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을 나온 신연우는 고개를 돌려 유월영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우리 밥 먹으러 갈까요? 샤브샤브 어때요?”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했다.유월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정말 이대로 가도 상관없어요?”신연우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답했다.“당연하죠. 안 될 게 뭐가 있어요?”“이번 프로젝트 제가 들어가서 두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하셨잖아요. 그랬는데 이건 너무…”“내가 감정에 휘둘려 공과 사 구분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생각해요?”신연우가 웃으며 물었다.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사실 이 프로젝트에 해운이 투자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연재준은 저를 쉽게 보내줄 리 없거든요. 어차피 사전 준비는 끝났으니 더 이상 제가 필요 없잖아요. 저 때문에 피해 보지 말고 제가 물러날게요.”“저 때문에 팀에서 오랜 시간 준비한 연구성과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지 말아요.”신연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장난 좀 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정색하니까 장난도 못 치겠네요. 그럼 나도 사실만 말할게요. 난 처음부터 해운의 투자에 관심이 없었어요. 아까 눈치 못 챘어요? 내가 항상 뚱한 표정으로 있었던 거?”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유월영은 해운에서 제시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그가 불편해하는 줄로만 생각했다.“사실 지금 해운이 진행하는 사업에 SK도 투자했거든요. 형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겠다고 했는데 협상이 결렬돼도 투자하겠다는 사람은 많아요. 오히려 월영 씨 덕분에 해운을 거절할 명분이 생긴 거죠.”신연우는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다만 형은 내가 월영 씨 때문에 해운과의 협력을 포기했다고 생각할 테니 남자를 홀린 나쁜 여자로 생각하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유월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제가 정말 전문성이 결여된 건 맞나 보네요. 교수님의 생각
유월영은 오늘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말에 오를 준비를 했다.그런데 말이 살짝 움직였는데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이미 말 등에 오른 신연우는 아직도 주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유월영 씨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었군요.”유월영이 못 말린다는 듯이 물었다.“설마 교수님은 제가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억센 여자로 보였나 봐요?”신연우가 웃으며 말했다.“좀 그런 이미지이긴 했죠.”그녀와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홀로 모든 걸 감내하는 강한 모습을 보였다.유월영은 이를 악물고 말 등에 훌쩍 뛰어올랐다.말이 앞으로 가자 그녀는 겁에 질려 고삐를 확 잡아당겼다.“움직이지 마!”신연우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두려울 거 없어요. 여기 있는 말들은 사전에 교육을 받은 말들이라 온순해요. 살짝 고삐를 잡아당기면 말이 앞으로 갈 거예요.”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고삐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말이 앞으로 걸었다.‘응? 조금 알 것 같기도 한데?’그녀가 말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멀리서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자 두 마리의 흑마가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말을 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유월영의 두 눈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연재준?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검은색 기마복을 입은 연재준이 멋지게 머리를 흩날리며 달리고 있었다.그의 옆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신연우의 형인 신현우였다.그들도 사업 얘기도 할 겸, 이쪽으로 승마를 나온 것 같았다.하지만 왜 하필 이곳에서 마주친 것일까?신연우도 여기서 그들을 마주칠지 몰랐는지 유월영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형, 연 대표님이랑 승마장 간다더니 여기로 왔어?”신현우는 유월영과 동생을 번갈아 보며 동생에게 물었다.“그래. 너도 놀려왔어?”“응.”유월영은 다가가서 인사라도 건네려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도 얌전히 걷던 말
유월영은 신연우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먼저 신현우에게 인사를 건넸다.“잘 지내셨어요, 신 대표님?”신현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월영 씨, 오랜만이네요. 현우랑 같이 일한다고 들었는데 현우가 요즘 칭찬이 자자하더라고요. 역시 능력이 출중하니 어딜 가든 인정을 받는군요.”“신 교수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연재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신현우는 유월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마사를 지나다가 전에 네가 기르던 망아지를 봤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사육사들에게 둘려싸여 있던데 가볼래?”신연우는 유월영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월영 씨도 같이 가볼래요? 연 대표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우린 너희보다 훨씬 전에 와서 얘기도 거의 끝났어. 나랑 같이 가자.”신현우는 일부러 유월영을 빼고 신연우만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눈치 빠른 유월영은 빠져야 할 때임을 인식하고 부드럽게 말했다.“가보세요. 망아지나 어린애나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많이 힘들어한다고 들었어요. 저도 혼자 마장을 둘러보고 싶군요.”신연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형과 함께 마사로 향했다.그들이 떠나자 현장에는 연재준과 유월영만 남게 되었다.키가 커서 그런지 체구가 비슷한 말을 타고 있는데도 연재준이 유월영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애를 키워본 적 있어? 어린애가 아프면 힘들어한다는 것도 어찌 그리 잘 알아?”유월영은 아이 문제에 관해 그와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즐기시는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말고삐를 잡았다. 그러자 놀란 말이 발을 굴렀고 유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앙칼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왜 이래요!”연재준이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네. 두 달 동안 시골에서 요양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신연우랑
유월영은 그와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둘이 같은 말을 타고 있다 보니 피하기도 쉽지 않았다.“대표님의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을게요. 이만 내려주세요.”그녀가 이를 갈며 말했다.연재준은 그 말을 깔끔하게 씹고 말 뱃가죽을 힘껏 걷어찼다.유월영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아까는 그녀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가만히 있던 말이 연재준이 고삐를 잡자 마치 활력을 찾은 것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승마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말 등에서 중심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월영은 초보 중의 초보였기에 온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야!’물론 연재준도 진심으로 그녀에게 승마를 가르칠 마음은 없었다. 단순히 괘씸해서 혼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드넓은 초원과 언덕이 펼쳐진 승마장은 말을 타고 달리기에 아주 좋은 것이었다.유월영은 손을 뻗어 말고삐를 힘껏 잡았다.그러자 달리고 있던 말이 갑자기 고개를 틀며 울부짖더니 폭주하기 시작했다. 연재준은 인상을 확 쓰며 다급히 고삐를 꽉 잡았다.돌발 상황에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마저 가슴을 졸였다.연재준은 말과 10초 정도 대치 끝에 드디어 말을 진정시키고 폭주를 멈추었다.그가 갈린 목소리로 고함쳤다.“미쳤어? 죽고 싶어? 말이 달리고 있을 때 고삐를 갑자기 잡아당기면 말도 놀라서 폭주한다고! 오늘 낙마하지 않은 걸 우린 다행으로 알아야 해!”유월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 지난번에도 이래서 낙마했거든요. 그렇게 해서라도 연 대표님을 나한테서 떼어내고 싶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그렇게 되면 자신마저 중상을 입게 되겠지만 유월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그의 이런 태도가 숨 막히고 자존심 상했다.연재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진짜 간덩이가 부었구나?”“대표님은 항상 명령하고 사람들이 대표님에게 복종하는 것에 익숙하셔서 간과한 게 있어요.”유월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해운과 신
연재준이 웃으며 말했다.“안 믿으니까 구체적인 걸 물어보는 거 아니야. 네가 또 어떤 거짓말을 지어낼지 궁금해지니까.”“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만담하는 사람을 찾아가셔야죠.”유월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아귀를 떨쳐냈다.연재준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두 손으로 고삐를 이렇게 잡고 좌우 방향을 조절하는 거야. 말고삐를 세게 잡을수록 말은 빨리 달려. 자꾸 말 뱃가죽을 차지 마. 그런 동작이 말의 심기를 자극할 거야.”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진짜로 승마를 가르쳐 주려는 걸까?연재준은 그녀의 종아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굳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꼭 발걸이를 꽉 디디고 있을 필요는 없어. 이런다고 안전한 건 아니니까. 만약 낙마하다가 발걸이에 발이 걸리면 더 크게 다칠 거야.”갑자기 너무 많은 걸 이야기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유월영은 대충 알았다고 대답했다.그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사납게 화를 냈다가 갑자기 차분하게 승마를 가르치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정신병자로 비춰졌다.연재준은 강의를 마친 뒤에 말을 타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에서 그는 일부러 그녀를 겁주려고 빠르게 달리지는 않았다.한편, 신연우는 신현우와 함께 마사로 갔다.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 신연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형,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 여기 말 맡긴 적 없잖아.”신현우가 말고삐를 당기며 그에게 물었다.“유월영 씨랑 둘이 사귀니?”신연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난 호감이 있어. 잘해보고 싶어. 설마 이 일 때문에 나를 따로 부른 거야?”신현우가 말했다.“SK랑 해운이 협력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네가 안 한다고 했다면서?”신연우가 말했다.“나도 형을 돕고 싶지. 하지만 난 팀도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잖아. 해운에서 제시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차라리 다른 투자자들이 제시한 조건이 더 좋았어.”“이 프로
신현우의 말에 신연우가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회사에 출근하지는 않지만 가족으로서 형이 그렇게까지 부탁을 하는데 거절하기는 힘들었다.신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가서 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예전부터 월영 씨를 SK에 취직시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최근 월영 씨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다가 새 직장에 취직하면 적응 기간도 힘드니까 부담 주기 싫어서 얘기 안 했던 거예요.”사실 조교 업무는 그리 힘들지 않으면서 두둑한 보수를 줄 수도 있었다. 신연우는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휴식 기간을 주고 싶었다.유월영은 자신을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신연우에게 감동했다.게다가 SK에 취직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제안이었다.SK에 입사하면 안정적인 급여를 보장받을 수 있고 대우도 좋았다.인공심장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 수술비와 인공심장 자체의 가격을 다 합산하면 최소 5억이 필요했다.게다가 나중에 기증자가 나타나서 수술하는 과정까지 합하면 또 3억이 나가야 할 판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제가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이제는 해운 사람들을 만나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요. 신 교수님은 팀의 중심이니까 교수님만 원하면 저는 문제없어요.”그 시각, 연재준과 신현우는 승마장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창문을 통해 드넓은 승마장을 바라보고 있었다.멀리서 보이는 두 남녀의 모습은 그렇듯 즐거워 보였다.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는 연재준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서 울화가 치밀었다.내가 그렇게 경고했는데 그걸 무시해?한편, 승마장을 나온 유월영은 약국으로 가서 소독약과 연고를 구매했다.초보자라서 그런지 말을 타고 내려온 뒤에 허벅지 안쪽이 쓰리고 아팠다. 옷을 갈아입으며 확인해 봤더니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솔직히 아까 그녀가 일부러 말을 자극한 건 그가 말을 진정시킬 실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면 믿지는 장사는 아니었다.연재준은 할 줄 아는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다음 날, 신연우의 연구팀은 해운그룹과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주말에 있을 영안 출장에 연구팀이 동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연구팀도 탐사와 관측이 필요했으니 합리적인 요구였다. 신연우가 가기로 했으니 자연히 유월영도 따라가야 했다.계약이 끝난 뒤, 유월영은 사무실을 나오면서 핸드폰으로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큰언니에게서 온 연락이었다.그녀는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다.“언니.”“월영아, 지금 바빠?”“지금은 괜찮아. 무슨 일이야?”“엄마 병세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큰언니가 말했다.“엄마가 요즘 들어 계속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안 쉬어진다네? 게다가 식욕도 떨어져서 끼니를 거의 안 드셔. 안색도 안 좋으시고. 병이 또 도진 게 아닌지 너무 걱정돼.”유월영은 주저 없이 말했다.“내가 지금 갈게. 엄마 모시고 병원에 한번 다녀와야겠어.”큰언니가 말했다.“나도 같이 가.”“언니는 서우도 돌봐야 하잖아. 별일 없을 거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할게.”큰언니는 그녀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다.유월영은 신연우를 찾아가서 차를 좀 빌리고 싶다고 부탁했다.신연우는 주저 없이 그녀에게 차키를 건넸다.“급한 일인가 봐요?”“그렇게 큰일은 아니에요. 내일 차는 학교에 끌고 가서 주차할게요.”유월영은 그가 걱정할까 봐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지금이 신연우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신연우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차는 급하지 않으니까 운전만 조심해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요.”연재준이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다급히 복도를 빠져 나가는 유월영의 뒷모습을 발견했다.신연우가 뒤돌아서며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신연우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고 연재준도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갈 길을 갔다.봉현군으로 돌아간 유월영은 엄마를 모시고 시내에 있는 신주병원으로 왔다. 나중에 그 일이 있고 그들은 병원을 옮겼다.검사 결과는 심장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다고 나왔다.의사가 정색한 얼굴로
“나랑 네 아빠는 마트를 운영하고 너희 셋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았어. 하교하면 마트에 와서 간식을 훔쳐먹었다가 아빠한테 크게 혼나기도 하고. 그때마다 너희는 내 뒤로 숨었어. 그러다가 아빠 화가 좀 누그러지면 또 마당에 나가서 신나게 놀았지.”“사실 네 아빠도 진심으로 너희들을 혼낼 생각은 없었어. 그랬으니까 내가 말린다고 그만뒀지. 간식을 많이 먹으면 저녁을 못 먹는다고 걱정하셨던 거야. 그때는 참 좋았었는데….”유월영도 지난날을 회상했다.아빠가 사기를 당하기 전까지는 그들도 참 활력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았다. 그 사기 사건은 그들의 가정을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었다.유월영은 지금도 일이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나중에 해운에서 자리를 잡고 사람을 통해 알아봤는데 그 사건에 연루되었던 인간들은 나중에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고 했다.그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때 그 사기 사건이 아니었으면 나 삶도 이 모양은 아니지 않았을까?“월영아, 엄마한테 약속 하나만 해. 정말 가망이 없다면 엄마 위해 돈 쓰지 말고 나중을 위해서 남겨둬. 엄마는 죽을 때까지 너한테 부담 끼치기 싫어.”유월영은 울먹이며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절대 그렇게 못해, 엄마.’“하지만 신영이는 꼭 찾아줘. 걔 누구한테 사기 당했어….”이어지는 이틀 동안 유월영은 신연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서 엄마를 돌봤다.이영화는 겨울에 춥다며 유월영을 위해 목도리를 직접 짜주겠다고 했다.유월영은 어차피 힘이 드는 일도 아니니 뭐라도 할 일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에 실과 뜨개바늘을 사다주었다.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화는 예쁜 목도리를 만들어냈다.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조서희였다.[월영아, 너랑 연재준이 승마자에서 말 타는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어. 벌써 인기검색어까지 올라갔더라.]유월영은 조서희가 보낸 링크를 클릭하고 기사에 접속했다. 연재준이 그녀를 앞에 태우고 달리다가 그녀가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