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시의 겨울은 건조하고 쌀쌀한 데다 오늘은 태양도 구름에 가려져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는 회색 안개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유월영은 멀리서 특유의 고독감을 풍기며 일렬로 세워진 묘비들을 바라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사모님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렇다고 하죠. 아무튼 난 내 뜻을 분명하게 밝혔으니 사모님이 알아서 판단하세요.”윤미숙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월영아, 아무래도 네가 내게 깊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재준이 네게 무슨 말을 전한 거야?”유월영은 윤미숙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있는 뭔가를 지그시 바라보나 싶더니 단순히 멍을 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인데도 유월영의 정신상태는 마비된 것 같았다.하지만 윤미숙은 계속 애석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다들 계모가 어렵다고 하더라. 그래도 난 재준을 내 친자식처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재준은 아직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 이젠 너까지도 날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니까 난 정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유월영이 그 말에 반응하지 않자 윤미숙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 재준이 자기 어머니 정신상태가 악화한 게 나 때문이라고 여기는 걸. 근데 사실 난 진짜 한 게 없어. 대신 그분의 건강을 신경 쓰고 있었어. 최근에 건강 상태가 또 악화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재준이 백유진을 스워시로 보내 그분을 돌봐달라고 했다고 그러더라... 나 원 참.”윤미숙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고 실수로 중요한 정보를 흘린 듯한 모습으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유월영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사모님은 나에게 백유진이 재준 씨 어머니 옆에서 돌보고 있는 사실을 내게 암시하고 싶은 거죠? 재준 씨가 아직 백유진과 깔끔하게 과거 청산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요.”“난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저...” 유월영은 윤미숙의 말을 끊고 계속 말했다. “이 일은 이미 알
“마을에 임신한 지 8개월 되는 시은이라는 여자가 있는데 사모님의 딸이 맞죠? 예전에 의도적으로 나를 유도해서 시은이 재준 씨의 여자라고 오해하게 했지만 사실은 당신과 회장님의 딸이 맞죠? 시은이 재준 씨보다 한두 살은 많아 보이는 것 같아서 회장님이 그 여자를 자기 친딸로 정식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거죠?”시은을 자기 친딸로 인정하면 회장님이 바람피운 사실을 승인하게 되는 게 뻔했다. 회장님은 해운 그룹, 연씨 가문, 그리고 자기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런 부정적인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연재준과는 부모와 자식 관계기도 하니까 회장님이 굳이 이런 끈끈한 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연재준의 마음속 마지노선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사모님은 사모님의 딸이 외롭게 밖에서 혼자 떠돌이 생활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요 몇 년 동안 암암리에 회장님과 재준 씨의 관계를 이간질해서 자기 딸을 연씨 가문에 들여보내도록 회장님을 들볶았죠. 가문에 들어와야만 당신 딸이 가문의 재산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요.”유월영의 말을 듣자 윤미숙이 평소에 자주 보이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가면이 와장창 깨져버렸다.바로 그때, 어느 남자의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월영아, 네가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해버리면 미숙 씨가 뭐라고 받아칠 수 없잖아.”유월영이 목소리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검은색 정장과 검은색 넥타이를 착용한 연재준이 나타났다.오늘 연재준의 검은색 정장과 넥타이는 평소와 약간 달랐다. 그는 어떤 액세서리도 착용하지 않았고 소매 단추, 장식용 넥타이, 심지어 손목시계도 착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이 사망한 사람과 유족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매너였다.연재준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유월영은 윤미숙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쪽으로 걸어가 연재준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에게 향을 드리러 가자.”연재준이 유현석에 대한 호칭은 “아버님”이었다.유월영은 입술을 오므리고 머리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함
유월영은 결국 이튿날 아침까지 엎드려 자고 일어났다.벨 소리 때문에 강제로 깨어난 순간, 유월영은 자기가 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어젯밤 명분은 분명히 신혼의 첫날 밤을 보내는 거였지만 연재준이 너무나 격렬하게 한 탓에 유월영은 침대에 못으로 고정되어 그 거친 관계를 받아내는 것 같았고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온몸이 쑤시고 저려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려 유월영은 이불 속에서 투덜거리다가 결국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여보세요?”전화 받은 사람은 유월영의 거친 목소리를 듣고 잠깐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월영이 맞아?”유월영은 침대에 누워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응, 서희야, 무슨 일이야?”“괜찮아?” 조서희는 유월영의 거친 목소리를 들으며 적어도 밤새 울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월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울었다고 생각했지 다른 원인은 고려하지 않았다.유월영은 흐릿한 상태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괜찮아.”조서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괜찮다면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밥이나 먹자. 승연도 불렀으니까 우리 함께 양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자.”유월영은 침실을 둘러보았다. 연재준은 이미 출근한 상태라 조용하고 한적한 동해안 저택에는 유월영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유월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주소를 보내줘.”전화를 끊고 유월영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가서 얼굴을 씻고 이를 닦은 후 시원하게 샤워도 했다.어젯밤 관계 후에 연재준은 유월영을 도와 깨끗이 씻었지만 아침에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뭉친 근육도 풀어주고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큰 함이 될 수 있었다.욕실에서 나오자 유월영은 마음마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고 며칠 전만큼 긴장하고 감정이 억압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다.아마도 장례를 무사히 마쳐 번거로운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어젯밤 침대에서 억눌린 감정을 완전히 쏟아낸 덕분일 수도 있다. 성과 폭력이 감정을 표출하는 최상의
연재준이 연민철에게 되물었다. “고해양은 누구죠? 유월영의 아버지는 유현석이예요. 어제 장례식 때 아버지께서 손수 그분 묘지에 가셔서 꽃을 드리고 절을 했는데 벌써 까먹었나요?”“내 앞에서 그런 발연기는 하지 마라.” 연민철이 계속 말했다. “그 일을 모르는 거라면 네가 굳이 날 속이고 월영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거야. 네가 먼저 저질러 놓고 내게 통지한 건 내가 네 결혼을 방해할까 봐 그런 거지?”연재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 향기를 음미했다. 뜨거운 수증기가 연재준의 시선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눈 속에서 번지고 있는 감정도 알아보기 힘들어졌다.“재준아, 해운 그룹은 지금 네 것이야. 네가 날 건너뛰고 윤영훈과 신현우와 연합을 맺은 건 나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근데 네가 이 자리에 앉아 권력을 누리는 이상 넌 그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져야 해. 그 60조는 꼭 찾아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해운 그룹에 언젠가 독이 되어 돌아올 거야.” 연민철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리를 떠났다.연재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표정이 점점 냉정해졌다. 그 표정은 흰 눈이 내린 고요한 얼음 평원과도 같았고 바람과 서리가 깃든 대검과도 같았다.연재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서지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시간 낼 수 있어?”서지욱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낼 수 있어. 어디서 만날까?”연재준은 외투를 입으며 대답했다. “내가 널 찾아갈게.”...한편, 양식집에 들어선 유월영은 주변을 쓱 훑어보고는 식탁 앞에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부르는 조서희를 발견했다.“월영아, 여기야!”“서희야, 승연아.”유월영이 다가가서 자리에 앉자 음식은 이미 다 나와 있는 상태였다. 허기진 유월영은 앉자마자 차를 한 모금 마셨고 젓가락을 들어 새우를 집어 먹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음식을 칭찬했다.“이 식당은 새로 오픈한 거야? 맛이 참 좋네. 우리가 자주 가던 그 식당에 전혀 뒤지지 않아.”하지만 이승연과 조서희는 음식보다 유월
한 번 “욱”하고 나서 이승연은 연이어 두 번 “욱”하는 소리를 내며 구역질이 났다.유월영은 급히 휴지를 두 장 빼서 접어 단열 깔개 삼아 향을 풍기는 생선 그릇을 집어 멀리 치웠다.조서희도 급히 이승연에게 물었다.“승연아, 괜찮아?”“...” 이승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목구멍으로 자꾸 북받쳐 오르는 멀미 같은 답답한 느낌을 억눌렀다. 그러고는 두 친구를 보며 머리를 저었다.“괜찮아.”조서희는 연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생선 비린내가 심하지 않은데? 이런 연어 스테이크는 진짜 맛있어.”이승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아마 일어나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어서 순간 구역질이 났나 봐.”조서희는 “그랬구나”라고 중얼거리며 별다른 생각 없이 이승연의 찻잔을 물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유월영은 이승연의 배를 보며 뭔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을 지켰다.그 후로 이승연은 다시 구역질이 나지 않았지만 식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조서희는 세심한 성격이 아닌지라 더 이상 이승연에게 집착하지 않고 아까 못다 한 얘기를 이어서 꺼냈다.“그러면 월영이 너는 앞으로 지성에서 살거나 연재준과 함께 그 어마어마하게 비싼 동해안 저택에서 살고 우리 작은 아파트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지?”유월영은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럴 것 같아.”조서희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투정을 부렸다.“헐, 짜증 나. 나 너랑 거의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갑자기 헤어져야 한다니 받아들이지 못하겠어.”그 말에 유월영은 웃으며 조서희를 달랬다. “아니면 너도 지성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그럼 우린 지성에서 또 룸메이트로 살 수 있잖아.”조서희는 이 제안을 잘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식사 후에 유월영은 병원에 이영화를 보러 가려 했고 조서희도 함께 갔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조서희는 갑자기 환자를 위문하러 왔는데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서둘러 과일 세트를 사러 갔다.유월영은 혼자 계단을 올라가 엘리베이터에 탄 후 이승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3년 전 집에 돌아온 이후로 유월영은 쭉 언니에게 예의를 갖추었지만 이번에는 참다못해 처음으로 언니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어머니 심장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몰라? 어머니 같은 환자가 가장 먼저 피해야 하는 게 큰 충격인 걸 몰라? 어머니가 이번에 왜 입원했는지도 몰라? 어머니가 퇴원한 후에 아버지 일을 천천히 알려드리자고 말했던 걸 벌써 다 까먹었어? 언니는 왜 갑자기 급하게 어머니한테 와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붙잡고 이 아픈 진실을 다 털어놓는 건데? 도대체 무슨 의도야?”언니의 이름은 유설영이었고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그래, 네가 그러자고 제안했었지. 근데 왜 내가 네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하는 건데?”유월영은 그 말에 손을 들어 유설영의 얼굴에 귀싸대기를 날렸다.유월영 가슴속 마지노선은 항상 어머니 이영화였다. 누구도 어머니에게 상처 입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고 그게 설령 언니 유설영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용서할 수 없었다.“왜 들어야 하냐고? 언니는 지금 그것도 말이라고 씨부렁대는 거야? 어머니가 충격을 받으면 언제든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언니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거야? 왜 내 말을 들어야 하냐고? 그 이유를 설명해 줄게. 왜냐면 어머니가 입원하고 수술하고 의사 선생님을 찾은 돈은 다 내가 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어머니를 돌봐야 할지는 당연히 내가 말한 대로 해야 해!”유설영은 얼얼한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기왕 이렇게 된 바엔 모든 걸 들어내서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그깟 얼마 되지도 않은 돈 갖고 뭔 지랄이야? 네가 낸 그 돈은 25년 동안 널 애지중지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한 보답일 뿐이야. 그건 네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유월영, 넌 이미 내 아버지를 죽였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내 어머니 일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신경 꺼!”유월영은 언니의 말이 우스꽝스러웠다.“네 아버지? 네 어머니?”유설영는 목에 힘을 꽉 주며 곧게 세우고 소리쳤
유월영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 쓰레기통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월영아!”조서희는 급히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면서 유설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당신이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 증거는요?”유설영은 자기 머리카락 몇 가닥 잡아당겨 땅에 던졌다.“검사해 봐. 유전자 검사 하면 되잖아. 너와 내가 혈연관계인지 아닌지!”조서희는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겁을 먹었다. 설마 유월영이 진짜로 유현석과 이영화의 친딸이 아닌 건가?금방 아버지를 여읜 아픔을 겪고 이제는 갑자기 친딸이 아닌 걸 알게 되면 유월영의 마음이 어떨지 조서희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월영아...”유월영의 손은 바닥을 짚고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의 한기가 그녀의 손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차갑게 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갑자기 정월 초사흘에 아버지가 병원에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네가 처음 집에 왔을 때 겨우 이 정도 크기였어.”...“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는 걸 알고 별로 좋지 않은 이 세상을 마주하기 싫어져서 계속 잠만 자고 있었던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그냥 내가 남의 신뢰를 계속 저버린 것 같아서.”...그때 그녀는 그의 이런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회상해 보면 그 말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진짜 친딸이 아니라고?유씨 집안의 월영이 아니라면, 그럼 나는 누구야?유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조서희의 힘을 빌려 일어섰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유설영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재빨리 계단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병실로 돌아와 이영화의 머리카락을 몇 개 뽑고 나서 의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빨리 검사하고 싶었다. 그녀는 진실을 원하고 답을 원했다!여기는 바로 병원이어서 감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더욱이 연재준이 전에 병원에서 미리 인사를 했던 터라 병원에서는 그녀를 특별 대우 해줘서 빠르게 검사를 진행했다. 다만 아무리 빨라도 결과는 세 시간이 지나야 나
두 줄.이승연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테스트하기 전에 만약 두 줄이라면, 그리고 이 며칠 그녀 자신의 반응으로 놓고 보면 99% 임신일 거로 생각했다. 만약 한 줄이 나온다면 내일 아침에 다시 테스트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임신한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임신 테스트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 그녀는 미간이 점점 좁혀왔다. 이혁재는 계속 아이를 원하고 있어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매번 피임약을 먹었었다. 하긴 콘돔이든 피임약이든 백 퍼센트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왜 하필 그녀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 걸까?이승연은 거울을 뚫어지게 보면서 자신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다 더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신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그녀는 그래도 하느님이 편애해 준 듯했다. 비록 서른 살이 되었지만, 성형과 시술을 하지 않아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눈가에는 나이를 상징하는 잔주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평소에 엄숙하고 크게 웃지 않고 표정이 별로 없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녀 나이에 아이를 갖는 것도 정상이고 그녀도 아이 낳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혁재가 그 계약서에 사인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계약서에 사인하든 안 하든, 아이를 낳는 것과는 논리적인 상관관계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그저 아이 낳는 일로 그를 협박하여 서명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승연은 휴지를 뽑아 손을 닦으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그녀는 이제 이 아이를 남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이라고 했지만 사무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엘리베이터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3분 사이에 그녀는 사실 이미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덧이 비교적 심한 편이기에 우선 경험이 많은 산후조리사를 찾아 돌봐줄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임신이었기에 그녀의 손에 있는 사건은 임 4월까지 다 차 있었다. 내일 출근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