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 치지 마!”유월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왜 거절 안 하냐고? 윤영훈 같은, 아니 너희들 같은 인간들이 과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 구겼으면 노발대발 화 안 낼까? 과연 쿨하게 날 놔줄까?”그런 사람들의 속내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유월영이다.내킬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면서 잘 해주다가도 일단 체면 구겨지면 내일 당장이라도 회사생활 그만두게 만들 사람들인데.연재준이 바로 그렇지 않았던가?그게 아니었으면 오랜 고향을 떠나, 병도 호전되지 않은 엄마 곁을 떠나 신주에서 서안까지 도망쳐 왔을까?유월영의 말에 그제야 연재준의 안색이 좋아진다.“룸 값은 내가 냈어. 앞으론 돈이든, 사람이든 뭐든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연재준한테 말하라고? 둘이 무슨 사이라고?유월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기회를 틈타 연재준을 밀어냈지만 얼마 밀지도 못하고 오히려 연재준에 의해 더욱 바짝 눌려버리고 만다.유월영은 들끓는 화를 간신히 누르며 말한다.“연재준, 너 그게 말이야 방구야? 나 안 괴롭히겠다며!”기적의 논리를 펼치는 연재준이다.“내가 룸값까지 내줬는데 그게 괴롭히는거야? 그리고 너 그런 말은 누구한테서 배웠어? 윤영훈?”“그건 너고......그래 맞아, 너 지금 윤영훈 따라하는거지?”유월영은 아침 내내 들었던 의구심을 입 밖에 꺼냈고 연재준은 딱히 부정을 하지 않는다.부정을 하지 않는다?!진짜 윤영훈을 따라하는건가?!유월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묻는다.“왜? 왜 이러는건데?”연재준은 대답 대신 유월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애기야, 빚 진건 언제 갚을래?”매번 애기야 소리를 들을때면 숨이 턱 막혀오고 심장이 조여오면서 눈 앞이 아찔해난다.남들이 말하는 “애기야”는 연인, 여자 친구, 와이프를 부르는 애칭이겠지만 연재준에게 “애기야”는 유월영을 속여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같은 것이었다.그렇다, 연재준은 유월영의 몸을 탐하고 있을뿐이다.지난번 산장에서 바램을 이루지 못해 요즘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밤 열시가 넘은 시각, 그들은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걸 인지하고서야 겨우 뿔뿔이 흩어졌다.윤영훈은 술 한번 입에 대지 않고 누가 따라주려고 할때마다 한 마디를 했다.“이따가 유 비서 데려다 줘야 해서요.”그래서인지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유월영은 결국 윤영훈의 차로 호텔에 도착했다.윤영훈에겐 어디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한 적도 없다. 허나 이 남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유월영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다른 곳으로 옮길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보안도 철저하고 청소와 조식까지 포함한데다 출근도 편한 이런 가성비 좋은 호텔을 다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문득 짜증이 난다. 이 남자들만 아니었어도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진 않았을텐데.유월영은 안전벨트를 풀고 바로 차에서 내리지 않은채 입을 열었다.“윤 사장님.”윤영훈은 겉옷을 벗은 채 잔근육들이 이따금씩 돋보이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허나 이 남자는 입만 열면 순식간에 호감도가 뚝 떨어지게 하는 대단한 매력이 있다. “음? 올라가서 있다가 가라고요? 에이 됐어요. 야밤에 그러는건 좀 그렇네요. 유 비서가 그럴만한 명분이라도 주면 모를까.”이미 윤영훈의 헛소리에 면역이 생겨버린 유월영이다.“사장님, 제가 분명 몇번이고 거절했잖아요. 누굴 좋아하는지는 감히 다른 이가 간섭할수 없는 개인의 자유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제가 곤란해질수 밖에 없습니다.”“내가 유 비서 좋아하는게 유 비서를 곤란하게 만든다는거예요? 뭐가 곤란해요? 난 왜 내가 유 비서를 위해 근심거리들을 해결해준것 같지?”“사장님이 그러시니까 전 회사에서 비서 신분 뿐만이 아니라 ‘윤 사장님 여자친구’라는 딱지까지 붙어버리잖아요. 이런 일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건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윤영훈은 콘솔박스에서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담배 안 피기로 약속했잖아요. 이젠 사탕만 먹어요.”유월영은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없거늘. 또 무슨 억지스러운걸 끼워 맞추려는건지.윤영훈은 창문을 내리고 밤바람을 맞
유월영이 묵묵부답인 사이 윤영훈은 웬 서류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말한다.“종신 그룹 자료들이에요. 잘 봐봐요.”유월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봉투를 받아쥔다.“감사합니다 윤 사장님.”“올라가서 쉬어요. 자기 전에 잊지 말고 약 챙겨먹고요. 소리 들으니까 아직도 쉰것 같던데.”유월영이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더 묻는다.“근데 사장님 저 거기 가는거 어떻게 아셨어요?”그 말에 윤영훈은 진지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한다.“인연줄이 길면 천리 밖에서도 알수 있죠.”냉큼 차에서 내려버리는 유월영이다.윤영훈은 그런 유월영의 뒷모습을 보며 웃는다.......이튿날, 유월영은 신현우와 밖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극장에서 약속을 잡은 그들은 사업 얘기를 하는 동시에 극도 감상했고 극이 끝나 막이 드리울때쯤 얘기도 거의 마무리됐다.빠뜻하게 이어지는 다음 일정으로 얼른 일어나 2층으로 내려가던때, 층계에서 생각지도 못한 하정은을 만나게 된다.하정은이 공손하게 말한다.“신 사장님, 다음 극은 저희 연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극인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보시지 않으시겠냐고 물으십니다.잠시 고민한던 신현우가 고개를 돌려 유월영에게 말한다.“유 비서는 먼저 진 차장한테 가서 좀 늦을거라고 말해줘요.”“네.”신현우는 하정은과 함께 특실로 들어가고 유월영은 계속 아래로 내려간다.1층으로 계단에서 고개를 든 유월영은 마침 2층 난간 쪽 특실에 앉아있는 연재준을 보게 되는데.그는 오늘 보기 드물게 자수가 박힌 흰색 정장을 입고는 고급스러움을 더욱 뽐내고 있었다.차 한 모금을 홀짝 하던 연재준은 이내 덤덤한 눈빛으로 유월영을 쳐다본다.어젯밤 발코니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 유월영은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온 뒤에야 겨우 숨을 내뱉었다.연재준이 신현우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리없는 유월영이지만 점심 식사때문에 차로 동승하던 신현우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인사부더러 박수진한테 해고통지서 보내라고 해요.”“박 매니저 해
회사엔 직원 식당이 따로 있었지만 지금 들어가 봤자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나 들을게 뻔하다고 생각한 유월영은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기로 한다.문을 활짝 열어놓은 식당 앞을 지나던 서정희가 우연히 안에 있는 유월영을 보게 됐던거다.“월영 씨, 여기서 만나네요.”그날 밤, 별장에서 참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서정희를 쏘아붙인 유월영이지만 사람이 다 그런거 아닌가. 완전히 등 돌리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친한 척 할 수 있는게 바로 사회생활이다. “그러게요. 아가씨가 여긴 웬일이세요?”서정희는 자연스럽게 유월영의 반대편에 앉더니 그녀와 같은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여기 있는 오래된 책방에 구하기 힘든 옛날 책들도 있다고 들어서 찾아보러 왔어요.”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보인다.“그래서 찾으셨어요?”“아니요. 괜찮아요, 아직 연 회장님 생신까진 꽤나 남았으니까 친구들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돼요.”그 말에 유월영이 잠시 주춤한다.“연 회장님 선물해 드릴거예요?”“그럼요.”서정희가 표달하고 싶었던건 연재준이 자신을 부모님께 데리고 갔을 뿐만 아니라 회장님도 꽤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것일지도 모른다.서정희가 국수를 받아들고 일회용 젓가락을 빼들며 말한다.“어젯밤에 백 아가씨부터 쫓아내라고 하셨는데 그럴 필요 없을것 같아요.”유월영이 고개를 들고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서정희도 더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한다.“월영 씨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은 재준 씨랑 백 아가씨 동의하셨다가 어떤 일 때문에 지금은 절대 동의 못하신다고 하시거든요. 그래서 둘은 가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유월영도 의문을 감추지 않고 직접 묻는다.“무슨 일 있었는데요?”“아무튼 백 아가씨랑은 지난 관계니까 저도 신경 안 써요.”아, 서정희도 무슨 일인진 모른다.허나 자신이 알고 있는게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쿨한척을 하고 있는것 뿐이다.식사가 마무리 될 때쯤 서정희는 자신이 연재준과 고등학교 시절 만났었고 서로가 첫사랑이라는 사
상대에게 끌려가 비틀대던 유월영이 겨우 중심을 잡는다. 박수진이다.박수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린다.“유 비서님, 저 용서해 주세요. 다시 돌아가게 해주세요.”잠시 놀라던 유월영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매몰차게 박수진의 손을 뿌리치며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절 너무 과대평가하셨네요. 해고는 저와는 상관없는 사장님의 뜻입니다.”그리고는 이내 등을 돌려 가버린다.박수진은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울부짖으며 유월영의 등 뒤에 대고 소리친다.“유월영! 이 나쁜 년! 너 남자덕에 그렇게 된거잖아! 사장님 남동생 덕에 여기 들어온거 우리가 모를줄 알아?! 그러더니 이젠 또 윤 사장님 믿고 나대! 두고 봐, 언젠간 그 콧대 꺾어줄테니까!”회사와도 가까운데다 점심 시간까지 겹치는 사람에 많은 직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만다.유월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회사로 들어가버렸다.식당에서 나오다가 그 모습을 본 서정희는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박수진에게로 다가간다.......유월영은 여전히 저기압인채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참 웃기다.박수진은 나이도 두 살이나 많다. 그때 유월영은 연재준 때문에 어느 회사에서도 일자리를 못 찾으면서도 이 정도로 실성한채 길바닥에서 울며 불며 통곡을 치진 않았었는데.해고 당했다고 해도 SK그룹에서 일한 이력으로는 여전히 괜찮은 일자리를 찾을수 있을텐데 왜 저렇게 난리지?유월영은 연재준에게 어장관리를 당한 사실 때문인지 박수진과의 일 때문인지 화가 치밀어 올라 서류들을 책상에 탕탕 내리친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점심에 먹은 고춧기름 때문인지 목상태가 더욱 악화돼 이튿날 아침엔 말도 못할 정도가 돼버린다.......연재준은 유월영이 있는 호텔에 묵고있다.연재준이 평소 묵는 고급호텔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지만 그가 여길 선택한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거다.최고급 호텔방이라고 한들 연재준은 깊은 잠에 들지 못했고 금방 일어난 그는 평소보다 더 짜증섞인 눈빛을 하고 있다.하정은이 다급히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준다.이윽고
“......”유월영은 간신히 침을 꼴깍 삼키고는 잔뜩 쉬어버린 약해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앉으실거면 제가 비켜드릴게요.”연재준이 미간을 찌푸린다.“목은 왜 그래?”여전히 대답없이 발버둥만 치는 유월영에게 연재준이 명령조로 말한다.“앉아서 먹어. 다 먹고 나서 병원 데려다 줄테니까.”“사장님께 실례 범하기 싫습니다.”유월영은 어떻게든 가려고 하지만 연재준은 절대 놔줄 생각이 없어보인다.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그릇에 있던 뜨거운 죽이 엎어지며 유월영의 손등에도 떨어졌고 유월영은 순간적으로 욱하는 감정이 올라와버린다.이내 유월영은 탁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를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고 이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켰다.연재준의 얼굴도 순식간에 어두워진다.“누가 너한테 접시 던지라고 가르쳤어.”친아버지가 식탁을 탕 쳤을때도 얼굴을 일그러뜨며 자리를 떴던 연재준인데 다른 사람이라면 오죽할까.간이 부을대로 부은 유월영이다.......유월영은 거의 접시를 던짐과 동시에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어장속 물고기일 뿐이었다는 사실과 박수진이 사람들 앞에서 행패를 부린 사실에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산해버린다.“사장님은 마음대로 사람 손바닥에 쥐고 흔들면서 전 화 한번 낼 권리도 없어요?”연재준은 힘겹게 한 마디를 이어나가는 유월영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유월영은 이젠 지쳤다는 표정으로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다.그래, 화 내든 훈육을 하든 마음대로 해라지 뭐.연재준은 뒤통수를 맞고도 아직도 유월영에게 복수를 안 하고 있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유월영이다.차라리 매 순간마다 마음 졸일 바엔 하루 빨리 처단당하는게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연재준은 무서울게 없다는 유월영의 표정을 보고는 되려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한다.“그래, 화 내고 싶은대로 다 내봐.”......응?연재준은 옷에 튀긴 죽을 종이로 닦아내며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감히 내 뒤통수까지 치는데 화 한 번 못 내겠어? 맞다,
유월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죽을 먹고 있다. 구기자와 대추의 단맛은 오히려 목의 통증을 더욱 격화시켜버린다.맑은 사골 국물로 만든 국수 한 그릇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어쩔수 없다, 다 먹는 수밖에.연재준은 유월영의 정수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연다.“미성년자 때 철없이 내뱉었던 한 마디도 다 속하는거야?”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방금은 접시까지 던지고 엮인 여자들 깨끗이 청산하라고 할때까지 화를 안 내던 연재준이 지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본다.“네가 현시우랑 진지한 관계였다고 다 그런줄로 착각하진 마. 우린 어린 나이에 그냥 놀자고 한 말일 뿐이었거든. 첫사랑은 무슨.”유월영이 숟가락을 꽉 움켜쥐더니 이내 입을 연다.“첫사랑은 고사하고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요? 그럼 왜 서정희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데요?”언제 그런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는 연재준이다. 걸쭉한 죽에 목이 끈적해난 유월영은 배즙 한 컵을 뜨러 자리에서 일어난다.등받이에 기대있던 연재준은 뭐가 생각났는지 눈빛이 서늘해진다.이윽고 유월영이 돌아오자 그는 테이블을 탁탁 치며 말했다.“얼른 먹고 병원 데려다 줄테니까 싸울거면 목 다 나은 뒤에 싸워.”“저 혼자 갈수 있어요. 사장님 차값 감당 못하거든요.”연재준이 피식 웃어보인다.“말 끝마다 차값 차값, 언제까지 그럴래? 내가 그 70만원 받았어? 너 계좌로 다시 들어간거 아니었던가?”그건 미처 확인 못 한 유월영이다.그제야 휴대폰을 열어 확인해보니 70만원은 24시간 초과로 자동으로 다시 유월영의 계좌에 돌아와 있었다.......데려다준다던 연재준을 한사코 거절하고 홀로 병원에서 나온 유월영은 마침 정류장에 정차한 회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 있던 연재준이 하정은에게 지시한다.“유월영 뭐 때문에 저렇게 바쁜지 좀 알아봐.”연재준이 유월영을 모를리가 없다. 그녀는 신현우를 위해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게 아니라 반차를 낼수 있는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저토록 견결하게 구는것일거다.하정은이 얼마도
얼빠진 유월영을 앞에 두고 박수진은 보란듯이 부회장의 팔짱을 낀채 친밀감을 과시한다.유월영의 머릿속에 문득 윤영훈이 전해준 서류 내용이 떠오른다.부회장은 애 둘까지 딸린 유부남이지만 밖에선 부인 몰래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던 내용.그러니까 박수진은 SK그룹에서 해고된 뒤 곧바로 호 부회장을 찾아간건가?조금 안타깝다.사실 업무능력은 딱히 흠 잡을데가 없었지만 개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었던 유월영은 아예 박수진을 무시한 채 부회장에게로 다가갔다.“부회장님, 저는 SK그룹 비서 유월영입니다.”그는 이내 유월영을 쭉 훑어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백번 듣는것보단 한번 보는게 낫네요.”악수를 하던 그는 유월영의 손을 놓지 않은채 계속 말했다.“유 비서 해운에 있을때 이름 있었던건 알았어요. 퇴사하고 나서 우리 종신 그룹에 데려오려고 했지만 연 사장이 못하게 하는 바람에 대단한 인재를 잃었었는데 결국은 돌고돌아 SK로 갔던거군요.”유월영이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렇게 따져보면 저희 다 아는 사이인것 같으니 제가 술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룸 예약해 뒀으니 안으로 드시죠.”“그래요 그래.”부회장이 손을 거두자 박수진이 이내 그의 팔짱을 끼고는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앞에서 가던 박수진은 별안간 유월영을 돌아보더니 턱을 쳐들어 보였다.마치 그 날 쫓아냈어도 오늘 다시 들어왔다는 식이랄까.“......”유월영은 당연히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엔 두 명의 매니저와 상무팀 직원 한명도 함께다.그 중 한 매니저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말한다.“박수진이 어떻게......”유월영이 묻는다.“저 오기 전에 박수진이 잠깐 비서직 맡았다던데 SK는 그때 이미 종신 그룹과 연이 닿았던건가요? 그때 부회장님도 만났었고요?”“맞아요. 그때 사무실에서 부회장님이 자기랑 메신저도 추가하고 가방 선물도 해줬다고 자랑했었거든요. 근데 진짜 부회장님한테 갈줄은 몰랐어요......좀 거북하네요.”전 직장 동료가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