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이 깼을땐 이미 점심 시간을 넘긴 때였지만 득달같이 달려드는 연재준 때문에 어느새 밖엔 또다시 땅거미가 졌다.사실 이 펜트하우스는 좋긴 하다. 앞엔 더 높은 건축물이 없어 통유리로 밖을 내다보면 구름 위에 사뿐이 걸터앉은 둥근 달만이 보일 뿐이니 말이다.유월영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비몽사몽해하고 있을때, 연재준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침대 맡으로 다가와 유월영을 잡아끈다.또 하려는건줄 알고 투덜거리며 이불 속으로 숨어드는 유월영이다. 신분이니 뭐니 그딴 소리를 하는게 아니었는데.속 좁고 뒤끝 장난 아닌 연재준은 일부러 그때 유월영을 궁지로 내몰며 다신 다른 여자 있단 말 안 하겠다, 다신 퉁 치자는 말 안 하겠다고 하도록 했다.그만하라고 할때면 연재준은 또다시 유월영의 허리를 붙잡고는 목 마른지 오래인거 믿지 못하는거 아니냐며, 지금 다 내주겠다고 하기도 했다......그걸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백유진과의 관계를 잘 모르겠는건데.묻기라도 했다간 또다시 신분이 어쩌고 저쩌고, 여자 친구여야만 물을 자격 있다고 할것 아닌가?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연재준은 더욱 거칠게 유월영을 다루기 시작했고 여덟개나 들어있던 한 박스는 하룻 밤 사이에 동이 나 버렸다.연재준은 정수리만 내놓고 있는 유월영을 보고는 입꼬리를 스윽 올리더니 이불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러자 유월영은 또다시 이불 깊숙이 머리를 파묻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가버리는데.“자기야, 새해라 밖에 북적이니까 좀 나가보게.”허리며 다리며 온 몸이 쑤셔오는 유월영에게 지금 필요한건 오로지 숙면이다.“싫어요, 안 가.”“연휴 내내 침대에서만 보낼래 그럼?”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저 말은 안 일어나면 며칠 내내 침대에서 안 놔주겠다는것 아닌가.더는 안 된다. 목까지 쉬어버린 유월영이 그 즉시 이불 밖으로 뛰쳐나온다.“아, 아뇨. 지금 당장 가요.”연재준이 일부러 관심하는 척 놀려댄다.“굳이 안 그래도 돼, 내가 너 못 자게 하는것도 아니고.”그래, 기절해서 자는것도
극장에서 가져다준 홍차는 입에 닿은 순간엔 달면서도 목넘김은 쓰다. 유월영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말한다.“연재준......”“준이라고 부른거 아니었어?”그 말에 찻잔을 들고있던 유월영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차가 테이블에 쏟아진다.역시나 어젯밤에 들었었구나.“전에도 그렇게 부른 적은 없었는데 언제 그런 호칭은 생각해낸거야?”휴지로 물기를 닦아내 보지만 여전히 테이블 위엔 자국이 남아있다.연재준은 아직도 유월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보통 친구들은 “재준아”, “재준이 형”이라고들 부르는데 “준아”라고 부른건 유월영이 처음이다.“재준아”보다 훨씬 친근해 보인달까.“며칠 사이에 생각해낸거야?”요즘 곁에 있어주며 평소와는 다른 따뜻함으로 대해줬기에 생겨난 애칭인줄로만 아는 연재준이다.사실은 그게 아니다.이 호칭은 벌써 유월영의 가슴 한 켠에 오래도록 자리잡고 있었다. 그를 좋아하고 난 뒤, 어떤 호칭으로 부르면 좋을지를 고민할때 부터랄까?“사장님”은 너무 서먹서먹하고 “연재준”은 너무 딱딱하고 “재준이”는 너무 평범했다.그러면 “준이”가 낫겠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으니까.그때의 유월영은 틈만 나면 종이에 그의 이름을 써내려가곤 했었다.허나 정식으로 입 밖에 꺼내기도 전에 그 날 아침 연재준은 딱딱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넌 비서니까 앞으론 사장님이라고 불러.”하필이면 많고많은 호칭 중에 제일 서먹서먹한 “사장님”이라니.혼자서만 품고 있던 기대와 설렘이 한심해 보이는 순간이었다.유월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할 수 없이 대답했다.“네, 사장님.”하도 사장님, 사장님 거리니 가끔은 두 사람이 정말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저릿해나곤 했었다.그런 날 밤이면 혼자 침대에 누워 공적인 얘기들 사이에 가끔씩 끼어있는 사적인 둘만의 채팅기록을 살펴보며 둘 사이는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며 위안 삼기도 했던 유월영이다.그리고는 그의 연락처 이름을 “준이”라고 저장했다. 이러면 또다시 가
“......”유월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대기 층을 누른다.연재준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서정희 사건같은건 생각않고 편히 쉴수 있었지만 한 이불 덮고 같이 잔다는건 말로 형용할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럽고 이상했다.지난 3년이든, 이번 며칠이든지를 막론하고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잠만 잔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그럴만도 했다.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던 연재준은 오늘따라 자신에게서 눈을 떼질 않는다.“사장님, 이게 훨씬 낫겠어요.”연재준이 콧방귀를 뀐다.12층에 다다르고 유월영이 앞서 나가며 말한다.“사장님 좋은 밤......”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재준은 갑자기 유월영의 팔을 붙잡고 안으로 끌어당기더니 냅다 거칠게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기는 그 짧은 찰나, 연재준은 무서운 기세로 유월영의 입 속을 파고 들더니 완전히 닫기기 1초전 유월영을 놔준다.그리고는 고집스러운 말투로 웨치는데.“식으면 다시 덥히면 되지!”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 유월영이 연재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문은 완전히 닫겨버리고 만다.“......”방금 뭐라는거야? 뭘 다시 덥혀? 무슨 뜻이지?멍하니 서서 아직도 남자의 촉감이 남아있는 자신의 입술을 다쳐보는 유월영이다.이내 유월영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이번엔 진심이라고 믿을거야?......연재준이 올라갔을때, 노현재는 그의 방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드는 노현재다.“재준아.”“언제 왔어? 연락도 없이?”“유 비서랑 밥 먹으러 나갔겠구나 하고 기다린거지, 어차피 별 일도 없으니까.”“유 비서는 같이 안 왔어”라는 말이 입가에서 근질거리지만 다시 목구멍으로 삼켜버리는 노현재다.유월영이 왔는지 안 왔는지는 그와 딱히 상관이 없지 않은가.연재준이 카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노현재는 코를 훌쩍이더니 들어가지 않고 선 자리에서 말을 이어가는데.“별거 아니니까 여기서 말하고 갈게. 주영문이 그러는데 당시 유비서네 집 빚더미에
뭣이라?!유월영이 허리를 바짝 세우며 묻는다.“진짜요?”연재준의 유월영의 휴대폰을 이불 위에 던져주며 눈치를 준다.다름 아닌 이승연에게서 걸려온 전화다.“승연아?”이승연은 유월영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한숨을 푹 쉰다.“드디어 목소리 듣네, 너 이틀 내내 어디 있었던거야? 메시지도 안 받고 연락도 안 받고 호텔 방 찾아가도 없어서 난 또 네가 서정희네 집에......오늘까지 연락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어.”유월영이 눈을 꿈뻑거린다. 이틀 내내 연재준과 함께 있느라 휴대폰이 든 가방은 펜트하우스에 버려두고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거다.“난 괜찮아.”“괜찮으면 다행이야. 맞다, 너 통행금지 풀렸으니까 이젠 자유의 몸이야. 그거 알려주려고 연락했어.”“근데 왜 갑자기 풀린거지?”“남자들이 경찰 조사 받다가 견디지 못하고 결국엔 서정희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폭로했대. 판은 서정희가 짜놓고 두 사람한테 3천만원씩 송금해줬다네. 경찰들이 이미 서정희 데리고 갔거든, 부모들은 변호사 찾아서 보석시키려고 수소문하고 있고.”“......”반전이 이렇게도 빨리 다가올줄은 생각지도 못한 유월영이다.잠시 침묵하던 유월영이 이내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사주 뿐만 아니라 증거까지 조작했잖아. 자살 소동 벌여서 온라인에 퍼뜨리고 일부러 나 공격하게 악플로 선동질하고 개인정보까지 퍼뜨렸어. 이틀 전엔 테러 비슷한 소포까지 받았거든! 그게 다 서정희 짓이잖아! 내가 고소할거야!”이대로 끝날 생각은 없다.서정희는 반드시 유월영이 감내해야만 했던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한다.“법을 무기 삼아서 널 지키는건 나도 찬성이야. 내가 증거들 다 모으면 분명 법정에서도 성립될거고 이젠 서정희가 감옥살이 하게 되겠지.”“너무 고생이 많다.”이승연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한다.“나도 이런 황당한 사건은 또 처음이라.”“그럼 그렇게 하고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해.”유월영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찰나 이승연이 말한다.“잠깐만.”“무슨 일이야?”“휴가
서안에서 신주까지는 차로 네시간 거리밖엔 되지 않는다.서정희라는 크나큰 장애물이 없어지자 더는 걱정할게 없었던 유월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사라진” 이틀동안 놓친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난 뒤 또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차 안 가득한 계피향 때문인지 어느새 차창에 기대 천천히 눈을 감는 유월영이다.선잠에 빠져있던 유월영은 연재준이 손을 뻗어 머리를 받쳐주는걸 느끼고는 눈을 떴다.연재준은 한 손으론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다른 한 손으론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때 유월영이 머리라도 박을까 손으로 머리를 받쳐주고 있다.너무도 당연하다는듯 자연스레 행동하는 연재준이다.그래서 다들 남자들은 마음 있을때랑 없을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하는거였구나.이내 코너를 돌때 유월영은 금방 잠에서 깬듯 눈을 떴다.연재준이 고개를 튼다.“안 자?”유월영이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한다.“네, 거의 다 왔어요?”기사가 대답한다.“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유월영은 이내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척하며 앉아있는다.연재준도 손을 빼내고는 다시 이메일을 읽는데 몰두하는데.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 그들은 봉현군에 도착했고 유월영은 가방을 메고 차에서 내린다.허나 연재준은 딱히 내릴 생각이 없어보인다.“안 내리세요?”연재준은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유월영을 바라본다.“부모님한테 소개라도 해주려고? 뭐라고 소개할건데?”“......”그 생각은 미처 못해본 유월영이다.“그렇다 할 신분 생기면 그때 다시 와야지 뭐.”“......”참 그 놈의 신분을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사장님 얼른 가서 쉬세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연재준은 콧방귀를 뀌고는 차 문을 닫고 휙 가버린다.유월영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차량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마을로 들어간다.허나 코너를 돌았던 차량이 다시 방향을 틀고 연재준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을거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유월영이다.......말도 없이 돌아온 유월영을 가장 반갑게 맞아주는건 엄마 이영화다
모녀 둘은 마을의 오솔길에서 함께 걷고 있다.유월영은 이영화한테 나쁜 소식은 잠시 묻어 두고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다.이영화는 듣더니 기뻐하며 말했다.“네 아빠가 침을 맞으러 가셨으니 우리가 데리러 가자.”“좋아.”유월영은 가정부한테서 유현석이 최근 한 달 동안 한의원에서 침을 놓으며 절뚝거리는 다리를 치료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그녀는 이영화를 따라 시장으로 가서 갈비며 닭, 오리, 생선 등 여러가지 고기와 야채를 사며 장을 보았다.유월영은 자기가 겨우 이틀만 묵으니 너무 많이 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이영화는 어쩌다 한번 온 자식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시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이렇게 많이 장을 봤으니 유월영은 유은영에게 문자를 보내 오늘 밤 조카을 데리고 와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를 보내는 사이 이영화는 콜리플라워를 하나 더 샀고 유월영이 돈을 내려고 했지만 이영화가 자신이 내겠다고 고집했였다. 결국 이영화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유월영은 그저 한 손에 음식을 들고 한 손에는 이영화의 팔짱을 꼭 끼면서 계속 걸었다.이 작은 마을에는 인구가 많지 않아 모두가 가까운 이웃처럼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그녀들이 장을 보는 이 길에서만 해도 네다섯 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이영화는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서서 수다를 떨었고 유월영을 자랑스럽게 소개해 주면서 팔방미인인데다 비서 일도 한다면서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월영은 옆에서 듣는 게 너무 민망해서 서둘러 이영화를 끌고 갔다.“남의 부모님들은 겸손하게 자식 칭찬을 하지 않으시는데 엄마는 왜 이렇게 오버해? 남들이 뒤에서 비웃을까 두렵지 않아? ”이영화는 당당하게 말했다.“우리 집 월영이가 최고지, 예쁘고 일도 잘하고.”유월영은 이영화의 말에 비위를 맞추어줬다.“맞아, 엄마 딸이 젤 잘났어.”이영화의 표정이 살짝 이상해졌다.하지만 유월영은 눈치채지 못하고 길을 찾고 있었다.“엄마, 아빠가 침을 놓는 데가 여기야?”이영화는 대답했다.
연재준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빨리도 오셨네, 모셔 와.”“네.”하정은이 손을 흔들자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르는 경호원이 나타나 그 차를 막았다.하정은이 차 옆으로 가서 몇 마디 했고 곧 차에 탄 사람이 내렸다.역시 윤영훈이었다.윤영훈은 연재준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미소를 살짝 띠었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하정은을 따라왔다.연재준은 카페 야외 테이블 의자에서 앉아 있었다. 윤영훈은 말했다.“연 대표님 요즘 너무 한가하시네요. 서울에 있으시다가 또 여기로 오시고 동해 번쩍 서해 번쩍이세요.”연재준은 말했다.“윤 대표는 친사촌 동생이 경찰에 연행됐는데 도와주지 않고 여기까지 오고 무슨 중요한 일 있나 봐요?”젊고 잘생긴 두 남자가 이 작은 마을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서 한 명은 웃고 한 명은 덤덤했지만 말속에는 신경전이 가득했고 불꽃이 튀었다.윤영훈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맞은편으로 가 앉은 후 다리를 번쩍 치켜올렸다.“사촌 동생은 이모부 이모가 있는데 내 여자친구가 이번에 놀랐을 테니 제가 와서 위로해 줘야죠.”연재준은 말했다.“둘이 사귀기로 했어요?”“거절은 안 했어요.”연재준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나는 너무 많이 거절당했어요.”윤영훈은 비꼬며 말했다.“저와 월영씨 사이의 일인데 연 대표님이 간섭할 자격은 없는 것 같은데요? 지난번에 내가 그녀를 좋아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요? 전 남자친구가 자꾸 나타나서 방해하면 곤란해요.”연재준은 윤영훈을 쳐다보았고 윤영훈은 매우 차갑고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구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연 대표님, 더 하실 말 없으시면 저는 제 예비 여자친구를 찾아가서 가겠어요.”윤영훈이 떠나려 하자 연재준이 말했다.“윤 대표가 그녀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어요.”윤영훈의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 연재준을 돌아보았다.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가 하필이면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생겼네요. 저는 또 어쩔 수
연재준은 검은 슈트를 입고 목에는 짙은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다. 그는 마치 극야의 한 줄기 빛처럼 어둠을 가로질러 오는 듯했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두근거렸다.“...”배가 천천히 기슭에 닿자 연재준은 유월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와 함께 배에 타자는 뜻이었다.그러나 유월영은 움직이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서 그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다시 주동적으로 그에게 마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저 보기만 하였다.연재준은 배를 모는 사부님께 좀 더 앞으로 닿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해안까지 아직 사오십 센티미터 정도 남았을 때 그는 갑자기 훌쩍 뛰어 한 걸음으로 유월영 앞에 섰다!유월영은 갑자기 달려드는 그를 보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고 하였으나 연재준 그런 그녀를 단숨에 품에 안았다.연재준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은 몸매에 검은색 코트를 입어서인지 유월영을 품에 쏙 안을 수 있었다.찬바람에 살짝 시린 유월영의 코가 따뜻한 연재준의 가슴에 부딪쳐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고 그녀는 어색하게 살짝 그를 밀쳐냈다.“왜 아직 안 갔어요?”유월영은 그가 일찍 마을을 떠났다고 생각했다.연재준은 대답했다.“내가 가긴 어디가? 명절 연휴에, 너희 마을의 딱 두 개 밖에 없는 호텔도 자리가 없어서 잘 데도 없어.”...거짓말.그는 연재준이 원하는 곳이라면 사막에서도 묵을 곳을 찾고 더구나 봉현진은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아 연재준은 바로 동해안까지 갈 수 있었다. 반 억짜리 이층 빌라도 있으면서 갈 데가 없다고?유월영은 연재준이 그녀 앞에서 핑곗거리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연재준이 그녀 앞에서 이러는 것이 그녀는 낯설게 느껴졌다. “놔줘요, 동네 사람들이 봐요.”연재준은 턱을 그녀의 머리에 괴고 말했다.“그럼 몰래 나를 너희 집에 데려가. 네 방에 숨기면 다른 사람들이 모를 거잖아.”유월영은 미쳐서인지 그의 꼬드김에 현혹되어서인지 자기도 모르게 연재준의 이런 황당한 요구를 들어주었다.언니와 형부는 조카를 데리고 밥을 먹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