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비운 연회에서 그녀는 몸을 돌리다 그만 한 신사와 부딪친 적이 있었다. 재빨리 반응하긴 했지만 이미 상대의 소매를 젖게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는 성격이 정말 유했고 전혀 그녀의 부주의함을 나무라지 않았었다.셔츠 값을 갚겠다던 그녀를 몇번이나 거절하던 그는 루장월의 고집에 결국 할 수없이 돈을 받았다.돈을 받았으니 깨끗이 정리됐다 생각한 루장월은 이 일을 더이상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가 말을 꺼내니 다시 그 날 생각이 났다.루장월은 그제야 심 교수를 자세히 들여다 봤다.그는 젊고 예쁘장한 외모에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이 이었다, 그렇다고 병적으로 창백하게 흰 건 아닌.금색 뿔테 안경 뒤로 보이는 까맣고 긴 눈썹에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은 마치 손을 뻗어 시냇물을 어루만질때의 그 차갑지만 뼈 시리지 않은, 편안하고 쾌적한 느낌을 방불케 했다.더 아래로 내려가 오똑 솟은 콧대에 연한 입술, 그리고 곧게 뻗은 턱선은 따뜻하고 무해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루장월은 또 그의 귀에서 반짝이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다시 보니 그제야 안경줄임을 알았다.사실 안경줄은 아주 “매혹”적이다.지적이면서도 사람을 끌리게 만듬을 형용할 만한 단어는 아마 “잘생긴 변태“밖에 없지 않을까.루장월은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능하다, 그래봤자 3초 5초 정도지만. 그리고는 자연스레 악수를 건네며 말한다.”안녕하세요, 심 교수님.“그는 악수를 받아 주지 않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사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학생들 따라 심 교수라고 부르는거 아닌가요, 그래도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죠——저는 서청 심씨 일가의 넷째 심소흠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루장월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단 한번도 그가 심씨 일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심씨 일가가 서청에서의 지위는 문씨 일가의 신청에서의 지위와 같이 유일무이한 것이었다.그녀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심씨 일가의 도련님이 대학교 교수님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실례가 많았습니
심소흠은 겨울 쿨톤이 틀림없다. 거기에 예쁘장한 이목구비까지 더하니 반달눈을 하고 웃을때면 마치 학생 시절 덕지체 어느 하나 뒤처지는데 없는, 그 누가 물어보는 문제라도 성심성의껏 대답해 줄것 같은 워너비 선배같아 보였다.음, 심소흠은 학생 때 아마 이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선생님이 됐겠지.“……제 카톡 닉네임 때문에 교수님 웃으신거예요?”그개 아니라면 그는 왜 갑자기 이렇게 웃고 있는걸까?근데 루장월의 닉네임은 꽤나 정상적인 닉내임이었다. “Re.”, re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영어 접두사로 “다시”와 “또 한번”의 뜻을 갖고 있다. 문연주와 헤어지고 나서 고쳐 쓴거니 다시 시작, 다시 새출발이라는 뜻이었다.심소흠이 주먹으로 입을 막아 가볍개 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아까 휴대폰 안 가지고 와서 카톡 추가 못한다던 사람이 누구였나 해서요.”“……”루장월이 무념무상으로 답한다.“심 교수님 설마 제가 어린 친구 거절하려고 그런거 모르시는건 아니시죠?”심소흠이 말했다.“어린 친구라뇨, 아가씨 그 학생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요.””세 살이면 세대차이도 크죠.“루장월이 곱바로 말했다.심소흠은 눈썹을 으쓱하며 말한다.”그럼 안 되겠네요. 저희는 세대차이가 엄청나서요.“루장월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웃어버리고 만다.식사를 끝마치고 심소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산책이나 하자고 했다. 루장월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한참을 걷던 심소흠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를 바라본다.”아가씨 최근에 다리 다치지 않으셨어요?“루장월이 놀라서 묻는다.”그게 보이세요?“심소흠이 말한다.”제 둘째 형이 중의여서 한동안 배운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조금은 알고 있는데 걸음걸이가 조금 부자연스럽긴 하네요.“”그럼요. 보름 전에 무거운 물건에 깔려서 다쳤거든요. 인대뼈는 다치지 않았는데 일주일이 넘어서야 땅 밟고 걸을수 있었어요. 지금은 큰 통증은 없지만 아직도 어딘가 이상하긴 하네요.“”저도
루장월은 잠시 넋이 나갔다.심소흠은 여자애의 손을 잡더니 본인 앞으로 데려와 말했다.“까불지 마, 친구랑 있는 거 안 보여? 남들이 보면 웃어.“여자애가 입을 삐죽 내밀고 원망한다.”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그들의 친밀도를 보니 일반적인 친구관계는 아닌 것 같다.그렇다면 혹시……여자 친구?루장월이 금방 이렇게 추측을 하고 나니 심소흠이 말했다.”우리 일은 나중에 다시 말해.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고 먼저 루 아가씨한테 인사부터 드려. 아가씨 여긴 다섯째 여동생 심묘묘에요.“여동생이었구나.루장월과 여자애의 눈이 동시에 마주친다. 둘은 모두 넋이 나갔고 심묘묘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당신이군요!“”……“루장월도 그녀를 안다.전에 문연주를 좋아했던 그녀는 열렬히 그를 쫓아다니면서 꽃이며, 커피 공세를 펼쳤다. 심지어는 회사 문 앞에서 그를 막아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 문연주 곁엔 이미 루장월이 있었기에 새로운 관계 발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단칼에 거절해벌렸다.마침 해외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었던 문연주는 그녀를 데리고 출국해 한 달 내내 업무를 봤다. 한 달 뒤 그들이 다시 귀국했을땐 여자애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그렇다면 이 둘의 교집합은 뭘까. 그녀가 문연주에게 처참히 거절당한 그 날, 대성통곡하며 비를 맞는 걸 보고 루장월은 그녀를 데리고 가 새 옷을 사입히고 학교에까지 데려다 줬었다.하지만.지금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더 중요한 건——이 여자애가 바로 그런 깔끔하고 청순한 외모에, 활발한 것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문연주의 요구에 걸맞았다.더욱 공교로운 건, 이어지는 대화에서 루장월은 여자애가 이미 졸업을 했고 취업 준비 중임을 알게 됐다. 오빠를 위해 조교 일을 하려고 했지만 심소흠에 의해 거절당하고 말았다.루장월이 잠시 고민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심 아가씨 다른 업종 알아보실 생각은 없으세요?”……루장월은 심 아가씨의 이력서를 들고 회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심호흠이 차를 끌고 그녀
심소흠은 앞으로 조금 이동해 그녀를 비운으로 데려다 줬다. 루장월은 손에 군만두를 들고 차에서 내리고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잘가라는 손인사를 해보였다.한편 비운에 문연주를 찾아온 수옥이 때마침 이 장면을 보게 됐다. 그는 눈썹을 들썩거리더니 한발 앞서 회사로 들어갔다. 그가 문연주를 찾아오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통보도 필요없이 바로 올라가면 그뿐인 것이다.그가 노크를 한다문연주가 방문 넘어 대답한다.”들어오세요.“수옥이 문을 밀고 들어간다.문연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쳐다본다.”아무데나 앉아.“그는 아직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수옥도 개의치 않고 그의 커피머신으로 스스로 커피를 내리고는 한 모금 마신 뒤 생각없이 툭 내뱉는다.“루비서 요즘 잘나가나봐. 금방까진 소운이더니 이젠 심소흠이네——방금 심소흠이 데려다 주는 거 내가 봤거든, 그 둘은 언제부터 접점이 있었지?“문연주가 고개를 들더니 미간을 찌푸린다.수옥이 숨은 뜻이 있는 듯한 묘한 말을 꺼낸다.“근데 루비서가 확실히 심소흠 취향이긴 하지.”심소흠은 겉보기엔 모범적인 군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취향은 아주 “저급“했다. 잘록한 허리를 좋아하는 그에게 루장월의 그 몸매는 완벽히 적합했다.문연주도 홀짝 커피를 마셨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때문에 그의 얼굴도 따라서 차가워졌다.수옥이 느릿느릿 말한다.”많이들 루장월을 갖고 싶어한다고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넌 여태 믿지 않았지만.“바로 이 타이밍에 루장월이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문연주는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한다.”들어오세요.“사무실에 들어온 루장월이 수옥이 있는 걸 보고 정중히 인사를 드린다.”수 사장님.“수옥이 고개를 까딱 흔든다.루장월은 문연주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문 사장님. 제가 사장님 요구에 부합하는 어울리는 지원자를 찾았습니다. 여기 이력서 한번 보세요.“그러나 문연주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루장월은 업무시 늘 정장을 입고 다닌다. 흰 셔츠와 짧은 스커트, 셔츠는 치마 속에 가지런히
여자에 관한 말은 한가할때나 심심함을 달래려 두어마디 주고 받는거지, 그들의 핵심은 아직 업무 있었다. 수옥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오늘 그를 찾아온 진짜 업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심취해 말하는 사이 오후가 훌쩍 지나갔다.퇴근 시간이 되고 밥 먹을 채비를 한 두 사람은 금방 사무실에서 나와 아까 그 비서가 물 반컵을 루장월에게 뿌리는 걸 목격했다.어찌나 급작스러웠는지 루장월은 피할새도 없었고 물은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정교하게 뻗은 아래턱까지 내려와 한방울 한방울 옷 위로 떨어졌다.비서는 컵을 버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는 몸을 돌려 도망가 버렸다. 모양새를 보니 울었던 것 같다.“……”루장월은 담담란 얼굴로 사무실애 있는 다른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종이 몇 장을 뽑아 얼굴을 닦았다.문연주에겐 이미 알맞는 비서 후보가 생겼으니 그녀는 자연히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고 루장월은 인사부더러 그녀에게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하게 했다.비서는 단번에 눈치를 챘다. 그녀는 그들에게 아니——정확히말하면 루장월에게 차였다는 걸.진 사장도 배신하고 그들에게까지 차이고 나니 수치심이 분노로 뒤바뀐 그녀가 앞뒤 생각도 안하고 비로 루장월에게 차가운 물을 퍼부었던 것이다.하지만 루장월은 화가 난다기 보단 귀찮은 마음이 더 컸다.정말 너무 귀찮다.문연주가 법을 들먹이며 그녀를 입박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지금쯤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텐데, 이렇게 돌아와 그의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또 그를 위해 “미인 고르기”에 쓸데없는 “도화”들까지 처리해야 하니 말이다.루장월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탈의실로 가 셔츠부터 갈아입으려 했다.뒤 도는 순간 문연주가 무표정으로 수옥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는게 보인다.루장월이 잠시 뜸알 들이더니 보고를 드리며 말했다.“사장님, 비서에 관한 일은 제가 이미 처리했습니다.”문연주가 매정하게 지적질을 하며 말한다.“형편없게 처리했지. 너의 능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문연주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더니 서늘한 얼굴을 하곤 양복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던지다 싶이 걸쳐주며 말한다.“자기절로 옷 사서 바꿔입어.“루장월은 외투를 걸치지 않았고 옷은 그렇게 바닥에 떨어졌다.문연주의 안색이 한층 더 서늘해지더니 말한다.“너 지금 나한테 화 내는거야?“수옥은 참지 못하고 콧등을 만졌다. 세상에나……루장월이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휴게실에 바꿔입을 옷 있다고 했잖아요. 사장님만 아니었으면 돈 들여서 셔츠 살 일도 없죠.““너 셔츠 하나 살 돈도 없어?”문연주가 가죽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똑같이 그녀에게 던져줬지만 그녀가 받지 않아 또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신경전을 벌였다.결국엔 보다 못한 수옥이 땅에 떨어진 외투를 집어 먼지를 털어주곤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채 루장월의 어깨에 걸쳐주며 말했다.“맞은켠에 백화점 있는데 여성복도 팔거예요. 날도 추운데 루비서 하나 골라서 바꿔입어요,감기 걸리면 안되니까.““카드는 맘대로 긁어, 얼마정도 사도 괜찮으니까……우린 먼저 “송학거”에 가 있을게. 옷 다 사면 바로 건너 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문연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루장월을 한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수옥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따라갔다.루장월은 단 일초도 참지 못하고 외투를 벗어던져 손에 꽉 움켜쥔다.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말이다.이 남자가 진짜!장장 3분동안을 화를 삭힌 루장월은 겨우 진정하고 맞은 켠 백화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여기서는 수옥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 “너는 어? 그렇게 이유도 없이 루비서 못살게 굴어야겠냐?“그의 여자가 남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하는데 이건 순전히 본인 앞길을 막는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문연주는 그저 그녀가 뭘 하든 다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수옥이 따끔하게 말한다.“너도 꼭 후회할 날이 있을거야.”……루장월은 백화점으로 들어가 브랜드를 고르지도 않고 아무 옷이나 고른 뒤 치수를 알려줬다.“
이 식사 자리에서 루장월은 딱히 끼어들어 할 말이 없었기에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심묘묘가 문연주를 붙잡고 이것 저것 묻는 사이 루장월은 벌써 죽순마 삼계탕,게장 두마리,새우 튀김 세 개에 푸아그라 절편,계피 생선,배추 절임까지 해치우고 있었다.수옥은 속으로 이 여자 식욕이 엄청나다며 감탄을 하고 있다.문연주 역시 처음으로 그녀가 이렇게 잘 먹는걸 본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며칠 굶긴 줄 알 정도로 집중해 먹고 있는 그녀는 다른 사람은 거들꺼 보지도 않는다.그가 별안간 입을 연다.“너 다 먹었어?“고개를 든 루장월은 그가 자신을 보며 묻는걸 알곤 레몬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사장님 무슨 지시 사항이라도?“문연주가 말한다.”심 아가씨 집에 데려다 드려.“루장월은 차가 없는데 어떻게 데려가라는 건가?하지만 반박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이 기회를 틈 타 빠져나가기 위해 얼른 대답했다.”알겠어요.“심묘묘도 그녀와 함깨 가길 원했는지 백을 들고 몸을 일으킨다.”그럼 연주 오빠, 저희 내일부터 회사에서 봬요.“문연주가 고개를 끄덕인다.심묘묘가 루장월의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른다.“장월 언니~”두 사람이 식당을 나가는 걸 본 수옥은 문연주를 어이없어 한다. 심묘묘를 우연히 만난건데 어떻게 그의 썸 상대를 루장월더러 집에 데려다주게 할 생각을 할 수 있지?그가 말한다.“네가 루비서더러 데려다 주라고 하면 또 심소흠이랑 마주칠거 아니야?”문연주가 미간을 찌푸린다.루장월과 심묘묘는 길가에서 콜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묘묘는 어린 애처럼 친하지도 않은데 친근하게 손을 잡고는 상반신을 완전히 그녀의 어깨에 기댄채 끈적끈적하게 말했다.“사장님 너무 잘 생기셨어요~”“전 대학교 4년동안 한번도 이렇게 잘 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자 연예인들 보다도 훨씬 잘 생겼어요! 그리고 일종의 매력같은 게 있는데 뭐랄까. 장월 언니는 알죠,일종의 그런……그런……뭐라고 해야 하지, 아무튼 전 3년이 지나도 잊혀
심묘묘가 흥분에 겨워 말했다.“진짜요? 좋아요!”그녀는 폴짝폴짝 뛰며 날 듯이 기뻐했다. “장월 언니, 그럼 전 언니 안 따라갈게요. 저희 내일 회사에서 봐요~“루장월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문연주는 바로 가버린다.루장월은 길가에서 계속 콜택시를 기다리며 속으론 언제부터 심묘묘와 자신이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됐는지, 문연주와는 이미 연인사이가 된건지 담담하게 생각을 했다.“문연주 여자 친구“라는 지위는 원래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구나.백유도 되고 심묘묘도 되고.다시 돌이켜보니 3년을 따라다니고도 아무런 칭호 하나 없었던 건 오직 그녀 뿐이다.흥.그저 루장월은 문연주의 “먹성“이 그리 좋은 줄 몰랐을 뿐이었다.이튿날, 그녀가 회사에 도착했을때 비서실엔 심묘묘 뿐만 아니라 그 비서도 함께 있었다.비서가 우쭐거리며 그녀 앞으로 다가와선 득의양양하게 말한다.“사장님이 저더러 돌아오시라고 한거예요. 제가 회사에 세운 공이 있으니 절 해고하지 않으시겠다고요. 그 누구더러 잘난 체 하지 말라네요.“루장월은 속으로 몇번이고 눈쌀을 찌푸렸지만 겉으론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어제 이미 그녀가 이해관계에 대해 명명백백히 설명했고 문연주도 이에 동의해서 다시 심묘묘를 찾은건데 왜 비서더러 더 남아있으라고 하는거지?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비서의 눈엔 오만 뿐만 아니라 미움도 함께 공존해 있다는 것이었다.루장월은 서류를 제출하러 문연주의 사무실로 가면서 이참에 그에게도 물었다.“사장님 어제 분명 저한테 그 비서 남기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문연주가 도리어 반박한다.“너 비서한테 내가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 했다며? 네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럼 나도 자연히 남겨야지.”“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앞전 차 안에서 저한테 그 비서만 데려오면 진 사장님께 한 발 양보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건 흥미를 느끼는 게 아니면 뭔가요?“따져보면 어제 루장월이 덮어썼던 물 반 컵과 비서의 살기는 그녀를 향하는 게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