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유월영은 반강제적으로 차에서 끌려나온다.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서안에서 가장 큰 시장 광장엔 새해를 맞이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화려한 조명과 빼곡한 인파들에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난다.연재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유월영, 그리고 그들 곁으로는 젊은 커플과 화목한 세식구, 그리고 폴짝 폴짝 뛰는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걷는 노부부들이 지나가고 있다.웃음소리, 말소리, 음악 소리로 어우러진 이곳은 시끄러운게 아닌 뜨거운 열기로 북적인다.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 아닌가.광장엔 먹거리들을 파는 이동식 포차도 즐비해 있었다. 그중 한 꼬치구이 집을 지나가고 있을때 별안간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불꽃이 이는데.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 연재준의 가슴팍에 부딪히는 유월영이다. 연재준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고는 고개를 숙여 유월영을 내려다본다.일렁이는 불길이 새하얀 유월영의 두 볼을 밝게 비춰진다. 어느새 저조하고 방황하던 유월영의 얼굴에도 다시금 생기가 돌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불쇼를 감상하고 있다.연재준도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불쇼는 저기 서커스 하는데서도 볼수 있어.”거기엔 서커스 뿐만 아니라 마술 코너도 있었다.처음으로 코 앞에서 앙상한 나뭇가지가 벚꽃 만발한 나뭇가지로 변하는 마술을 본 유월영이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감탄을 금치 못한다.어릴때 봉현군에서 새해를 맞을때에야만 이런 북적이는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을 다름 아닌 연재준과 함께 한다는게 참 묘하다.유월영이 고개를 들어 연재준을 올려다 본다.“사장님도 이런데 와요?”“네 눈에 난 무슨 동굴속에 사는 괴물이야?”연재준이 유월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며 말한다.광장 돌계단에서는 앳된 남자 아이들이 보드타기에 한창이다.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아이도, 땅에 넘어지고서도 아무렇게 일어나서는 아이도 전부 하나같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는다.유월영의 입꼬리도 어느새 제법 올라가 있다. 연재준이 괴물같다는게 아니라 이런 따뜻한 구
연재준은 한 손으로 유월영의 볼을 붙잡고 그녀더러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게 한다. 눈부신 불빛 때문인지 연재준의 눈빛이 전과는 달리 나긋해져 보인다.“전엔 죽기살기로 피하기만 하고 날만 서있는게 미웠는데 지금은 우울해하고 무서워하는게 보기 싫어졌어. 이 정도 이유면 충분해?”그 말에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유월영이다.하루종일 흙탕물에 담겨져 있었던듯한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으며 뭔가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다.“재밌어? 내가 있는 한 너 보고싶을땐 언제든지 볼수 있을거야.”“......”유월영이 다급히 고개를 숙인다. 무슨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호흡이 가빠진다.이때, 광장에서 빠른 리듬의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누가 시작했는진 모르지만 남녀노소 할것없이 전부 춤을 추기 시작했다.연재준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뒤로 한발 물러나 유월영에게 손을 내밀었다.“주말에 춤 춰줄거라고 했잖아, 몇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미리 소원권 쓸게.”아......되새겨보면 늘 화려한 무대 위에서나, 고급진 연회장에서만 춤을 췄던 연재준은 이런 시장 광장에서 춤을 춰 본 적이 없었다.이내 어쩔수 없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은 살짝 유월영을 자신에게로 당겨 춤을 추기 시작한다. 유월영은 그런 연재준을 아까부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다. 먼 훗날 완전히 등 돌려 서로 갈길 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밤 친히 유월영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춤도 같이 줘주며 한 해의 마지막을 함께해준 연재준을 잊지 못할것 같다.그 생각에 하루 종일 참고 또 참아왔던 눈물이 그만 왈칵 터져버리고 만다.연재준이 보기라도 할까 다듭히 고개를 숙여 눈물을 닦아내는 유월영이다.사실 연재준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별다른건 묻지 않은채 유월영이 한바퀴 빙 돌수 있도록 잡은 손을 높이 들어준다.유월영의 어깨에 걸쳐져있는 연재준의 옷은 오직 그를 위해 제작된 옷이라 마침 딱 들어 맞았지만
호텔 맨 위층 펜트하우스 문이 열리고 남자가 여자를 꼬옥 끌어안은채 들어온다.유월영이 입구에 놓인 발판에 발을 헛디뎌 휘청대자 연재준은 아예 유월영을 번쩍 들어올려 현관에 있는 신발장 위에 앉힌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연재준이 유월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잡고는 입을 맞추기 시작하는데.열렬하고도 적극적인 그의 입맞춤은 어쩐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얼음장 같이 차갑고 매정하기만 하던 사장님이 아니라.......그저 온전한 남자 그 자체랄까.자기 여자에게 목말라 있는 남자 말이다.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뒤로 젖혀지고 입이 벌려진 유월영의 뒤통수를 받쳐주던 연재준은 거칠게 돌진해오며 숨 쉴 틈도 주지 않는다. 머리속은 하얘지고 어딘가 아득해지기도 하는 유월영이다. ......허락한 적 없는것 같은데?그냥.......그냥 뭐였더라?혼을 쏙 빼놓는 연재준 때문에 생각의 흐름마저 끊겨버린 유월영의 머리속엔 그저 방금 봤던 불꽃놀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연재준은 자신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유월영을 눈치챘는지 입을 떼고 여리고 얇은 그녀의 눈 밑에 입을 맞춘다.저도 모르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유월영은 바로 코 앞에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보기 드물게 따뜻하고 온순한 남자를 발견한다.요즘, 특히나 오늘은 더욱 그랬다.단 한번도 누군가의 이런 따뜻함을 느껴본적 없던 유월영은 상처 투성이인 자신의 몸에 부드럽게 약을 발라주곤 호호 불어주는듯한 연재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다.이내 잔뜩 경직돼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마치 암묵적인 동의와도 같달까.당연히 그걸 눈치챈 연재준이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린다.웃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웃어보이니 어딘가 쎄해진 유월영은 냅다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허나 연재준이 어디 그런 언행불일치의 기회를 줄 사람인가?그는 늘 그랬듯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기세로 또다시 유월영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춘다.조명도 없는 신발장은 영 아니었는지 냅다 유월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오늘 밤엔 수면제의 도움 없이도 숙면을 취할수 있는 유월영이다.잠들기 직전 그런 생각도 했었다.백유진이 나타난 뒤로는 겨우 몇번 없었던 잠자리도 발악하기만 바빴던 탓에 뭘 느끼질 못했었는데 오늘은 온 몸의 힘을 풀고 그를 받아들이니 편하기도, 심지어는 기분이 좋기도 했다.그렇게 한참을 단잠에 빠져있을때, 유월영은 어딘가 간질간질한 느낌에 비몽사몽 눈을 떴고 연재준이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는걸 발견한다.“뭐하는.......”연재준은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웃어보인다.“깼어?”마치 유월영이 눈을 뜬게 암묵적으로 뭔가를 동의한것마냥 곧바로 발목을 잡고 유월영의 한 쪽 다리를 들어올리는 연재준이다.다음 순간, 유월영은 정신이 번쩍 든다. “하지 마.......”허나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연재준에 의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데.연재준은 이번엔 쉽사리 유월영을 놔줄 생각이 없어보인다.눈물자국으로 흥건해진 베개 위에서 유월영은 저 멀리 지평선을 밝혀오는 아침해를 보고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울면서 부탁한다. 그제야 연재준도 멈추고는 유월영을 안고 욕실로 들어가는데.샤워를 마친 뒤 여전히 비몽사몽 상태였던 유월영은 또다시 이상한 느낌을 받지만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입만 간신히 열고 말한다.“싫어, 제발 그만해......”“한번만 더 빌어봐.”“제발 그만하라고......”그제야 연재준이 유월영의 눈가에 입을 맞춘다.“자 이젠.”그 말은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듯 유월영을 단잠에 빠져들게 했다.연재준은 잠도 안 오는지 샤워를 끝내고 헐렁한 잠옷으로 갈아입은뒤 옆으로 누워 꿀잠에 빠진 유월영을 바라본다.그나저나 아까 “준아”라고 불렀던것 같은데?잘못 들은걸까? 아니면 잘못 부른걸까?연재준 역시 그렇다 할 확신이 서진 않는다.그저 오래도록 힘겹게 공을 들여 결국엔 꽃봉오리를 피워낸 기분일뿐.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연재준의 눈가를 비춘다.잠시 후, 연재준은 유월영의 볼에 붙은 머리를 귀 뒤로 부드
노현재가 고개를 휙 돌린다.잠시 주춤하던 그는 이내 귓볼을 슬쩍 만지며 연재준을 올려다본다.“재준아, 너 유 비서랑 화해했어?”연재준은 한 손엔 유리컵을, 다른 한 손엔 컵받침을 들고 덤덤히 응이라고 답한다.“그럼 왜......”그 말에 연재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데.이내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는 노현재다.이내 뭔가 알겠다는듯 콧방귀를 뀌던 노현재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한다.“아픔과 고통이 제일 좋은 선생님이란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네......그래, 알겠어.”웨이터가 아침밥을 가져다 줬고 노현재는 맛있는거라도 없나 둘러보려 하지만 연재준이 매정하게 선을 그어버린다.“네건 없어.”“참나 안다 알아! 넌 일만 시키지! 밥은 내가 알아서 먹을거거든!”연재준은 아침밥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테이블 위에 차키를 휙 던져주며 말한다.“조심해라.”노현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밖으로 나가려다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안방 쪽을 슬쩍 바라본다.문이 닫기자 마자 여유롭던 표정은 어디가고 떡하니 서서는 담배에 불을 지피는 노현재다.......연재준은 물컵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간다.침대 맡에 서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유월영은 걸어들어오는 연재준을 보며 잠시 주춤하더니 입을 연다.“어제 옷은요?”“세탁 맡겼어.”연재준은 성큼 다가가 유월영의 허리를 감싸더니 이내 자연스레 셔츠 밑단에 가려진 몸 쪽으로 손을 옮겨가며 물었다.“옷 없으면 나 부를줄 몰라? 이러고 나오면 어떡해?”어젯밤에야 잠시 이성의 끈을 잃었으니 뭐든 자연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런 스킨십이 익숙치 않은 유월영이다.“......노현재 있을줄은 몰랐죠, 방해했어요?”연재준이 고개를 숙여 유월영의 입술 가까이에 대고 말한다.“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 보는거 난 싫어.”유월영은 차갑고 도도해보이는 외모때문에 평소에는 늘 냉정하고 이타적이여 보인다.허나 방금 잠에서 깨 조금은 정신을 덜 차린 모습은 길 잃은 꽃사슴마냥 자꾸만 뭔가를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만든다.유
흠칫 놀라는 유월영이다.복잡하게 얽혀있던 여러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허리를 꼿꼿이 편채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는데.“사장님, 잊으셨나본데 전 어젯밤 뭘 허락한 적이 없는데요.”연재준이 또다시 그 익숙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월영을 쏘아본다.“그래? 그럼 안방 쓰레기통에 있는게 뭔지나 보고 와.”어젯밤에 쓰고 버린......어젯밤 뭘 했는지를 귀띔해 주고 있는것 같다.그렇게까지 했는데 허락한적 없다고 말할거냐 뭐 이런 뜻이랄까?이내 유월영은 미니케익 한 조각을 입에 가져가며 중얼거린다.“늘 이런식 아니셨어요? 그래놓고도 딱히 그렇다 할 신분은 안 주잖아요 늘.”그를 따라다녔던 3년동안 유월영에겐 신분이 없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들고 그의 서늘한 얼굴을 마주본다.“사장님이 백유진한테 신분 줬다는 얘기도 들은적이 없네요? 두 사람도 그런적 꽤나 많았을텐데.”이때, 전자레인지가 “띠띠”소리를 내고 연재준은 아무 말 없이 그 곳으로 다가간다.이내 그는 식탁에 돌아와 유월영을 내려다보며 눈에 띄게 짜증섞인 말투로 대답한다.“늘 이런식이라고? 내가 누구랑? 이름이나 대보지 그래. 백유진이랑 그런 적 많다는건 또 어디서 주워 들은거야?”앞 부분 질문엔 그렇다 할 증거가 없었지만 뒷 부분은......“어디서 주워 들은건 아니고 안 했을 리가 없잖아요. 둘이 결혼 말도 오고갔는데.”연재준은 여전히 대답 대신 어두운 표정을 유지한다.유월영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케익 위에 있는 딸기를 포크로 찍어내리는데.그때, 연재준이 갑자기 입을 연다.“그런 적 없어.”이내, 딸기가 접시에서 튕겨나가 버리고 마는데.“단 한번도. 연애도 해 본 적 없거든.”유월영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듯 고개를 번쩍 든다. 6개월이 거의 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그래 뭐, 잠자리야 백유진이 “가정교육 잘 받고”, “혼전순결”을 지킨다는걸 존중해서 그랬다고 치자.근데 애초에 남자, 여자친구 관계도 아니었다?어떻게 그럴수가 있지?그렇게 지켜주고 도와주고 심지어는
“......”그런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거지 미리 준비하라고 공지를 하는 사람이 어디있나?!그 말 한 마디에 유월영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채 식사를 마치곤 로비에 연락해 옷을 가져다달라고 한다.이때, 연재준이 뒤로 훅 다가와 냅다 유월영을 번쩍 안아들며 말하는데.“보상부터 해야지.”진짜 이럴줄은 생각도 못한 유월영이 발버둥을 치며 내려가려고 안달을 낸다.“연재준! 이거 놔! 너 이러면......또 이러면......잠깐만!”마지막 한 마디는 “쾅”하고 닫히는 안방 문에 의해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만다.평소 묵던 고급 호텔과는 비할바도 못 됐지만 펜트하우스답게 방음 하나는 끝내준다.유월영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들리질 않으니.......밖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탄 노현재는 일단 부하들에게 연재준이 맡긴 일부터 처리하도록 지시하고는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독한 담배를 선호하는 그는 담배를 쭉 들이키고는 폐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역류하는 짜릿하고도 독한 느낌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그렇게라도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그 장면을 지워버려야 할것만 같았다.부스스한 머리, 얇은 셔츠 뒤로 비치는 보여서는 안 될 곳과 허벅지를 다 가리지도 못한 셔츠 밑단, 무릎에 남은 멍자국과 여린 발목까지......여느때와 다름없지만 또 어딘가 다른 유 비서였다.같다고 함은 일부러 그런 척을 하는게 아닌 타고난 섹시함이랄까.굳이 뭘 하지 않고 서있기만 해도 하지 말아야 할 상상을 하게 만든다.다르다고 함은 단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훤칠한 키의 유월영에게 남자의 셔츠는 넓고 펑퍼짐하긴 했지만 길이는 겨우 엉덩이 아래까지 닿을락 말락한것이 희고 쭉 뻗은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담배 두 까치를 펴도 도저히 안정이 되지가 않는다. 허나 노현재보다 더욱 진정을 못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고개 숙여 내려다본 노현재가 낮은 소리로 “젠장”이라며 중얼거린다.이윽고 살을 에이는듯한 겨울의
유월영이 깼을땐 이미 점심 시간을 넘긴 때였지만 득달같이 달려드는 연재준 때문에 어느새 밖엔 또다시 땅거미가 졌다.사실 이 펜트하우스는 좋긴 하다. 앞엔 더 높은 건축물이 없어 통유리로 밖을 내다보면 구름 위에 사뿐이 걸터앉은 둥근 달만이 보일 뿐이니 말이다.유월영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비몽사몽해하고 있을때, 연재준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침대 맡으로 다가와 유월영을 잡아끈다.또 하려는건줄 알고 투덜거리며 이불 속으로 숨어드는 유월영이다. 신분이니 뭐니 그딴 소리를 하는게 아니었는데.속 좁고 뒤끝 장난 아닌 연재준은 일부러 그때 유월영을 궁지로 내몰며 다신 다른 여자 있단 말 안 하겠다, 다신 퉁 치자는 말 안 하겠다고 하도록 했다.그만하라고 할때면 연재준은 또다시 유월영의 허리를 붙잡고는 목 마른지 오래인거 믿지 못하는거 아니냐며, 지금 다 내주겠다고 하기도 했다......그걸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백유진과의 관계를 잘 모르겠는건데.묻기라도 했다간 또다시 신분이 어쩌고 저쩌고, 여자 친구여야만 물을 자격 있다고 할것 아닌가?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연재준은 더욱 거칠게 유월영을 다루기 시작했고 여덟개나 들어있던 한 박스는 하룻 밤 사이에 동이 나 버렸다.연재준은 정수리만 내놓고 있는 유월영을 보고는 입꼬리를 스윽 올리더니 이불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러자 유월영은 또다시 이불 깊숙이 머리를 파묻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가버리는데.“자기야, 새해라 밖에 북적이니까 좀 나가보게.”허리며 다리며 온 몸이 쑤셔오는 유월영에게 지금 필요한건 오로지 숙면이다.“싫어요, 안 가.”“연휴 내내 침대에서만 보낼래 그럼?”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저 말은 안 일어나면 며칠 내내 침대에서 안 놔주겠다는것 아닌가.더는 안 된다. 목까지 쉬어버린 유월영이 그 즉시 이불 밖으로 뛰쳐나온다.“아, 아뇨. 지금 당장 가요.”연재준이 일부러 관심하는 척 놀려댄다.“굳이 안 그래도 돼, 내가 너 못 자게 하는것도 아니고.”그래, 기절해서 자는것도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