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청수호의 절반이 불길에 휩싸였다. 물이 증발하면서 하얀 안개가 피어올라 호수는 마치 인간 세상의 선경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꽃에 둘러싸인 우진영은 당황하지 않았다.그는 즉시 체내의 선천 강기를 모아 자신의 몸을 덮었고, 얇은 얼음 갑옷이 그의 몸을 감싸고 나타났다. 이 얼음 갑옷은 매우 견고하여 대종사가 아니면 부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어 우진영의 손에 선천 강기로 만든 얼음 검이 나타났다.그가 강하게 휘두르자 차가운 기운이 퍼져 나갔다. “부셔져라!”폭발적인 소리와 함께 불길이 얼음알갱이로 뒤덮여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우진영은 비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인가?”그러나 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김문호는 이미 2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나? 나는 삼중 진법을 설계했다!”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에 금빛이 번쩍였다. 우진영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의 머리 위에 거대한 금빛 보탑이 나타나 있었다. 이 보탑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압박감을 주었다. 우진영은 즉시 위험을 감지하고 이 보탑 아래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려는 순간, 몸이 마치 납으로 채워진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내려가라!” 김문호의 명령과 함께 공중에 떠 있던 금빛 보탑이 우진영을 향해 떨어졌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금빛 보탑이 내려앉자, 호수 전체가 20미터가 넘는 파도를 일으켰다. 강력한 바람이 칼날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진서준은 한보영 앞에 서서 그 무서운 기류를 막아냈다. 그의 옷자락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김문호와 함께 온 중년 남자는 상황이 달랐다. 그의 얼굴은 바람에 일그러졌고, 두 손으로 나무를 꼭 붙잡으며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다.여파가 사라지고 물결이 가라앉자, 호숫가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반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우진영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치 피의 연못에 잠긴 듯 보였다. 매우 끔찍한 광
“뭐라고? 유씨 가문이라고?” 우진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북의 유씨 가문을 그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곳은 온몸을 단련하는 종사들이 대대로 배출되는 서남부 최고의 가문이었다. 장씨 가문과 유씨 가문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유씨 가문과 맞설 수 있는 가문은 강남 전체를 통틀어도 수가밖에 없었다.“살려줘! 나도 장씨 가문을 떠나 유씨 가문에 들어갈 거야!” 우진영은 목숨을 구걸하며 소리쳤다. 이제는 체면 따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오호, 너도 유씨 가문에 들어가고 싶다고?” 김문호는 손을 들어올리다 천천히 내려놓으며 우진영을 비웃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맞아! 나도 오래전부터 유씨 가문을 동경해 왔어. 다만, 누구도 나를 소개해 주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야!” 우진영은 급히 변명했다.“좋아, 내가 유씨 가문에 들어가게 소개해 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전에 나에게 증명할 것이 있어야 해.” 김문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증명할 것?” 우진영은 순간 멍해졌다가, 김문호의 의도를 깨달았다. 김문호는 자신에게 진서준을 죽이고 그의 목숨을 증거로 바치라는 것이었다.“좋아, 문제없어!” 우진영은 곧바로 동의하며 진서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살의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는 이미 진서준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제는 진서준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더욱 비참해졌다고 느꼈다. 김문호가 증명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우진영은 진서준을 죽였을 것이다.우진영이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자 진서준은 미소를 지었다.“정말로 나와 싸우겠다는 겁니까?”“잡소리 말고, 이 모든 게 너 때문에 일어난 거다. 오늘 밤, 네 목숨으로 내가 당한 수치를 씻어내겠다!”우진영은 미친 사자처럼 진서준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진서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김문호를 이기지 못했으면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쾅!한보영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볼 틈이 없었다. 그녀의 앞에서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밤공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청수호 저택은 고요에 휩싸였다. 조금 전 우진영과 김문호 사이의 격전이 있었지만,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했다. 아마도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네가 유씨 가문에 들어갔다고? 누가 너를 소개했지? 혹시 유지수인가?” 진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며 김문호에게 물었다.“유지수? 그게 누구냐? 난 그런 사람 모른다!” 김문호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를 유씨 가문에 초대한 사람은 바로 유씨 가문 가주의 동생이야. 직접 나를 초대했다고!”유씨 가문 가주의 동생이 직접 초대한 것은 김문호 같은 사람들에게 큰 영광이었다. 이는 유씨 가문이 김문호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며, 그렇지 않다면 가주의 동생이 직접 초대하러 올 리 없었을 것이다.진서준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 의심을 완전히 지웠다. 유지수의 말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그는 이제야 그 모든 의심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유지수가 김문호를 유씨 가문에 들인다는 핑계로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어머니를 납치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어머니를 데려간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내 제자들이 변변치 않다 해도, 네가 감히 그들을 가르칠 자격은 없다!” 김문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진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 밤, 내가 그 셋의 복수를 대신해주마!”말과 함께 김문호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자, 열 개의 금빛 장검이 그의 등 뒤에 떠올랐다.“그렇게 검 다루는 걸 좋아하나?” 진서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김문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분노에 차서 외쳤다. “죽음이 목전에 있는데도 이런 말을 하다니, 감히 나를 모욕하려 들다니! 널 산산조각 내주마!”김문호는 진서준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소리 외치며, 열 개의 금빛 검을 진서준을 향해 빠르게 날렸다. 금빛 검이 지나가는 길마다, 아래의 호수 물이 양옆으로 밀려나면서 하나의 수
진서준은 김문호의 말을 듣고,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하찮은 진법으로 나를 막으려 하다니, 어리석군.”진서준이 발을 세게 내딛자, 김문호가 펼친 진법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진법이 아직 발동되기도 전에, 이미 진서준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김문호의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어떻게 이토록 짧은 순간에 자신이 만든 진법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인가?심지어 대종사라 해도 이 진법을 깨기 위해서는 몇 초는 필요할 텐데, 진서준은 그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뜨렸다.김문호의 머릿속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급히 열 개의 금빛 검을 자신의 오른쪽으로 모아, 진서준의 검을 막아내려 했다.천문검이 떨어지자, 열 개의 금빛 검과 부딪쳤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얇은 종이를 자르는 것처럼, 금빛 검의 맨 위에 있던 검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금빛 검이 부서진 후에야, 겨우 진서준의 검을 막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김문호는 이미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두 다리는 마치 기름칠을 한 듯이 빠르게 뒷걸음질쳤다.지금 김문호는 조금 전의 당당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더 이상 위엄을 유지할 수 없었고, 매우 초라해 보였다.“무서운 놈!”김문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분노에 휩싸였다.“바람이여, 불어라!”그의 외침과 함께 갑작스러운 강풍이 일어,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들 사방에서 진서준을 향해 몰려들었다. 진서준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바람의 칼날을 마주하며, 금이 간 천문검을 가슴 앞에 들었다.천문검은 아직 단련이 덜 된 상태였고, 진서준과 함께하는 동안 지금에 이르러서야 금이 간 것이다. 그만큼 천문검은 견고하고 충실한 동반자였다.이때 바람의 칼날들은 어떤 힘에 이끌리듯 공중에서 서로 회오리치기 시작했고, 결국 작은 토네이도로 변했다.토네이도의 외곽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 바람은 앞서의 칼날들보다 훨씬 날카로웠다.이 기술은
우진영은 눈이 휘둥그레져,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금방 자신을 한 방에 제압했던 김문호가, 지금은 진서준의 검에 의해 두 팔이 잘려나간 것이다.우진영은 방금 전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진서준이 그때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지금쯤 그는 이미 목과 몸이 분리되어 있었을 것이다.“아아아!”찢어질 듯한 비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이제 김문호는 더 이상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지 못했고, 길가에서 헤매는 노인처럼 물 위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옷은 빠르게 피로 물들어 선명한 붉은색으로 변해갔다.“이제 왜 내가 이 별장에서 널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겠지.”진서준은 한 손에 검을 쥔 채,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방금 진서준이 휘두른 그 한 번의 검격은 그의 체내의 모든 기를 거의 소진시켰다. 하지만 지금 김문호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그저 물 위에 누워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다음 생에는 사람을 잘 가려. 어떤 사람은 당신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천문검을 들어 김문호를 죽이려 했다.“죽이지 마! 날 죽이면 안 돼! 난 유씨 가문의 공신야. 내가 죽으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김문호는 진서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끼고, 팔이 잘린 고통도 잊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유씨 가문의 이름을 이용해 진서준을 협박하고, 그가 포기하도록 만들려 했다.진서준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서북 유씨 가문? 그들이 나를 찾지 않아도, 내가 직접 유씨 가문을 찾아갈 거야.”과거에 자신이 유지수와 이지성에 의해 감옥에 보내졌을 때, 진서준은 유씨 가문이 그 배후에 있을 가능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당시 이 일을 계획한 배후자에게 물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어쨌든 진서준은 유씨 가문을 찾아갈 예정이었지만, 그건 내년 3월에 신농산을 나올 때의 일이다.유씨 가문의 이름이 더 이상 통하지
하지만 뼛속까지 전해지는 고통은 가시지 않고 파도처럼 넘실대며 김문호의 대뇌로 전해왔다.진서준은 김문호의 뒤를 따르며 별장으로 향해 걸어갔다. 우진영은 감히 도망가지 못하고 재빠르게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별장에 도착해 김문호는 진서준 일행을 데리고 2층의 작은 방에 도착했다.“여기 있어요.”김문호가 턱으로 방을 가리켰다.진서준이 문을 힐끗 보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여기에 진법을 숨긴 걸 내가 모를 것 같아?”“진법을 숨긴 건 외부인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거지 선생님을 해치려는 건 아니에요.”김문호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알았어. 농담한 건데 뭘 그렇게 겁을 먹어?”김문호의 얼굴을 보면서 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죽음 앞에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태연한 척하기 힘들었다.조금 전 청수호에서 영기를 보충했기에 진서준은 한 손으로도 쉽게 진법을 제거했다.진법을 제거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책상 위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나무상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진서준은 바로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영기를 느꼈다.“보물이 저 상자 속에 있어요.”김문호의 말을 듣고 걸어가 나무 상자를 열어보니 속에 주먹만 한 맑고 투명한 돌이 들어있었다.“영정석이야.”영정석을 본 진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영정석만 있으면 강남의 제일 장인을 못 찾더라도 천문검을 보수할 수 있었다.마침 내일 하루 시간이 더 있기에 보수할 시간이 충분했다.“전 이젠 가도 돼요?”김문호는 진서준의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면서 재빨리 물었다.“썩 꺼져.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아니면...”진서준이 차갑게 노려보니 김문호는 겁이 나 바로 몸을 돌려 도망갔다.김문호가 가고 나서 진서준은 영정석을 자신의 저장 반지에 넣고 객실로 돌아왔다.“진 마스터님,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용서해 주세요.”우진영이 진서준의 앞에 풀썩 무릎을 꿇으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이건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만일 지금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으
허윤진이 한보영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허사연은 감동해서 울 뻔했다.허사연은 여동생이 자기를 도와주려는 것을 눈치챘다.“서준 씨, 다친 데는 없어요?”아무도 없자 그제야 허사연이 본 모습을 드러냈다.“다쳤어.”진서준이 기침하며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어딜 다쳤어요? 봐봐요.”허사연이 깜짝 놀라면서 진서준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방금 김문호와 싸우면서 거의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서 지금 양기가 너무 왕성해. 양기를 꺼버리지 않으면 심한 내상을 입을 수 있어. 손 만져봐. 뜨겁지?”진서준은 허사연의 손을 잡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어머, 왜 이렇게 뜨거워요?”허사연은 진서준의 말을 의심했으나 불같이 뜨거운 체온에 깜짝 놀라 삽시간에 의심이 사라졌다.사실 이건 진서준의 계략이었고 영기를 이용해 자신의 체온을 순간적으로 높이는 수법이었다.“서준 씨,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요.”허사연이 놀라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음기를 흡수하면 좋아질 수 있긴 한데...”진서준은 아픈 척하며 무기력하게 말했다.“네?”허사연이 움찔하더니 바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잘 익은 사과와 같았다.“조...조금만 기다리면 안 돼요? 윤진이와 보영 씨가 잠들면 우리가...일을 치르면...”여기까지 말한 허사연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진서준의 품에 묻으며 귀뿌리까지 빨개졌다.진서준은 오해가 커진 걸 느끼고 깜짝 놀랐다.그저 허사연이 키스해 주길 바란 건데 그 일을 생각할 줄 몰랐다.“사연아, 그렇게 복잡할 건 없고 입으로 음기만 불어주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어.”진서준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래도 돼요?”허사연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행여 진서준의 몸에 이상이 생길까 봐 그녀는 자기 한 몸 바쳐서라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되지. 한번 해봐.”“그럼 해볼게요.”허사연은 진서준의 목을 안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두 사람은 키스 삼매경에 빠졌고 진서준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사연의
2층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허윤진의 눈빛에는 분노와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이튿날 아침 진서준과 허사연 일행은 기차역으로 진서라를 마중하러 왔다.“오빠.”진서준을 발견한 진서라는 달려오면서 진서준의 품에 와락 안겼다.주위의 여객들이 진서준을 향해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곁에 세 명의 미인이 서 있었고 그중 두 명은 자매였고 품에 또 한 명의 미인을 안고 있으니 마냥 부럽기만 했다.“서라야. 오빠가 있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진서준은 진서라의 등을 다독이며 작은 소리로 달랬다.“오빠만 믿을게.”진서라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았다.“새언니, 윤진 씨, 보영 언니.”진서라는 허사연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새언니라는 호칭에 허사연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요즘 더 야윈 거 아니에요? 집에 가서 맛있는 보양식을 해줄게요.빨리 가요.”“새언니, 고마워요.”진서라가 웃으며 말했다.“고맙긴요.”진서준은 네 명의 미인과 함께 별장으로 돌아왔다.네 사람을 별장에 내려놓고 진서준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늦게나 들어올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밥 먹어.”“조심해서 다녀와요.”허사연이 걱정스레 말했다.“걱정하지 마.”진서준은 차를 운전해 바로 운대산으로 가지 않고 김씨 가문으로 향했다.요즘 김연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만나러 갔다....결혼식 때문에 배수정은 김씨 가문에 반 달 남짓 더 머물렀다.의식주행은 신경 쓸 것 없으나 유일한 고민이라면 김씨 가문의 한 도련님이 매일 배수정을 보러왔다.이 도련님은 하필 김씨 가문의 직계 후손이라 화도 내지 못하고 마냥 참고만 있었다.띵똥...벨소리가 울렸다.배수정은 잔뜩 귀찮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문을 열어보니 멋진 청년이 꽃다발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배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수정 씨, 이건 방금 호숫가에서 꺾어온 장미예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김태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꽃을 좋아
“김평안 씨는 내가 엄청난 공을 들여서 모셔 온 분입니다.”유기명이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며 진서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겉보기엔 4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그 실력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어마어마하다고? 그럼 나랑 한번 붙어볼래?”은청준이 비웃으며 말했다.은청준은 스물여섯 살에 이미 사급 대종사가 되었는데 반면 이 경호원은 체내에 강기가 거의 없었다.아무래도 겨우 종사의 문턱을 밟은 무인인 것 같은데 이런 쓰레기가 세속에서는 강자로 불리는 건가?유기명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은청준 씨와는 비교할 수 없죠. 하지만 김평안 씨 검술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실력입니다.”“마침 나도 검술이 특기인데, 한 번 겨뤄볼까?”은청준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청준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무도는 남과 다투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이장로가 차분하게 말하자 은청준은 곧바로 태도를 고쳐잡고 공손하게 말했다.“이장로님, 저는 그냥 세속 무인과 가볍게 한 수 겨뤄볼 생각이었습니다.”이장로는 은청준을 흘긋 보았으나 그의 속마음을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은청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같은 종문 사람이니 체면은 세워줘야 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진서준이 다시 강조하자 은청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쏘아봤다.이 녀석 왜 이렇게 말이 많지? 혹시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가?“은범은 내 사촌 동생이야. 네가 그 못난 동생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은청준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신농산에서 만난 적이 있어.”“뭐라고? 걔가 신농산에 갔다고?”이 말에 은청준은 흥미가 동했다.“그 녀석 실력으로는 신농산 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들 텐데?”은청준은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은범이 어떤 인물인지 은청준은 잘 알고 있었다.애매한 실력과 어중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은범이 은씨 가문에서 빛을 볼 일은 없었다.은청준과 은범의 격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컸다.“그 녀석은 테
진서준은 아버지 진요한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이렇게 닮은 꼴로 곤륜 사람들을 만나면 곤륜 장로가 진서준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진서준은 곤륜에 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인피면구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목소리까지 완전히 변해버린 진서준을 보고 유정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진서준이 자기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진서준이 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알겠어요, 진서준 오빠.”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름 잘못 불렀어. 지금 난 김평안이야.”진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강조했다.“그냥 김평안이라고 부르면 돼.”“알았어요.”그렇게 진서준은 유정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인피면구를 쓴 진서준을 본 유기명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진서준이 슬쩍 보낸 눈짓을 보고 유기명은 즉시 이 사람이 진서준이란 걸 깨달았다.“유정아, 이리 와 앉아. 네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유기명이 유정을 옆에 앉히며 말했다.이때, 곤륜의 이장로가 진서준을 흘끗 보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바로 유정에게 시선을 돌렸다.“가주님, 따님 건강이 막 회복된 것 같은데, 맞나요?”이장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네? 이장로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유기명은 깜짝 놀랐다.유기명은 아직 딸의 병에 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장로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 큰 병을 앓았다는 걸 눈치챘다.이건 거의 신의 영역 아닌가?“따님께서는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지만 눈에 피곤한 기운이 남아 있고 걸음걸이도 미세하게 불안정합니다.”이장로가 천천히 해명했다.“역시 곤륜 장로님이십니다.”유기명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딸은 최근 큰 병에서 막 회복된 참입니다.”“따님을 치료한 의사는 보통 인물이 아닐 것 같네요.”이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큰 병인데도 이 정도로 빠르게 완치하다니, 의술이 보통이 아닐 텐데... 혹시 성약당 장로가 아닙니까?”유기명은 순간 멈칫하더니 곁눈질로 진서준이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도 겨우 서른을 갓 넘긴 정도였다.“가주님, 이번에 찾아온 건 부탁할 일이 따로 있어서입니다.”이장로가 용건을 말하자 유기명이 시원하게 대답했다.“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유씨 가문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곤륜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건 곧 곤륜이 유씨 가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곤륜은 대한민국 4대 최강 종문 중 하나였다.곤륜이 유씨 가문에 빚을 진다면 훗날 유씨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 종주님 따님도 이번에 곤륜에서 내려왔습니다.”이장로가 말문을 열었다.“네? 조슬기 아가씨도 왔습니까? 근데 아가씨는 어디에...”유기명이 멈칫하더니 이장로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어제 하산할 때 슬기와 경호원 두 사람이 따로 움직였고 밤에 저희와 다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요. 나중에 수소문해 봤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슬기를 찾아주신다면 이 늙은 몸이 신세를 지는 셈 치겠습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이장로님, 과한 말씀입니다. 제가 즉시 서남 지역 전체에 조슬기 아가씨를 찾으라고 명령하겠습니다.”유기명은 망설일 틈도 없이 즉시 지시를 내렸다.서남에서 유씨 가문은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명령이 내려가자 서남의 크고 작은 도시, 심지어 작은 마을까지도 조슬기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모두가 조슬기를 찾기 위해 분주한 사이, 진서준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오빠!”진서준을 보자마자 유정이 반갑게 소리쳤다.“유정아, 몸은 좀 어때?”진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많이 좋아졌어요.”유정은 대답하며 진서준을 위아래로 살폈고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혹시라도 진서준이 자기를 위해 묘강에 가서 복수라도 했던 게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진서준이 앞으로 다가가 유정의 맥을 짚었다.“확실히 거의 다 나았네. 이틀만 더 쉬면 원래 상태로 돌
“가주님! 대문 앞에 중요한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유씨 가문의 집사가 황급히 유기명을 찾아 소리쳤다.“중요한 손님이라고?”유기명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서남 지역에서 유씨 가문을 찾아 올 만한 중요한 손님이라면 꽤 오랜만이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씨 가문에서 중요한 손님으로 인정할 만한 인물 자체가 거의 없었다.설령 그것이 경성의 4대 가문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방문해야만 중요한 손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누가 왔어?”유기명이 물었다.“곤륜의 이장로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유기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뭘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안으로 모셔 와야지!”유기명은 집사를 따라 급히 장원 입구로 향했다.그곳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그들은 모두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복장이었고 등에는 검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풍기는 기운도 비범했다.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느 극단에서 뛰쳐나온 배우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이장로님, 이 유씨 가문이란 곳,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를 대문 앞에서 기다리게 할 수 있습니까?”무리의 맨 앞에 선 잘생긴 청년이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우리 곤륜이 오랫동안 여기를 찾지 않은 건 맞지만 이런 대우는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잖아요.”그들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이전에도 곤륜산에서 내려와 세속의 여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를 가든 귀빈처럼 모시며 극진한 대우를 받았었다.하지만 유씨 가문이 이들을 이렇게 문 앞에 세워두고 있다니, 그 격차가 너무 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다 떠들었으면 이제 조용히 해.”그 순간, 백발의 이장로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순간적으로 모든 이가 입을 다물었다.“종주님의 따님이 사라졌는데 너희는 지금 대접 타령이나 하고 있어? 이번에도 슬기를 못
진서라는 재빨리 움직여 유정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고마워, 서라야.”유정은 물컵을 받아 들고 천천히 마셨다.“몸은 어때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진서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이제 괜찮아.”유정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참 다행이네요.”진서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진서준 오빠는 어디 있어? 왜 안 보이지?”유정이 문밖을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유정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진서준이었다.진서라는 급히 둘러대기 시작했다.“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나갔다고? 혹시 묘강으로 간 건 아니겠지?”유정도 바보는 아닌지라 진서라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아, 아니에요. 묘강은 워낙 위험한 곳이라 우리 오빠도 그렇게 무모하진 않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서라의 마음은 누구보다 더 초조했다.벌써 하루가 지나도록 진서준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었다.점심때 국제 뉴스를 본 진서라는 배논국의 묘강 지역에서 큰 소란이 있어 배논국이 결국 묘강 지역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확인했다.하지만 진서준의 소식은 단 한 줄도 없었다.그러니 자연스레 진서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유기명이 방으로 들어왔다.딸이 깨어난 걸 보자 유기명은 눈물을 글썽이며 격동한 말투로 말했다.“유정아, 드디어 깨어났구나!”“죄송해요, 아버지. 걱정 끼쳐드려서...”유정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절반이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바보 같은 소리 마. 사과할 사람은 나야.”유기명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때 내가 진서준의 말을 듣고 그 자식을 죽였더라면 네가 중독될 일도 없었을 거야.”“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그 얘긴 그만하세요.”진서라가 서둘러 다독였다.“그래,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야. 더 이상 골치
조슬기의 피부 온도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지만 몸속은 한기로 가득했다.조슬기의 오장육부는 이미 일반인의 체온을 한창 밑돌고 있었다.옥패가 어느 정도 억제하는 기능이 있긴 했지만 효과가 너무 미미했다.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조슬기 몸속에 쌓인 한기가 완전히 폭발할 것이다.그 순간이 오면, 조슬기의 목숨도 위험해질 것이다.“이봐, 헛소리하지 마. 너야말로 정신 상태가 안 좋은 거 아냐?”신수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고 심지어 조슬기 본인도 몰랐다.조슬기가 알면 괜히 걱정할까 봐 일부러 숨겨왔던 것이다.그런데 지금 이 녀석이 대놓고 말해버리다니,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놓은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사실을 알아챈 신수란이 충격을 받아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하면 누구도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다.“란 언니, 오빠를 탓하지 마. 사실 오빠가 말 안 해도 난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조슬기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자기 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건 결국 자신이었다.진서준이 말한 대로 조슬기의 상태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에둘러 말해서 그렇지 지금의 상태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신수란은 진서준을 매섭게 노려본 뒤, 급히 조슬기를 달랬다.“아가씨,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종주님과 장로님들이 반드시 치료법을 찾으실 거예요. 게다가 전 대한민국에 용존이라는 천재 소년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천재는 실력도 강하지만 의술 또한 모든 사람을 압도한다고 해요. 그런 인재라면 분명 아가씨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진서준은 듣자마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용존이라니, 그건 진서준이 아닌가?“뭐야, 그 표정은?”신수란이 진서준의 표정을 눈치채고 불쾌한 얼굴을 했다.“아, 별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너희는 용존에 대해 어디서 들었어?”“우릴 뭐로 보는 거야? 우리가 원시인인 줄 알아? 우리도 휴대폰 쓸 줄 알아.”신수란이 불쾌한 표정으로 받아치
진서준은 이 주제에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이 녀석은 알아서 수습하세요.”“고마워요, 오빠.”조슬기는 고마움을 표하고는 신수란을 바라봤다.신수란은 속에 쌓인 화를 주체하지 못해 단검을 뽑아 장강훈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말해! 누가 너희를 보낸 거야? 그리고 우리가 미리 산에서 내려온 걸 어떻게 알았어?”“돈 받은 만큼 일할 뿐이야. 우린 돈만 받으면 그만이고,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는 모른다니까.”장강훈은 이를 악물며 사실을 털어놨다.“말 안 하겠다 이거지?”신수란은 냉소를 지으며 더 이상 긴말하지 않고 바로 장강훈의 다리 힘줄을 단칼에 끊어버렸다.“아악!”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장강훈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정말 몰라! 나도 온라인에서 의뢰를 받았을 뿐, 누군지는 몰라.”“이래도 고집을 부려? 말 안 하면 내가 널 고자로 만들어버릴 줄 알아.”말을 마치며 신수란은 단검을 장강훈의 아래쪽에 갖다 댔다.그러자 장강훈은 순간 몸을 덜덜 떨며 깜짝 놀라 눈물까지 찔끔 날 뻔했다.“말할게, 말할게!”머리가 잘리거나 피가 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그 부위만큼은 절대 잃을 수 없었다.“우리에게 조 아가씨를 납치하라고 시킨 사람은...”그 순간, 장강훈은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검은 피를 뿜어내고 그대로 푹 쓰러졌다.“죽은 척하지 마!”신수란은 앞으로 다가가 장강훈을 툭 밀었다.하지만 장강훈은 이미 숨통이 끊어져 완전히 사망한 상태였다.“진짜 죽었네.”신수란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했다.분명 조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죽은 걸까?그 광경을 본 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상황을 대충 이해했다.묘왕은 죽었지만 묘강의 사수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진서준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장강훈의 머리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그 모습은 마치 머릿속에 뭔가가 있는 듯했다.신수란이 앞으로 다가가 확인하려는 순간, 장강훈의 귀에서 새까만 지네들이 한 마리씩 기어 나오기
갑자기 쓰러진 장강훈을 바라보며 현장 사람들은 전부 멍해졌다.이게 무슨 상황이지?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저 건방지고 거만한 청년이 장강훈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마지막엔 처참하게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그런데 저 극악무도한 악당 장강훈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다니, 모두의 예상을 빗나간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모두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얼이 빠져 있었다.심지어 신수란조차도 미간을 찌푸리며 이 장면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네놈이 감히 암기로 날 공격해?”장강훈은 고통에 찬 얼굴로 진서준을 노려봤다.그 눈빛은 당장이라도 진서준을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였다.“내가 말했지? 넌 나와 겨룰 자격이 없다고.”진서준은 여전히 평온하게 말했다.“암기라니? 너도 저놈들처럼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었구나.”신수란이 콧방귀를 끼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신수란 복부의 상처는 바로 암기의 공격으로 다친 것이었다.그리고 방금도 장강훈이 신수란을 비겁하게 기습하려 했다.그래서 신수란은 이런 비열한 수법을 쓰는 인간들에게 혐오감을 느꼈다.진서준은 신수란의 말을 듣고 살짝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고 대신 속으로 이 여자가 멍청하긴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진서준이 두 여자를 구하려고 선뜻 나섰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같은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하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어서 저놈을 해치워! 암기든 뭐든 다 부숴버려! 내 무기와 똑같은 걸 쓸 자격이 있기나 해?”장강훈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강훈은 진서준이 자기와 같은 종류의 암기를 사용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그러나 진서준이 사용한 건 단순한 은침 두 개였을 뿐이고 다만 그것이 일반 은침보다 좀 더 단단했을 뿐이었다.남아있던 부하들은 우르르 진서준에게 몰려들었다.개미도 많이 모이면 코끼리를 잡는다고 했다.하지만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아무리 개미가 많아도 결국 희생될 뿐이었다.진서준이 발을 내딛자마자 서 있던 바닥이 산산조각이 났다.이어지는 진서준의 움직임은 유령처럼 사
결연한 표정을 지은 조슬기를 본 장강훈은 순간 당황했다.“뭐든 다 협상할 수 있어. 제발 흥분하지 말자.”장강훈이 받은 임무는 조슬기를 데려가는 것이었고 그녀를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만약 조슬기가 다친다면 그야말로 큰일 날 상황이었다.“다시 물을게, 내 조건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조슬기가 단호하게 묻자 결국 선택지가 없었던 장강훈은 마지못해 동의했다.“좋아, 저 여자는 보내주겠어.”“안 돼요, 아가씨. 절대 저 녀석들과 함께 가면 안 돼요.”신수란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만류했다.“란 언니, 걱정 마세요. 이 사람들은 절대 저를 함부로 다치진 않을 거예요. 언니는 먼저 몸부터 챙기세요.”조슬기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대체 누가 자기를 잡으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가 이토록 신중히 행동하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이 자기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건 확신했다.“조 아가씨, 시간이 얼마 없어. 서둘러 나가자.”장강훈이 손짓하며 재촉하자 조슬기는 말없이 단검을 쥐고 천천히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방 안에 있던 킬러들은 신수란을 힐끔힐끔 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조슬기가 문턱에 거의 다다른 순간, 장강훈이 갑자기 신속하게 움직였다.쨍그랑!단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얼른 이 여자를 잡아!”장강훈이 명령하자마자 양쪽에 대기하던 킬러들이 조슬기를 단단히 제압했다.“왜 이렇게 비겁해? 약속을 지켜야지!”조슬기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조 아가씨, 내가 아까 한 자기소개를 잊었나 보네?”장강훈은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여자는 생포해. 저 남자는 어디 보자, 그냥 죽여버려.”장강훈은 진서준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오빠, 미안해요. 우리 때문에 이런 일이...”조슬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했다.“이봐, 당장 창문으로 뛰어내려. 내가 시간을 끌게.”신수란이 이를 악물며 지시했다.지금의 신수란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시간을 끄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