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유월영은 반강제적으로 차에서 끌려나온다.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서안에서 가장 큰 시장 광장엔 새해를 맞이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화려한 조명과 빼곡한 인파들에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난다.연재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유월영, 그리고 그들 곁으로는 젊은 커플과 화목한 세식구, 그리고 폴짝 폴짝 뛰는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걷는 노부부들이 지나가고 있다.웃음소리, 말소리, 음악 소리로 어우러진 이곳은 시끄러운게 아닌 뜨거운 열기로 북적인다.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 아닌가.광장엔 먹거리들을 파는 이동식 포차도 즐비해 있었다. 그중 한 꼬치구이 집을 지나가고 있을때 별안간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불꽃이 이는데.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 연재준의 가슴팍에 부딪히는 유월영이다. 연재준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고는 고개를 숙여 유월영을 내려다본다.일렁이는 불길이 새하얀 유월영의 두 볼을 밝게 비춰진다. 어느새 저조하고 방황하던 유월영의 얼굴에도 다시금 생기가 돌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불쇼를 감상하고 있다.연재준도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불쇼는 저기 서커스 하는데서도 볼수 있어.”거기엔 서커스 뿐만 아니라 마술 코너도 있었다.처음으로 코 앞에서 앙상한 나뭇가지가 벚꽃 만발한 나뭇가지로 변하는 마술을 본 유월영이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감탄을 금치 못한다.어릴때 봉현군에서 새해를 맞을때에야만 이런 북적이는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을 다름 아닌 연재준과 함께 한다는게 참 묘하다.유월영이 고개를 들어 연재준을 올려다 본다.“사장님도 이런데 와요?”“네 눈에 난 무슨 동굴속에 사는 괴물이야?”연재준이 유월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며 말한다.광장 돌계단에서는 앳된 남자 아이들이 보드타기에 한창이다.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아이도, 땅에 넘어지고서도 아무렇게 일어나서는 아이도 전부 하나같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는다.유월영의 입꼬리도 어느새 제법 올라가 있다. 연재준이 괴물같다는게 아니라 이런 따뜻한 구
연재준은 한 손으로 유월영의 볼을 붙잡고 그녀더러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게 한다. 눈부신 불빛 때문인지 연재준의 눈빛이 전과는 달리 나긋해져 보인다.“전엔 죽기살기로 피하기만 하고 날만 서있는게 미웠는데 지금은 우울해하고 무서워하는게 보기 싫어졌어. 이 정도 이유면 충분해?”그 말에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유월영이다.하루종일 흙탕물에 담겨져 있었던듯한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으며 뭔가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다.“재밌어? 내가 있는 한 너 보고싶을땐 언제든지 볼수 있을거야.”“......”유월영이 다급히 고개를 숙인다. 무슨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호흡이 가빠진다.이때, 광장에서 빠른 리듬의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누가 시작했는진 모르지만 남녀노소 할것없이 전부 춤을 추기 시작했다.연재준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뒤로 한발 물러나 유월영에게 손을 내밀었다.“주말에 춤 춰줄거라고 했잖아, 몇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미리 소원권 쓸게.”아......되새겨보면 늘 화려한 무대 위에서나, 고급진 연회장에서만 춤을 췄던 연재준은 이런 시장 광장에서 춤을 춰 본 적이 없었다.이내 어쩔수 없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은 살짝 유월영을 자신에게로 당겨 춤을 추기 시작한다. 유월영은 그런 연재준을 아까부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다. 먼 훗날 완전히 등 돌려 서로 갈길 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밤 친히 유월영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춤도 같이 줘주며 한 해의 마지막을 함께해준 연재준을 잊지 못할것 같다.그 생각에 하루 종일 참고 또 참아왔던 눈물이 그만 왈칵 터져버리고 만다.연재준이 보기라도 할까 다듭히 고개를 숙여 눈물을 닦아내는 유월영이다.사실 연재준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별다른건 묻지 않은채 유월영이 한바퀴 빙 돌수 있도록 잡은 손을 높이 들어준다.유월영의 어깨에 걸쳐져있는 연재준의 옷은 오직 그를 위해 제작된 옷이라 마침 딱 들어 맞았지만
호텔 맨 위층 펜트하우스 문이 열리고 남자가 여자를 꼬옥 끌어안은채 들어온다.유월영이 입구에 놓인 발판에 발을 헛디뎌 휘청대자 연재준은 아예 유월영을 번쩍 들어올려 현관에 있는 신발장 위에 앉힌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연재준이 유월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잡고는 입을 맞추기 시작하는데.열렬하고도 적극적인 그의 입맞춤은 어쩐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얼음장 같이 차갑고 매정하기만 하던 사장님이 아니라.......그저 온전한 남자 그 자체랄까.자기 여자에게 목말라 있는 남자 말이다.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뒤로 젖혀지고 입이 벌려진 유월영의 뒤통수를 받쳐주던 연재준은 거칠게 돌진해오며 숨 쉴 틈도 주지 않는다. 머리속은 하얘지고 어딘가 아득해지기도 하는 유월영이다. ......허락한 적 없는것 같은데?그냥.......그냥 뭐였더라?혼을 쏙 빼놓는 연재준 때문에 생각의 흐름마저 끊겨버린 유월영의 머리속엔 그저 방금 봤던 불꽃놀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연재준은 자신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유월영을 눈치챘는지 입을 떼고 여리고 얇은 그녀의 눈 밑에 입을 맞춘다.저도 모르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유월영은 바로 코 앞에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보기 드물게 따뜻하고 온순한 남자를 발견한다.요즘, 특히나 오늘은 더욱 그랬다.단 한번도 누군가의 이런 따뜻함을 느껴본적 없던 유월영은 상처 투성이인 자신의 몸에 부드럽게 약을 발라주곤 호호 불어주는듯한 연재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다.이내 잔뜩 경직돼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마치 암묵적인 동의와도 같달까.당연히 그걸 눈치챈 연재준이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린다.웃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웃어보이니 어딘가 쎄해진 유월영은 냅다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허나 연재준이 어디 그런 언행불일치의 기회를 줄 사람인가?그는 늘 그랬듯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기세로 또다시 유월영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춘다.조명도 없는 신발장은 영 아니었는지 냅다 유월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오늘 밤엔 수면제의 도움 없이도 숙면을 취할수 있는 유월영이다.잠들기 직전 그런 생각도 했었다.백유진이 나타난 뒤로는 겨우 몇번 없었던 잠자리도 발악하기만 바빴던 탓에 뭘 느끼질 못했었는데 오늘은 온 몸의 힘을 풀고 그를 받아들이니 편하기도, 심지어는 기분이 좋기도 했다.그렇게 한참을 단잠에 빠져있을때, 유월영은 어딘가 간질간질한 느낌에 비몽사몽 눈을 떴고 연재준이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는걸 발견한다.“뭐하는.......”연재준은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웃어보인다.“깼어?”마치 유월영이 눈을 뜬게 암묵적으로 뭔가를 동의한것마냥 곧바로 발목을 잡고 유월영의 한 쪽 다리를 들어올리는 연재준이다.다음 순간, 유월영은 정신이 번쩍 든다. “하지 마.......”허나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연재준에 의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데.연재준은 이번엔 쉽사리 유월영을 놔줄 생각이 없어보인다.눈물자국으로 흥건해진 베개 위에서 유월영은 저 멀리 지평선을 밝혀오는 아침해를 보고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울면서 부탁한다. 그제야 연재준도 멈추고는 유월영을 안고 욕실로 들어가는데.샤워를 마친 뒤 여전히 비몽사몽 상태였던 유월영은 또다시 이상한 느낌을 받지만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입만 간신히 열고 말한다.“싫어, 제발 그만해......”“한번만 더 빌어봐.”“제발 그만하라고......”그제야 연재준이 유월영의 눈가에 입을 맞춘다.“자 이젠.”그 말은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듯 유월영을 단잠에 빠져들게 했다.연재준은 잠도 안 오는지 샤워를 끝내고 헐렁한 잠옷으로 갈아입은뒤 옆으로 누워 꿀잠에 빠진 유월영을 바라본다.그나저나 아까 “준아”라고 불렀던것 같은데?잘못 들은걸까? 아니면 잘못 부른걸까?연재준 역시 그렇다 할 확신이 서진 않는다.그저 오래도록 힘겹게 공을 들여 결국엔 꽃봉오리를 피워낸 기분일뿐.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연재준의 눈가를 비춘다.잠시 후, 연재준은 유월영의 볼에 붙은 머리를 귀 뒤로 부드
노현재가 고개를 휙 돌린다.잠시 주춤하던 그는 이내 귓볼을 슬쩍 만지며 연재준을 올려다본다.“재준아, 너 유 비서랑 화해했어?”연재준은 한 손엔 유리컵을, 다른 한 손엔 컵받침을 들고 덤덤히 응이라고 답한다.“그럼 왜......”그 말에 연재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데.이내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는 노현재다.이내 뭔가 알겠다는듯 콧방귀를 뀌던 노현재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한다.“아픔과 고통이 제일 좋은 선생님이란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네......그래, 알겠어.”웨이터가 아침밥을 가져다 줬고 노현재는 맛있는거라도 없나 둘러보려 하지만 연재준이 매정하게 선을 그어버린다.“네건 없어.”“참나 안다 알아! 넌 일만 시키지! 밥은 내가 알아서 먹을거거든!”연재준은 아침밥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테이블 위에 차키를 휙 던져주며 말한다.“조심해라.”노현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밖으로 나가려다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안방 쪽을 슬쩍 바라본다.문이 닫기자 마자 여유롭던 표정은 어디가고 떡하니 서서는 담배에 불을 지피는 노현재다.......연재준은 물컵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간다.침대 맡에 서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유월영은 걸어들어오는 연재준을 보며 잠시 주춤하더니 입을 연다.“어제 옷은요?”“세탁 맡겼어.”연재준은 성큼 다가가 유월영의 허리를 감싸더니 이내 자연스레 셔츠 밑단에 가려진 몸 쪽으로 손을 옮겨가며 물었다.“옷 없으면 나 부를줄 몰라? 이러고 나오면 어떡해?”어젯밤에야 잠시 이성의 끈을 잃었으니 뭐든 자연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런 스킨십이 익숙치 않은 유월영이다.“......노현재 있을줄은 몰랐죠, 방해했어요?”연재준이 고개를 숙여 유월영의 입술 가까이에 대고 말한다.“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 보는거 난 싫어.”유월영은 차갑고 도도해보이는 외모때문에 평소에는 늘 냉정하고 이타적이여 보인다.허나 방금 잠에서 깨 조금은 정신을 덜 차린 모습은 길 잃은 꽃사슴마냥 자꾸만 뭔가를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만든다.유
흠칫 놀라는 유월영이다.복잡하게 얽혀있던 여러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허리를 꼿꼿이 편채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는데.“사장님, 잊으셨나본데 전 어젯밤 뭘 허락한 적이 없는데요.”연재준이 또다시 그 익숙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월영을 쏘아본다.“그래? 그럼 안방 쓰레기통에 있는게 뭔지나 보고 와.”어젯밤에 쓰고 버린......어젯밤 뭘 했는지를 귀띔해 주고 있는것 같다.그렇게까지 했는데 허락한적 없다고 말할거냐 뭐 이런 뜻이랄까?이내 유월영은 미니케익 한 조각을 입에 가져가며 중얼거린다.“늘 이런식 아니셨어요? 그래놓고도 딱히 그렇다 할 신분은 안 주잖아요 늘.”그를 따라다녔던 3년동안 유월영에겐 신분이 없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들고 그의 서늘한 얼굴을 마주본다.“사장님이 백유진한테 신분 줬다는 얘기도 들은적이 없네요? 두 사람도 그런적 꽤나 많았을텐데.”이때, 전자레인지가 “띠띠”소리를 내고 연재준은 아무 말 없이 그 곳으로 다가간다.이내 그는 식탁에 돌아와 유월영을 내려다보며 눈에 띄게 짜증섞인 말투로 대답한다.“늘 이런식이라고? 내가 누구랑? 이름이나 대보지 그래. 백유진이랑 그런 적 많다는건 또 어디서 주워 들은거야?”앞 부분 질문엔 그렇다 할 증거가 없었지만 뒷 부분은......“어디서 주워 들은건 아니고 안 했을 리가 없잖아요. 둘이 결혼 말도 오고갔는데.”연재준은 여전히 대답 대신 어두운 표정을 유지한다.유월영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케익 위에 있는 딸기를 포크로 찍어내리는데.그때, 연재준이 갑자기 입을 연다.“그런 적 없어.”이내, 딸기가 접시에서 튕겨나가 버리고 마는데.“단 한번도. 연애도 해 본 적 없거든.”유월영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듯 고개를 번쩍 든다. 6개월이 거의 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그래 뭐, 잠자리야 백유진이 “가정교육 잘 받고”, “혼전순결”을 지킨다는걸 존중해서 그랬다고 치자.근데 애초에 남자, 여자친구 관계도 아니었다?어떻게 그럴수가 있지?그렇게 지켜주고 도와주고 심지어는
“......”그런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거지 미리 준비하라고 공지를 하는 사람이 어디있나?!그 말 한 마디에 유월영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채 식사를 마치곤 로비에 연락해 옷을 가져다달라고 한다.이때, 연재준이 뒤로 훅 다가와 냅다 유월영을 번쩍 안아들며 말하는데.“보상부터 해야지.”진짜 이럴줄은 생각도 못한 유월영이 발버둥을 치며 내려가려고 안달을 낸다.“연재준! 이거 놔! 너 이러면......또 이러면......잠깐만!”마지막 한 마디는 “쾅”하고 닫히는 안방 문에 의해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만다.평소 묵던 고급 호텔과는 비할바도 못 됐지만 펜트하우스답게 방음 하나는 끝내준다.유월영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들리질 않으니.......밖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탄 노현재는 일단 부하들에게 연재준이 맡긴 일부터 처리하도록 지시하고는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독한 담배를 선호하는 그는 담배를 쭉 들이키고는 폐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역류하는 짜릿하고도 독한 느낌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그렇게라도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그 장면을 지워버려야 할것만 같았다.부스스한 머리, 얇은 셔츠 뒤로 비치는 보여서는 안 될 곳과 허벅지를 다 가리지도 못한 셔츠 밑단, 무릎에 남은 멍자국과 여린 발목까지......여느때와 다름없지만 또 어딘가 다른 유 비서였다.같다고 함은 일부러 그런 척을 하는게 아닌 타고난 섹시함이랄까.굳이 뭘 하지 않고 서있기만 해도 하지 말아야 할 상상을 하게 만든다.다르다고 함은 단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훤칠한 키의 유월영에게 남자의 셔츠는 넓고 펑퍼짐하긴 했지만 길이는 겨우 엉덩이 아래까지 닿을락 말락한것이 희고 쭉 뻗은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담배 두 까치를 펴도 도저히 안정이 되지가 않는다. 허나 노현재보다 더욱 진정을 못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고개 숙여 내려다본 노현재가 낮은 소리로 “젠장”이라며 중얼거린다.이윽고 살을 에이는듯한 겨울의
유월영이 깼을땐 이미 점심 시간을 넘긴 때였지만 득달같이 달려드는 연재준 때문에 어느새 밖엔 또다시 땅거미가 졌다.사실 이 펜트하우스는 좋긴 하다. 앞엔 더 높은 건축물이 없어 통유리로 밖을 내다보면 구름 위에 사뿐이 걸터앉은 둥근 달만이 보일 뿐이니 말이다.유월영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비몽사몽해하고 있을때, 연재준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침대 맡으로 다가와 유월영을 잡아끈다.또 하려는건줄 알고 투덜거리며 이불 속으로 숨어드는 유월영이다. 신분이니 뭐니 그딴 소리를 하는게 아니었는데.속 좁고 뒤끝 장난 아닌 연재준은 일부러 그때 유월영을 궁지로 내몰며 다신 다른 여자 있단 말 안 하겠다, 다신 퉁 치자는 말 안 하겠다고 하도록 했다.그만하라고 할때면 연재준은 또다시 유월영의 허리를 붙잡고는 목 마른지 오래인거 믿지 못하는거 아니냐며, 지금 다 내주겠다고 하기도 했다......그걸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백유진과의 관계를 잘 모르겠는건데.묻기라도 했다간 또다시 신분이 어쩌고 저쩌고, 여자 친구여야만 물을 자격 있다고 할것 아닌가?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연재준은 더욱 거칠게 유월영을 다루기 시작했고 여덟개나 들어있던 한 박스는 하룻 밤 사이에 동이 나 버렸다.연재준은 정수리만 내놓고 있는 유월영을 보고는 입꼬리를 스윽 올리더니 이불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러자 유월영은 또다시 이불 깊숙이 머리를 파묻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가버리는데.“자기야, 새해라 밖에 북적이니까 좀 나가보게.”허리며 다리며 온 몸이 쑤셔오는 유월영에게 지금 필요한건 오로지 숙면이다.“싫어요, 안 가.”“연휴 내내 침대에서만 보낼래 그럼?”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저 말은 안 일어나면 며칠 내내 침대에서 안 놔주겠다는것 아닌가.더는 안 된다. 목까지 쉬어버린 유월영이 그 즉시 이불 밖으로 뛰쳐나온다.“아, 아뇨. 지금 당장 가요.”연재준이 일부러 관심하는 척 놀려댄다.“굳이 안 그래도 돼, 내가 너 못 자게 하는것도 아니고.”그래, 기절해서 자는것도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