가문과 해운 그룹의 총책임자에요. 그분에게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에게도 이득이 없을 겁니다.”하정은은 잠시 멈칫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유 비서는 죽지 않았습니다.” 윤미숙은 믿기지 않는 듯 참지 못하고 외쳤다.“그럴 리가 없어!”하정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연재준을 따라갔다.윤미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하정은의 말을 곱씹었다.‘죽지 않았다니? 유월영이 죽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없지...내가 두 눈으로 직접 봤는데...’윤미숙의 심복이 그녀의 휘청거리는 몸을 부축하며 말했다.“사모님...”윤미숙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난 믿지 않아! 내가 직접 유월영의 시신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을 봤어. 그는 그냥 나를 겁주려고 하는 거야!”‘그래, 분명 그럴 거야. 그는 그저 나를 겁주려는 거야.’“하지만 하 비서의 말도 맞습니다. 연재준에게 문제가 생기면 해운 그룹은 혼란에 빠지고, 연씨 가문도 무너질 겁니다. 우리한테도 좋을 게 없어요.” 심복은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그러나 윤미숙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해운 그룹이 혼란스러워질수록 더 좋아. 그래야 내가 그 틈에 나와 내 딸의 몫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심복은 그녀가 연재준에게 손을 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윤미숙은 고개를 들어 복도의 CCTV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연재준,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보여주겠어!”조형욱은 병실과 복도의 CCTV 영상을 확보했다.그러나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은, 바로 연민철이 사망하기 반 시간 전 복도의 CCTV가 이유 없이 전원이 꺼지면서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는 것이다.병실의 CCTV도 마침 고장 나서 화면이 검게 변했지만 소리만은 녹음되어 있었다.조형욱은 차 안에서 영상을
비록 사진 몇 장과 짧은 동영상만 있을 뿐, 소리가 없어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로 그 모호함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병실 안에서 연 회장이 숨을 거두자마자 병실 밖에서는 장남과 계모가 권력을 두고 다투는 모습은 도덕적인 면이든 가십거리든 논란의 여지가 너무 많았다.게다가 연재준은 이미 이전에도 여러 차례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로 지금도 인기몰이 중이어서 짧은 시간 안에 이 사건은 전 국민적인 논란으로 번지게 되었다.다만 이번 사건에서는 연재준이 있는 데서 경호원이 윤미숙에게 손을 댔기 때문에 여론은 대부분 윤미숙의 편에 서게 되었고 연재준이 나약한 자를 괴롭힐 뿐만 아니라 대상이 하필이면 계모였다는 점을 비난했다.해운 그룹의 홍보팀은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즉시 돈을 내고 실시간 검색어에서 이 내용을 억누르려 했다.하지만 그 실시간 검색어의 배후에도 누군가가 조종하는 듯했으며 기사 하나를 막으면 또 다른 기사가 올라왔다. 해운 그룹에서 기사를 막을수록 오히려 네티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더 강한 역풍을 맞게 되었다.연재준은 그렇게 단번에 “재계의 귀공자”에서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전락했다.홍보팀은 더 이상 함부로 할 수 없어 급히 하정은에게 전화를 걸어 연재준의 지시를 구했다.연재준은 이미 본가의 빈소에 있었고 하정은이 전화를 받았다.“연 대표님의 뜻은...지금은 회장님의 장례가 최우선이니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신경 쓰지 말라고요??”“여론이 이렇게 악화되는 걸 그대로 두고만 있으라는 건가요?”이건 누가 봐도 윤미숙이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여론을 이용해 연재준을 압박하려는 것이 뻔히 보였다. 이렇게 가면 연재준의 명예가 실추될 뿐만 아니라 해운 그룹의 주가까지도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그들은 모두 직장을 잃게 될 것이었다. 홍보팀은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거리며 하정은에게 도움을 호소했다.그러나 하정은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연재준을 바라보았다. 연재준은 검은색 정장
윤미숙의 말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오늘은 윤민철이 사망한 지 삼 일째로 신주시의 풍습에 따라 오늘은 발인, 화장에 하관까지 진행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연민철 생전의 친척들과 지인들이 모두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기 위해 찾아왔고, 넓은 빈소에는 최소 20~3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윤미숙의 그 말을 듣고 몰려들었다.이런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미숙은 달랐다. 그녀는 연민철의 부인이었기에 그 말에 대한 신뢰성이 더 있었다.수많은 의심의 눈초리가 연재준에게 쏠렸지만 그는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사모님은 아마 연 회장이 병으로 돌아가셔서 마음이 많이 상하셨나 봐요.”윤영훈은 연재준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해성 그룹을 세운 후부터 그들은 이미 이익 공동체가 되었다.“연 대표님은 아내도 없는데 어떻게 '아내를 살해'했겠어요? 게다가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고요? 마치 그 영화, 아! 생각났네요, [나를 찾아줘]처럼요. 우리 연 대표님은 아주 인기 많은 미혼남인데 설령 결혼했어도 틀어지면 이혼하면 되지 굳이 살인까지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하정은이 침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사모님, 그런 말을 하시려면 증거를 가지고 하셔야 합니다.”연재준의 큰 삼촌이 나서서 말했다.“형수님, 오늘은 형님이 떠나시는 날입니다. 무슨 일이 있거든 재준이와 나중에 잘 이야기하시고 여기서 형님을 욕보이게 하지 마세요. 밖에서 우리 가문을 웃음거리로 만들 필요가 없잖아요.”작은삼촌도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다들 하던 일 하세요. 이건 모두 오해입니다, 오해.”그러나 윤미숙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당신들은 모두 연재준에게 의지해서 살려고 하니까 그가 당신들 앞에서 사람을 죽여도 그를 도와 시신을 숨겨주겠지! 하지만 나는 항상 저 아이의 눈치를 보고 살았어. 오늘에 꼭 모든 것을 밝히고 말 거야!”윤미숙은 오늘 모두 있는 데서 반드시 연재준을 끌어내리려 결심했다.연민철이 세상을 떠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