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뗀 소운은 얼마 알지도 못하는 영어 단어들을 총출동시켜 아랫층 파티장 로비에 있던 손님들께 대고 말했다.“Ladies-and-gentlemen! 매우 중요한 사안 하나를 선포하려고 합니다! 다들 잘 들으세요! 저와 루……“어디서 솟아나온 용기인진 모르겠지만 루장월은 한 손으로는 문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필사적으로 그를 뿌리치며 끌려나가지 않으려 용을 썼다.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뿌리침에 소운은 밖에 있던 복도로 내팽개 쳐져서는 털썩 주저 앉아버린다. 하마터면 천장을 보며 벌러덩 자빠질 뻔했다. 아래층에서는 손님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너도나도 까치발을 들어 무슨 일이라도 났는지 올려다보고 있었다.루장월은 얼른 두 발자국 뒷걸음쳤고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손님들은 그녀를 못 본것 같다.침착함을 되찾은 그녀가 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농담도 적당히 하셔야죠!““저랑 도련님 알게 된지도 얼마 안 됐는데 혼사를 논하다니 이건 말도 안되죠! 전 도련님이랑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제가 나가서 사람들한테 다시 한번 말할 수도 있어요.“그녀의 이런 태도에 소운의 체면은 이미 구겨질대로 구겨졌다.바닥에서 간신히 일어난 소운은 곧장 그녀를 덮치며 잡을 기세였다.“너……”재빠르게 피하며 겨우 두 발자국 뒷걸음질 친 그녀의 어깨가 뒤에 있던 누군가에게 부딪쳤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뒤 돌아본다.문연주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소운의 앞을 가로 막았다.“이 지경까지 망신 당하고도 아직 부족한가 봐?“그의 아버지가 차갑게 웃으며 말한다.“넌 장월이 마음에 안 든다며? 그럼 누구랑 결혼하든 너랑 무슨 상관이지?“소운이 중얼거린다.“그러니까! 연주 형은 백유랑 결혼한다고 안 했나? 그럼 장월은 나한테 줘야지, 공평하게 한 사람 하나씩!“한 사람이 하나씩이라. 루장월이 믿기지 않는다는듯 물었다.“도련님 절 무슨 시장에서 파는 배추포기
문연주는 확실히 그런 마음이 훅훅 바뀌는 정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3년동안 곁에 있을때 만큼은 그에겐 오직 그녀 한 사람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백유의 전통을 존중해 혼전 거사를 치르지를 못하니 그녀라는 이 도구를 찾아와 욕구를 해소하려는게 틀림없다. 그 날 그가 백유의 전통을 칭찬하며 앞에 덧붙였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가정교육이 잘 됐어.“뻔하다. 그의 마음 속에 그녀는 가정 교육이 잘 된 모범소녀가 아니였겠지. 그러니 군말 없이 3년 동안이나 자신을 따라다닌 사람에 의해 걸레 마냥 아무렇게나 버려진게 아닌가.차라리 먼저 떠난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결혼해 아이를 낳는거와는 상관이 없어졌으니.아이 출산이라……루장월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복부를 감싸쥐었다. 콕콕 찌르는 듯한 심장의 고통이 고스란히 눈가로 전해져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쓰디쓴 눈물의 맛을 맛봐야했다.……문연주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백유를 아파트로 데려다 주며 신신당부했다.“밤길 조심하고 가서 얼른 쉬어.“백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을 열어 한 쪽 발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아쉬운 듯 연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사장님 단지에 가로등 하나가 고장 나서 엄청 어둡거든요. 조금 무서워서 그러는데 저 데려다 주시면 안될까요?“문연주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는 말했다.“내가 그냥 데려다 주기만 했으면 해?“백유의 두 볼이 화끈 달아오른다.“이렇게 늦었는데 사장님 차 끌고 돌아가시기도 힘드시잖아요. 아니면 오늘 밤……“여기까지 암시했으면 뜻은 이미 뻔했다.문연주가 그녀를 바라본다.“너희 어머니가 함부로 남자들이랑 가깝게 지내지 말라 하셨다고 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나?“백유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근데 사장님 저랑 결혼할 거라면서요. 그럼 저희 함부로는 아니잖아요.“전에 그녀는 알게 모르게 자신은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암시를 해왔었다. 필경 남자들이란 얻
문연주는 끝까지 엽혁연의 의견을 수긍할 건지 안 할건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은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그제야 헤어졌다.엽혁연이 서궁에서 그냥 잠드려고 하자 문연주는 더럽다며 서궁의 웨이터들을 시켜 그를 차에 태워 동해안까지 데려가도록 했다.걷는것도 비틀대는 걸 보니 그는 이미 7,8할은 취한듯 하다. 그런 그를 웨이터들이 조심히 부축해 윗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문연주는 소파에 눕다싶이 하고는 손으로 이따끔씩 저려오는 태양혈을 짚었다.웨이터는 그가 가고 나서 무슨 일이라도 생겨 책임을 묻게 할까 두려웠는지 우물쭈물하며 물어왔다.“저 문 선생님, 문 선생님? 제가 선생님 보모 분 데려와서 선생님 케어하시라고 할까요? 아니면 선생님 집 술 깨는 약은 어디 있으세요? 제가 선생님 도와 가지고 올까요?“문연주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내 던졌다.“루장월한테 전화 해서 여기 오라고 해.“간 큰 웨이터는 그의 연락처를 뒤져가며 “루장월“을 찾아냈다.그녀에게 연락을 해본다.처음엔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기야 새벽 두시가 다 돼가는데 상대도 아마 잠들었겠지.웨이터가 또 한번 연락을 한다. 통화 연결음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전화기 너머 비몽사몽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딱 들어도 금방 단잠에서 깬 것 같은 목소리였다.“……누구세요?”웨이터가 다급히 말했다.“안녕하세요, 루장월 아가씨신가요?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문 선생님께서 술에 취하셨거든요. 지금 동해안에 계신데 아가씨께서 와주셨으면 해서요.“루장월은 그제서야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화면을 확인했다.과연 문연주가 맞았다.단잠을 방해받아 깨서 습관적으로 받다보니 누군지도 확인을 안 했던거다.그녀는 별안간 조용해지더니 장장 1분을 묵묵부답 상태를 유지했다.웨이터가 소리를 쳐본다.“루 아가씨, 아직 듣고 계신가요?“이윽고 전화가 바로 끊겨버렸다.당황한 웨이터가 바로 다시 연락을 취해봤지만 이번엔 통화중이라는 시스템 음성이 흘러나왔다……그는 어찌할 바
생일 파티 그 후, 소운은 온갖 핑계를 대가며 루장월을 만나거나 식사라도 한 끼 하려 했으나 그녀는 모두 묵묵부답이었다.몇 번이 지나니 소운도 그녀가 마음을 굳힌 걸 알아챘는지 더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하긴 평소에도 남들에게 떠받들려 살아온 재벌집 아드님이 몇 번이나 고배를 맛봤으니 흥미가 떨어진 만도 했다.그 날 마트에서 장을 보던 루장월은 그가 인플루언서와 함께 있는 걸 보게 됐다. 그도 분명 루장월을 봤지만 못 본 척 인플루언서를 감싸 안고는 차에 올라탔다. 그들의 이 인연줄은 그렇게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마구잡이로 끌어들이려 하던 소운이 없으니 루장월은 그 무리들과 실질적으로 멀어져갔다. 자연히 그들의 근황 역시 알 수가 없었다.교서서는 그녀의 화장대 위에 앉아서 수다스럽게 말했다.“내 사무실 동기 하나가 그 무리랑 자주 어울리거든. 그 날 어느 재벌집 백수한테서 들은건데 이사장님은 백유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셔서 조용히 내보냈대. 문연주한테는 어디로 보냈는지도 안 알려주고 말이야. 문연주는 최근 항상 저기압이라던데.“루장월이 전혀 몰랐던 일이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가 말했다.“그래?”잘 생각해보면 그리 의외도 아니었다.문연주의 아버지는 아직 완전히 뒤로 물러 나신게 아니었기에 여전히 본인의 세력이 있었다. 그 날 문연주가 백유와 결혼하겠다고 했던게 그의 마지노선을 건드렸고 그렇게 어쩔수 없이 둘을 떼어놨을것이다.“후기도 있는데 한 번 알아맞춰봐. 문연주는 또 새로운 대학생 비서를 곁에 들였어, 밸리 댄스 추는 애로다가. 전에 백유랑 똑같이 두 사람은 같이 들어갔다가 같이 나와.“교서서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내 생각에 문연주는 이사장님을 약 올리려고 저러는거야. ‘백유를 보내면 난 또 다른 백유를 찾아오겠다, 어차피 널린 게 대학생인데.‘ 이런 심리랄까.“몇 십 초간의 침묵을 깨고 그제야 루장월이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우리랑은 상관 없잖아.“그러면서 삐뚤어진 아이라인을 지우고 다시 그리고는
면접관의 충고는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해주는 거였다.전에 한 대형 공장 프로젝트 담당자가 계약 만료 임계점에서 다른 회사와 접촉을 진행한 뒤 바로 이직하려고 했다는 뉴스를 접한적이 있었다.결국엔 진지하게 업무에 임하지 않은 죄, 그 자리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히지 않은 죄, 회사에게 거액의 손실을 안긴 죄로 고소당하고 말았다.이건 순전히 직원에게 죄를 물고야 말겠다는 전 직장의 고의성이 다분한 행위였다. 법정 싸움은 징장 2년동안 지속됐고 결국 직원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건에 할애한 그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바닥쳐 버린 명예는 완전히 그를 고립시켜 버렸다.루장월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저도 알고 있어요.“식사가 끝난 뒤 그들은 바로 헤어졌다.식당 화장실에 갔던 루장월은 벽 하나를 사이 두고 우연히 밖에서 두 웨이터들이 하는 말을 엿듣게 됐다.“너 문 사장님 옆에 있던 그 여자 봤어? 뭔가 꼼수가 많아 보이던데.““맞아 맞아 맞아, 나도 봤어. 사장님 비서 같던데 술 잔을 막아도 모자랄 판에 쉴새없이 술 따라주고 있었어. 꼭 술 안 취하는게 두려운 것처럼 말야.“웨이터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당연히 거하게 취하게 만들어야지. 안 그러면 어떻게 사장님 침대에 오를 수 있겠어? 요즘 어린 여자애들 진짜 대단하다.““쉿! 가자 가자. 또 술 가지러 가야 되잖아.“그들이 간 뒤에야 루장월은 칸에서 나와 손을 씻고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았다.면접관의 말이 생각나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그 두 웨이터들을 따라 문연주의 독방에 들어갔다.독방이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루장월은 지나가는 척하며 내부를 슬쩍 들여다 봤다.비서는 문연주 바로 옆에 있었다. 문연주의 얼굴엔 취기가 다분했다. 손으로는 턱을 괴고 있었고 눈빛은 무심해보였다. 고객들과 얘기 나누는 그의 입가엔 평소엔 보기 힘들었던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다.금방 술잔을 내려놓은 그에게 비서는 다시 술을 따랐고 문연주는 또 술잔을 들어올렸다.평소의 문연주라면 업무 시간에
기사님 말이 맞았다.문연주가 탄 그 차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호텔이었다.동해안 역시 시중심인데 문연주가 집이 아닌 호텔로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 해답은 하나 뿐——비서가 문연주가 취한 틈을 타 자기 마음대로 데리고 온게 아닌가.택시값를 내고 차에서 내린 루장월은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비서가 그를 부축해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있았다.비서가 이 기회를 잡아 승진을 하려는건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건지 확신이 서지 않은 그녀는 계속해서 뒤따라 가보기로 했다.그녀는 가는 길이 겹친 호텔 투숙객인 것처럼 위장해 그들을 따라 방문 앞에 도착했다.차까지 타고 온 문연주는 술기운이 더 올라왔는지 완전히 취한것 같아보였다. 발걸음은 거의 질질 끌다 싶이 했고 온 몸은 완전히 비서에게 맡긴 상태였다.왜소한 비서에게 180 남짓하는 거구의 그를 부축해 걷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방문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 툭 밀기만 했다.루장월은 재빠르게 한쪽 발을 내밀어 문이 완전히 닫기지 않게 막았다. 다행히 비서는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그녀는 조심스레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가 현관앞에 서있었지만 여전히 들키진 않았다.비서가 문연주를 침대에 눕히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문 사장님 너무 무거우셔서 제가 숨도 못 쉴 뻔했잖아요~“거하게 취한 문연주는 불빛에 눈이 따가웠는지 팔을 눈 위에 얹어놓고 있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그의 입술은 꽉 깨물어져 있었다, 매우 불편해 하는 게 눈에 보였다.그랬더니 비서가 말한다.“사장님 어디 불편하세요? 슈트가 너무 꽉 끼시죠, 제가 벗겨드릴게요~“그의 옷을 벗겨준다던 비서는 먼저 자기 옷을 벗더니 이내 단추까지 풀어헤치고는 까만색 속옷을 드러내며 한쪽 무릎을 끓어 침대 위로 올라가 문연주의 넥타이를 풀었다.루장월이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만약 그 사람 침대 위로 올라가 놓고 내일 아침 술에 취한 사장님이 널 강압적으로 그랬다고 고발해 책임을 물을 생각인 거라면 거기에 대
루장월은 고개를 돌려 재빠르게 입을 피했다. 허탕을 친 문연주는 끝가지 간다는 기세로 다시 끈질기게 쫓아왔다.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던 루장월이 뭔가를 잡았다.그 순간, 치익——코를 찌르는 하얀 연기가 문연주의 눈 앞에서 터진다.순간 눈을 질끈 감은 문연주는 루장월에게서 떨어져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거의 동시에 찾아온 눈을 찌르는 듯한 고통과 목이 찢어지는 듯한 열감에 문연주는 그만 참지 못하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켁!켁켁!루……켁켁!루장월!“루장월의 상황 역시 그리 좋지는 않았다.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에 상대에게 뿐아니라 본인에게도 고스란히 고통을 줬다. 다행히 그녀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얼른 눈을 감고 숨을 참았기에 다량의 기체를 흡입하는 건 막을 스 있었다.그녀 역시 기침을 해대며 신속히 침대에서 내려와 연기 속을 빠져 나왔다. 욕실로 달려 간 그녀는 깨끗한 물로 입가와 눈을 씻어냈다.——그건 다름 아닌 방호 스프레이였다.루장월이 외출 시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던 방호 용품이었지만 이걸 처음으로 쓰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욱이 문연주에게 말이다.그녀가 흡입한 기체는 그 양이 많지 않았기에 조금만 숨을 돌려도 금방 괜찮아졌다.하지만 문연주는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그는 쉴새없이 기침을 하며 루장월이 욕실로 간 사이 침대 끝자락 카펫에 주저 앉아 있었다, 주위엔 온통 물병을 엎어뜨린 채로.그는 아마 물 마시는 걸 통해 호흡기 내의 열감을 낮추려고 하는 것 같다.그녀의 발자국 소리에 문연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으나 그 지경까지 가서도 끔찍하게 휘몰아치는 그의 감정을 제어하진 못했다.이대로라면 산 채로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것만 같다.루장월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사장님 취하지도 않으셨네요.“진짜 취한게 맞았더라도 지금은 완전히 술에서 깼을거다.“뭐 필요하시면 알아서 전화하세요. 전 이만 갈게요.“그러면서 땅에 떨어진 가방을 주어 나가려고 한다.문연주의 말 한마디
루장월이 병상 앞으로 다가간다.“사장님 혹시 제가 수액 맞는거 지켜보시길 원하시면 저 여기 남을게요.“문연주가 휴대폰을 들더니 타닥타닥 몇 글자를 타자해 보인다.그리고는 그녀에게 보여주는데.“마음 약해졌나 보네?”마음 약해졌다 해도 좋고, 그의 복수가 두렵다 해도 좋다. 아무튼 하룻밤 곁에 있어 준다 해서 살점이 뜯겨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라도 갚아준다 생각하면 되는거다. 그녀가 생리통으로 쓰러졌던 그 날도 그가 병원에서 밤새 그녀를 지켜줬으니까.“루장월이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시간 늦었어요. 사장님 일찍 주무세요.“문연주의 목은 미칠 정도로 아파서 침 넘기기도 힘든데 어디 잠이나 올까?그가 또 타자를 해 보여준다.“너 오늘은 성씨 자본 쪽 사람이랑 만나는건가?”그 날 식당에서 그녀를 본 걸까? 루장월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문연주는 몸을 뒤로 기울이며 침대 머리에 기댄다.그땐 이미 새벽이었는지라 입원 센터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들 역시 경황도 없이 온 거라 다인 병실에 들게 됐다. 다른 환자들을 위해 병실 조명은 이미 전부 꺼진 뒤였고 남은 건 어둡고 누런 천장 조명 뿐이었다. 불빛에 가려진 그의 얼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유난히 조용하고 차갑다. “신청을 떠나려고?”“......”사실 글로는 사람의 어조와 감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걸 보는 순간 루장월은 문연주가 그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말하는게 그대로 느껴지며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불안을 못 이겨 그녀의 눈꺼풀이 몇 차례 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건 제 친구예요.”문연주가 비웃어댔다.그는 기다랗고도 골격이 명확한 손가락으로 빠르게 타자를 한다.“다리 다쳐서 병가 내고 출근 안 하더니 경찰서에, 스파에 파티에 친구까지 만나네. 루비서는 상황 봐가면서 아픈가 봐.”루장월의 두 눈이 찰나 잠깐 빛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연주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휴대폰을 내려놓고 누워버렸다.그가 두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