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콥터의 거대한 날개에서 불어온 바람은 잔디밭을 거의 평평하게 쓸어 버렸다. 현시우의 우산은 일찌감치 날아갔고 몸에 걸친 정장은 바람에 펄럭이었다.현시우는 유월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월영아, 정말 나랑 같이 가지 않으래?”불과 몇 초의 순간, 유월영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야 되나? 가지 말아야 하나? 연재준과 현시우, 누가 더 수상할까? 누구를 믿어야 하지?’‘남아서 계속 조사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현시우를 따라가면 진실을 알 수 있을까?’그녀는 연재준이 자신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소년 시절의 현시우가 그녀의 곁을 지켜주던 걸 떠올렸다. 혼인신고 하던 날 연재준의 ‘보고 싶었어’라고 속삭이던 것을 떠올렸고, 자신이 아무리 애원해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던 현시우의 뒷모습이 떠올랐다...유월영은 숨이 가빠왔고 빗물이 코안으로 들어가 그녀는 심지어 물에 빠져 익사하는 듯한 공포감까지 밀려왔다. 헬리콥터의 문이 열리고 한세인이 몸을 숙인 채 소리 질렀다.“대표님!”지남이 급하게 외쳤다.“사다리 내려요!”한세인은 바로 헬리콥터에서 사다리를 내던지자 바로 그들 앞에 떨어졌다. “빨리 올라와요! 빨리!”연재준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수십 미터의 거리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월영아!”유월영은 자기도 모르게 연재준을 향해 바라보았다. 연재준의 차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치 유리창 사이로 연재준의 눈과 마주친 듯했었다. 그녀는 방금 연재준과 재결합을 했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방금 연재준과 혼인신고 하러 갔고 아직 부부의 신분으로 함께 지내기 시작하지도 않았다...현시우도 그녀에게 외쳤다.“월영아!”유월영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현시우를 쳐다보면서 물었다.“내가 당신과 함께 가면 나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줄 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걸.”현시우의 목울대가 떨렸다.“그럴게.”유월영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그 계단을 잡고 올라갔다. 그 모
2, 3초 후 연재준은 밟고 있던 지남의 목을 놓아주고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그는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노현재가 있으니 그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몇 시간 후에도 그의 입이 지금처럼 굳게 닫혀있을지 한번 보자고.”노현재가 부하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은 이내 지남의 두 다리를 묶고 입에 테이프를 붙인 채 트렁크에 던져 넣었다. 노현재는 부하가 건네준 수건을 받아 얼굴과 머리를 대충 닦고 나서 마이바흐에 올라탔다. “재준이 형, 이제 어떻게 하려고?”연재준의 눈꺼풀에 투명한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번뜩였다. 그는 창밖의 날씨를 바라보았다. 번개와 천둥이 번갈아 치는 이런 날씨는 가시거리가 매우 낮아 원래대로면 헬리콥터가 이동할 수 없었다.하지만 현시우는 신주시에 1분만 더 머물러도 연재준에게 잡힐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라면 이륙을 강행할 가능성이 컸다. 연재준이 입을 열었다.“하 비서, 지욱에게 전화 해줘. 그가 항공부서에 아는 사람 있으니까 지금 바로 연락해서 현시우의 모든 전세기 운항을 금지하라고 해.”“알겠습니다!”“그리고 신주 병원에 사람 보내서 유월영 어머니 병실을 지키라고 해. 우선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아무도 데려가지 못하게 지켜. 의사, 간호사만 만나게 하고, 정상적인 치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해.”“알겠습니다!”연재준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말했다.“노현재.”“재준이 형, 듣고 있어.”“넌 가서 현 회장을 감시하고 있어. 특히 그의 통화를 감청하고 만약 현시우가 연락한다면 바로 먼저 알려줘.”연재준은 불과 몇 분 만에 그물을 촘촘히 짰다.“현시우, 당신은 빠져나갈 수 없어!”노현재는 아랫사람에게 분부하며 그를 위로했다.“재준이 형, 너무 걱정하지 마. 유 비서가 어머니라면 끔찍하니까 우리 손에 있는 한 꼭 다시 돌아올 거야.”연재준이 무표정하게 답했다.“당연히 돌아올거야. 그녀는 내 아내라고,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디로
헬리콥터는 내부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 유월영은 시트에 웅크리고 앉아 추위에 계속 재채기했다.현시우는 담요를 가져와 유월영의 몸에 둘러주었다.“여기 갈아입을 옷이 없네. 거의 다 오니까 조금만 참아.”유월영은 고개를 들어 현시우를 쳐다봤다. 빗물에 씻긴 뺨은 티 없이 깨끗했고 하얀피부가 투명하게 빛났다.“우리 그냥 이렇게 가버려도 돼? 당신 부하를 구하러 가야 되지 않아?”현시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낮게 말했다.“연재준은 그를 어떻게 하지 않을 거야, 우리 아버지도 가서 얘기할 거고. 지남도 충분히 스스로 도망칠 수 있어.”유월영은 추위에 신경이 얼어붙는 듯 해서 담요를 더욱더 끌어안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지만 밤이 되어 신주시는 어두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유월영은 그가 말한 ‘도착지’가 건물인 줄 알았는데 도착해보니 부둣가였다. 그들은 헬리콥터에서 개인 크루즈선으로 갈아탔다.폭우로 인해 바다에는 큰바람이 불고 파도가 출렁이었다. 파도가 기슭을 때려왔지만 부두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배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현시우는 유월영을 부축하여 요트에 태우고 선실로 들어서자 그는 즉시 그녀의 젖은 담요를 풀었다. 유월영은 선실을 둘러보았다. 이 크루즈선은 현 회장이 연회를 열 때 사용했던 크루즈보다 조금 더 큰 듯했다. “원래는 개인 전세기로 갈아타고 신주시를 떠나는 게 더 빠른데, 방금 비행 금지령을 받았어. 날씨가 좋지 않아 모든 노선이 운항이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연재준이 먼저 손을 쓴 것 같아. 그래서 지금 배를 타고 떠날 수밖에 없어. 먼저 비서보고 샤워할 수 있게 뜨거운 물 준비하라고 할게.”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씨는 사실 바다로 나가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현시우는 그래도 출발시켰다. 하루 더 늦게 출발하면 연재준이 수로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 배까지 출항 못 하게 할까 봐 그런 거란걸 유월영은 알고 있었다.유월영은 방에서 뜨거운 물로 재빨리 샤워하고 그들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깨
유월영은 수석비서관답게 순간적으로 그의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내가 뭘 아는지는 보고 얘기하겠다는 심산이야?”그녀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아까 약속했잖아, 모든 걸 빠짐없이 내게 말하겠다고.”그녀는 편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깐깐한 유월영을 보면 현시우는 미소 짓다가 꼬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었어. 다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관련된 것도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거야. 의문을 끌어낸 거지.”유월영은 생각하다가 먼저 이승연이 알아낸 것을 물었다.“아버지가 협박당한 채 병원을 나왔어. 아버지를 납치한 사람이 별장으로 데려간 것 같은데 아직 찾지 못했어, 그 별장이 누구 소유야?”“윤영훈이라는 사람.”현시우가 대답했다.유월영이 생각밖이라는 듯 흠칫 다.“윤영훈이라고?”현시우는 유리 주전자를 들어 와인 한 잔을 더 따랐다. 주전자가 줄곧 인덕션 위에서 끓고 있어, 따라낸 와인에서 김이 났다.“송초의 윤영훈, 그 사람이 당신을 쫓아다녔지?”“이 일이 그 사람과 관계가 있어?”유월영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아예 상관이 없던 인물이었다.요트는 평지를 밟는 것과 같이 해수면을 부드럽게 항해하고 있었으며, 현시우의 목소리도 평화로웠다. “당연하지, 그가 직접 당신 양아버지를 납치해서 병원을 떠난거야.”“...”유월영은 갑자기 이승연 오후에 전화해서 못다 한 말이 무엇인지 알 듯했다. 그녀가 CCTV에서 본 아는 사람이 아버지와 10분 차이로 병원을 떠났다고 했었다. 그 아는 사람은 바로 윤영훈이었다.유월영의 눈이 반짝였다. 이미 그녀 곁에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윤영훈은 왜지?”현시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해양그룹이 무너지고 이어서 현재의 4대 재벌그룹이 생겼어. 해운그룹 연씨 가문,SK그룹 신씨가문, 윤씨 가문과 오씨 가문. 이들이 해양그룹의 시장을 나눠 가졌지.”유월영이
유월영은 진짜로 떠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현시우를 선택했고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그렇게 그를 떠나갔다.그가 그녀의 손에 끼워준 결혼반지, 같이 했던 혼인신고, 그리고 그들이 정식으로 부부가 된 일들은 정말로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지 연재준은 의문이 들었다. ‘그래. 그녀에겐 정말 아무 의미가 없었는지도 몰라.”문이 굳게 닫혀있던 욕실에는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처음으로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샤워기를 끄고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물줄기가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 내려왔다. 연재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현시우가 있는 한, 어떤 선택 문제든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로 향했다.고등학교 시절에도, 분명 그와 현시우의 인기는 막상막하였지만 그녀의 눈은 영원히 현시우만을 향했다. 그녀는 수없이 그의 앞을 곧장 가로질러 자신의 뒤에 있던 현시우에게 달려갔으며 한 번도 그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그녀는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수 없는 듯했다. 그래서 그가 귀국하자마자, 그녀는 자신과 방금 결혼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렇게 현시우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유월영은 그를 버린 채 그렇게 가버렸다. 연재준은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가운을 입은 채 나와서 와인 냉장고를 열어 와인 한 병을 꺼냈다. 그는 브랜드와 연도를 보지 않고 바로 열어 유리잔에 반 컵을 따르고 얼음을 몇 개 넣었다.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불도 켜지지 않은 거실에 혼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그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강수영이 이였다. 그는 받지 않아도 알았다. 그녀는 분명 그에게 유월영과의 진행 상황을 물어보려고 전화했을 것이다.‘무슨 진행 상황? 내 아내가 다른 남자랑 도망간 거?’연재준은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윤영훈이었다. 연재준은 전화를 받아서 스피커를 켠 후 책상 위로 던져놓았다.윤영훈은 인사도 건너
유월영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자기 심장에 가져다 댔다.‘이게 혈연 간의 유대인 건가?’그녀는 분명히 고해양을 만나 본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그의 자료를 찾을 때 그의 선명한 사진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현시우의 이 세 마디 묘사를 듣자니 그녀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바늘로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어렴풋이 그녀는 정글 수사자를 보는 것 같았다. 사자는 실수로 사냥꾼의 함정에 빠져 최선을 다해 기어 나갔지만, 온몸의 부상으로 전투력이 점차 떨어졌고 곧 그의 영토를 노리는 동료들에게 먹잇감으로 보였다.그들은 연합하여 그를 토벌하고, 서슴없이 가장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서 안팎으로 같이 그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어 늘어졌다. 그리고 순리대로 그의 영토를 강점하여 그의 재산을 나누어 가졌으며 수사자는 그렇게 구석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갔을 것이다. 그의 몸은 썩고 백골이 되어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유월영은 목이 메어 더는 음식이 내려가지 않았으며 기억 속의 연 회장의 위엄있고 인자하던 모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흉악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뭔가 솟구쳐 올랐다. “만약 모함을 당한 거라면, 고해양은 왜 상소하지 않은 거야?”현시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 사냥은 빈틈없이 이루어져서 판을 깰 방법이 전혀 없었어. 그가 끝까지 저항한다고 해서 반드시 포위를 뚫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 게다가 그의 가족이 밖에 있으니 그는 가족들이 복수를 당할까 봐 두려워 결국 모든 죄를 인정하고 혼자 죽음으로서 이 일에 마침표를 찍은 거야.”가족, 가족이라...그가 말한 가족은 아마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유월영은 25년을 살면서, 그녀의 친아버지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죽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그녀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계속 물었다.“그러면 이제 끝난 거잖아. 그런데 왜 우리 양아버지를 또 찾아온 거지?”현시우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감싸고 있자,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온도를 높여주고 담요를 꺼내 그녀의
현시우는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유월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날 곁에서 지켜준다는 사람...또 당신이지?”유현석도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은연중에 말했었다. 그녀는 아주 운이 좋은 아이라서 하늘이 그녀를 돕는다고 했으며 매번 위험에 빠졌을 때마다 전화위복하는 재능이 있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말했었다. 그때 그녀는 유현석이 자신의 무책임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주변에 진짜로 누군가가 있는 듯했다...유월영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현시우밖에 없었다. 그는 ‘전과’가 있었으며 전부터 지남을 보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찍게 했었다. 하지만 현시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나 아니야.”유월영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으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당신이 아니면, 누구야?”“아마 고해양의 다른 측근들일 수도 있어.”현시우는 와인잔을 들어 뱅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겁던 뱅쇼는 차갑게 식어버렸고 그의 가슴까지 냉기가 흘러내렸다. “고해양은 의리도 있고 친구들에게도 잘해주었어. 그래서 일이 터졌을 때 그 상황은 비장하기 그지없었지. 누군가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어. 해양그룹이 쓰러지기 전만 해도, 현... 우리 아버지가 회사에‘수혈’해 주려고 100억을 투자하셨어. 그러다가 고해양이 감옥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서야 다들 그만두었지.”현시우는 잔을 내려놓았다.“유현석도 고해양이 전에 잘 다해주니까 너를 데려가 키워준 거야. 그리고 누군가 고해양의 덕을 본 사람이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너의 주변에서 그의 유일한 혈육이 너를 보살펴 준 거고.”유월영은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시우의 이 논리에는 문제가 없었으며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에는?”화제는 다시 고해양의 일로 이어졌다. “전에 주영문은 제 아버지의 친구인 유용우가 고해양의 딸을 데려간 거만 알고 있어지 어디에
폭우가 내린 다음 날은 여전히 흐린 날씨였다. 오전 9시가 막 지났을 때 연재준의 차가 연씨 가문 별장으로 들어왔다.그는 출근길에 연민철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비서는 급한 말투로 연민철이 중요한 일로 그를 찾고 있다면서 지금 꼭 집에 들르라고 했다. 그의 차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비서는 오래 기다렸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연 대표님, 오셨어요? 회장님께서 2층 안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안방?”연재준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집 안에 들어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어디 편찮으신가요?”“어젯밤 회장님의 혈압이 200까지 치솟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어요. 다행히 가정의가 계셔서 상황을 잘 넘기셨어요. 아침 7시에 다시 혈압을 재보았는데 여전히 높았습니다.”연재준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연민철은 평소에 고혈압이 있었으며 매번 그와 연재준이 싸울 때마다 유월영은 옆에서 연재준을 일깨워줬다. 게다가 전에는 이렇게까지 심각한 적이 없었다. 연재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방문은 닫히지 않았고, 윤미숙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연민철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었다.비서가 나지막이 인사 했다. “회장님, 사모님, 연 대표님 오셨어요.”연재준은 침대 끝에 기대어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4대 재벌이었던 윤민철은 어느덧 60대에 접어들었으며 지금은 앙상한 몸에 병든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벌겠고 눈두덩은 파래진 채 콧날개 양쪽에는 팔자 무늬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침실에 커튼이 쳐져 있어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침대 머리에만 전등이 켜져 있어 화면이 더욱 답답해 보였다. 윤미숙은 얼은 몸을 일으키며 아는체했다.“재준이 왔니? 일하는 데 지장 없겠지? 어젯밤 네 아버지가 한밤중에 일어나자마자 너를 보자고 하셨어. 그때 새벽 4시라서 내가 말렸어. 그런데 네가 아침에도 안 오면 아마 이이가 너의 회사까지 찾아갈까 봐 두려웠어. 의사가 지금은 반드시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어.”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