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이 한없이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 순간 뼈가 시릴 정도로 한기가 감돌았다. 남하준은 진중하면서도 냉담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뜻이지?”서다인은 굳건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우리 이혼해요.”그녀는 이 남자를 3년 동안 짝사랑하며 바라는 건 단 하나, 순수한 결혼생활뿐이었다.이젠 이 혼인 관계가 더는 순수하지 않으니 그녀도 굳이 타협하며 눈 감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남하준은 서늘한 눈빛에 표정이 일그러졌다.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 류청이 언짢은 말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름, 서다인, 나이 25세, M국 안성시 출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 성향이 있고 어머니와 오빠는 도박에 빠져 빚이 산더미입니다.”서다인은 놀란 눈길로 류청을 쳐다봤다.류청은 거리낌 없이 계속 말을 보탰다.“서다인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중퇴하고 인터넷으로 만난 남자에게 사기를 당하여 유흥업소에서 몇 년 동안 아가씨로 몸담아왔습니다. 20살 때 해외에 있는 80세 노인에게 시집갔는데 2년도 안 돼 과부가 되었고 재산은 한 푼 상속받지 못했습니다.”“다인 씨는 기껏해야 초등학교 학력이고 이 몇 년 동안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인간관계가 문란하고 복잡하며 성매매로 두 번 잡히고 성형을 15번 했습니다. 성병 치료 세 번에 알려진 남자친구만 32명입니다. 최대 5명까지 동시에 사귀었고 원나잇 상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3년 전에 M국으로 돌아와 일부러 어르신을 가까이하며 환심을 사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죠. 그러다 결국 재벌가인 남씨 일가에 시집와서 도련님의 아내로 거듭났습니다.”서다인은 자신의 과거를 듣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해서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곤두섰다.화려한 과거사에 그녀도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류청은 서다인의 신상정보와 과거의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캐내며 야유 조로 말했다.“서다인 씨 같은 사람이 도련님의 아내로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축복이나 다름없는데 대체 무슨 염치로 이혼을 논하는
남하준은 아찔하고도 강렬한 수컷의 기운을 내뿜었다.“감히 날 협박해?”서다인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불안감에 떨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제발 사람 강요하지 말아요.”남하준은 싸늘하고도 한없이 짙은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을 담담하게 쳐다봤다.매끄럽고 탱탱한 피부 결과 또렷한 이목구비, 작고 동그란 얼굴은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아 귀엽고 앙증맞을 따름이었다.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은 백하린의 어릴 때 모습을 조금 닮아 있었다.남하준은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썩거렸다.“네가 그 여자 어릴 때 모습이랑 비슷해지려고 갖은 수단을 부렸나 봐? 이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겠어. 이래서 할머니가 널 그렇게 좋아하셨구나.”그 여자 어릴 때 모습이라니?남하준이 말한 ‘그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서다인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남하준이 침착하게 대답했다.“알았어, 네 요구 들어줄게.”그는 이 말만 남긴 채 부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그 순간 서다인은 어안이 벙벙했다.어떤 요구를 들어준다는 말이지?이혼 아니면 부부로서 잘 지내는 거?...밤이 깊어지고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류청이 저녁밥을 방 문 앞까지 가져왔고 서다인은 식사를 마친 후 방 안에서 병법에 관한 서적을 한 권 찾아내 흥미진진하게 새벽까지 책을 읽었다.피곤이 몰려오자 그제야 씻으러 들어갔다.욕실에서 30분을 씻은 후 갈아입을 옷이 없어 몸에 걸쳤던 때 묻은 옷을 깨끗이 빨아서 욕실 창문 밖에 내걸어놓고는 샤워가운을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별안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남하준이 막 상의를 벗고 튼실한 몸매를 드러내며 버젓이 방에 나타난 것이다.건강한 피부색과 탄탄한 근육, 군살 하나 없는 완벽한 몸매에 간간이 옛 상처가 보여 남자의 매력이 더 물씬 풍겼다. 말 그대로 상남자였다.남하준이 상의 탈의한 채로 화끈한 몸매를 드러내며 그
남하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정색하며 물었다.“이 남하준의 아내가 바닥에서 잔다고? 지금 누굴 능멸하는 거야?”막강한 남성호르몬과 아찔함 속에 스친 무언의 압박감에 서다인은 곧 질식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잔뜩 긴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그저... 하준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가 함께... 함께 자는 게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했어요.”남하준은 눈썹을 치키며 입꼬리를 말아 올려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난 너한테 아무 감정 없어. 네가 발가벗고 내 앞에서 춤춘다 해도 쳐다보지 않을 거고 터치할 일은 더더욱 없어.”서다인은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고 가슴 깊숙이 있는 가장 연약한 곳을 찔린 듯 숨이 턱턱 막혔다.반박하고 싶었지만 목이 불에 타듯 따가웠고 입만 열면 이 서러운 감정이 한꺼번에 분출될까 봐 두려웠다.그녀의 맑고 영롱한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서다인은 결국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침묵했다.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고인 순간 남하준은 무언가에 홀린 듯 잠시 넋을 놓았다.이어서 그는 옆자리에 등지고 누워 차갑게 명령했다.“불 끄고 이만 자.”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졌다.서다인은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을 쳐다보며 마음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자세를 다잡고 편하게 누웠다.커다란 더블침대에 두 남녀는 각자 침대 양옆에 눕고 중간에 아주 넓은 거리를 두었다.이날 밤 서다인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새벽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끝내 참지 못하고 스르륵 잠들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그녀는 벨 소리에 놀라서 깼다.비스듬히 눈을 뜨니 남하준이 멋진 검은색 군복 세트를 차려입고 위풍당당한 기운이 저절로 차 넘쳤다.이런 게 아마도 한 사람을 짝사랑하는 자의 마음가짐이겠지. 그가 나타난 곳마다 눈부신 아우라가 풍기는 그런 느낌.남하준이 전화를 받고 목소리를 낮췄다.“좋은 아침, 하린아, 무슨 일이야?”서다인은 백하린이 뭐라 말하는지 모르지만 남하
부하가 공손하게 대답했다.“네.”남하준은 속절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서다인이 말한 남편의 도리를 잘 지키기 위해 이러고 있는 저 자신이 너무 뜬금없게 느껴졌다....사흘 뒤.서다인은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됐다.남하준은 백하린을 만나러 간 그날부터 사흘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서다인은 3일을 꼬박 남하준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했다.그녀는 기분이 점점 가라앉아 훈련기지에 와서 이곳의 전사들에게 호신술을 몇 수 배우기로 했다.남성호르몬이 폭발하고 양기가 차 넘치는 이곳에서 무술을 배우는 가녀린 그녀는 자연스럽게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훈련장에 건장한 사내들로 둘러싸였고 가까운 곳에서 백하린이 정호 비서실장과 함께 걸어왔다.“벌써 3일째인데 하준 오빠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정호가 말했다.“도련님은 아주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계십니다. 오늘 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백하린은 한창 호신술을 배우는 서다인을 가리키며 눈가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요?”“사모님은...”정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하린이 덥석 가로챘다.“사모님은 개뿔! 지금 나더러 사모님이라고 불러라는 거예요? 쟤 따위가 그럴 자격이 돼요? 심보가 고약하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인데. 오빠가 저 여자 때문에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알아요? 유흥업소에서 아가씨 일까지 했었다고요. 온갖 문란한 짓은 다 하고 다녔는데...”백하린은 정호의 귓가에 대고 오버하며 서다인의 험담을 늘려놓았다.훈련장에서 땀에 흠뻑 젖은 서다인은 며칠 동안 우울했던 기분이 금세 맑아졌다.“고마워요, 선생님.”서다인은 호신술을 가르쳐주신 코치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몇 수 더 배우고 싶은데 또 가르쳐주실 순 없나요?”코치가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가르쳐드려야죠.”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정호가 씩씩거리며 다가와 야유에 찬 눈길로 서다인을 노려봤다.“제가 가르쳐드리죠.”서다인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고 코치는 공손하
짙은 눈빛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지닌 남하준이 싸늘한 말투로 정호에게 물었다.“지금 이 사람 가르치는 거야 그냥 놀리는 거야?”정호는 바짝 긴장하여 침까지 삼켰다.“도련님, 저는 사모님께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장내에 있는 모든 이가 정호 대신 식은땀을 뺐다.그의 비겁한 수작을 남하준이 모를 리 있을까.그는 서다인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멀리 가 있어.”서다인은 심장이 움찔거리고 이유 모를 설렘을 느꼈다.남하준은 그녀를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지만 이 동작은 분명 그녀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니까.‘하준 씨가 대체 왜 이러지?’그녀는 몹시 의아했다.남하준은 여유 있게 손목시계를 풀며 말했다.“우리 한 판 붙어. 네가 이기면 여기 남는 거고 지면 당장 꺼져.”정호는 식겁하여 사색이 된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해명했다.“도련님, 저는... 도련님께 상대가 안 돼요. 단지 사모님께 호신술을 가르쳐드렸을 뿐이에요. 제발 저 자르지 마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도련님...”남하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서다인에게 건넸다.그녀는 시계를 받으며 또다시 이유 모를 설렘을 느꼈다.정호는 긴장하고 당혹스러운 채 꿈쩍없는 남하준을 쳐다보다가 결국 애원하는 눈길로 서다인에게 말했다.“사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넘어뜨린 건 아니에요.”남하준은 그에게 시끄럽게 변명할 기회를 안 줬다. 그는 마치 맹수처럼 정호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퍽!”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정호는 1미터 밖으로 튕겨 나가더니 바닥에 쓰러진 채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배를 끌어안고 서서히 몸을 움츠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서다인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남하준의 충격적인 무력에 그만 입이 쩍 벌어졌다.대박! 이토록 살벌한 공격이라니.만약 아까 맞은 게 그녀였다면 한방에 하늘을 뚫고 올라갔을지도 모른다.정호는 고통이 조금 가신 후 몸을 지탱하며 겨우 일어나 도련님이 여느 때보다 진지하단 걸 깨달았다.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오늘 무조건 잘릴 것이다.
서다인은 손 내밀어 그의 말을 툭 잘랐다.“됐어요. 여기 남으셔도 돼요.”그녀는 결코 속 좁은 여자가 아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직업에 애정 품은 사람을 밥그릇을 잃게 할 생각은 없다.정호는 희열에 넘쳐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고맙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너그러운 분이시네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분부만 하세요. 사모님을 위해서라면 두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서다인은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 무심코 손목시계를 정호에게 건넸다.“두 발 벗고 나설 필요는 없고, 일단 이 시계를 하준 씨한테 돌려주세요.”“네.”정호는 손목시계를 건네받았다.이때 서다인이 또 물었다.“이 근처에 기차역이나 공항 있어요?”정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사모님 여길 떠나시게요?”서다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제 남편이 딴 여자랑 알콩달콩한 모습을 한시라도 쳐다보고 싶지 않으니까.이런 식으로 저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해 경향이 전혀 없다.돌아가서 할머니께 잘 설명해 드리고 이 죽일 놈의 결혼생활에 얼른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정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사모님, 제가 내일 휴가 신청하고 바래다 드릴게요. 안성시까지 차로 가려면 6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그래요, 고마워요.”서다인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몸에 기운이 쫙 빠진 채 나긋하게 대답했다. 이건 아마도 남하준을 향한 마음을 다 내려놓아서 그런 듯싶다.그녀는 흐리멍덩하게 훈련장을 떠났다.저녁 무렵 드리워진 따뜻한 노을빛은 아늑한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서다인은 방에 숨어 책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점심도 안 먹었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됐다.그녀는 방에서 나와 곧게 주방으로 향했다.가는 길에서 남하준과 마주쳤고 그의 뒤엔 류청과 정호 두 명의 비서실장도 있었다.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인사를 올렸다.“사모님.”서다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응했다.“네.”남하준은
5번 과학 연구소 건물.사람들이 줄지어 코를 막고 안에서 도망쳐 나왔다.중독당한 대부분 사람들은 구토 증상을 일으키고 또 일부는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에 누워 있었다.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캠프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전부 환자를 구하러 달려왔다.서다인은 숨을 헐떡이며 현장으로 달려와 남하준의 안위가 걱정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때 남하준이 백하린을 안고 5번 건물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의료 침대에 눕혔다.서다인은 문득 저 자신이 우스워졌다.그녀의 신경은 온통 이 남자인데 정작 이 남자의 눈엔 백하린밖에 없다.남하준은 백하린을 의사에게 넘긴 후 또다시 안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려 했다.이때 백하린이 그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울며 애원했다.“오빠, 가지 말아요. 나 너무 아파. 토하고 싶어요...”“착하지.”남하준이 다정하게 타일렀다.“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옆에 있어.”백하린은 머리를 내저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울먹이며 계속 중얼거렸다.“가지 말아요. 나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오빠, 나 진짜 죽으면 어떡해요?”이때 류청이 달려와 보고했다.“도련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고 총 35명이 중독되었습니다.”남하준은 옆에 있는 연구원에게 물었다.“유 교수님, 대체 무슨 액체가 누출된 거죠? 생명의 위험은 있나요?”유주헌이 사색이 되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청유액이라고 해외에서 들여온 신제품이라 저희도 아직 연구 단계에 있습니다. 이 제품에 대해 아예 익숙하지 않습니다.”남하준은 차가운 시선으로 의사를 쳐다봤다.의사는 흠칫 놀라더니 긴장감이 더 조여왔다.“도련님, 제가 오랫동안 의학을 공부해왔지만 청유액이란 화학 물질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그 독성도 잘 모릅니다. 각 환자의 화학 실험 보고서가 나와야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왜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고 누출하게 된 거죠?”남하준은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포스에
설마 이 여자의 조사에 대한 조사에 착오가 있었단 말인가?하지만 유주헌은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고는 가슴이 벅찼는데도 예의를 지키며 물었다.“사모님, 혹시 화학을 전공하셨어요?”강물처럼 맑은 눈을 가진 서다인은 순간 머리가 하얘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모르겠어요, 기억이 없거든요.”“기억이 없다고요?”유주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보였다.“그럼 청유액이랑 레늄 원소는 어떻게 알고 있어요? 해독할 줄도 아시잖아요.”서다인이 한참 고민을 하다가 여유롭게 대답했다.“요리할 때는 소금을 넣어야 하듯이, 낚시할 때는 미끼를 던져야 하듯이, 이건 상식 아닌가요?”그녀의 말에 유주헌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숭배의 눈빛으로 서다인을 바라봤다.멀지 않은 곳에서 정호와 류청은 부하들과 함께 중독된 사람들에게 식용 알칼리수를 마시게 했다.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의 구토 증상과 복통이 사라졌다.머리가 아직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해독약의 효과는 대단했다.류청은 남하준 앞에 다가오고는 예의를 갖추며 그에게 알칼리수를 건넸다.“도련님, 효과가 좋으니 하린 씨께 드리세요.”백하린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녀는 주목받는 서다인이 싫어 고집을 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안 마셔요.”남하준이 미간을 구기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안 마셔?”백하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하준 오빠, 나 이런 거 안 마실래요. 서다인 언니는 중학교도 졸업 못했잖아요, 지식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믿고 마시겠어요.”중학교도 졸업 못했다니, 그럼 초졸이란 말인가?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람들이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서다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서다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기에 일부러 괜찮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하린 씨, 차래지식을 먹지 않으려는 그 패기, 대단하시네요.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켜나가시길 바랄게요, 화이팅!”말을 마친 서다인이
정안은 탄식했다.“서연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일찍 포기해. 그렇다고 너무 자포자기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말고. 승아는 너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백건이 느릿느릿 말했다.“승아에게는 수단이 악랄한 고모가 있죠.”정안은 경악했다.“너도 알고 있었던 거야?”“네.”정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부했다.“그래. 난 이만 갈게.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 점심에 금원에 와.”금원은 국가가 남하준에게 준 작은 별장이었고 금원 맞은편이 바로 유원, 유승아의 집이 있었다.“금원에는 왜요?”정안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일찍 와서 누나 좀 도와줘.”말을 마친 정안은 돌아서서 백건의 방을 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백건은 쓸쓸한 눈으로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익일 점심.남서연은 꽃무늬 원피스에 차양 트리밍 모자를 쓰고 손에 대나무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꽃바구니 안에는 온통 화초의 어린 모종들이 가득했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기뻐하는 무지개 나비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멀리 그녀는 정원 한가운데에 흰 셔츠를 입고 진흙탕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작은 엄마!”가까이 다가선 남서연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소리가 목구멍에 걸리고 시선은 눈앞의 남자에 고정되어 멍해졌다.백건은 소리를 듣고 일어나 자신의 귀가 잘못 들린 줄 알고 돌아섰을 때,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여자를 보자 그도 멍해지며 굳어버렸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남서연은 남자의 시선이 왠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자 당황한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작은 엄마인 줄 알았어요. 묘목을 선물하려고 왔는데 내가...”“물 가지러 갔어.”백건은 처음에 정안이 왜 집안의 정원사를 놔두고 굳이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 정원을 가꾸게 했는지 몰랐다.이제야 그는 이해했다.그는 손에 든 호미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고 두 걸음 앞으로 나가 남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한 번 또 한 번.백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쓸쓸한 눈동자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안의 소리로 바뀔 때까지.“건아. 나야.”정안은 비록 집에 있는 시간이 적지만 백건의 마음속에 누나는 따뜻하고 친절한 존재였다. 어머니에게서 얻을 수 없는 모든 정을 누나가 줬다.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걸어가서 그림을 한 방향으로 돌려 다시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정안은 어두운 안색으로 눈 밑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백건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무슨 일이에요?”백건이 묻자 정안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나 네 방에 들어가 좀 앉아도 돼?”백건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들어와요.”정안이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방은 조명이 밝았지만 단조롭고 썰렁했다.커다란 침대 하나, 한 줄로 늘어선 캐비닛, 소파 의자 하나, 마치 그의 성격처럼 매우 차가운 색조였다.그가 남서연을 짝사랑하는 것도 당연했다.남서연은 아주 밝고 따뜻한 여자로 모든 악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정안은 소파에 가서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거꾸로 바닥에 놓인 그림에 시선이 꽂혔다.그녀는 빙긋 웃으며 옆자리를 토닥였다.“건아, 너도 앉아.”백건은 그녀 옆에 앉아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정안은 백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젊고, 준수하고, 부자이고, 남서연보다 다섯 살 많았다. 성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정직하고 착한 남자였고, 끈기와 책임감이 있어 어머니의 마귀 같은 가훈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버텼다.남서연이 그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백건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다음 달 네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나와 하준 오빠 돌아왔어.”백건은 얼굴이 굳어지며 차갑게 말했다.“결혼식은 없어요.”“엄마는 이미 모든 지인에게 청첩장을 돌렸어.”백건은 잠자코 있자니 눈 밑의 냉기가 더욱 깊어졌다.“내 생각에 엄마는
서윤아는 화를 꾹 참고 또박또박 말했다.“넌 오랫동안 국경에서 일해서 건이가 얼마나 변태적인지 몰라. 서연이는 건이를 삼촌이라고 불러. 두 사람은 친척이야. 근데 건이는 어렸을 때부터 서연이를 몰래 좋아했어. 서연이의 고무줄, 물컵, 인형, 그리고 많은 잡다한 물건들을 훔치고 심지어 서연이가 버린 필통까지 주워 담으며 쓰던 볼펜 한 자루도 놓치지 않았어. 남씨 가문에 갈 때마다 서연이가 쓰던 물건들을 몰래 가지고 와서 숨겼어. 어느 집 남자가 일기를 쓰는데 그 안에 온통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뿐이겠어? 서연의 물건을 훔칠 뿐만 아니라 숨어서 몰래 서연이를 훔쳐보고 미행하고, 그림책은 전부 서연이의 초상화뿐이야. 내가 정말... 방법이 없어서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강요했더니 승아와 둘이 짜고 나를 속였어. 건이를 외국으로 보낸 것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정안은 화가 치밀어 말을 끊었다.“엄마, 왜 건이 일기를 훔쳐봤어요?”“다 건이를 위해서지.”서윤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정안은 아픈 머리를 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참 숨 막히는 모성애네요.”“내가 만약 일기를 훔쳐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 자식 마음이 저렇게 깊은 줄 알았겠어? 내가 만약 그 변태적인 행동을 미리 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몰라.”정안은 어이없기 짝이 없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엄마, 건이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성적이고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요. 한 여자 아이를 짝사랑하면 그 여자 물건을 훔치는 건 정상이죠. 미행한 건 어쩌면 보호하고 있었고 더 많이 보고 싶었을 수도 있죠. 서연이가 목욕하는 걸 훔쳐본 것도 아니고 서연이 속옷을 훔친 것도 아닌데 왜 엄마는 그걸 변태라고 해요?”서윤아는 항상 보수적인 사상이 있어 정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서연이가 자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 촌수가 어떤지 자기가 몰라? 이것도 변태가 아니면 꼭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패륜을 저질러야 변태라고 할 수 있는 거니?”정안은 그녀
남서연은 깜짝 놀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남자의 미색과 육체에 대한 탐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바칠 정도일까?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니.그녀를 내연녀로 전락시키면 그녀의 집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 이 남자는 두렵지 않을까?이 남자는 양심이라곤 없을까?남서연은 제대로 화가 났다.“이거 놔!”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남서연은 아픈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단념하세요. 승아 언니와 결혼해서 절대 언니를 저버리지 말고 잘 살아요. 다시는 그딴 생각 말고.”말을 마친 남서연은 화가 나서 자리를 뜨더니 옆의 큰 철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녀는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백건을 욕했다.‘백건, 이 개자식.’‘네게 여자친구만 없었어도, 약혼녀만 없었어도, 아내만 없었어도 난 승낙했을 거야.평생 너와 육체적 관계만 유지하며 명분이 서지 않는 비밀 연인이 되더라도 난 기꺼이 원했을 거야.’‘하지만 승아 언니는 너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고 다음 달이면 결혼하잖아? 근데 지금 와서 나를 건드려?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백씨 가문 별장.백건이 피곤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서자 도우미가 마중 나왔다.“큰 도련님 오셨어요?”백건은 침울한 기색이 역력하여 손에 들고 있던 양복 외투를 도우미의 손에 내동댕이치고 넥타이를 풀며 걸었다.거실을 지나갈 때 안에서 정안의 소리가 들렸다.“동생 돌아왔어?”정안이 외치자 백건은 소파에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그의 어머니와 누나였다.“저 돌아왔어요.”백건은 담담하게 인사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어디 갔다 와?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정안이 묻자 서윤아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원망으로 가득 찼다. “수백억을 손해 봐도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는 녀석이야. 오직 그 여자만 네 동생을 저 몰골로 만들 수 있어.”“유승아를 말하는 거예요?”서윤아가 격분해서 말했다.“만약 승아였으
남서연은 당황했다.이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남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도 흘러내리지 않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백건은 그녀의 억울하고 멍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났다.“내 말 알아들었어?”남서연은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서연이 한마디 던졌다.“알아들었어요. 나 책임질 필요 없어요. 나도 당신 귀찮게 매달리지 않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가슴팍이 아팠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숙여 심장 깊숙한 곳의 통증을 완화했다.순간,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제 네가 나를 책임져야겠어.”남서연은 화들짝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며 물었다.“내가... 당신을 책임져요?”백건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아.”남서연은 굳어버렸고 머리가 흐리멍덩했다.분명 먼저 잠자리를 원한 건 이 남자였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더라고 피동적인 입장이었고 과정은 너무 아팠다. 전혀 즐기지 못했으니 아무리 봐도 손해 본 쪽은 남서연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더러 책임을 지라니?무엇보다 이 남자에게는 약혼녀도 있는데 어떻게 책임지라는 걸까?설마 백건은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관계를 유지하고 그녀더러 빛을 못 보는 내연녀가 되라는 걸까?그건 때려죽여도 원하지 않았다.당황한 남서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싫어요.”백건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맑고 예쁜 여자의 눈을 주시하며 눈에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찼으며 약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남서연, 네가 나랑 잠자리에 든 순간, 네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남서연은 한 기류의 냉기가 발바닥에서 이마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완전히 당황했다.백건은 애초부터 그녀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계획이었을까?탈락한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고 해외 행사에도 데리고 가서 같은 방에 묵었다.알고 보니, 이는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기 위함이었고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육체관계를 유지하는 숨겨진 연인으로 삼으려는 의
“손님 도착했습니다.”택시 기사는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외쳤다.남서연은 사색에서 깨어나 황급히 눈물을 닦고 현금을 꺼내어 지불했다.“감사합니다.”남서연은 결제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내렸다.문이 닫히자 택시가 천천히 떠났다.남서연은 고개를 들어 불빛이 환한 별장을 올려다보며 침울한 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그녀가 막 철문에 접근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쫓아오더니 번개처럼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어느새 옆의 벽에 눌렸다.“악!”남서연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에 눌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앞에 확대된 얼굴을 보았다. 어렴풋이 백건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발버둥 쳤다.“음!”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남자는 더욱 그녀를 짓눌러 숨도 쉴 수 없게 했고 그녀의 두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눌렀다. 그녀의 몸은 남자의 건장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촘촘히 짓눌려 있었다.남자의 키스는 마치 폭풍우가 습격하듯 사나웠다. 그녀의 입술과 혀를 아플 정도로 빨아들여 그녀는 산소 부족을 느꼈다. 당장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포악한 분위기와 광야적인 기세를 풍겼다.남서연은 사나워진 남자의 키스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마치 백건에게 잡아 먹힐 듯 했고 여태껏 느낀 적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녀는 키스로 인해 산소가 부족하고, 입술이 부풀어 올라 아프고, 몸은 눌려 숨이 막히고, 등에는 땀이 나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결국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흘러 그녀의 하얀 뺨 위로 흘러내렸다.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목구멍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남자는 눈물의 짠맛을 맛보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그녀의 이마를 맞대고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서연이 부풀어 오른 입술을 가볍게
육나리에게 지금 당장 일을 핑계로 여다혜를 불러내라고 했다.15분 후.여다혜는 부랴부랴 영화관을 나서며 투덜댔다.“젠장. 주말인데 웬 PPT를 급하게 만들라고 지랄이야. 내일 써야 한다면서 사람을들들 볶아? 그럼 미리 얘기라도 해주든가! 지금이 몇 시야? 젠장...”여다혜는 폭언을 퍼부으며 빠른 걸음으로 유승아의 곁을 지나쳐 영화관을 빠져나갔다.곧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두 시간 후, 남서연은 여민찬과 나란히 영화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내가 데려다줄게요.”여민찬이 예의 바르게 입을 열자 남서연이 엷게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그건 위험하죠.”“정말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광장 한복판에서 멈추었다. 심장 박자가 엇나가며 긴장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차량을 바라보았다.고급 차량의 운전석에는 백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남서연과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백건의 안색은 극도로 음산했으며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며 온몸에는 음울하고 무서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남서연은 백건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몰랐다.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불안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난처하고 긴장하고 수치스러우며 손바닥에 땀이 났다. 감히 그와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서서히 시선을 내리뜨렸다.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태연하게 백건과 유승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유승아가 안에서 나와 남서연의 옆을 지나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건이가 벌써 차를 몰고 왔네. 나 먼저 갈게 서연아.”남서연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유승아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요. 언니.”“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백건의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백건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네가 왜 앉아?”유승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고모가 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갔어. 가는 길에 나 좀 태워다 줘.”기분이 최악인 백건은 차가운 말투로 명령했다.
남서연은 당황해서 황급히 설명했다. “아니에요. 동료 오빠예요. 방금 알았어요.”여민찬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안녕하세요.”유승아는 피식 웃더니 화제를 돌려 물었다.“영화 어느 타임이야?”“7시, 2번 홀이에요.”여민찬이 대답하자 유승아가 아쉬워했다.“아쉽네요. 우리는 6시 45분, 6번 홀인데.”남서연은 웃음을 짜내어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그러게요. 아쉽네요.”그때 여다혜가 팝콘이랑 음료수를 들고 와서 여민찬에게 건네주고 유승아를 보았다.유승아는 그들이 확실히 세 사람인 걸 확인하고 급한 척 자리를 피했다.“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건이가 걱정할 거야. 나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유승아는 돌아서서 떠났다.백건과 유승아가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고?남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으면서 마음이 차갑고 답답하고 괴로웠다.좋은 기분은 사라지고 잔잔한 감상이 밀려왔다.그녀는 슬픈 동시에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느꼈다.백건이 약혼녀와 같이 데이트하고 영화 보는 건 정상이 아닌가?외부인인 그녀가 왜 질투를 하고 슬퍼할까?그녀는 전혀 자격이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서연아, 가자. 10분 후면 시작이니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여민찬이 물건을 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유승아는 영화관에 들어서자 고모 유미에게 콜라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 밖에서 남서연을 만났어요. 동료와 그 동료 오빠랑 셋이서 2번 홀에서 영화를 본대요.”유미는 열심히 영화를 보며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느릿느릿 말했다.“이럴 땐 백건에게 전화라도 해야 했던 거 아니야?”“왜요?”유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바보야, 전에 네가 말했잖아. 백건이 남서연을 좋아한다고. 두 사람이 비록 친척이긴 하지만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야. 그럼 서연이가 너의 가장 큰 연적이라고. 모르겠어?”유승아는 유미의 뜻을 알아듣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돌리며 영화
남서연은 하루 휴가를 냈고 주말이 다가왔다.그녀는 3일 동안 계속 방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잠자는 것 외에는 노래를 듣거나 아무 생각 없이 베란다 바깥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을 비웠다.그때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발신 번호를 보니 동료 여다혜에게서 온 전화였다.“여보세요. 다혜 씨.”남서연은 핸즈프리를 켜놓고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서연아, 영화 보러 가자.”여다혜가 긴장해서 말했지만 남서연은 흥미가 돋지 않았다.“싫어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9시면 끝나. 나와. 내가 멋진 남자 소개해줄게.”남서연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또 다혜 씨 큰 오빠요?”“맞아. 너 계속 연애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22살인데 아직 연애도 못 해보고. 우리 큰 오빠 만나봐.”“우리 어울리지 않아요.”남서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혜 씨 큰오빠 아주 잘생긴 건 알지만 우린 안 맞아요.”가문 계급이 어울리지 않으면 그녀의 가족도 혼사를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여다혜는 그녀의 가정 형편은 모르고 항상 자신의 큰 오빠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여다혜가 반문하자 남서연의 머릿속에는 백건이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그녀와 백건은 평생 불가능할 운명인데, 굳이 자신을 괴롭히면서 불가능한 남자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남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주소 보내줘요.”그러자 여다혜는 흥분해서 말했다.“좋아. 바로 보내줄 테니까 꼭 나와야 해.”남서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30분 후, 타임스퀘어 4층 영화관 입구.남서연은 멀리서부터 여다혜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와 함께 서서 반갑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남서연은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