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을 심하게 맞은 이혁재의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 바로 붉은 자국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면서 아픈 것도 잊고 믿기지 않는 듯 이승연을 바라보았다.“이 자식 때문에 지금 날 때린 거야?” 이승연은 주먹을 꽉 쥐고 오성민을 바라보면 차갑게 말했다.“꺼져. 다시는 신주시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오성민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없어져 줄 수 있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두 사람에 남겨줘도 상관없었다. 오성민은 바닥에서 일어나 가운을 다시 여미면서 말했다.“승연아, 내가 한 말 잊지 마.”그가 이승연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듣자 이혁재 몸 안의 폭력이 꿈틀거렸다. “다시는 신주시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혁재는 이승연처럼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번에 이미 오성민에게 경고했었다. 그런데 신주시까지 와서 그의 아내를 꼬드겼으니, 이번엔 몸이 성한 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이혁재는 오성민의 어느 팔을 부러뜨릴지까지 생각해 놨다. 이승연은 다시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이혁재는 그런 그녀의 팔을 확 잡아당겨 그녀를 벽으로 밀치고 그녀의 가운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승연이 낮게 소리 질렀다.“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운의 허리띠가 매듭 지어져서 풀기가 어려워지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힘껏 잡아당겼다. 한바탕 몸싸움한 뒤라 그의 입가와 광대뼈에는 멍이 들어있었고 원래 사납던 얼굴이 더욱 거칠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학생 시절 성적은 나쁘고 싸움을 좋아하던 일진의 모습이었다. 이승연은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그와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말린다고 들을 그도 아니어서 아예 그의 뺨을 한 대 더 때렸다.별로 아픔 느낌이 없는지 이혁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가운을 풀어 헤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가운 안에 속옷만 입고 있었으며 그는 그녀에게서 낯선 남자의 냄새가 나는지 살폈다.
구급차는 이승연을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HCG 검사를 하여 임신이 확실해졌다.다행히 아이와 그녀 모두 큰 문제가 없어서 얼마간 쉬면 병원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고민하다 결국 유월영에게 전화했다.“월영아, 나 임신이 확실하대.”유월영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려고? 아이는 남길 거야?”유월영은 이승연이 계속 피임약을 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응. 남길 려고.”이승연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싸웠던 자신과 이혁재의 일이었고 아이는 그녀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연관계였다. 이 아이만 있다면 그녀는 앞으로 혼자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간 후 그녀는 늘 외롭게 세상을 살아왔다. “월영아, 오늘 밤 와서 친구 해줄 수 있어?”평소 같았으면 유월영은 가서 옆에 있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그녀는 낮게 속삭였다.“내가 서희를 보낼게.”“너 무슨 일 있어?”“지금 병원에서 엄마랑 같이 있어.”“알았어. 고생해.”이승연은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유월영은 전화를 끊고 멍하니 있었다. 병원에서 엄마를 돌보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냥 병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유설영은 그녀와 이영화를 못 만나게 했다. 유월영이 집에 돌아온 후부터 부모의 모든 비용을 부담했었다. 그래서 가장 이영화의 옆에 있을 자격이 되었지만, 유현석이 자살하고 그녀가 친자 확인까지 마친 후 그녀는 갑자기 명분이 없어졌다. 유월영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다가 가방 안에 있던 A4용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가방 지퍼를 닫았다. “월영아.”조서희는 따뜻한 코코아 두 잔을 사서 그녀에게 한 잔 건네주었다. “너 여기 오후 내내 앉아 있었잖아. 거의 10시 되는데 우리 아파트에 가서 쉬고 있어.”“응. 이따가 돌아가려고.”유월영이 이어 말했다.“오늘 밤 승연이 언니한테 가봐. 언니가 임신이래. 다른 얘기는 안 했는데 기분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바람은 멎은 듯했다.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소리도 멀어졌고,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유월영의 귓가에는 자신이 그를 쫓아가며 했던 말만 들렸다.“현시우, 이번에 가면 이젠 다시 쫓아가지 않을 거야.”...“월영아.”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월영은 목이 메어 한참 있다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현시우...”‘당신 돌아왔네.’오늘은 정월 보름이었다.이날 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뜻밖에 임신한 이승연, ‘불륜 현장’을 잡은 이혁재,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유월영,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현시우.한편, 서덕궁에서 서지욱을 만난 연재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옛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설전부터 지성시에 부지런히 다니네. 해운그룹에 가니 조 비서가 지성시에 시찰하러 갔다고 하던데. 시찰은 무슨, 지금 그 비서 쫓아다니는 거지? 거기다 노현재까지 불러 도와달라 그랬다며.”서지욱은 모든 걸 아는 듯했다. 오늘 서덕궁은 영업하지 않고 연재준은 서지욱과 바텐더 앞에 앉아 있었고 노현재는 바텐더를 자처하고 있었다.연재준은 정장 외투를 벗고 조끼만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품 있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나와서 술 마시자]이혁재가 보낸 메시지였다.연재준은 서덕궁의 위치를 그에게 보내자 바로 답장이 왔다.[오케이]노현재는 손의 술잔을 흔들며 야유했다.“조만간 유 비서한테 그렇게 대했던 걸 후회할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내가 몇 가지 방법을 알려줄까? 유 비서가 다시 마음 돌리게?”연재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고맙지만 됐어. 이미 돌아왔거든.”서재욱은 알고 있었으며 노현재만 놀라서 물었다.“이렇게 바로 돌아왔다고?”연재준은 턱을 괴며 대답했다.“손가락에 지금 내가 준 결혼반지를 끼고 있으니 다음에 월영을 만나면 제수씨라고 부르면 돼.”반지는 서재욱도 모르고 있었다. 술잔을 흔들던 동작이 현저히 느려져 노현재와 같이 연재준을 바라보았다.
“당시의 해양그룹은 국내 최대의 민영기업으로 고해양의 별명이”마이더스의 손”이었어. 그가 참여한 프로젝트라면 손실을 보는 경우가 없었고 모두 돈이 되었어. 확률은 백 퍼센트였고 예외가 없어 전설로 불렸지. 그래서 그가 하겠다는 프로젝트는 국내외에서 모두 거액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어.”“그가 당시에 큰 광산을 발굴하고 있었는데, 착공도 하기 전에 수십조의 투자를 받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어. 그런데 광산이 갑자기 무너지고 백여 명의 광산 노동자들이 생매장되었던 거야.”노현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속의 캐릭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잘려’ 죽자, 그는 게임을 그만두고 서지욱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서지욱은 설명하다 말고 자신도 한숨을 쉬었다. 백여 명의 광산 부는 백여 명의 가족으로 연결되었다.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이어 말했다.“일이 터지자 고해양은 관련 부서에 불려 가서 반년 넘게 조사를 받았어. 결국 사고로 확실시되었고 그래서 하늘의 탓이라는 거야.”연재준의 표정은 오색영롱한 천장 등불 아래서 알아보기 힘들었다.서지욱이 계속했다.“사고로 판명되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해양그룹은 그야말로 원기가 상했어. 게다가 국민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민원이 들끓어 해당 기관은 할 수 없이 계속 조사할 수밖에 없었지.”“그런데 그 시절이 모든 게 막 부흥하기 시작하던 시절이라, 대기업이라 해도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았던 때여서, 누구라도 그렇게 탈탈 털면 먼지가 나오기 마련이라고.”그래서 결과도 불 보듯 뻔했다. 조사할수록 해양그룹의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던 것이다.“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건 수사팀은 익명의 제보를 잇달아 받았다는 거야. 게다가 그런 익명의 제보는 모두 해양그룹에 치명적인 내용이었고 마침내 회사는 파산까지 이르게 했지.”“결국 고해양은 감옥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했어. 여러 개 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는 항소하지 않고 죄를 인정했어. 그가 죽은 후 해양그룹도 완전히 와해하였어.”이게 바로 사람 탓이었다.서
이혁재가 서덕궁에 도착했을 때 노현재만 혼자 남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난 상처도 신경 쓰지 못한 채 초조하고 굳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재준이는? 나한테 보낸 위치가 서덕궁 아니었어?”노현재가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재준이 형이 갑자기 해양그룹에 관심이 생겨서 지욱이 형을 끌고 현씨 어르신네 집에 갔어. 재혁이 형, 얼굴이 왜 그래? 싸웠어?”이혁재는 해양인지 호수인지에 관심이 없는 듯 풀썩 앉았다. “현재야, 취할 수 있는 술로 몇 병만 가져다줘.”노현재는 게임을 끄고 일어나 등 뒤의 선반에서 한 병을 골랐다. “왜 무슨 일이야?”이혁재는 아무리 속이 없다고 해도 자기 아내가 바람피운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어 얼굴이 굳은 채 양주 한 병을 따서 잔에 부었다.“넌 아직 어려서 몰라. 예쁜 여자일수록 힘들다는 것만 알아둬.”노현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둘은 26살 동갑이었으며 이혁재는 자신보다 생일이 3개월 빠를 뿐이었다. 노현재도 연재준과 서지욱이 떠난 뒤 게임 몇 판 하다가 게임을 할수록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도 양주를 들어 자신의 잔에 절반 따랐다. 술잔에 일렁이는 불빛을 나른하게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알지.”단숨에 술을 삼키고 두 사람은 이내 말이 없었다. 그저 한 잔 또 한 잔 술만 마시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거의 취기가 돌자 이혁재는 입가를 문질렀다. 멍이 든 부분이 여전히 욱신거렸다. “흥, 그러고도 변호사라고. 유죄 확정 전에 변호도 안 해주고 사형선고 하다니. 그러기 전에 나한테 물어보면 어디 덧나? 내 말 보다 전 애인의 말이나 믿고, 대체 누가 남편이야?”“여자들은 가끔 이렇게 억지를 부려. 한 번 죄를 지으면 갚아주고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눈치를 줘.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녀 앞에서 내연녀를 두둔하잖아? 오히려 이틀도 안 가 그를 용서하고 결혼까지 한다니까.”노현재는 혀를 차며 웃었다. “맞아. 여자는 정말 이상한 것 같아.”이혁재는 그가 여자 일
현 회장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고해양한테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었어. 그 일이 있을 때 아들은 겨우 세 살이었고 딸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어.”연재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들이 하나 있었다고요?”“있긴 있었지. 그런데 내가 아까 그 집에 장례 치를 사람 없다고 했잖아? 그건 그때 고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아들 혼자 문 앞에서 놀다가 유괴당한 것 같아. 나도 그때 사람을 풀어서 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어. 그니깐 이게 얼마나 엎친 데 덮친 격이야?”현 회장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연재준이 이어 물었다.“그럼 그 딸은요?”“고해양이 죽은 뒤 아내가 막내딸을 품에 안고 같이 강에 뛰어들었어.”연재준이 놀라서 물었다.“강에 투신자살했다는 건가요?”“그래. 고 부인의 시신은 한 달 뒤에 강에서 발견됐고, 장례도 내가 치러줬어.”“그러면 딸의 시신은요?”현 회장이 한숨 쉬었다. “딸의 시신은 못 건졌어. 아마 물고기한테 먹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작은 아기라서 강바닥에 휩쓸려 돌 틈에 끼었을 거야.”“...”연재준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앞에 놓인 찻잔에서 뜨거운 연기가 피어올랐고 공중으로 퍼지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현 회장은 탄식하며 이이 말했다. “확실히 여자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지. 남편이 죽고, 아들까지 사라졌는데 고 부인이 혼자서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헤쳐 나가겠어. 너무 막막하니까 그런 결정을 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 같은 외인이 고해양의 관을 들지 않았겠지. 아는 사이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어.”서지욱이 끼어들었다. “그렇죠. 늘 자비로우시니 모두가 선비라고 부르시는 거 아니겠어요?”현 회장은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남의 집 일에 신경 그만 쓰고. 내가 어제 네 아버지랑 낚시를 하면서 얘기해 봤는데 네 아버지 말을 들어보니 아마 그 네 ‘누나’를 정말로 집에 데려가려고 하는 눈치더라.”연재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
차는 멈추지 않은 채 두 사람 곁을 지나 현씨 가문의 저택 마당으로 들어섰다.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하인의 나미작한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네.”간결한 말소리는 밤의 어둠 속에 사라지고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그들의 등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그가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인사할 줄 알았던 서지욱은 혀를 찼다.“현시우 맞지? 귀국했나 보네.”그가 귀국한 소식은 연재준도 소문을 못 들은 듯했다. 원래 차갑던 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가자.”운전기사가 이미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한쪽에 올라탔다. 서지욱은 방금 차가 스쳐 지나갔을 때를 생각하자 그만 웃음이 났다.“여전히 잘생겼네.”연재준은 핸드폰을 꺼내다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서지욱은 빙그레 웃었다. 남자가 남자를 볼 때는 상대방의 얼굴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의 얼굴은 무시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현시우는 소년이었을 때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전에 나도 들었긴 해. 현시우가 해외 자산을 매각하고 국내의 회사를 인수하고 있다던데. 아마 상장 준비해서 국내 업계로 진출하려 하나 봐. 그래서 정식 귀국할 때 요란하게 할 줄 알았더니, 이렇게 조용히 들어왔네.”연재준은 서지욱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현시우를 본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 그는 유월영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월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두 번 연속으로 전화했지만 들리는 건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였다.“연결이 되지 않아...”카톡 보이스로도 해봤지만 유월영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재준의 이마의 힘줄이 툭툭 튀었다. 서지욱은 그의 표정이 굳어진 걸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너는 현 회장님이랑 가깝게 지내면서 또 현시우랑은 별로 안 친한가 봐?”“같은 업계 아니니 당연히 교집합이 없지.”연재준은 동해안 저택의 cctv를 켜서 여러 곳을 살펴봤다.
연재준과의 전화를 끊은 뒤 이승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거실에 있는 유월영을 바라보았다.유월영은 사실 이승연의 집에 있었다.그녀는 방금 연재준의 전화를 받기 전 유월영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쉿 했고, 그 뜻인즉 연재준에게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걸 얘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이승연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왜 연 대표하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유월영은 뜨거운 물이 담긴 유리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유리를 통해 전해진 열기에 그녀의 손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녀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있었다.“내가 좀 조사할 게 있어서 부탁하려고 했는데, 언니가 지금 임신 중이라...”유월영이 입술을 깨물다 다시 이어 말했다.“그런데 언니 말고 누가 날 도와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이승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무슨 일인데? 내가 임신했지, 불구가 된 건 아니야.”조서희도 옆에서 거들었다.“나도 있잖아. 나도 도울 수 있어.”유월영은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우리 엄마가 설 전날에 쓰러져서 병원에 갔었잖아. 아버지도 그때 따라 같이 갔었거든. 그런데 그 뒤로 보이지 않았어. 그러다 한밤중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었어. 아버지가 술에 취해 길에서 소란을 피운다고.”이승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래서?”“아버지가 그때 누군가를 만난 것 같아. 그래서 병원에서도 빠져나와서 그렇게 무작정 술을 마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이승연은 이해한 듯했다.“그래서 아버님이 병원에서 나온 후의 행방을 알아보고 싶다는 거지?”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이승연은 변호사뿐만 아니라 인맥이 넓어 일을 조사하는 게 유월영보다 수월했다.그래서 그녀가 부탁한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승연은 궁금해졌다.“왜 갑자기 그런 의심이 들었는데?”...그랬다. 너무 갑작스러웠다.유월영은 몇 시간 저의 그 갑작스러운 재회를 떠올리자 마치 그의 몸에서 나던 옅은 송백나무 향이 나는 듯했다. 그녀는 손에 든 물컵을 꽉 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