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요?”정호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서다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방문을 닫았다.저녁밥은 류청이 가져다주었고, 늦은 밤에는 정호가 우유를 가져왔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오늘 밤 바쁘셔서 기숙사에 못 돌아와 주무시니 일찍 쉬시랍니다.”다음날 점심.서다인은 기숙사 책을 다 읽고 할 일이 없어 남하준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 5번 연구소에 가서 교수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그녀가 방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아마 남하준이 보낸 사람일 것이다.서다인은 급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고 밖에 낯선 남자가 서 있는데, 그는 군전 그룹의 호위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사모님, 안녕하십니까.”남자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기숙사 건물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군전 그룹 내부인일 것이다.“안녕하세요.” 서다인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께서 사모님을 6번 건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6번 건물은 뭐 하는 곳이죠?”서다인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프로그래밍 부서입니다.”프로그래밍 부서?서다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문을 닫고 남자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이 기숙사 건물을 나서자 입구에 있던 두 병사가 남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부대장님.”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도련님께서 사모님을 6번 건물로 모시라고 하셨어. 가까우니 너희들은 따라 오지 않아도 돼.”“네.”두 병사가 입을 모아 말했다.‘부대장이었구나!’서다인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안심하고 그를 따라갔다.그녀는 남자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주변 환경을 힐끗 보았는데, 도로가 좁고 양쪽에 관목이 비교적 많았으며 그 앞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다.서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멍해졌다.남자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사모님, 왜 안 가십니까?”서다인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그녀는 5번 건물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
부대장은 차갑게 웃었다.“맞아, 조직은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 지난번에는 운 좋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을 거야.”서다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것을 느꼈고 온몸이 힘없이 비틀거리며 머리가 하얘졌다.부대장이 총을 꺼내 그녀를 겨누었다.서다인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기억을 잃기 전에 첩자였다?블랙 섀도우 조직이 남하준의 곁에서 기밀을 빼돌리기 위해 보낸 스파이였다고?부대장은 총을 들고 천천히 다가와 침착하게 말했다. “남하준은 이미 나를 조사하고 있어. 내가 바로 지난번 널 암살하려던 범인임을 곧 알아내겠지.”“내 정체가 탄로 났으니 곧 네 정체도 알아낼 거야.”“넌 언젠가 죽어. 조직의 손에 죽 든, 남하준의 손에 죽든.”서다인은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예전의 자신이 나쁜 여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타락하고 더럽고 썩었더라도 그런 것들은 모두 고칠 수 있었다.그런데 그녀는 왜 하필 간첩이었을까?평생이 가도 지울 수 없는 오점이자 죄인이었다.남하준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이고 전 국민이 미워하는 간첩이라니.그녀는 남하준의 손에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절망한 서다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나 죽여.”남자는 총구를 서다인에게 겨누었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는 더 이상 다음 생을 기대할 수 없었다.그녀 같은 사람은 아무리 반복해도 몸의 죄악을 씻을 수 없으니 남하준과 어울리지 않았다.순간 한바탕 총소리가 났다.서다인은 놀라서 몸을 떨었지만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통증도 전해지지 않았다.문득 넓고 따뜻한 가슴이 달려와 그녀를 꼭 껴안고 익숙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바로 남하준이었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고 눈물은 그녀의 시선을 흐렸다. 녹초가 되어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도망가라니까 왜 가만히 있어?”낮지만 화가 난 남자의 목소리였다.서다인은 한마디도
류청은 여전히 무기력하여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그런 것 같네. 오늘 점심 먹을 때 도련님께서 닭다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결국 식사를 한 입도 안 하셨잖아.”“도련님은 절대 음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야.”류청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래서 내가 다 먹었잖아.”류청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트림이 나올 것 같았다.정호는 몸을 기울여 류청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음모를 꾸몄다.“아니면 내가 안성에 가서 사모님을 데려올까?”“됐어. 열흘이나 떨어져 지내는 신혼부부가 어디 있어?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아마 두 분 사이에 감정이 없을 거야.”정호는 긴장된 표정으로 입구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나 할 말 있어.”류청은 정호의 긴장에 감염되어 황급히 눈을 뜨고 몸을 굽혀 다가갔다. “무슨 말인데?”“사모님께서 남긴 편지 말이야. 그날 도련님이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셨어.”“그게 뭐?”“근데 그 편지가 어제 서랍에 있더라니까?”류청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정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어제 도련님 고모가 청첩장을 보냈잖아. 도련님한테 알려줄까?”정호는 눈살을 찌푸렸다.“죽고 싶어? 고모님이 보내온 초청은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이 바로 거절이라고 도련님이 진작 말했잖아.”류청은 정호를 힘껏 걷어찼다.“너 바보야? 안성에 돌아갈 핑계가 필요하다면 이번엔 혹시 참가하고 싶지 않겠어?”정호는 그제야 깨달았다.두 사람은 급히 일어나 사무실로 향해 문을 두드렸다.사무실 안에서 남하준은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서 조용히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넓고 쓸쓸한 뒷모습은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도련님.”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남하준은 등을 돌린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 쉬어.”정호: “네.”류청은 겁이 많은 정호를 차갑게 쏘아보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고모님께서...”그
“대단하지!”허윤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서다인은 불안한 듯 멍하니 있었다.허윤미는 서다인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모습을 보이자 또 주의를 주었다.“하준이조차 피하는 사람이야. 이번에 돌아와서 분명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거야.”서다인은 궁금한 나머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허윤미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서다인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방금 선샤인하우스에서 일하시는 거 봤는데 제가 도와드릴까요?”허윤미는 그제야 생각났다.“아 참. 선샤인하우스에 꽃들이 다 피었어. 시간 날 때 좀 잘라 꽃병에 꽂아주고 별장으로 옮겨서 진열해 줘.”서다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시간 있어요. 몇 병이나 꽂을까요?”“꽃병은 내가 이미 선샤인하우스에 갖다 놓았어. 자, 나 따라와.”그러던 중, 허윤미는 자신도 모르게 서다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서다인은 마음속으로 약간 기뻐했다.자신과 남하준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이혼하든 남하준의 손에 죽 든 모두 시간문제라는 것도 잘 알지만 그녀는 결혼 기간 동안 가족들이 그녀를 좋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서다인은 허윤미를 따라 별장을 나섰다.그때 군전 그룹의 무장차량 몇 대가 달려왔다.허윤미는 깜짝 놀라 감격에 겨워 달려갔다.“어머, 세상에! 우리 아들 차네!”서다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다가 남하준의 차가 멈추는 것을 보았다.류청과 정호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서다인은 이미 심장 박동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고 긴장하여 온몸이 팽팽해졌고 호흡이 약간 흐트러졌으며 손목의 동맥이 마구 뛰었다.곧이어 남하준이 차에서 내렸다.열흘 만에 다시 보는 그는 여전히 늠름하고 멋있었다.햇살이 그의 몸에 쏟아져 내리니 그렇게 눈이 부셨다.“엄마.”남하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허윤미와 껴안았다.그의 시선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미 서다인에게 쏠렸다.하지만 차
별장에 들어서자 하인이 찻물과 간식을 가지고 왔다.남하준은 앉아서 허윤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고, 시선은 항상 집 밖 대문 쪽으로 향했다.허윤미는 그의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을 발견하고 자꾸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하준아 왜 그래? 네 부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아니에요. 쉬라고 보냈어요.”남하준은 정신을 차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차의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모금 더 마셨다.“맛 좋지? 다인이가 고른 차야. Z국 벽라춘인데 맛이 아주 좋아. 게다가 이 차를 우려내는 데 노하우가 있더라고. 수온이 너무 높으면 맛이 떫대. 85도가 딱 정당한 온도라고 하더구나.”서다인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 그의 마음은 출렁거렸다. 천천히 잔을 내려놓고 목을 축이며 말했다.“보아하니 잘 지내는 것 같네요.”“사실 아주 단순하고 착한 아이야. 성격이 온순하고 마음도 여려. 무슨 일이든 참 잘 해내고. 나도 가끔은 참 이상해. 분명 총명하고 순수한 아이인데 어떻게 그런 눈뜨고 볼 수 없는 과거가 많은지.”남하준은 그녀의 과거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뭐하러 간 거예요?”“꽃 자르러 갔어. 선샤인하우스에 꽃이 활짝 피었거든. 잘라서 거실에 진열해놓으면 예쁠 것 같아서 말이야.’남하준은 잔에 담긴 차를 마시고 일어섰다. “제가 꽃 잘라 줄게요.”허윤미는 경악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뭐?”남하준은 이미 성큼성큼 떠났다.허윤미는 소파 등에 엎드려 남하준이 황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뭐라고? 쟤가 지금 꽃 자르러 간다고?”그녀의 아들은 태생부터 상남자로 지금까지 화초를 가까이한 적이 없다.예전에 그에게 꽃에 물을 주라고 하면 너무 많이 줘서 식물을 다 죽이던 남자인데, 오늘 먼저 꽃을 잘라 주겠다고 하다니?선샤인하우스.따스한 햇볕이 유리를 통해 꽃 한 송이마다 쏟아졌다.꽃이 만발하여 화사하고 온 방에는 마음을 파고드는 꽃향기가 가
서다인은 마음을 읽힌 듯, 부끄럽고 불안하여 고개를 떨구었다.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화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혼하고 싶으면 솔직히 말해. 이런 식으로 나랑 거리 두지 말고.”서다인은 머리를 푹 숙이고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고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그녀는 남하준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뭘 바꿀 수 있겠는가?나쁜 여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끔찍한 과거가 있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없었다.그녀는 지금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토끼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남하준은 서다인의 기분이 매우 가라앉은 것을 보고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순간 자신의 말투가 너무 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부드러워지더니 그녀의 축 처진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네 생각을 말해봐.”그녀는 줄곧 말이 없었다.남자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점점 더 낮아지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서다인이 몰래 눈물을 훔친 것을 발견한 남하준은 심장이 약간 조여왔다.그는 긴장해서 일어나 서다인 앞으로 가서 그녀를 잡아당겼다.그녀의 작은 체구가 고개를 떨구고 있어 잡아당겨도 그는 서다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왜 울어?”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아픈 것 같았다.이 죽일 놈의 고통은 그를 괴롭히고 낯설게 만들었다.여자가 우는 것을 보고 이런 고통을 느낀 것은 10년 전이었다.서다인은 울고 싶지 않아 꾹 참느라 노력했지만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자신의 빌어먹을 신분을 생각하고, 나중에 남하준의 손에 죽을 것을 생각하면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말도 안 하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눈물만 흘리는 여자의 모습에 남하준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서다인의 뒤통수를 낚아채
남하준은 그녀의 물음에 갑자기 굳어졌다.잠시 후에야 그는 침착하게 답했다.“이 방법이 효과가 좋아.”이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둘 사이의 온기를 깨뜨렸다.“꽃 다 꽂았어?”소리를 들은 서다인은 급히 자리로 돌아와 도구를 들고 자르기 시작했다. “거의 다 됐어요, 어머니.”허윤미가 들어와 보니 꽃 한 병도 제대로 꽂히지 않았고 바닥에 아직 빈 병 몇 개가 남아 있었다.허윤미는 의심스러운 듯 남하준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준아, 너 방금 여기 와서...”남하준은 급히 허윤미의 어깨를 껴안고 밖으로 나가면서 큰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엄마, 먼저 가서 쉬세요. 여기는 저희가 할게요.”남하준이 강제로 허윤미를 내보내고 돌아왔을 때 서다인은 열심히 꽃을 자르고 있었다.그는 가위를 하나 구해와 서다인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꽃 자르는 모습을 살피고 묵묵히 함께 꽃을 다듬기 시작했다.시간은 항상 조용하고 아늑하게 흘러갔다.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고, 향긋하고, 세월이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다.서다인은 눈을 들어 남하준이 혼자 꽂은 꽃병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통일된 색깔의 붉은 장미꽃들이 가지런하고 질서 정연하며 네모반듯한 것이 마치 그의 병사들이 늘어선 것 같았다.사내대장부의 안목은 정말 치명적이었다.그녀가 몰래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남하준은 기분이 좋아졌다.“예쁘지 않아?”서다인은 계속 분주히 움직이며 대답했다.“당신이 직접 꽂은 걸 아시면 어머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남하준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넌 예뻐 보여?”서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예쁘네요.”남하준은 그녀의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확실히 예뻤다!그는 난생처음 꽃꽂이가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꼈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남하준은 방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회색 바지 차림으로 베란다 밖에 서서 두 손으로 난간을 짚고 하늘을 쳐다보았다.알고 보니 여기 별도 밝았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서다인이
남하준의 그윽하고 아리송한 검은 눈동자는 뜨거운 빛을 띠었고, 몸에는 차갑고 위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살짝 화난 듯 또박또박 말했다.“갑자기 글만 남기고 떠나는 건 실례지. 나한테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어?”서다인은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에게 자신이 블랙 섀도우가 보낸 첩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까?군전 그룹은 M국의 국방 무기 생산 기지로 일급 비밀 군공장이었다.그녀의 신분은 그곳에 남아서는 안 된다.군전 그룹에서 중요한 기밀이 누설되면 그녀의 혐의는 너무 커지기에 그녀는 이런 죄명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머리가 텅 비어 있었고 생각이 복잡하여 작별인사의 핑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그게...”서다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입을 열듯 말듯 하는 그녀의 핑크빛 입술을 바라보던 남하준은 덩달아 가슴이 떨렸다.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눈동자가 뜨거워지며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남자는 섹시한 목젖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고개를 더 숙였다. “대체 부대장이 뭐라고 해서 갑자기 떠난 거야?”서다인은 갑자기 등줄기가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서다인의 눈에 나타난 당황스러움은 그녀의 생각을 드러냈고 남하준은 이를 알아챘다.그녀는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도련님, 사실은...”“그 호칭부터 좀 바꾸면 안 돼?”남하준이 그녀의 말을 끊고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나지막하고 매혹적인 말투로 말했다.서다인은 마음이 약해졌다.왜 그녀는 이 위엄 있고 패기 넘치는 남자가 자신을 달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까?“하준 씨.”서다인은 이내 호칭을 바꾸었다.남하준은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착하네.”서다인은 또 경직되었다. 심장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급회전하여 큰 기복이 생겼다.그녀는 약간 수줍어하며 멍하니 있었다.‘이 말이 왜 이렇게 애틋하게 들리지?’남하준은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가 부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백건은 그녀 앞에 와서 안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흐려지며 부드러운 말투에 약간 불쾌함을 띠었다.“나 무서워하지 마. 서연아.”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가로저었다.백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일할 때는 좀 엄숙하긴 하지만 부하직원에게만 그래.”남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나도 부하직원이잖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웃더니 고개를 떨구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남서연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줄 알고 급히 해명했다.“무서워한 게 아니라 그냥 좀 적응이 안 됐어요.”차이가 너무 컸으니 말이다.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사납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너무 다정하게 대해서 적응이 안 됐을 뿐이다.백건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펴보더니 물었다.“배고파?”남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배고픈 건 아니에요.”백건은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옆 휴게실로 향했다.그는 남서연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백건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녀도 끌고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남자는 곧장 그녀를 문짝에 눌렀다. 두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가두고 몸을 붙이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남서연은 깜짝 놀라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져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남자의 강한 호르몬이 그녀를 감싸고 있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며 호흡에는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가득했다.남자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관능적인 목젖을 위아래로 구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네가 거절하지 않는 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돼?”남서연은 머리가 하얘지고 몸이 약간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문득 남자의 얼굴이 다가와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음!”그녀는 수줍은 소리를 내며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그의 키스는 매우 갑작스러웠고, 거칠면서도 거침없이 그녀의 입안을 침략하고 입과 혀를 섞었다.그의 키스는 매우 깊었다.남자는 서서히 자신의 몸을 눌렀고 나른해
그녀는 넓은 홀을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비서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하현우는 보이지 않았다.대표 사무실의 문이 굳게 닫혀있지 않았다.남서연은 궁금해서 앞으로 걸어가며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그때 안에서 서류 뭉치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가까이 다가간 남서연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백건의 냉엄한 목소리만 들렸다.“당신 사람들 데리고 당장 나가세요!”그러자 연륜이 느끼지는 중후한 목소리가 버럭 화를 냈다.“백건! 너무 나대지 마. 내가 네 할아버지와 사업을 일굴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만약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넌 날 보고 끽소리도 못 냈어. 네 아버지가 나를 봐도 아저씨라고 정중하게 부르는데 네가 감히 나를 해고해?”백건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을 해고하고 있어요. 당장 나가세요.”“네가 뭔데 나를 해고해? 내가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함께 했는데 어떻기 감히 나를 내보내?”“당신 손에 있는 주식, 매달 월급 그리고 매년 주어지는 배당금까지, 전부 고생 값이에요. 회사는 이미 현금으로 보상했으니 더 이상 빚진 것 없어요. 사람이 늙으면 능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면 회사 자원을 점유하지 말고 집에 가서 노후를 보내야죠.”“백건. 네 이놈!”“당신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사람들 한 명도 남기지 마세요.”또 한바탕 큰소리에 남서연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예순 살쯤 된 늙은 남자가 양복 차림의 젊은이 몇 명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고 입구에서 남서연과 부딪혔다.남자는 남서연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조롱했다.“바로 너야? 일개 디자이너가 감히 대표 사무실에 찾아와? 생긴 건 번지르르하네. 몸을 팔아 디렉터를 쫓아낸 거지?”남서연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전 디자인 디렉터도 그의 사람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말을 마친 남자는 사람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떠났다.백건은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안색이 좀 긴장된 남
“대... 대표님. 아침부터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그러세요?”백건의 목소리는 얼음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듯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졌다.“어제저녁에 왜 야한 영화를 보냈어? 잘리고 싶어?”하현우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렀고 침을 삼키고 긴장하며 말했다.“그건 대표님께서...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를 부탁하셨잖아요. 혼자 사는 성인 남자가 저녁에 영화를 달라고 하니. 그리고 대표님은 애니메이션도 안 보고 로맨스 영화도 안 보시니 분명 그런 장르를 원한 거 아니셨어요?”백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았다.“서연이가 보려고 한 거야. 내가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해 모르니 네게 부탁한 거고.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하현우는 어안이 벙벙하고, 입이 떡 벌어지며,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았다.백건은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그의 옷깃을 풀어주고 한 발짝 물러서서 경고했다.“만약 서연이가 이 일로 날 미워하고 나에 대해 나쁜 인상을 받았다면 넌 바로 아웃이야.”하현우는 깜짝 놀라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반드시 만회할 방법을 찾을게요. 반드시 대표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백건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하현우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급히 운전석을 열고 들어가 차를 몰고 떠났다.가는 내내 하현우는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고민했고 백건은 뒷좌석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순간 하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서연 아가씨께서 어제 영화를 끝까지 안 보셨죠?”“응.”백건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하현우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그럼 대표님은요?”“다 봤어.”백건이 솔직하게 말하자 하현우는 꾹 참으며 감히 웃지 못했다.그는 재미있는 영화를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남자가 아닌 한.하현우가 또 물었다.“그런 영화 자원이 더 필요하세요?”백건은 서류를 덮고 눈을 감더니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