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처음 듣는 이름에 유월영은 어리둥절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현시우를 쳐다보았다. 현시우가 노 집사에게 물었다. “우리 어머니가 시키신 건가요?”노 집사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네, 도련님. 사모님께서 저를 보내셔서 젊은 도련님과 아씨를 레온 정원으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택에서는 환영 연회도 준비되어 있으며 모든 건 사모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겁니다. 원래는 김우희 사모님이 갑자기 방문하지 않았다면 사모님께서 직접 마중 오시려고 했습니다.”뒤에 있던 지남과 한세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사모님이 직접 왔더라면, 상황은 지금보다 더 과장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사모님은 정말...“우리 다니엘 저택으로 갑시다.”현시우는 차분하게 말했다. “어머니께 전해주세요. 월영이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이렇게 떠들썩 한 행사들은 그녀를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노 집사는 그 말을 듣고 유월영을 살펴보았다. 유월영의 얼굴은 여전히 많이 병약해 보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가까운 다니엘 저택으로 가서 먼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민서 아씨, 빨리 회복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유월영은 노 집사의 모든 게 조금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외국 사람들의 성격이 원래 감저표현이 풍부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히 한국 사람이었다...아마도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곳 사람들과 같아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유월영은 생각했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 집사는 크게 감동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나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유월영은 노 집사의 큰 예의를 감당하기 어려워 자기도 모르게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현시우는 이젠 습관이 됐다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항구의 계단 아래로 데려갔다.계단 아래에는 눈에 띄는 여러 대의 고급 승용차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들이 차 앞을 지나갈 때, 운전사들은 일
현시우가 유월영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그녀는 눈을 비비며 깨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시우 씨, 돌아왔구나.”현시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매일 이렇게 자면 머리 안 아파?”“그래도 졸려.”그녀는 이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며 마치 추위를 타는 작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렸다.현시우는 무심코 그녀의 뺨을 살짝 만졌다. 한세인은 그의 뒤에 서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문밖에 서 있는 한세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방 안에는 불을 켜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정원 가로등과 복도에서 흘러들어오는 전등의 빛만 있었고 반쯤 어둑한 조명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었다.현시우의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밖에 나가서 밥 먹자. 마르세유에 온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아직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잖아.”유월영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베개에 기대어 무기력하게 말했다. “그날 항구에서 저택까지 가면서 이미 봤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얘기지?” 유월영의 뜻을 알아챈 현시우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 집에서 먹자. 일어나.”유월영은 무언의 한숨을 내쉬고 현시우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저택의 집사와 가정부들은 모두 동양인이었고, 요리도 한식으로 다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유월영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 현시우가 먼저 말을 걸지 않을 때면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렇다고 어디가 이상하다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성격 자체가 원래 조용했으니까.식사가 끝난 후, 유월영은 다시 올라가려고 했고 그런 그녀를 현시우가 불러 세웠다. “또 자러 가는 거야?”유월영은 시계를 보았다. 밤 9시 반이었다. “이렇게 늦었는데, 안 자?”“밥 먹고 나서 바로 누우면 위가 아파. 이것도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이야.”현시우는 일어나며 말했다.“저택의 길을 알려줄 겸 소개할게. 식사 후 소화한다고 치고.”“난 별로 많이 먹지 않아서 소화할 필요도 없어. 좀 졸리니까 내일 길을 알아볼게.”현시우가 가정부에게 말했다.
유월영은 뭐라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도 자신의 마음속 감정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현시우는 그녀의 반응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월영아, 나를 위해 한 번만 더 춤을 춰줘. 내가 해외로 떠나기 전에 네가 마지막으로 췄던 그 춤 말이야.”유월영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돌렸지만, 사방이 거울이어서 고개를 돌려도 현시우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거부하고 있었다. 다만 현시우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춤에 대한 거부감이었다.유월영이 대답했다.“너무 오래돼서 나도 춤 다 잊어버렸어.”“너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내가 모를 것 같아?”“상처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고.”“상처는 배에서 이미 회복되었고, 의사도 확인했어.”“오늘 입은 옷도 춤추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다음에 할게.”“교복을 입고도 춤을 출 수 있었잖아. 지금은 왜 못해?”현시우는 그녀가 계속 거부하는 상황에서, 드물게도 계속해서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유월영은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현시우는 팔짱을 풀며 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아직도 내가 너를 떠난 것에 화가 나 있는 거야?”유월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현시우가 다시 말했다. “그럼 이번에 내가 너를 구한 걸로 과거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을까?”유월영은 반복해서 강조했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어.”현시우는 그녀가 여전히 화가 나서 춤을 추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그럼 이제 빚은 갚았으니까 나를 위해 춤을 춰줄 수 있겠지?”유월영은 그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고!’현시우는 미소를 지었다.“...”“음악 틀어줄까?”“...”현시우는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들었다.“...”유월영은 묵묵히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로 나무 바닥을 밟았다. 나무 바닥은 윤을 냈는지 매끄러워 춤을 추기에 맞춤했다.현시우는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고 잠시 생각한 후 차이콥스키의 ‘
꿈은 현실을 도파할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든 꿈속에서 다시 한번 광야에서의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었다.연재준이 쏜 그 화살에 맞은 상처는 이미 아물었고 동전 크기의 흉터만 남았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매번 뛰는 순간마다 그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고 매번 그녀에게 그 일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유월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녀의 눈가가 갑자기 붉어졌다. “...나도 모르겠어. 이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어.”어떻게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해야 하고 화살에 맞은 아픔을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풍비박산 난 집안과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연재준까지...너무 많은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고 그녀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왜 나는 항상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루장월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무 바닥은 차갑고 딱딱했으며, 찬 기운이 그녀의 사지로 스며들었다. 사방에 걸려있는 거울은 그녀의 미세하게 떨리는 몸을 비추었다. 그녀는 목소리마저 떨렸다. “그날 난 죽었어야 했어.”유월영은 본래 강인한 사람이었다. 당시 연재준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압박을 줬어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마치 빛바랜 옛날 사진처럼, 그녀는 온통 창백하고 생기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현시우도 그녀가 매우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수술 후에 그렇게 많은 날 동안 의식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의사들도 그녀에게 생존 의지가 없다고 말했다.만약 도망치고, 누에고치처럼 웅크리고 있다고 해서 정말로 그녀가 신주시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도 그녀가 계속 고치 안에 숨어 있도록 응원할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유월영은 낮에는 자는 척하고 밤에는 무릎을 껴안고 날이 밝을 때까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순간도 그 일들을 내려놓지 못했으며 그저 그렇게 밤낮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현시우는 유월영
그날 이후로 유월영의 정신은 비로소 예전과 같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생활 방식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식사도 정상적으로 했으며, 의사의 검사와 약물 치료에도 협조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묻지 못했던 일들도 이제는 용기 내 물어볼 수 있었다.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지남을 데려오라고 부탁했다. 그날 도대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었다.거실에서 가정부가 차 두 잔을 가져다주었다. 유월영과 현시우는 긴 소파에 앉아 있었고 지남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유월영의 질문에 지남은 먼저 현시우를 보았다. 현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남은 유월영에게 90도 인사를 하며 깊은 죄책감을 표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어머님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유월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고 싶어요.”지남은 고개를 끄덕였다.“연재준은 월영씨 어머님을 매우 엄격하게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병원을 벗어나기도 전에 발각되었죠.”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그들은 병원에 많은 사람을 데려가지 않았고, 총 네 명만 있었다. 경호원들이 이미 따라오자 지남은 즉시 이영화를 부하에게 맡겼다.“너는 사모님 모시고 가좌역으로 가. 거기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가 우선 저 사람들 따돌릴게.”“네!”그들은 비록 인원이 적었지만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호흡이 잘 맞았다. 이영화를 데리고 간 사람과 지남 일행은 간호사와 함께 경호원들을 따돌리려 했다. 그 간호사는 전에 유월영과 두 번 은밀히 접촉했던 간호사로, 이번 구출 작전에도 참여했다. 간호사는 이영화로 변장하여 지남과 같이 경호원들을 유인했다.병원은 시내 중심에 있어 지남 일행이나 경호원 모두 큰 소동을 일으켜 대중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추격전은 매우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사람이 많을 때는 빨리 걸었고, 사람이 적을 때는 급히 달렸다. 그렇게 그들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움직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지남 일행은 병원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뛰
유월영은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영화는 항상 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했다. 이영화는 자신이 죽으면 유월영이 자신을 탓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연재준의 함정에 빠져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게 했다고 생각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영화는 마지막 유언으로 딸을 탓하지 않는다고,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현시우는 손수건을 건넸지만,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번 한 번만 울고, 다음번에 울 때는 반드시 복수한 그날이 될 것이라고 결심했다.“엄마가 다른 말은 없었나요?”유월영은 쉰 목소리로 물었다.지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께서 월영 씨가 약속했던 일, 신영을 꼭 찾아야 한다고 하셨어요.”유신영, 유씨 집안의 셋째 딸이었다.현시우는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김이 그의 눈 앞을 가렸다.“나도 이미 사람을 보내서 찾는 중이야. 하지만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실종되어서 아직 단서를 찾지 못했어.”“부모님 말씀으로는 동생이 대학에 다니던 중 한 청년을 만나 그와 함께 가출했다고 했어요. 그 이후로 동생은 한 번도 집에 연락한 적이 없어요.”유월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혹시 동생이 그 남자에게 속은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한 번도 집에 연락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그럴 가능성도 있어. 지남, 그쪽으로 조사해 봐.”현시우는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연재준도 신영을 찾고 있었어.”“아마도 장부가 신영이한테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유월영은 순간 멈칫하다 이내 뭔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신영은 정말로 얌전하고 말도 잘 들었어요. 동생은 가출할 사람이 아니에요.”현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집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출'했으니, 아마도 양아버지가 위험을 감지하고 동생에게 장부를 가지고 떠나라고 했을 거야. 너의 양어머니가 죽기 전에 동생을 찾으라고 한 것도 사실
‘현시우가 말해줄 의향이 없는 것 같으니 물어보지 말자.’‘아니야, 지금 가서 분명히 물어보자.’유월영은 잠깐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는 자신이든 그에 관한 일이든 이제는 더 이상 진실을 모른 채 속고 싶지 않아 바로 따라 올라갔다.두 사람은 현시우의 방으로 들어갔고, 방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유월영이 노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밀고 들어가자 김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행히 아직 완전한 여름이 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상처가 곪았어봐, 대표님의 어린 색시가 얼마나 놀라겠어.”현시우는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헛소리 하지 말지.”“아니야? 현씨 집안과 고씨 집안은 대대로 친분이 있었지, 게다가 해양그룹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씨 집안은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줬어. 이런 인연에 고씨 집안이 그런 일만 겪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이미 잘 어울리는 부부가 되고도 남았을 거야.”연재준의 성격이 ‘냉정’하다면 현시우의 성격은 ‘차분’이었다. 그는 많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차가운 거리감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신분과 지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함부로 농담하지 않았다.김 의사는 그와 이렇게 농담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좋아 보였다. 현시우는 문을 등지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당신은 의사가 아니라 작가가 돼야 했었어.”“내 헛소리를 듣기 싫으면, 자신을 좀 더 소중히 다뤄.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 말도 타고 활쏘기까지, 그러다 상처가 다시 터진다고.”현시우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우연히 머리를 들어 반대편 캐비닛의 유리에 비친 유월영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월영아.”현시우의 뒤에 서 있던 김 의사도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비키자 유월영은 그제야 현시우의 등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등에 있는 상처를 보고 유월영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의사를 부른 이유가 그가 다쳤기 때문이었다. 매끈한 허리 위로 넓은 어깨와 팔은
유월영은 의료용 면봉에 연고를 덜어 상처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피가 고인 안쪽으로 발랐다. 그녀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거랑은 다르잖아.”현시우는 유월영의 손길이 깃털처럼 가볍게 닿아 오히려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는 유리에 비친 진지한 얼굴을 보면서 더는 묻지 않았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그녀의 뜻은 아마도 자신의 상처와 그의 상처는 다르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심지어 유산 수술도 스스로 사인하고 들어갔으니, 당연히 이런 ‘작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동안 혼자서 감당한 일이 생각나자 그의 이마가 미세하게 찡그러졌다.유월영은 그가 상처 때문에 아픈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상처에 살짝 입김을 불어 넣었다. 현시우는 간지러움을 참으며 미소 지었다. “난 어린애가 아니야.”유월영은 눈을 깜빡이며 그의 가슴을 보았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상처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의 가슴에는 손톱 크기의 둥근 흉터가 있었는데 이런 흉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총상뿐이었다.그녀는 놀라며 물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거야?”현시우는 한 번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레온그룹의 상속권을 얻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유월영은 처음으로 실제 총상을 보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 흉터를 만졌다. 상처는 이미 아물었지만 피부는 원래의 매끄러움을 잃고 거칠어졌으며 그녀는 손끝에서 그 거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총알이 들어갈 때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건 오른쪽 가슴을 맞춘 치명적인 부위였고,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이 상처를 보자 문득 현시우가 왜 자신을 외국에 데려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상속권을 놓고 싸워야 했고, 그의 주변은 더욱 위험할 수도 있었다. 유월영은 예전에는 어떤 일이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다고 천진하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해양그룹의 멸망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