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회장님의 생각인지 윤미숙 개인의 생각인지 분간할 수 없어 유월영은 당혹스러웠다.너무도 위험한 제안에 유월영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사모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저는 환경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바깥세상도 구경하고 싶고요. 저를 딸처럼 생각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새도 크면 둥지를 떠나듯이 자식은 언젠가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서 자립하기 마련이에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그녀는 감성을 호소하며 위험한 주제를 가까스로 피해갔다.그녀의 말에 윤미숙도 더 이상 그녀를 만류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차나 마시자꾸나.”유월영은 더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시간도 늦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모님도 얼른 쉬세요.”윤미숙이 말했다.“회장님 2층 서재에 계셔. 가서 인사나 드리고 가. 둥지 떠난 새가 또 언제쯤 집에 돌아올지 모르잖아.”유월영이 물었다.“서재는 어디 있어요?”“2층 올라가서 좌측의 두 번째 방이야.”“알겠습니다.”유월영은 해운에 있을 때도 저택에 자주 방문했지만 1층에서 식사만 했을 뿐, 2층까지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윤미숙이 알려준 대로 좌측의 두 번째 방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서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고개를 돌려 보니 전신 거울 앞에서 연재준이 옷을 벗고 있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회사로 돌아간 거 아니었나?’연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당황한 유월영은 다급히 시선을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죄송해요, 바로 나갈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연재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월영.”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등 뒤에서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입구에 단추가 하나 떨어졌어. 그거 좀 주워서 갖다줘.”유월영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니 바닥에 파란색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손을 뻗어 넥타이를 바로맸다.와인색 셔츠에 진한 청색 넥타이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연재준도 눈을 내리 깔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전에는 그녀가 넥타이를 매주고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 여자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느낌이었다.그래서 덩달아 그의 기분도 언짢아졌다.“인공심장이 뭐예요?”그녀가 바짝 경계하는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연재준은 담담히 대답했다.“해외에서는 이미 임상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치료법이야. 널리 퍼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릴 테지만 비교적 안정적으로 임상실험을 마쳤어.”심장 기증자는 간이나 신장보다도 더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간단한 치료법이 있는데 왜 널리 퍼지지 않은 걸까?유월영이 말이 없자 연재준이 그녀의 의문을 대신 대답해 주었다.“비용이 어마어마하고 감염 확률이 아직은 높기 때문이야. 인공심장의 수명은 길어서 7년이거든.”인체의 심장을 이식 받으면 짧게는 10년, 관리만 잘하면 더 길게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가능했다.가성비나 안전성에서 인공심장은 아직 장기 기증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유월영은 말없이 넥타이 매듭을 지었다.연재준이 계속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인공심장을 먼저 이식 받은 환자가 다시 인체 심장을 이식받지 못한다는 설은 없어. 먼저 인공심장을 이식받았다가 시간을 벌고 기증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야.”유월영은 전혀 몰랐던 가설이었기에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게 가능해요?”연재준은 그녀의 앞으로 팔을 쭉 내밀었다. 팔 소매 단추를 잠가달라는 의미였다.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단추를 잠가주었다.시선을 내리고 있어서 그녀의 긴 속눈썹이 얼굴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연재준이 물었다.“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시골에서 먹고 놀기만 하고 이런 것도 안 알아봤어?”“대표님이 하실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옷매무시를 다 정리한 유월영
저택을 나온 유월영은 택시를 잡아 신주대학으로 가면서 핸드폰으로 인공심장에 대해 검색했다.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인공심장 관련해서 대략적으로 요해하게 되었다.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직원 카드를 센서에 찍고는 안으로 들어갔다.유월영은 새로 직장을 구하지 않았지만 신연우의 옆에서 잠시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처음에 신연우가 그렇게 제안했을 때 혹시 그가 자신을 직장도 없는 백수라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오해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건 아니었다.학기말이라 신연우는 학생들 학점도 케어하고 논문도 써야 해서 굉장히 바빴다.유월영은 이틀 해보고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전에는 교수직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었다.그렇게 일한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물론 신연우도 그녀를 돕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더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을 조교로 초빙했을 것이다.유월영도 그것을 알기에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의 배려에 보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신연우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유월영은 오늘 정리해야 할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다가가서 일에 열중하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오늘은 쉬라니까 왜 왔어요? 조교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월급이라도 더 올려줘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유월영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손에 교재를 들고 안경 너머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연우는 교수라기보다는 학생처럼 보였다.“재판 순조롭게 풀린 거 축하해요.”유월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소식이 신 교수님한테까지 전해졌어요?”“월영 씨 일인데 각별히 관심 갖고 있었죠. 인터넷에서 기사 봤어요.”신연우가 말했다.“그런데 점심까지 기다려도 월영 씨한테서 문자 한 통 없어서 좀 서운했어요. 나랑은 그 정도로 친하지 않은 사이인가 싶어서요. 그래도 이렇게 사무실에서 보니까 좋네요.”굉장히 친근감이 느껴지는 말에 유월영은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신연우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유월영이 자료를 정리해 줬기에 이 일은 그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혹시 저를 배려해서 안 가도 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신연우가 웃으며 말했다.“꼭 그런 건 아니고요.”유월영은 월급 주는 사람이 직원을 이 정도로 배려해 줄 줄은 몰랐다.“괜한 걱정이세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아르바이트 끝나면 정식으로 직장도 구할 건데 어떻게든 일하면서 마주치게 되겠죠. 매번 그쪽을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월영은 단호한 어조로 재차 강조했다.“저는 이제 해운그룹에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그녀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신연우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저녁에 그들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오늘 미팅에는 신연우 연구팀 소속 멤버들이 모두 참석했다.팀장이 문을 열고 한 남자와 함께 룸에 입장했다. 유월영이 고개를 들자 보인 얼굴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들어오는 연재준의 모습이었다.오늘 그와 마주친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그는 아까 입었던 캐주얼한 옷 대신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팀원들과 함께 있는 유월영을 본 순간에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유월영은 오늘 방에서 그와 함께 나눴던 대화 중에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던 연재준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이어지는 식사 자리에서 연재준은 그녀에게 별다른 시선을 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일 얘기에 집중했다.유월영은 그들의 협상 내용을 기록하고 자료를 정리해서 보고서를 올리는 업무를 맡았다.간단히 말하자면 해운그룹에서 과학기술 연구팀에 거액의 돈을 투자하고 그들의 연구성과를 해운의 사업에 이용하는 것이었다.만약에 돈이 안 되는 연구였다면 절대 해운에서 거금을 투자했을 리 없었다.하지만 협상은 순조롭지 못했다. 해운에서 연구팀의 주도권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신연우는 연구팀의 핵심인물로써 가장 많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시로 유월영의 상태를 살폈다. 호텔 직원이 와서 그녀에게 술을 따르려 하자 그는 손을 내밀어 저지하고 말
레스토랑을 나온 신연우는 고개를 돌려 유월영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우리 밥 먹으러 갈까요? 샤브샤브 어때요?”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했다.유월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정말 이대로 가도 상관없어요?”신연우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답했다.“당연하죠. 안 될 게 뭐가 있어요?”“이번 프로젝트 제가 들어가서 두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하셨잖아요. 그랬는데 이건 너무…”“내가 감정에 휘둘려 공과 사 구분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생각해요?”신연우가 웃으며 물었다.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사실 이 프로젝트에 해운이 투자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연재준은 저를 쉽게 보내줄 리 없거든요. 어차피 사전 준비는 끝났으니 더 이상 제가 필요 없잖아요. 저 때문에 피해 보지 말고 제가 물러날게요.”“저 때문에 팀에서 오랜 시간 준비한 연구성과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지 말아요.”신연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장난 좀 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정색하니까 장난도 못 치겠네요. 그럼 나도 사실만 말할게요. 난 처음부터 해운의 투자에 관심이 없었어요. 아까 눈치 못 챘어요? 내가 항상 뚱한 표정으로 있었던 거?”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유월영은 해운에서 제시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그가 불편해하는 줄로만 생각했다.“사실 지금 해운이 진행하는 사업에 SK도 투자했거든요. 형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겠다고 했는데 협상이 결렬돼도 투자하겠다는 사람은 많아요. 오히려 월영 씨 덕분에 해운을 거절할 명분이 생긴 거죠.”신연우는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다만 형은 내가 월영 씨 때문에 해운과의 협력을 포기했다고 생각할 테니 남자를 홀린 나쁜 여자로 생각하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유월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제가 정말 전문성이 결여된 건 맞나 보네요. 교수님의 생각
유월영은 오늘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말에 오를 준비를 했다.그런데 말이 살짝 움직였는데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이미 말 등에 오른 신연우는 아직도 주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유월영 씨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었군요.”유월영이 못 말린다는 듯이 물었다.“설마 교수님은 제가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억센 여자로 보였나 봐요?”신연우가 웃으며 말했다.“좀 그런 이미지이긴 했죠.”그녀와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홀로 모든 걸 감내하는 강한 모습을 보였다.유월영은 이를 악물고 말 등에 훌쩍 뛰어올랐다.말이 앞으로 가자 그녀는 겁에 질려 고삐를 확 잡아당겼다.“움직이지 마!”신연우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두려울 거 없어요. 여기 있는 말들은 사전에 교육을 받은 말들이라 온순해요. 살짝 고삐를 잡아당기면 말이 앞으로 갈 거예요.”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고삐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말이 앞으로 걸었다.‘응? 조금 알 것 같기도 한데?’그녀가 말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멀리서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자 두 마리의 흑마가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말을 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유월영의 두 눈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연재준?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검은색 기마복을 입은 연재준이 멋지게 머리를 흩날리며 달리고 있었다.그의 옆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신연우의 형인 신현우였다.그들도 사업 얘기도 할 겸, 이쪽으로 승마를 나온 것 같았다.하지만 왜 하필 이곳에서 마주친 것일까?신연우도 여기서 그들을 마주칠지 몰랐는지 유월영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형, 연 대표님이랑 승마장 간다더니 여기로 왔어?”신현우는 유월영과 동생을 번갈아 보며 동생에게 물었다.“그래. 너도 놀려왔어?”“응.”유월영은 다가가서 인사라도 건네려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도 얌전히 걷던 말
유월영은 신연우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먼저 신현우에게 인사를 건넸다.“잘 지내셨어요, 신 대표님?”신현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월영 씨, 오랜만이네요. 현우랑 같이 일한다고 들었는데 현우가 요즘 칭찬이 자자하더라고요. 역시 능력이 출중하니 어딜 가든 인정을 받는군요.”“신 교수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연재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신현우는 유월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마사를 지나다가 전에 네가 기르던 망아지를 봤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사육사들에게 둘려싸여 있던데 가볼래?”신연우는 유월영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월영 씨도 같이 가볼래요? 연 대표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우린 너희보다 훨씬 전에 와서 얘기도 거의 끝났어. 나랑 같이 가자.”신현우는 일부러 유월영을 빼고 신연우만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눈치 빠른 유월영은 빠져야 할 때임을 인식하고 부드럽게 말했다.“가보세요. 망아지나 어린애나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많이 힘들어한다고 들었어요. 저도 혼자 마장을 둘러보고 싶군요.”신연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형과 함께 마사로 향했다.그들이 떠나자 현장에는 연재준과 유월영만 남게 되었다.키가 커서 그런지 체구가 비슷한 말을 타고 있는데도 연재준이 유월영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애를 키워본 적 있어? 어린애가 아프면 힘들어한다는 것도 어찌 그리 잘 알아?”유월영은 아이 문제에 관해 그와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즐기시는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말고삐를 잡았다. 그러자 놀란 말이 발을 굴렀고 유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앙칼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왜 이래요!”연재준이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네. 두 달 동안 시골에서 요양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신연우랑
유월영은 그와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둘이 같은 말을 타고 있다 보니 피하기도 쉽지 않았다.“대표님의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을게요. 이만 내려주세요.”그녀가 이를 갈며 말했다.연재준은 그 말을 깔끔하게 씹고 말 뱃가죽을 힘껏 걷어찼다.유월영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아까는 그녀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가만히 있던 말이 연재준이 고삐를 잡자 마치 활력을 찾은 것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승마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말 등에서 중심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월영은 초보 중의 초보였기에 온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야!’물론 연재준도 진심으로 그녀에게 승마를 가르칠 마음은 없었다. 단순히 괘씸해서 혼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드넓은 초원과 언덕이 펼쳐진 승마장은 말을 타고 달리기에 아주 좋은 것이었다.유월영은 손을 뻗어 말고삐를 힘껏 잡았다.그러자 달리고 있던 말이 갑자기 고개를 틀며 울부짖더니 폭주하기 시작했다. 연재준은 인상을 확 쓰며 다급히 고삐를 꽉 잡았다.돌발 상황에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마저 가슴을 졸였다.연재준은 말과 10초 정도 대치 끝에 드디어 말을 진정시키고 폭주를 멈추었다.그가 갈린 목소리로 고함쳤다.“미쳤어? 죽고 싶어? 말이 달리고 있을 때 고삐를 갑자기 잡아당기면 말도 놀라서 폭주한다고! 오늘 낙마하지 않은 걸 우린 다행으로 알아야 해!”유월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 지난번에도 이래서 낙마했거든요. 그렇게 해서라도 연 대표님을 나한테서 떼어내고 싶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그렇게 되면 자신마저 중상을 입게 되겠지만 유월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그의 이런 태도가 숨 막히고 자존심 상했다.연재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진짜 간덩이가 부었구나?”“대표님은 항상 명령하고 사람들이 대표님에게 복종하는 것에 익숙하셔서 간과한 게 있어요.”유월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해운과 신
현시우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야?”유월영이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현시우, 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말해줘. 너도 그랬잖아 여자친구는 이런 순간에 필요한 존재라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어. 고민은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말로 털어놓는 게 훨씬 나아.”“물론, 네가 정말 혼자 있고 싶다면 내가 시간을 줄게. 하지만 연락을 끊으면 안 돼. 그러면 나도 걱정이 되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말이야. 정말 힘들어.”그녀의 말에 현시우는 마치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그 바늘은 그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더 깊이 찔러 들어갔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월영아, 그냥 여기까지 하자. 내가 사람을 불러 너를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지금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현시우의 목젖이 떨렸다.그는 “그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차마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그가 침묵하는 동안 유월영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유월영의 눈물에 현시우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달래려 했다.하지만 유월영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뒤돌아 뛰어갔다.현시우가 본능적으로 뒤따라 가려 했지만 연회 부인이 제때 나타나 그를 막았다.“시우야! 지금은 내버려둬.”어머니의 충고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현씨 가문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유월영은 산길을 따라 뛰면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가을은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가을은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계절이었다.유월영은 눈앞이 흐릿해졌고 너무 빨리 뛰다가 발이 엉켜 땅에 넘어졌다.흙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아래층의 부모님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손등에
유월영의 망연자실한 모습은 연재준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쉬는 시간, 그는 일부러 유월영이 있는 반을 지나가며 텀블러에 물을 담고 있던 유월영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듣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았다.“...”연재준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현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하나? 설령 죽었다고 해도 최소한 죽었다는 소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러나 현씨 가문의 입단속은 철저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더구나 현시우와 연회 부인의 대화는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다만 현시우는 최근 병원에 드나들고 시골로 내려가는 등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분주하다는 소문만 들렸다.연재준은 손에 동전을 굴리며 고민했다.‘이 틈을 타서 슬쩍 끼어들어 볼까?’보름이 지나도 현시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결국 유월영은 참지 못하고 생애 가장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그녀는 직접 현씨 가문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유월영은 경비원에게 자신이 현시우의 학교 친구이며 그가 너무 오래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다고 말했다.경비원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겠다고 했다.10분 후, 유월영은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월영아.”그녀가 돌아보자, 나온 사람은 바로 현시우였다.처음에는 기뻤지만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유월영은 달려가며 따졌다.“너 요즘 왜 그래?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그녀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휴대폰 부모님이 뺏어갔어? 아니면 벌이라도 받은 거야? 혹시 맞기라도 한 거야? 아픈 건 아니지?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은 갔어?”“월영아.”현시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깊게 꺼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모습은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불과 보름 만에 그는 한층 더 야위었고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보였
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
“손님, 이 케이크는 당일 제조된 거라 유통기한이 짧아요. 냉장고에 넣어도 최대 3일밖에 보관할 수 없으신데, 이렇게 많이 사가시면 다 드실 수 있으신가요?”유월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연회 부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일 제조된 거라면 학생이 직접 만든 거예요?”“제가 아니고 저희 가게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한번 맛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구매하셔도 돼요. 다만 가족 인원이 많지 않으시면 한 번에 다 사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아요.”유월영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다 먹을 수 있어요.”연회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학생, 교복을 보니 신주시 고등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다녀요.”유월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아, 그러신가요.”“학생, 참 예쁘게 생겼네.”연회 부인은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고 유월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아니에요. 손님께서 훨씬 멋지고 품격 있어 보이세요.”“말도 참 예쁘게 하네요.”연회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케이크 맛있네요. 이거 전부 살게요. 계산해 주세요.유월영은 계산하며 말했다.“총 3만 6백 원인데, 3만 원만 받을게요. 맛있으시면 또 오세요.”“그럼 그럴게요.”계산을 마친 연회 부인이 케이크 포장을 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네일아트를 본 유월영이 주저하며 물었다.“차로 오셨나요? 제가 차까지 들어다 드릴게요.”“그래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연회 부인은 그녀를 차로 데려갔고 유월영은 케이크를 차에 실은 후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연회 부인이 출발하려는 찰나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옆에 멈췄다.“아빠!”유월영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연회 부인은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유월영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고해양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었고 그녀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갑작스러운 만남에 연회 부인은 몸은 얼어붙었고 혼란에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