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장월이 병상 앞으로 다가간다.“사장님 혹시 제가 수액 맞는거 지켜보시길 원하시면 저 여기 남을게요.“문연주가 휴대폰을 들더니 타닥타닥 몇 글자를 타자해 보인다.그리고는 그녀에게 보여주는데.“마음 약해졌나 보네?”마음 약해졌다 해도 좋고, 그의 복수가 두렵다 해도 좋다. 아무튼 하룻밤 곁에 있어 준다 해서 살점이 뜯겨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라도 갚아준다 생각하면 되는거다. 그녀가 생리통으로 쓰러졌던 그 날도 그가 병원에서 밤새 그녀를 지켜줬으니까.“루장월이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시간 늦었어요. 사장님 일찍 주무세요.“문연주의 목은 미칠 정도로 아파서 침 넘기기도 힘든데 어디 잠이나 올까?그가 또 타자를 해 보여준다.“너 오늘은 성씨 자본 쪽 사람이랑 만나는건가?”그 날 식당에서 그녀를 본 걸까? 루장월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문연주는 몸을 뒤로 기울이며 침대 머리에 기댄다.그땐 이미 새벽이었는지라 입원 센터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들 역시 경황도 없이 온 거라 다인 병실에 들게 됐다. 다른 환자들을 위해 병실 조명은 이미 전부 꺼진 뒤였고 남은 건 어둡고 누런 천장 조명 뿐이었다. 불빛에 가려진 그의 얼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유난히 조용하고 차갑다. “신청을 떠나려고?”“......”사실 글로는 사람의 어조와 감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걸 보는 순간 루장월은 문연주가 그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말하는게 그대로 느껴지며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불안을 못 이겨 그녀의 눈꺼풀이 몇 차례 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건 제 친구예요.”문연주가 비웃어댔다.그는 기다랗고도 골격이 명확한 손가락으로 빠르게 타자를 한다.“다리 다쳐서 병가 내고 출근 안 하더니 경찰서에, 스파에 파티에 친구까지 만나네. 루비서는 상황 봐가면서 아픈가 봐.”루장월의 두 눈이 찰나 잠깐 빛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연주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휴대폰을 내려놓고 누워버렸다.그가 두
문연주는 이미 샤워를 끝내고 전신 거울 앞에서 세월아 네월아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휴대폰은 아무렇게나 옷장에 처박아 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장월의 귀엔 그저 단단한 재질의 셔츠 원단이 스칠 때 그 삭삭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너무 익숙한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이다.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엔 이미 그 장면이 영화처럼 자동 재생되니까.그는 블랙 셔, 블랙 슈트 바지 같은 블랙을 좋아한다. 유난히 그의 쭉 뻗은 길쭉한 몸매를 부각시키기도 하거니와 카리스마 역시 더욱 차가워 보이도록 해주기 때문이다.그는 늘 셔츠 단추를 잠그고는 턱을 들어 옷깃을 정리한다. 그의 턱선은 옷깃 못지 않게 날렵하고 뚜렷하다. 넥타이 매듭 역시 문씨 집안 계승자 다운 가장 전통적인 윈저 매듭이다.그는 또 시계함 속에서 정성껏 시계를 고를게 분명하다......잠깐!루장월은 두 눈을 감고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에 대한 너무 많은 기억들의 그녀 머릿속에 자리잡은 탓에 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그녀의 생각들을 꼬이게 했다. 루장월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사장님.”문연주는 옷장을 열어 줄지어 걸린 양복 중에서 아무렇게나 한 벌을 집어들곤 말했다.“동해안으로 돌아와. 차고에서 차 꺼내와서 나랑 같이 고객 만나러 가야 하니까.”그는 나무 옷걸이를 도로 걸고 겉옷을 챙겨입은 뒤 휴대폰을 집어들고는 계단을 내려가며 옷마디를 정리했다.“루비서, 마지막 일주일 본인 직책에 최선을 다해.”루장월이 두 눈이 반짝 빛난다. 그가 마지막 한 주라고 말했다. 그 말인 즉 이번 주가 끝나면 가도 된다는 건가?그녀가 재차 확인한다.“사장님 말씀은 일주일 뒤면 정상 퇴직이 가능하다는 건가요?”문연주가 말한다.“15분 준다. 당장 내 눈 앞으로 튀어와.”다른 면에서 어떤지는 잠시 제기하지 말도록 하자. 사실 문연주에겐 반발할 필요가 없어보인다.루장월은 믿는 구석이 생긴 느낌이다. 한 주일이면 한 주일이겠지, 말만 바뀌지 않는다면 조
그가 한 이 말의 뜻은……루장월은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잡고는 재빨리 백미러를 흘겨본다.“그 비서 진짜 진 사장님 사람이에요?“어젯밤 잠을 설친 문연주는 불편한듯 눈꺼풀을 지그시 감고 있는다. 무쌍인 그는 겉으로만 봐도 과감하고 차가워보였다.“스파이 꽂는 방식은 그닥 고집 스킬이 아니었는데 미인계를 쓴 건 꽤나 괜찮았지.“확실히 괜찮긴 하다. 고른 사람 모두 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으니.루장월이 짐작하건대 상대는 아마 어떠한 방법을 통해 문연주가 그의 아버지와 백유의 일로 틀어진 걸 알고 조치를 취해 비서를 데려온 것 같았다.비서에게서는 백유의 느낌이 물씬 났다. 그래서인지 문연주는 한눈에 그녀를 눈여겨봤고 심지어는 그녀를 의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기까지 했다.진짜 “중독적인 사랑”이네.루장월은 입을 빼죽 내밀었다. 사장님 요구사항이신데 하란 대로 할 수 밖에.그녀가 사무적으로 대답한다.“제가 최선을 다해 해결할게요.”문연주가 눈을 뜨고 그녀를 훑어보더니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그리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약속 장소에 가니 비서실의 다른 한 비서가 이미 팀을 이끌고 문어구에서 대기중이었다. 팀원들 중엔 그때 비서도 있었다.비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고개를 푹 숙인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본인의 계획이 이미 들통난 걸 알아서겠지.담판이런 말 그대로 핵심을 직격하는 것이다. 루장월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비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맨 뒤에서 걸어왔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진 사장님이 무슨 조건을 내걸었어요?”비서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루장월이 이어서 말했다.“당신은 진 사장님이 문 사장님 곁으로 보낸 사람이에요, 문 사장님도 이미 다 아셨고요. 하지만 사장님이 당신한테 꽤나 흥미를 느끼시더군요. 진 사장님이 얼마를 드리겠다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저희는 그 두배를 드릴게요. 본인이 저희 쪽으로 이직할 생각먼 있다면요.”비서가
루장월이 재빨리 일어나선 비서를 본인 뒤로 데려왔다.“진 사장님 손찌검하시는 것도 위법인거 아시죠? 응당 비서가 저희 쪽으로 넘어온 걸 ‘축하’해 주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몰래 상업 스파이 심으신 것도 엄연히 따지면 죄죠. 사장님 아무리 돈 많이 버신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요, 감옥에서는 쓰지도 못할텐데요!“”……“결국 진 사장은 이 악물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는 떠나기 전 잊지 않고 비서를 향해 ”너 딱 기다려“라며 막말을 퍼부었다. 딱 봐도 이미 제대로 눈 밖에 난 것 같다.비서가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끼며 문연주 앞으로 다가갔다.”문 사장님……“비서는 사실 이 담판을 이길 수 있었던 일등 공신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뺨까지 맞았으니 말이다.어떻게 보면 이 뺨은 문연주를 대신해 맞은걸지도 모른다.루장월은 문연주가 그녀를 잘 ”위로“ 해주길 바랬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먼저 나가라는 눈치를 주고는 그 둘에게 자리를 내줬다.모두 식당 밖에서 기라리고 있는 사이 그녀의 동료가 그녀에게 눈빛을 보낸다. 마치 비서와 사장이 그렇고 그런 사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루장월은 그저 손을 입에 갖다대며 ”쉿“하는 손짓만을 해보였다.동료는 여전히 문 사장의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장월아 너 퇴사 안 하는거야 아니면?”“퇴사 하겠다고 했으면 당연히 가야지, 남아버리는 건 직장 금기잖아. 그랬다간 보스한테서 어떤 타격을 받을지 몰라.“루장월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말했다.”난 인수인계만 끝내고 다음 주엔 떠날거야.“적어도 반시간에서 40분은 걸릴 줄 알았더니 5분도 채 안돼서 문연주와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별다른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루장월은 조용히 차 믄을 열었다.문연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루장월 곁을 스쳐가며 그녀를 바라봤다.“괜찮은 방법이었어.”아마 그녀가 성공적으로 비서를 포섭한 걸 ”칭찬“하는 것일거다.루장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연주가 뒷좌석에 앉자 비서도 쭈볏쭈볏 따라 들어와서는 또 그 애
잠시 후 루장월은 문을 열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다른 두 동료 비서들은 그녀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보고는 호기심에 차 물어봤다.“장월아 왜 그래? 사장님이 너 욕하셨어?”“아니.”“그럼 너 표정이 왜 그래?”루장월이 중얼댄다.“지금 생각 중이야. 요즘 졸업 시즌도 아닌데 나 어디가서 대학생 찾지.…..”대학생 찾는 건 문제가 안됐다. 문제는 문연주가 원하는 사람은 대학생이 아니라 대학생 같이 청순하고 맹한 성격에 그에게 의지할 만한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다.제일 중요한 건 그와 ”관계“ 잘전을 할 의향이 있는지였다. 그러니 이건 그냥 구인 정보를 올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이 일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님을 느낀 루장월은 자리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신청대학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때마침 그녀가 가던 날은 신청대학교 개방일이어서 신분증만 등록하면 들오갈 수가 있었다.그녀가 교수 청사를 빙 둘러본다. 대학 시절도 벌써 한참이나 지난 것 같아 낯설게만 느껴진다……허나 그녀는 이제 스물 다섯.그도 그럴 것이 3년동안 하도 많은 일이 있었어서 너무 많은 감정과 정력을 할애한 바람에 지난 시절을 회억할 여유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엔 별안간 먼 시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오스만투스 나무 아래 서있는 그녀가 고개를 들자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비친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루장월은 눈을 감고 미풍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는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무슨 일이 일어날진 꿈에도 모른채……“저기! 거기 여성분! 빨리 피해요!”누군가 소리를 친다.눈을 뜬 루장월이 눈 앞으로 농구공 하나가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는게 보였다.그녀는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는 각 잡고 한방에 공을 차 보냈다,축구공마냥 말이다.운동장에서 공을 치던 남학생들중 몇명은 공을 따라, 몇명은 그녀에게로 달려왔다.달려온 남학생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며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괜찮으세요? 저희 공이 빗나가
작년 비운 연회에서 그녀는 몸을 돌리다 그만 한 신사와 부딪친 적이 있었다. 재빨리 반응하긴 했지만 이미 상대의 소매를 젖게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는 성격이 정말 유했고 전혀 그녀의 부주의함을 나무라지 않았었다.셔츠 값을 갚겠다던 그녀를 몇번이나 거절하던 그는 루장월의 고집에 결국 할 수없이 돈을 받았다.돈을 받았으니 깨끗이 정리됐다 생각한 루장월은 이 일을 더이상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가 말을 꺼내니 다시 그 날 생각이 났다.루장월은 그제야 심 교수를 자세히 들여다 봤다.그는 젊고 예쁘장한 외모에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이 이었다, 그렇다고 병적으로 창백하게 흰 건 아닌.금색 뿔테 안경 뒤로 보이는 까맣고 긴 눈썹에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은 마치 손을 뻗어 시냇물을 어루만질때의 그 차갑지만 뼈 시리지 않은, 편안하고 쾌적한 느낌을 방불케 했다.더 아래로 내려가 오똑 솟은 콧대에 연한 입술, 그리고 곧게 뻗은 턱선은 따뜻하고 무해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루장월은 또 그의 귀에서 반짝이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다시 보니 그제야 안경줄임을 알았다.사실 안경줄은 아주 “매혹”적이다.지적이면서도 사람을 끌리게 만듬을 형용할 만한 단어는 아마 “잘생긴 변태“밖에 없지 않을까.루장월은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능하다, 그래봤자 3초 5초 정도지만. 그리고는 자연스레 악수를 건네며 말한다.”안녕하세요, 심 교수님.“그는 악수를 받아 주지 않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사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학생들 따라 심 교수라고 부르는거 아닌가요, 그래도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죠——저는 서청 심씨 일가의 넷째 심소흠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루장월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단 한번도 그가 심씨 일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심씨 일가가 서청에서의 지위는 문씨 일가의 신청에서의 지위와 같이 유일무이한 것이었다.그녀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심씨 일가의 도련님이 대학교 교수님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실례가 많았습니
심소흠은 겨울 쿨톤이 틀림없다. 거기에 예쁘장한 이목구비까지 더하니 반달눈을 하고 웃을때면 마치 학생 시절 덕지체 어느 하나 뒤처지는데 없는, 그 누가 물어보는 문제라도 성심성의껏 대답해 줄것 같은 워너비 선배같아 보였다.음, 심소흠은 학생 때 아마 이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선생님이 됐겠지.“……제 카톡 닉네임 때문에 교수님 웃으신거예요?”그개 아니라면 그는 왜 갑자기 이렇게 웃고 있는걸까?근데 루장월의 닉네임은 꽤나 정상적인 닉내임이었다. “Re.”, re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영어 접두사로 “다시”와 “또 한번”의 뜻을 갖고 있다. 문연주와 헤어지고 나서 고쳐 쓴거니 다시 시작, 다시 새출발이라는 뜻이었다.심소흠이 주먹으로 입을 막아 가볍개 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아까 휴대폰 안 가지고 와서 카톡 추가 못한다던 사람이 누구였나 해서요.”“……”루장월이 무념무상으로 답한다.“심 교수님 설마 제가 어린 친구 거절하려고 그런거 모르시는건 아니시죠?”심소흠이 말했다.“어린 친구라뇨, 아가씨 그 학생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요.””세 살이면 세대차이도 크죠.“루장월이 곱바로 말했다.심소흠은 눈썹을 으쓱하며 말한다.”그럼 안 되겠네요. 저희는 세대차이가 엄청나서요.“루장월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웃어버리고 만다.식사를 끝마치고 심소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산책이나 하자고 했다. 루장월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한참을 걷던 심소흠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를 바라본다.”아가씨 최근에 다리 다치지 않으셨어요?“루장월이 놀라서 묻는다.”그게 보이세요?“심소흠이 말한다.”제 둘째 형이 중의여서 한동안 배운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조금은 알고 있는데 걸음걸이가 조금 부자연스럽긴 하네요.“”그럼요. 보름 전에 무거운 물건에 깔려서 다쳤거든요. 인대뼈는 다치지 않았는데 일주일이 넘어서야 땅 밟고 걸을수 있었어요. 지금은 큰 통증은 없지만 아직도 어딘가 이상하긴 하네요.“”저도
루장월은 잠시 넋이 나갔다.심소흠은 여자애의 손을 잡더니 본인 앞으로 데려와 말했다.“까불지 마, 친구랑 있는 거 안 보여? 남들이 보면 웃어.“여자애가 입을 삐죽 내밀고 원망한다.”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그들의 친밀도를 보니 일반적인 친구관계는 아닌 것 같다.그렇다면 혹시……여자 친구?루장월이 금방 이렇게 추측을 하고 나니 심소흠이 말했다.”우리 일은 나중에 다시 말해.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고 먼저 루 아가씨한테 인사부터 드려. 아가씨 여긴 다섯째 여동생 심묘묘에요.“여동생이었구나.루장월과 여자애의 눈이 동시에 마주친다. 둘은 모두 넋이 나갔고 심묘묘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당신이군요!“”……“루장월도 그녀를 안다.전에 문연주를 좋아했던 그녀는 열렬히 그를 쫓아다니면서 꽃이며, 커피 공세를 펼쳤다. 심지어는 회사 문 앞에서 그를 막아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 문연주 곁엔 이미 루장월이 있었기에 새로운 관계 발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단칼에 거절해벌렸다.마침 해외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었던 문연주는 그녀를 데리고 출국해 한 달 내내 업무를 봤다. 한 달 뒤 그들이 다시 귀국했을땐 여자애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그렇다면 이 둘의 교집합은 뭘까. 그녀가 문연주에게 처참히 거절당한 그 날, 대성통곡하며 비를 맞는 걸 보고 루장월은 그녀를 데리고 가 새 옷을 사입히고 학교에까지 데려다 줬었다.하지만.지금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더 중요한 건——이 여자애가 바로 그런 깔끔하고 청순한 외모에, 활발한 것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문연주의 요구에 걸맞았다.더욱 공교로운 건, 이어지는 대화에서 루장월은 여자애가 이미 졸업을 했고 취업 준비 중임을 알게 됐다. 오빠를 위해 조교 일을 하려고 했지만 심소흠에 의해 거절당하고 말았다.루장월이 잠시 고민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심 아가씨 다른 업종 알아보실 생각은 없으세요?”……루장월은 심 아가씨의 이력서를 들고 회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심호흠이 차를 끌고 그녀
사무실에서 유월영은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혁재의 스캔들 뉴스를 보고 있었다.이혁재의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고 이미 댓글들이 폭발하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평가했다.“이 제목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네요. [해성 그룹 임원 이혁재 혼인 중 외도, 호텔에서 현장 발각]이라니. 혁재 씨의 신분에 회사 이름도 나오고,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지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네요.”“게다가 지금 해성 그룹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라 작은 움직임도 큰 주목을 받는데 뉴스 제목에 해성 그룹을 걸었으니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겠죠.”한세인이 말했다.“저도 봤어요. 댓글에선 해성 그룹이 안팎으로 온갖 나쁜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성민은 이혁재 씨를 망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요.”유월영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손을 배 위에 포개며 물었다.“부정적 여론의 최적 대응 시간이 얼마였죠?”“골든타임은 24시간이에요. 물론 빠를수록 좋습니다.”유월영이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보내요.”이혁재의 외도 스캔들은 오전 내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그는 순식간에 쓰레기 남편으로 전락했다.누리꾼들이 비난하는 와중에 점심시간 동안 갑자기 한 영상이 나타나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그 영상에는 이혁재가 정신을 잃은 채 두 명의 직원에게 방으로 옮겨지고 침대에 던져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여자 도착했어?”“도착했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중이야. 먼저 이 남자 옷을 벗기자.”동영상에서는 직원들은 합심해 이혁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있었다. 물론 노출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다.옷을 모두 벗기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에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바로 그 화영이였다.“다 됐어?”“술에 수면제를 넣었어. 해 뜨기 전까진 못 깨어날 거야.”“알겠어. 이제 나가 봐.”화영은
유월영이 멍해 있자 연재준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당신도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쳤잖아. 난 그러면 안 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연재준은 차가 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손끝에는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날 저녁, 이혁재는 배 사장을 데리고 온천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고 배 사장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이곳 공기가 정말 좋군요.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오염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이혁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장님께서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이 호텔을 고른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길 아침 공기가 더 좋다고 하네요.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산속을 걸으면서 산림욕을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배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그거 정말 좋겠군요.”“그럼 지금 마사지하러 가실까요?”이혁재가 말했다.“여기 직원분들 모두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시랍니다. 호텔 사장님이 약자를 돕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장애인분들에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배 사장이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렇게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가를 좋아합니다. 그 사장님이 누구신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이혁재가 모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나중에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좋습니다.”그들은 함께 마사지실로 향했고 두 명의 청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그들을 맞이했다.그들은 마사지를 받으며 계약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직원이 친절하게 디저트와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칵테일 도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마사지는 너무나도 편안한 탓인지 이혁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그리고 마사지사 두 명이 이내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이혁재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연재준은 차를 몰고 유월영의 사무실로 갔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유월영의 차를 찾아낸 뒤 그녀 차 옆에 차를 세웠다.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유월영은 회사에 하루 종일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주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때 회사를 나서곤 했다.유월영이라면 굳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었고 시간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쓰여야 했다.연재준은 참을성 있게 한 시간가량 기다렸고 그제야 그녀가 한세인과 함께 회사를 나서고 있었다.한세인은 차에서 내리는 연재준을 빠르게 발견하고 유월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월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월영은 오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헤어밴드로 장식했다. 그리고 하얀색 쉬폰 블라우스에 고급스러운 블랙 스커트를 매치하여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대로 연재준을 향해 걸어왔고 작은 굽의 힐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맑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그녀가 우선 입을 열었다.“이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연 대표님 만나는 게 놀랍지도 않네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이 착용한 진주 귀걸이에 향했다. 광택이 도는 고급 진주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그는 뜬금없이 말했다.“해성 그룹에 꽤 큰 거래 파트너가 있어. 성은 배 씨인데 갑자기 반년 짜리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하더군.”유월영의 눈이 반짝였다.“그래요?”“혁재가 그를 접대하고 있어.”연재준이 물었다.“당신의 생각은 어때?”유월영이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정말 저를 끝까지 도우려는 건가요?”“...”옆에서 듣고 있던 한세인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두 분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건가?’‘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지?’해성 그룹이 고객을 접대하는 일을 연재준은 왜 유월영에게 말하는지, 이게 어떻게 그녀를 돕는 것인지 한세인은 알 수가 없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끝까지 도우려고.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연재준도 힐끗 이혁재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도 이 변호사님이 널 차단하지 않은 걸 보면 그냥 널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것 같네.”이혁재는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한 놈은 아내가 옆에 없고, 다른 한 놈은 아내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고. 이렇게 감정 불화가 있는 두 놈이 나 같은 화목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네.‘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라는 속담이 딱 맞아.”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지욱을 향해 말했다.“이제 내가 법원에서 전해준 말을 믿겠지.”서지욱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3년 동안 조용히 있길래 정말 욕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완전히 변태가 된 거였네.”이혁재는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듯 찡그렸다.“짜증 나네. 오늘 밤에 회식이 있다니.”그는 연재준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넌 아내도 없잖아. 그 회식 네가 대신 가.”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널 찾아온 거지 날 찾아왔냐?”이혁재는 혀를 차며 말했다.“회사가 다 망해가고 있는데 아내와 알콩달콩하게 보낼 밤을 방해하다니 정말 죽여 마땅한 죄지.”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간 됐으니 준비하고 가. 배 사장이 신주시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잘 접대해. 그럼 너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이혁재도 그 말에 동의하며 시간을 확인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는 바로 접시를 들고 밥을 국에 말아 몇 분 만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손을 흔들었다.“간다.”서지욱은 미간을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여유롭게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 기분 꽤 좋아 보인다?”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지욱이 말했다.“마르세유에서 돌아온 이후로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내가 알기로는 아직 월영 씨랑 화해도 못 했고 월영 씨는 4월에 현시우랑 결혼 준비 중이라고 하던
유월영은 그의 말에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꾸하지 않았다.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44분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정말 죽음을 숫자로군. 흥미로운데.”유월영이 말했다.“혁재 씨 그 말이 오성민을 자극했어요.”“전에 말했듯이 오성민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자존감이 높을수록 더 예민한 법이죠. 혁재 씨가 그의 치부를 그렇게 쑤셔댔으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봤어요? 그는 지금 미쳐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더 재밌어질 거예요.”연재준은 그녀가 이렇게 여유롭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어느덧 늦은 밤이 되고, 집에 온 오성민은 계속해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제는 길고 긴 전화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마치 예전처럼.예전의 오성민은 이승연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었다. 그녀의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본 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며칠간 이승연과 그토록 바랬던 시간을 누렸던 그는 이제 다시 그녀를 “잃는” 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승연아,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승연아!”전화벨 소리가 끊기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활짝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그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일어나 부하의 옷깃을 잡고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혁재의 치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아냈어? 응?”이승연은 감정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단칼에 관계를 끊었고 이혁재가 여자 모델과의 소문이 났을 때도 이혼을 생각했다.이승연은 그동안의 정이 남아 있어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망설임 없이 관계를 끝냈다.그래서 그는 이혁재가
이혁재는 복도로 돌아와 이승연을 보자 표정을 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애기야.”이승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예쁘고도 도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이혁재는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이승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전처럼 불러.”이혁재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뭐라고 불렀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이승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결국 몇 초 후 항복하며 말했다.“여보.”이혁재는 음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다른 건 없어?”이승연은 작게 웅얼거리며 말했다.“자기.”이혁재가 바로 대답했다.“그래!”이승연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들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여보’라고 부른다더라고. 누나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나 괜찮아.”이승연은 그의 철면피에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내기도 지쳐 고개를 돌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이혁재는 바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복숭아 맛이 꽤 달콤하네. 이제 집에 가자, 여보.”이승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걸어갔다.복도의 구석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그 옆에서 연재준이 그녀를 지켜보며 물었다.“왜 웃는 거야?”유월영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달콤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연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미있네.”그녀는 벽에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혁재 씨가 연 대표님 지인들 중에서 연애를 가장 잘하는 것 같네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정반대에요. 그는 지금 자신과 승연 언니 사이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라고요.” 유월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이혁재가 벌린 온갖 난리를 겪고 나니 이승연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날 어린애처럼 달래지 마.”이혁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여보와 누나 사이에서 이 변호사님은‘애기’라는 별명을 고른 거잖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애기라고 부를게.”이승연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부른다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이혁재가 히죽거리며 그녀의 입가에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져서 트고 있었다.“응.”자판기는 다른 복도에 있었고 이혁재는 복숭아 맛 음료 두 병을 골랐다.그때 갑자기 오성민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넌 말장난으로 이승연을 속이고 있는 거야.”이혁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결제하며 무심히 말했다.“내가 내 아내랑 어떻게 지내는지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오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해서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 본질을 피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이상하다 말이지. 왜 꼭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 두 병을 떨어뜨렸다.이혁재는 음료를 바로 꺼내지 않고 오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좌절이나 어려움들이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림돌인데도,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그냥 피해 가면 안 돼? 왜 굳이 쓸데없이 고통을 자처해야 하지?”오성민이 비웃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군!”이혁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때?”“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부모도 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온 가족이 형만 편애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보니 우리 상황이 조금 비슷하네. ““내 아버지도 두 명의
이혁재가 뻔뻔하게 말했다.“나를 봐봐. 매일 당신한테 달라붙어서 뽀뽀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하고 1분이라도 못 보면 떼를 쓰잖아. 내가 꼭 애 같지 않아? 응? 어차피 내가 연하이기도 하잖아, 나를 아들로 봐도 아무 문제 없어.”이승연은 그의 헛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이혁재는 단도직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 병 있어. 그리고 당신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 마.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할게.”“...”이승연은 더는 대꾸할 힘이 없어 그를 밀쳤다. 다만 이번엔 아까처럼 혐오감에 의한 거부가 아니라 그의 엉뚱한 발언에 기가 차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이승연은 거의 기진맥진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이혁재의 말을 되풀이했다.“당신 잘못 아니야...”이혁재가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지. 나도 완전히 억울한 피해자야. 그러니까 나를 미워하면 안 돼.”그의 당당한 태도는 마치 모든 액운을 쓸어내는 빗자루 같았고 이승연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들이 깨끗하게 지워졌다.이승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그녀는 매일 아침 이 향기 속에서 깨어났고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이혁재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헤쳐 이승연의 눈을 가렸다.“법정을 설 용기가 없어도 상관없어. 안 보면 되지. 자, 눈을 가려줄게.”그는 넥타이를 그녀의 머리 뒤에서 묶으며 말했다.“눈을 가리고 법정에 서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식물인간으로 지냈던 3년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눈앞이 깜깜해지자 이승연은 오히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이혁재는 고개를 숙여 넥타이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눈을 가려도 참 예쁘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누구 아내지? 아, 내 아내네.”이승연은 그의 황당한 발언들을
이혁재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깨어난 뒤 왜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이승연은 그날 자신과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 이혁재를 줄곧 마음속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이혁재는 이승연의 힘에 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는 밀어낸 이승연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여보.”이혁재는 느낄 수 있었다. 이승연은 사랑싸움이 아닌 진심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이혁재의 팔을 꽉 잡은 그녀의 손톱이 그의 살에 파고들었다. 이승연은 그를 향해 울부짖었다.“이거 놔!”오성민도 뒤따라왔고 큰 소리로 외쳤다.“승연이한테서 손 떼!”오성민이 이승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경호원에게 가로막혔다.그 경호원들이 이혁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여기는 법원이니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하지만 사실, 이 경호원들은 유월영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이승연의 첫 재판을 걱정해서 직접 법정에 와 있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연재준도 법정에 나타났고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다.연재준은 손을 입가에 대며 말했다.“쉿.”“...”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유월영은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그렇게 회사를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날 따라다녀도 돼요?”정말 그렇게 한가하다면 병원에나 가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이혁재는 주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픔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승연을 꼭 안고 말했다.“여보, 내 말 좀 들어봐...당신은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싫다면 그땐 내가 떠날게.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이승연이 여전히 몸부림쳤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말했다.“3년 전 그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그는 또렷하게 말했다.“그때 내 자리는 방청석이었고 내 앞에는 몇 줄의 좌석과 다른 방청객들이 있었어.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 놀라 도망치기 바빴고 내 앞을 막아섰어. 난 좌석을 지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