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에 들어서자 하인이 찻물과 간식을 가지고 왔다.남하준은 앉아서 허윤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고, 시선은 항상 집 밖 대문 쪽으로 향했다.허윤미는 그의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을 발견하고 자꾸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하준아 왜 그래? 네 부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아니에요. 쉬라고 보냈어요.”남하준은 정신을 차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차의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모금 더 마셨다.“맛 좋지? 다인이가 고른 차야. Z국 벽라춘인데 맛이 아주 좋아. 게다가 이 차를 우려내는 데 노하우가 있더라고. 수온이 너무 높으면 맛이 떫대. 85도가 딱 정당한 온도라고 하더구나.”서다인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 그의 마음은 출렁거렸다. 천천히 잔을 내려놓고 목을 축이며 말했다.“보아하니 잘 지내는 것 같네요.”“사실 아주 단순하고 착한 아이야. 성격이 온순하고 마음도 여려. 무슨 일이든 참 잘 해내고. 나도 가끔은 참 이상해. 분명 총명하고 순수한 아이인데 어떻게 그런 눈뜨고 볼 수 없는 과거가 많은지.”남하준은 그녀의 과거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뭐하러 간 거예요?”“꽃 자르러 갔어. 선샤인하우스에 꽃이 활짝 피었거든. 잘라서 거실에 진열해놓으면 예쁠 것 같아서 말이야.’남하준은 잔에 담긴 차를 마시고 일어섰다. “제가 꽃 잘라 줄게요.”허윤미는 경악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뭐?”남하준은 이미 성큼성큼 떠났다.허윤미는 소파 등에 엎드려 남하준이 황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뭐라고? 쟤가 지금 꽃 자르러 간다고?”그녀의 아들은 태생부터 상남자로 지금까지 화초를 가까이한 적이 없다.예전에 그에게 꽃에 물을 주라고 하면 너무 많이 줘서 식물을 다 죽이던 남자인데, 오늘 먼저 꽃을 잘라 주겠다고 하다니?선샤인하우스.따스한 햇볕이 유리를 통해 꽃 한 송이마다 쏟아졌다.꽃이 만발하여 화사하고 온 방에는 마음을 파고드는 꽃향기가 가
서다인은 마음을 읽힌 듯, 부끄럽고 불안하여 고개를 떨구었다.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화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혼하고 싶으면 솔직히 말해. 이런 식으로 나랑 거리 두지 말고.”서다인은 머리를 푹 숙이고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고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그녀는 남하준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뭘 바꿀 수 있겠는가?나쁜 여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끔찍한 과거가 있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없었다.그녀는 지금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토끼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남하준은 서다인의 기분이 매우 가라앉은 것을 보고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순간 자신의 말투가 너무 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부드러워지더니 그녀의 축 처진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네 생각을 말해봐.”그녀는 줄곧 말이 없었다.남자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점점 더 낮아지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서다인이 몰래 눈물을 훔친 것을 발견한 남하준은 심장이 약간 조여왔다.그는 긴장해서 일어나 서다인 앞으로 가서 그녀를 잡아당겼다.그녀의 작은 체구가 고개를 떨구고 있어 잡아당겨도 그는 서다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왜 울어?”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아픈 것 같았다.이 죽일 놈의 고통은 그를 괴롭히고 낯설게 만들었다.여자가 우는 것을 보고 이런 고통을 느낀 것은 10년 전이었다.서다인은 울고 싶지 않아 꾹 참느라 노력했지만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자신의 빌어먹을 신분을 생각하고, 나중에 남하준의 손에 죽을 것을 생각하면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말도 안 하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눈물만 흘리는 여자의 모습에 남하준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서다인의 뒤통수를 낚아채
남하준은 그녀의 물음에 갑자기 굳어졌다.잠시 후에야 그는 침착하게 답했다.“이 방법이 효과가 좋아.”이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둘 사이의 온기를 깨뜨렸다.“꽃 다 꽂았어?”소리를 들은 서다인은 급히 자리로 돌아와 도구를 들고 자르기 시작했다. “거의 다 됐어요, 어머니.”허윤미가 들어와 보니 꽃 한 병도 제대로 꽂히지 않았고 바닥에 아직 빈 병 몇 개가 남아 있었다.허윤미는 의심스러운 듯 남하준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준아, 너 방금 여기 와서...”남하준은 급히 허윤미의 어깨를 껴안고 밖으로 나가면서 큰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엄마, 먼저 가서 쉬세요. 여기는 저희가 할게요.”남하준이 강제로 허윤미를 내보내고 돌아왔을 때 서다인은 열심히 꽃을 자르고 있었다.그는 가위를 하나 구해와 서다인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꽃 자르는 모습을 살피고 묵묵히 함께 꽃을 다듬기 시작했다.시간은 항상 조용하고 아늑하게 흘러갔다.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고, 향긋하고, 세월이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다.서다인은 눈을 들어 남하준이 혼자 꽂은 꽃병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통일된 색깔의 붉은 장미꽃들이 가지런하고 질서 정연하며 네모반듯한 것이 마치 그의 병사들이 늘어선 것 같았다.사내대장부의 안목은 정말 치명적이었다.그녀가 몰래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남하준은 기분이 좋아졌다.“예쁘지 않아?”서다인은 계속 분주히 움직이며 대답했다.“당신이 직접 꽂은 걸 아시면 어머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남하준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넌 예뻐 보여?”서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예쁘네요.”남하준은 그녀의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확실히 예뻤다!그는 난생처음 꽃꽂이가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꼈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남하준은 방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회색 바지 차림으로 베란다 밖에 서서 두 손으로 난간을 짚고 하늘을 쳐다보았다.알고 보니 여기 별도 밝았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서다인이
남하준의 그윽하고 아리송한 검은 눈동자는 뜨거운 빛을 띠었고, 몸에는 차갑고 위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살짝 화난 듯 또박또박 말했다.“갑자기 글만 남기고 떠나는 건 실례지. 나한테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어?”서다인은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에게 자신이 블랙 섀도우가 보낸 첩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까?군전 그룹은 M국의 국방 무기 생산 기지로 일급 비밀 군공장이었다.그녀의 신분은 그곳에 남아서는 안 된다.군전 그룹에서 중요한 기밀이 누설되면 그녀의 혐의는 너무 커지기에 그녀는 이런 죄명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머리가 텅 비어 있었고 생각이 복잡하여 작별인사의 핑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그게...”서다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입을 열듯 말듯 하는 그녀의 핑크빛 입술을 바라보던 남하준은 덩달아 가슴이 떨렸다.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눈동자가 뜨거워지며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남자는 섹시한 목젖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고개를 더 숙였다. “대체 부대장이 뭐라고 해서 갑자기 떠난 거야?”서다인은 갑자기 등줄기가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서다인의 눈에 나타난 당황스러움은 그녀의 생각을 드러냈고 남하준은 이를 알아챘다.그녀는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도련님, 사실은...”“그 호칭부터 좀 바꾸면 안 돼?”남하준이 그녀의 말을 끊고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나지막하고 매혹적인 말투로 말했다.서다인은 마음이 약해졌다.왜 그녀는 이 위엄 있고 패기 넘치는 남자가 자신을 달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까?“하준 씨.”서다인은 이내 호칭을 바꾸었다.남하준은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착하네.”서다인은 또 경직되었다. 심장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급회전하여 큰 기복이 생겼다.그녀는 약간 수줍어하며 멍하니 있었다.‘이 말이 왜 이렇게 애틋하게 들리지?’남하준은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가 부
남하준은 그녀를 끌고 화장대 의자에 앉히고 그도 침대로 가서 엄숙한 얼굴로 앉았다.“서다인,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고도의 의심과 경각심을 가져야지.”서다인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남하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어렸을 때부터 잘 보호받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토끼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잃어서인지 세상의 추악함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남하준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나도 네가 블랙 섀도우가 보낸 스파이인지 의심스럽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직 사실은 아니야.”“당신한테 죽은 그 스파이가 한 말도 사실이 아닐까요?”“그 사람은 전에 널 암살하려던 자가 아니야. 비디오를 수백 번이나 반복해서 봤는데 체형이 같지 않아. 게다가 부대장은 일 년 내내 총을 지니고 있으니 널 죽일 때 칼을 쓸 필요가 없지.”서다인은 놀라는 표정이었다.수백 번이나 봤다고? 그가 직접 봤을까? 왜 이 일을 그토록 중시할까?“부대장은 진범에게 떠밀려 죄를 대신 뒤집어썼을 가능성이 커. 만약 정말 블랙 섀도우가 보낸 스파이라면 속전속결로 죽였지 너한테 쓸데없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을 거야.”열흘 넘게 서다인의 마음을 짓누르던 큰 바위가 순식간에 떨어져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으로 옷을 부드럽게 휘저으며 말했다.“난 내가 스파이인 줄 알았어요.”“아직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막 풀린 그녀의 마음은 남하준의 말 한마디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서다인은 고개를 번쩍 들고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남하준은 놀란 그녀의 모습에 이내 위로했다.“직업병이야. 그래서 네 신분에 대해 항상 의심하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건 없어. 더 조사해 봐야 해.”서다인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정말 첩자였다면 나 죽일 거죠?”그녀의 물음에 남하준은 멈칫했다. 티 없이 맑은 그녀의 살굿빛 눈을 바라보며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사실이라면 그녀를 죽일 수 있을까?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하
“이번에는 십여 개국을 다녀왔는데 정말 멋졌어요.”왁자지껄한 소리, 격앙된 정서.분명히 한 여자의 목소리일 뿐인데 야채 시장에 들어와 쉴 새 없이 지껄이는 느낌이었다.서다인은 쭈뼛쭈뼛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남하준은 서다인을 보고 옆자리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했다.서다인은 왠지 그에게 관심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걸어가서 남하준 옆에 앉았다.막 앉았는데 맞은편에 낯선 젊은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젊은 여자는 단정하고 대범하며 청초하고 부드러우며 눈길은 서다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서다인이 앉아 있는 몇 분 동안, 온 가족이 이 50여 세의 여자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중년 여인은 좀 복스럽게 생겼고 부티가 났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말하고 있었다.중년 여인은 마침내 멈추더니 티 테이블의 물을 한 모금 마시다가 갑자기 남하준 옆에 앉아 있는 서다인을 발견했다.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남하준이 소개하기도 전에 여자는 서다인의 존재를 일부러 무시하고 자신의 옆에 있는 젊은 여자를 소개하기 시작했다.“이 아가씨는 온씨 가문의 첫째 온가윤이에요. 제가 딸로 삼은 아이이고 하준이를 위해 고른 신붓감이죠.”서다인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담담해 보였다.“온씨 가문 다들 아시죠? 부동산계의 우두머리이자 재벌 가문이죠. 우리 가윤이는 마음이 어질고 착할 뿐만 아니라 명문대 졸업에 금기서화에 모두 능통하고 음식도 제법이고 우아하고 품성도 좋아 백하린보다 백배 나아요.”“하준아, 고모가 골라준 신붓감 마음에 들어?”남하준이 마침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그는 한쪽 손을 벌려 서다인의 뒤에 있는 소파 등에 걸치고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다가갔다.“고모, 소개할게요. 이분은 내 아내 서다인이에요.”남연희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눈빛이 매서워졌다.남하준은 서다인을 보며 정식으로 소개했다.“다인아, 인사해.
그러나 남연희의 목소리가 너무 높아서 조금씩 들렸다.남연희는 눈물 없이 울기만 하다가 울면서 해묵은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그때, 두 분이 사업을 위해 밖에서 열심히 일할 때 애들을 전부 제가 키웠어요.”“첫째가 학교에서 괴롭힘당해 충격으로 똥오줌을 못 갈릴 때 내가 매일 심리상담을 해주고 안아주고 재워줬어요.”“둘째가 실연을 당해 투신하려고 했을 때, 내가 무릎 꿇고 뛰지 말라고 빌고 애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왔어요.”“셋째는 승벽심이 가장 강했어요. 명품을 사겠다고 나한테 손을 내밀면 난 달라는 대로 다 줬어요. 애가 얼마나 예쁘면 그랬겠느냐고요.”“그리고 넷째는 반항적이라 매일 사회의 건달들과 어울리고, 싸우고,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녔어요. 그래서 내가 꾸준히 가르치고 타이르면서 애 마음을 달래줬죠.”남연희는 또 남하준을 가리켰다.“그리고 너, 다섯째는 세 살이 되었는데도 젖을 떼지 않았지. 새언니가 일하러 나가면 매일 나 쫓아다니며 내 옷을 들추고 젖 달라고 했잖아.”남하준은 심호흡하고 천천히 눈을 감고 꾹 참았다.서다인은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남하준이 그녀의 귀를 꾹꾹 눌러도 그녀는 들렸다.‘형제들이 이 고모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 일이 하나둘씩 터지는 게 두려워서였네.’체면이란 존재하지 않았다.“그리고 백하린이 출국했던 해에 다 큰 애가 매일 개처럼 울었잖아. 폐인처럼 지내다가 술과 담배까지 배우고. 고모가 널 그 구덩이에서 꺼내준 거야. 다들 양심도 없지.”몇백 번을 들은 이야기라 남창민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연희야, 다 지나간 일이니 이제 그만해. 아이들 다 커서 체면이 있는데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크긴 뭐가 커요. 내 눈에는 언제나 애들이에요. 내 손에서 자란 애들.”“내가 50대 중반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은 것도 다 애들 돌보기 위한 것 아니에요. 양심 없는 것들.”“고모가 너희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정성껏 신붓감까지 골라줬더니, 내 말을 듣는 녀석이 아무도 없어.
남연희가 아이들을 키운 공로를 과시하고 있을 때, 문밖이 술렁거렸다.남씨 가문의 첫째, 둘째, 셋째가 모두 아내를 데리고 달려왔다.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들어오자마자 물었다.“아빠 어디 계세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남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너희들 아버지 여기서 식사 중이셔.”남창민은 어리둥절했다. 아들과 며느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왔다.“대체 왜 그러냐?”첫째 남희준은 남연희를 노려보고 아버지가 무사하자 애써 참으며 말했다.“고모가 아빠 뇌졸중으로 집에서 돌아가셨다고 하셨어요.”남창민은 밥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연희야,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나를 뇌졸중으로 죽었다고 저주해?”남연희는 급히 달려가 남창민의 손을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거짓말을 했을 뿐이지 오빠 저주할 생각은 없었어요. 화내지 마세요. 네?”남창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곧이어 모두가 둘러앉아 식사하게 되었다.남연희는 또 가문의 ‘양심’없는 사람 하나하나 반복해서 늘어놓았다.서다인은 두 번 들은 것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인데 남씨 가문 사람들은 대체 몇 번이나 들었기에 이 고모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일까?식사 후.남연희는 아무도 못 떠나게 했고,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서다인은 남하준의 귀에 기대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준 씨 형제들 진짜 고모가 키운 거 맞아요?”남하준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서다인처럼 얼굴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아니, 우리는 할머니 때부터 집에 하인이 부족하지 않았어. 어렸을 때부터 전담 도우미가 계셨어. 그런데 고모는 밖에 나가 일하지 않고 집안에만 있었으니 우리가 자라는 걸 지켜본 셈이지. 그러니 돌본 건 아니야.”“아버님이 고모님을 많이 예뻐하시는 것 같아요.”“그래, 확실히 그렇지.”서다인은 짓궂게 물었다.“고모님이 골라준 신붓감 맘에 들어요?”남하준은 미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지우는 당장 남태준을 찾아가고 싶었다.그러나 어젯밤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 그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상대할 의향이 있을까?지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어젯밤 자신이 남태준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 그는 아직도 답장하지 않았다.어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매몰차게 말했는데 지금 다시 메시지를 보내 다시 만나자고 하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이지는 않을까?이렇게 하면 그녀가 남태준을 대하는 감정이 제멋대로이고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처럼 오만하게 보이지 않을까?지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고민하다 보니 생각이 많고 마음이 착잡했다.전화도 문자도 모두 성의 없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이 시간에 남태준은 이미 퇴근했을 것이다.저녁노을이 지우에게 쏟아지고 그녀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가락을 찾지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스쿠터가 무성한 오동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봄바람이 불어와 공기마저 향긋했다.지우는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30분 후. 경찰서 입구에 도착한 지우는 브레이크를 밟고 전원을 끄고 대문 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안에서 계속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데 유독 남태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지우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차를 잠그고 가방을 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좀 긴장되었다.들어가서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전부 업무를 보고 사건을 처리하는 경찰들이었다.그때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지나가면서 물었다.“어떻게 오셨죠?”지우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긴장하며 물었다. “실례지만 마약 단속팀 남 대장님 계시나요?”남자는 사무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안 계세요.”“그럼 어디로 가셨죠?”지우가 또 묻자 경찰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주시했다.“누구시죠? 무슨 일로 남 대장님을 찾으시죠?”지우는 상대방의 경계심과 엄숙함이 느껴졌고 뭔가 사납고 엄한 압박감을 주는
“난...”진효연은 당황하고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이게 전부 너를 위해서야.”지우는 눈물을 닦고 울며 말했다.“전 세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거의 매일 사람이 죽어요.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살해당하거나.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내가 만약 운전기사와 결혼하면 남편이 운전하다가 차에 치여 죽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요?”“내가 작은 가게 사장에게 시집가면 그 사람이 술을 많이 마셔 죽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어요?”“만약 농부에게 시집가면 가난해서 죽겠네요?”“뉴스 보면 가문이 몰살되는 참사가 얼마나 많아요?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고 마약 형사만 해당하는 거 아니라고요.”“제발 엄마의 그 비참한 운명을 나에게도 돌리지 말라고요!”지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파에 엎드려 목놓아 울었다.진효연은 어찌할 줄 몰라 멍하니 있으며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고 마음도 어지러워졌다.한바탕 눈물을 흘린 지우는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였다.“엄마 첫사랑인 그 약혼자가 뜻밖에 세상을 떠나 결혼하지 못한 건 엄마 평생의 한이겠죠. 이제 나도 똑같아요. 다른 점은 내 첫사랑은 죽지 않았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 감정은 엄마 때문에 이미 억눌려 죽었어요.”진효연은 얼굴이 창백하여 넋을 잃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지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은 적막했다.진효연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넋을 잃은 채로 소파에 멍하니 있었고 초점을 잃은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그날 밤, 지우도 잠을 설쳤고 진효연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아침.하룻밤이 지나자 지우는 어제저녁 자신이 한 말이 너무 심해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거나 진효연은 지우를 사랑하고 걱정하기 때문이었다.지우는 미안한 마음으로 진효연의 방문을 두드렸다.“엄마. 일어났어요?”방안에 인기척이 없자 지우는 또 몇 번 두드리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진효연은 늘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늘 삶에 대
지우가 난동을 부릴수록 남자는 더욱 괴로웠다.남자의 키스는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가며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부드럽게 닿았다.지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울다가 눈을 감은 채 몸을 떨며 울먹였다.“태준 씨. 이러지 말아요.”“사랑해 지우야.”그녀의 귓불에 키스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빠져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지우는 그의 손길이 스쳐 지나고 그가 키스한 피부에 마치 전류가 흘러 사지를 관통하고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두렵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갈망하고 있었다.어느새 몸부림을 포기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누군가를 사랑하기 전, 그녀는 절대 혼전 순결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했다.하지만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이성보다 신체의 갈망이 훨씬 컸다.지우는 온몸에 힘을 빼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한 촉감에 입에서 수줍은 신음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꾹 참았다.그녀가 남태준이 주는 정욕의 설렘을 즐기고 있을 때 남자가 갑자기 멈추었다.그는 지우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숨을 몰아쉬더니 그녀의 옷 밑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어 그녀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주었다.“미안해.”남태준은 욕망을 고통스럽게 억누르고 죄책감 가득한 채 속삭였다.“미안해. 미안해.”그는 하마터면 통제력을 잃을 뻔했다.이성이 돌아온 지금, 남태준은 자신의 뺨을 몇 대 때리고 싶을 정도였다.‘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른 거야?’“난 정말 개자식이야. 미안해.”남태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그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지우는 가슴이 출렁이고 호흡이 어지럽고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욕망을 추슬렀다.좋아하는 남자가 키스하면서 쓰다듬어주면 몸에서 이렇게 격렬한 반응이 일어날 줄이야.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아 강렬한 욕망까지 생겼다.아주
그래서 이 일은 남태준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다.그의 사명이고 명예이고 책임이고 그의 전부일 것이다.지우는 남태준을 사랑하고 그의 일과 삶도 존중했다.남태준은 그녀의 팔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내가 그 비실비실한 이혼남보다도 못하다는 거야?”지우는 중심을 잃고 그의 품에 안겨 방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팔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그녀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고 턱은 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바라봤다.남태준은 그녀 눈 밑의 눈물을 바라보며 자신도 눈시울을 붉혔고 그의 슬픈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다리도 못 쓰고 앞도 못 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네가 돈 때문에 나를 보살피기는 했지만 나 그때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그때를 생각하면 지우 눈 밑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그녀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남태준은 너무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그가 언제나 지금처럼 건강하기를 바랐다.“그때 너는 내가 눈이 안 보인다고 멋대로 행동했어.”남태준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 밑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네가 나를 도와 샤워하고 밥 먹여주고 우리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었지. 넌 청개구리처럼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 했어.”“네가 아무리 완자 친구라지만 내 말 한마디면 엄마는 널 해고할 수 있었어. 하지만 난 널 떠나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어. 진흙탕이 된 내 마음을 넌 작은 작대기로 계속 저어주어 더 이상 평온하지 않고 매일 파도가 일렁였어.”“그러던 어느 날, 네가 갑자기 떠났어.”남태준은 눈물이 흘러넘쳐 흐느껴 울었다.“난 또다시 그 암흑 같은 삶으로 돌아갔어. 햇볕도 없고 활기도 없는 그 어두운 세계로.”“지우야. 네가 돈을 원한다면 난 만족시켜 줄 수 있어. 네가 사랑을 원한다면 난 온 마음을 다해 널 사랑할 거야. 네가 안정감을 원한다면 나 일선에서 떠나 사무직으로 물러날 수 있어.”남태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애틋했고 점점 더 간절해졌다.“제발 나 떠나지 말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