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 쓰레기통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월영아!”조서희는 급히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면서 유설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당신이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 증거는요?”유설영은 자기 머리카락 몇 가닥 잡아당겨 땅에 던졌다.“검사해 봐. 유전자 검사 하면 되잖아. 너와 내가 혈연관계인지 아닌지!”조서희는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겁을 먹었다. 설마 유월영이 진짜로 유현석과 이영화의 친딸이 아닌 건가?금방 아버지를 여읜 아픔을 겪고 이제는 갑자기 친딸이 아닌 걸 알게 되면 유월영의 마음이 어떨지 조서희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월영아...”유월영의 손은 바닥을 짚고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의 한기가 그녀의 손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차갑게 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갑자기 정월 초사흘에 아버지가 병원에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네가 처음 집에 왔을 때 겨우 이 정도 크기였어.”...“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는 걸 알고 별로 좋지 않은 이 세상을 마주하기 싫어져서 계속 잠만 자고 있었던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그냥 내가 남의 신뢰를 계속 저버린 것 같아서.”...그때 그녀는 그의 이런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회상해 보면 그 말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진짜 친딸이 아니라고?유씨 집안의 월영이 아니라면, 그럼 나는 누구야?유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조서희의 힘을 빌려 일어섰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유설영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재빨리 계단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병실로 돌아와 이영화의 머리카락을 몇 개 뽑고 나서 의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빨리 검사하고 싶었다. 그녀는 진실을 원하고 답을 원했다!여기는 바로 병원이어서 감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더욱이 연재준이 전에 병원에서 미리 인사를 했던 터라 병원에서는 그녀를 특별 대우 해줘서 빠르게 검사를 진행했다. 다만 아무리 빨라도 결과는 세 시간이 지나야 나
두 줄.이승연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테스트하기 전에 만약 두 줄이라면, 그리고 이 며칠 그녀 자신의 반응으로 놓고 보면 99% 임신일 거로 생각했다. 만약 한 줄이 나온다면 내일 아침에 다시 테스트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임신한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임신 테스트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 그녀는 미간이 점점 좁혀왔다. 이혁재는 계속 아이를 원하고 있어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매번 피임약을 먹었었다. 하긴 콘돔이든 피임약이든 백 퍼센트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왜 하필 그녀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 걸까?이승연은 거울을 뚫어지게 보면서 자신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다 더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신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그녀는 그래도 하느님이 편애해 준 듯했다. 비록 서른 살이 되었지만, 성형과 시술을 하지 않아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눈가에는 나이를 상징하는 잔주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평소에 엄숙하고 크게 웃지 않고 표정이 별로 없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녀 나이에 아이를 갖는 것도 정상이고 그녀도 아이 낳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혁재가 그 계약서에 사인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계약서에 사인하든 안 하든, 아이를 낳는 것과는 논리적인 상관관계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그저 아이 낳는 일로 그를 협박하여 서명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승연은 휴지를 뽑아 손을 닦으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그녀는 이제 이 아이를 남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이라고 했지만 사무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엘리베이터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3분 사이에 그녀는 사실 이미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덧이 비교적 심한 편이기에 우선 경험이 많은 산후조리사를 찾아 돌봐줄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임신이었기에 그녀의 손에 있는 사건은 임 4월까지 다 차 있었다. 내일 출근해서
“감시하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이혁재가 널 데리러 오는지. 그렇게 며칠 기다렸는데 당신 계속 혼자 출퇴근했잖아. 음, 뭐라고 할까? 내가 생각했던 대로야. 그 녀석은 당신의 유산을 노리면서 이젠 노력조차 안 하고 있어.”오성민은 술잔을 잡고 즐거운 듯 손으로 잔을 두드렸다. 이승연은 그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전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자기보다 못한 듯 해서?아니면 전 여자 친구가 자신과 헤어진 걸 후회하는 듯 해서?“...”어떤 수준의 남자든 이런 나쁜 근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승연은 요리사가 건넨 스테이크 조각을 받아 들고, 입에 넣기 전에 냄새를 맡아보았다. 메스꺼운 느낌이 안 들자 입안으로 넣었다. “우리가 사귈 때도 당신 매일 나를 출퇴근 시켜주지 않았잖아. 근데 이걸로 그가 내 유산을 노리고 있다고 단정하는 거야?”“걔가 당신의 유산을 노리지 않는 거라면, 그놈 주위에 예쁘고 어린 여자들이 많은데 왜 너와 결혼하는지 생각 안 해봤어? 당신 그놈보다 4살 많아. 남자는 다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것도 모르지? 걔가 지금까지 지내온 여자들과 완전히 끝내지도 않았어. 당신이 설에 사무소에서 일할 때, 걔는 여자를 데리고 바다낚시를 갔어. 비키니 입은 미녀를 껴안고 있는 사진도 나한테까지 보내졌어.”오성민은그가 이혁재보다는 낫다고 말하고 싶었다. 스테이크는 조금 짰다. 이승연은 청주를 한 모금 먹고 오성민의 말에 맞받아쳤다. “그래서 당신은 여자를 찾지 않았다는 거야? 바람피우다 나한테 걸렸잖아. 그것도 침대에 있는걸.”요리사는 한참 동안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다가 참지 못고 눈앞의 남녀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엘리트들이었으며 막장 관계였다. 오성민은 옛날의 추문이 들춰지자 불쾌한 듯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내가 해명했었잖아. 그날 우리가 싸우고 내가 좀 기분이 안 좋아서 술을 마시고 취했는데, 그 여자가 내 침대에 올라온 거라고...”“기분 안 좋은 게 두 번이었어? 술
오성민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그는 물티슈 한 장을 뽑아 손을 닦으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 “승연아, 너도 잘 알 거야. 내가 이기고 싶은 사건은 반드시 이기고, 내가 감옥에 보내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감옥에 보낸다는 걸.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지고 싶은 사람은 결국엔 반드시 내 손안에 넣고야 말 거야.”이승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그는 우월한 출신을 가지고 있었다. 상계에는 4대 재벌이 있었다. 남쪽의 문씨 가문, 서쪽의 서씨 가문, 동쪽의 오씨 가문 그리고 북쪽의 류씨 가문. 그는 그중 오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거기다 능력도 좋았다. 수능 만점자에 우수한 법대 졸업생, 지금은 법조계에서 서열 1위였다.게다가 외모도 출중했다. 시원한 외 겹눈 눈매에 높은 콧날, 얇은 입술에 신분과 직업까지 받쳐주니 그가 서 있기만 해도 반하는 여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오성민과 같이 바람피우다 걸린 여자애가 바로 좋은 예제였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이승연에게 발각된 후, 여자는 오성민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뺨을 여러 대 때리면서 제발 그를 탓하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그래서 오성민은 지금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었다. 이승연은 의자 팔걸이에 기댄 채 따뜻한 오렌지 불빛을 빌어 눈앞의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오성민, 언감생심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승연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바람을 피우는 현장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뒷걸음질 쳤다. 발아래에 걸리는 물체가 없었지만 그녀는 그대로 걸려 바닥에 넘어졌었다. 그녀는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져 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 희끄무레한 두 개의 엉켜있는 나체를 보면서 그녀의 눈앞에는 두 사람의 7년 동안의 시간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알콩달콩했던 기억들, 느꼈던 따뜻한 감정들, 하지만 마지막에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심장은 누가 도려간 것처럼 텅 비었다.
전화를 끊고 이혁재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혁재야.”이혁재는 엄마가 뭘 알아차리기라고 할까 봐 표정을 관리하면서 돌아서 대답했다“네. 엄마.”이혁재 어머니는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할머니가 아직 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어디 가려고?”이혁재는 검은 후드티를 입고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마음이 급해서 집중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식사도 다 끝났는데 엄마랑 할머니같이 얘기나 하면 되죠. 제가 뭐 할 것도 없잖아요.”“둘째와 셋째는 지금 그들의 천한 자식들 데리고 할머니 앞에서 알랑거리고 있는데, 네가 지금 가버리면 할머니가 너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지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네 할머니와 아버지 모두 그 두 천한 종자를 더 좋아하는데!”이 씨 가문에는 본처 하나와 두 명의 첩이 있었다. 둘째와 셋째가 바로 그 “첩”들이었으며 이 씨 가문에 각각 아들 하나씩 낳아줬다. 이혁재의 부모는 상업적으로 혼인한 사이인데, 이혁재 아버지는 부모님이 정해준 아내보다 자기가 고른 여자를 더 좋아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지만 이혁재 할머니마저 그 두 ‘서자’들을 더 예뻐했으며 본처와 그 아들 이혁재에 대해 줄곧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혁재 어머니는 이혁재에게 이승연과 결혼하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승연의 막대한 유산을 보증으로 자신과 아들이 이씨 집안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속셈이었다.이혁재는 줄곧 이런 집안 서열 싸움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툴툴거렸다.“할머니가 원래 나를 별로 예뻐하지 않잖아요. 제가 옆에 가서 몇 마디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나를 좋아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엄마도 그렇게 신경 곤두세우지 않으셔도 돼요. 누가 뭐래도 엄마는 이씨 가문에서 정혼해서 시집온 본처잖아요. 만약 아버지가 이혼하겠다고 하면 제 아내 찾아가 이혼 소송을 하면 돼요. 이씨 가문의 절반 재산을 나눠 가지면 결국 아버지도 다시 엄마한테 돌아
“승연아, 너도 변호사니까 잘 알 거야. 그런 말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오성민이 느릿느릿 대답했다.“네가 술에 취하고 몸에 토까지 했어. 너의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사무소도 다 퇴근해서 할 수 없이 호텔로 데려온 거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옷도 호텔 직원이 갈아입혀 준 거야. 난 그냥 얌전히 옆에만 있었어.”이승연은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난 전혀 취하지 않았어! 당신이 약을 타서 그런 거지!”“술 취한 사람들은 자기가 취한걸 인정하지 않지.”이승연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먼저 몸을 검사했다. 확실히 아무 짓도 안 한걸 느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놀랄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짧은 몇 초 동안 오성민 같은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강제로 뭘 하지 않았고 추행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술에 탄 약은 이미 깨끗하게 대사되어 혈액 검사를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을 게 확실했다. 그녀가 경찰에 신고해서 추궁한다고 해도 그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의 범행이라 그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어떠한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났고 강도는 점점 커졌다. 이승연은 문 쪽을 바라보면서 혹시나 이혁재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일 꾸민 원인이 뭐야? 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거야? 이혁재가 당신과 내가 관계 가졌다고 오해하게 하려고? 그래서 혁재와 내가 이혼하기를 바라는 거야?”이승연은 비웃으면서 이어 말했다. “당신 그건 생각해 봤어? 내가 혁재랑 이혼한다고 해도 나 당신한테는 죽어도 안 돌아가. 당신을 지금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 난다고!”오성민은 술잔을 탁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이승연의 턱을 움켜쥐었다.“내가 구역질 난다고? 이혁재는 괜찮고? 이거 한번 네 눈으로 봐보라고!”그는 사진 한 묶음을 그녀 앞에 던졌다.“폴라로이드로 찍은 거야. 위에 날짜도 있으니까 포토샵이니 날짜 고쳤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이
뺨을 심하게 맞은 이혁재의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 바로 붉은 자국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면서 아픈 것도 잊고 믿기지 않는 듯 이승연을 바라보았다.“이 자식 때문에 지금 날 때린 거야?” 이승연은 주먹을 꽉 쥐고 오성민을 바라보면 차갑게 말했다.“꺼져. 다시는 신주시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오성민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없어져 줄 수 있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두 사람에 남겨줘도 상관없었다. 오성민은 바닥에서 일어나 가운을 다시 여미면서 말했다.“승연아, 내가 한 말 잊지 마.”그가 이승연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듣자 이혁재 몸 안의 폭력이 꿈틀거렸다. “다시는 신주시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혁재는 이승연처럼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번에 이미 오성민에게 경고했었다. 그런데 신주시까지 와서 그의 아내를 꼬드겼으니, 이번엔 몸이 성한 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이혁재는 오성민의 어느 팔을 부러뜨릴지까지 생각해 놨다. 이승연은 다시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이혁재는 그런 그녀의 팔을 확 잡아당겨 그녀를 벽으로 밀치고 그녀의 가운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승연이 낮게 소리 질렀다.“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운의 허리띠가 매듭 지어져서 풀기가 어려워지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힘껏 잡아당겼다. 한바탕 몸싸움한 뒤라 그의 입가와 광대뼈에는 멍이 들어있었고 원래 사납던 얼굴이 더욱 거칠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학생 시절 성적은 나쁘고 싸움을 좋아하던 일진의 모습이었다. 이승연은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그와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말린다고 들을 그도 아니어서 아예 그의 뺨을 한 대 더 때렸다.별로 아픔 느낌이 없는지 이혁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가운을 풀어 헤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가운 안에 속옷만 입고 있었으며 그는 그녀에게서 낯선 남자의 냄새가 나는지 살폈다.
구급차는 이승연을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HCG 검사를 하여 임신이 확실해졌다.다행히 아이와 그녀 모두 큰 문제가 없어서 얼마간 쉬면 병원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고민하다 결국 유월영에게 전화했다.“월영아, 나 임신이 확실하대.”유월영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려고? 아이는 남길 거야?”유월영은 이승연이 계속 피임약을 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응. 남길 려고.”이승연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싸웠던 자신과 이혁재의 일이었고 아이는 그녀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연관계였다. 이 아이만 있다면 그녀는 앞으로 혼자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간 후 그녀는 늘 외롭게 세상을 살아왔다. “월영아, 오늘 밤 와서 친구 해줄 수 있어?”평소 같았으면 유월영은 가서 옆에 있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그녀는 낮게 속삭였다.“내가 서희를 보낼게.”“너 무슨 일 있어?”“지금 병원에서 엄마랑 같이 있어.”“알았어. 고생해.”이승연은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유월영은 전화를 끊고 멍하니 있었다. 병원에서 엄마를 돌보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냥 병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유설영은 그녀와 이영화를 못 만나게 했다. 유월영이 집에 돌아온 후부터 부모의 모든 비용을 부담했었다. 그래서 가장 이영화의 옆에 있을 자격이 되었지만, 유현석이 자살하고 그녀가 친자 확인까지 마친 후 그녀는 갑자기 명분이 없어졌다. 유월영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다가 가방 안에 있던 A4용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가방 지퍼를 닫았다. “월영아.”조서희는 따뜻한 코코아 두 잔을 사서 그녀에게 한 잔 건네주었다. “너 여기 오후 내내 앉아 있었잖아. 거의 10시 되는데 우리 아파트에 가서 쉬고 있어.”“응. 이따가 돌아가려고.”유월영이 이어 말했다.“오늘 밤 승연이 언니한테 가봐. 언니가 임신이래. 다른 얘기는 안 했는데 기분이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