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은 순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고 시선을 옮겨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호흡이 흐트러졌다.“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남하준이 가볍게 물었다.“언론에 알리고 싶은 거야?”정안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뜻 아니에요.”남하준의 불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그녀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바짝바빡 마르는 얇은 입술을 오므렸다.그의 숨결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고 가슴이 끓어올랐다. 방금 찬물 샤워로 누그러뜨린 욕망이 지금 되살아났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손을 놓고 한발 물러섰다.“나가.”“네?”“금원에 있어. 아무 데도 가지 말고.”남하준의 말투가 진지해졌다.“오빠 몸 정말 괜찮은 거예요?”정안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남하준은 그녀의 붉게 물든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에게 계속 말하는 것은 마치 양귀비꽃처럼 매력적이고 치명적이었다.그녀에게 키스한 적이 있기에, 그 맛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알고 그녀의 매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남하준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안 죽어.”정안은 백하린의 일이 생각나 또 물었다.“방금 백하린 반응 보니까 백인호 상황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어요. 백인호 어떻게 됐어요?”남하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안색이 확 굳어졌다.“그 자식 걱정하는 거야?”“아니요.” 정안이 긴장해서 해명했다.“백인호가 죽으면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 찾을 수 없고 또 오빠가 형사 책임을 질까 봐 두려운 거죠.”남하준은 심호흡을 하며 필생의 의지력으로 욕망을 꾹 억눌렀다.“그 자식 안 죽어. 일단 좀 나가.”“어디 있어요?”“병원에.”“오빠가 구한 거예요?”남하준은 곧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물었다.“완아, 안 나갈 거야?”정안은 지금의 남하준이 약물의 작용으로 몸과 마음이 괴롭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 자신이 구출된 후 백인호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고 싶어 계속 캐물었다.“백인호가 안 죽었다면 납치범으로 고소해
정욕에서 깨어난 정안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있던 손을 풀며 착잡한 심정이었다.남하준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만지며 그녀의 귓볼에 가볍게 키스했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내가 많이 사랑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나랑 결혼해줘. 응?”정안은 가슴이 욱신욱신 쑤시고 눈시울이 젖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참았다.만약 그녀가 기억이 없을 때 이 말을 들었으면 크게 감동하고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지금 백완자가 아니라 정안이었다. 그녀는 M국 군전 그룹의 수장과 절대 감정적으로 얽힐 수 없었다.“미안해요.”정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나 오빠랑 결혼할 수 없어요.”남하준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그녀의 목에 머리를 묻은 채 처량하게 물었다.“나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면 못하는 거야?”정안은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만약 그를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 없다고 하면 남하준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캐묻고 그녀의 상황을 조사하면서 그녀의 정체도 알게 될 것이다.정안은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며 애써 평온하게 말했다.“둘 다요.”남하준은 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을 에이는 듯 한 고통이 전해졌고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짓더니 눈동자는 온통 붉어졌다.심장의 통증이 몸의 욕망보다 더 심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는 천천히 정안에게서 일어섰다.정안은 그의 목을 덥석 껴안고 붉게 물든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니 지독하게 슬프고 우울하고 고독해 보여 가슴이 찢어졌다.그녀는 약간 울먹이며 말했다.“하지만 난 좋아요.”남하준은 한 손으로는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가?”“오빠랑 자는 거요.”남자의 서글픈 눈빛을 보니 가슴이 아파 수줍음따위 잊은 그녀였다.남하준은 촉촉하고 붉어진 눈을 가늘게 뜨고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정안은 놀라지 않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었다.“결혼 못 해.”“도련님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도련님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미 돈을 주고 Z국에서 언니 신분증을 재발급받아 언니 신분으로 결혼한다고요!”정안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지윤을 바라보았고 지윤은 굳은 얼굴로 황급히 정안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언니 할머니께서 이미 결혼식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신랑이 누군지 알아요?”“그게 누구든 할아버지는 왜 허락하신 거야?”“할아버지께서는 당연히 반대하셨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백하린이랑 억지를 부리는 할머니를 막을 수 없었어요.”정안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이를 갈며 말했다.“백씨 가문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온갖 짓을 다 버리네.”“어떡해요?”지윤은 정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만약 백하린이 언니 신분으로 M국의 고위 관리 자제에게 시집간다면 앞으로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을 거예요.”“고위 관리?”정안은 화가 나서 온몸이 언짢았다.“맞아요. 남자 쪽 아버지가 시장이래요.”정안은 걱정으로 가득 차서 이일의 엄중성을 깨달았다.만약 정말 혼인신고를 한다면 그녀는 Z국으로 돌아가 다시 정치심사를 받고 조사를 받은 후 M국의 결혼을 처리하게 될 것이고 골치 아픈 일들이 산더미처럼 일어날 것이다.“지금 가장 걱정 되는 건 앞으로 일어날 골치 아픈 일들이 아니야.”정안은 사색에 잠겨 중얼거렸다.“만약 백하린이 진짜 M국으로 시집와서 상속권을 얻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유언장을 손에 쥐게 되면 두 분을 해치게 될까 봐 두려워.”지윤은 멍해졌다.“그럼 가만있을 수 없죠! 내일 안성 호텔에서 약혼식하고 모레 혼인 신고하러 간대요. 결혼식은 대략 한 달 후에 하고.”정안은 여전히 우려하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내가 신분을 밝히면 우리 부모님은 어떡하지?”“언니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어요. 비록 시체를 찾지 못했지만 그 한 가닥 희망 때문에 백하린이 언니 행세를 하는 걸 묵인하고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를 희생할 수는 없잖아요?”정안
“이게 누구야?”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정안이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남하준의 고모 남연희였다.“안녕하세요, 고모님.”점잖고 고귀한 차림의 남연희는 경멸하며 웃었다.“호칭에 주의하지 그래? 이미 우리 하준이랑 이혼했는데 내가 왜 그쪽 고모야?”정안은 개의치 않은 듯 덤덤하게 답했다.“죄송합니다.”“오늘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거물급인데 그쪽이 왜 여기 있어? 청첩장은 어디서 났고?” 정안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지윤이 보다 못해 이를 악물고 반격하려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안의 손에 눌렸다.그때 남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다가와 정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비록 남하준과 이미 이혼했지만 그녀는 원래 호칭대로 일일이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 아주버님, 형님.”남창민과 허윤미 그리고 큰형 내외는 정안에게 상냥한 편이었지만 둘째 내외는 표정이 굳었고 셋째 내외는 숨기지도 않고 남연희처럼 대놓고 깔보았다.정안이 여기에 나타나 오늘 파티의 격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세상에 어쩜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지? 내 첫사랑을 뺏어가더니 이젠 또 남의 남편 염탐하러 왔네.”셋째 형수 최서윤이 조롱하며 말하자 지윤은 더 이상 못 참고 쏘아붙였다.“지금 누구보고 뻔뻔하다는 거예요? 빙빙 에두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바로 해요.”몸에 오만이 배인 최서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쳤다.“나? 방금 서다인 욕했는데?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대체 무슨 낯짝으로 하린이 약혼식에 온 거야?”“당신!”지윤은 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 그녀의 뺨을 때리려 했다.정안이 지윤의 충동적인 행동을 막더니 최서윤에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눈에 거슬리시면 멀리 떨어져 계세요. 굳이 저 찾아와서 험담하면서 입 더럽힐 필요 있나요?”최서윤의 안색이 어두워져 말을 하려는데 남창민이 엄하게 말했다.“남 잔칫상에까지 와서 소란 피울 거냐?”남연희도 최서윤의 편에 서서 말했다.“오빠. 서다인은 이미 하준이랑 이혼했어요. 누가 오빠 며느리인지
소우빈은 어깨를 으쓱하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정안을 응시했다.정안은 더 이상 남자를 상대하지 않고 돌아서서 떠났고 지윤이 그 뒤를 따랐다.두 사람은 반대편 구석으로 가 똑같이 어색하고 불안해 하는 지우를 발견했다.상류층 부자들의 잔치에 처음 참석한 지우는 아는 사람이 없어 더욱 긴장했다.정안이 다가가 인사했다.“지우야.”지우는 정안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드디어 널 만났네.”정안은 그녀 손바닥의 땀기운을 느끼고 부드럽게 웃었다.“괜찮아. 긴장하지 마.”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네 엄마 방금까지 여기 계셨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지우야, 오늘이 지나면 진화연 씨는 더 이상 내 엄마가 아니고, 나도 서다인이 아니야.”지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그럼 네 이름이 뭔데?”“백완자.”정안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이름을 말하자 지우는 입술을 오므리고 싱긋 웃었다.“너무 귀엽다! 네 부모님은 어떻게 그런 귀여운 이름을 지어주신 거야?”정안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준 오빠가 지어준 거야.”지우가 한참 경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은은한 음악으로 바뀌고 조명이 어두워지자 약혼식은 신비에 빠졌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위에 집중되었다.음악이 점차 아름다워지고 무대 스포트라이트가 천천히 백스테이지 입구에서 켜졌다.화려한 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백하린은 활짝 웃으며 소우빈의 팔짱을 낀 채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소우빈이 먼저 부모님과 친인 친척들, 그리고 백하린에게 고맙다는 공식적인 말을 전했다.지나치게 형식적인 말에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백하린은 행복에 겨워 활짝 웃으며 공주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정안이 현장을 한 바퀴 휙 둘러보니 올 사람들은 전부 모였다.방송국 간부들, 변호사들, 검찰과 경찰들, 시장들, 그리고
지윤은 소우빈을 보며 말했다.“소우빈 씨, 당신 약혼녀가 진짜 사기꾼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아요?”그때 소우빈의 아버지가 앞으로 나서서 위엄 있고 패기 넘치게 소리쳤다.“당신! 지금 당장 명확한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남은 평생 감옥에서 지내게 될 거야!”백하린은 소우빈의 팔을 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긴장하며 말했다.“얼른 이 여자 끌어내요. 우리 약혼식을 망치고 있잖아요.”소우빈은 예리한 눈으로 백하린을 보더니 나지막이 위로했다.“몸이 바르면 그림자가 비뚤어질까 봐 두렵지 않죠. 이 여자 말이 거짓이라면 난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죠?”소우빈의 말을 들은 지윤은 그가 자신의 약혼녀가 사기꾼이고 또 블랙 섀도우의 간첩이라는 걸 모른다고 확신했다.지윤이 또 리모컨을 누르자 스크린에는 백씨 가문의 가족사진이 나타났다.백하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과 그녀가 있었다.지금으로부터 10년 전, 14살의 백하린이 출국 전 찍은 사진이었다.여은수는 후들후들 떨면서 무대로 나가 노발대발하면서 자신의 손녀를 도우려 했지만 백진이 그녀를 끌어당겼다.여은수는 온몸을 떨며 소리쳤다.“저 여자는 서다인 친구예요.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하더니 이젠 우리 손녀 약혼식에 와서 사기꾼이라고 모함하며 소란을 피우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백진은 어쩔 수 없어 하며 위로했다.“일단 흥분하지 말고 다 보고 얘기해요.”“뭘 더 지켜봐요? 우리 손녀가 왜 사기꾼이에요?”여은수가 나지막이 쏘아붙이자 백진은 어두운 얼굴로 혼냈다.“눈먼 노친네. 저 여자는 우리 손녀가 아니야!”“무슨 헛소리에요?”여은수는 화가 나서 벌벌 떨었고 백진이 무대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당신 진짜 손녀는 저기 있다고. 기다려봐.”그때 무대 너머로 정안이 천천히 무대에 올라갔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정안의 모습이 사진 속 여자아이와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백하린은 정안이 서서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정안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동영상도 친자확인 검사도 전부 가짜일 수 있지만 나의 시간과 기억들은 가짜일 수가 없지.”그녀는 백하린에게 말하고 돌아서서 현장의 모든 사람들을 마주했고 시선은 남하준에게 떨어졌다.남하준의 따뜻한 눈빛을 보며 안정감과 충분한 용기를 얻었다.오늘 성공하든 실패하든 남하준만 있으면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정안은 목을 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백완자이고 올해 25살이에요. 본명은 백하린이고 본 국적은 M 국 사람이며 백진 어르신 손녀입니다. 영상에 나온 두 분은 제 부모님이신데 지금 행방이 묘연합니다.”그때 백진이 부주의한 틈을 타 여은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무대로 뛰쳐나왔다.“헛소리! 성형 중독인 당신이 어떻게 내 손녀야?”‘아, 할머니!’리듬이 끊긴 정안은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여은수를 바라보았다.“할머니, 나예요. 나 열 살 때 할머니 좋아하는 가수 보려고 온 가족 몰래 나 데리고 외국으로 가서 그 가수에게 10억짜리 차도 선물했잖아요?”여은수는 멍해졌다. 이건 분명 그녀와 손녀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백진이 노발대발하며 달려와 여은수를 손가락질했다.“이 망할 여편네가. 그 남자한테 10억을 썼어?”정안이 급히 위로했다.“할아버지, 여가수예요. 여가수!”여은수는 이미 백진의 화를 돌볼 겨를도 없고 누구에게 돈을 썼든, 비밀 따위는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아찔한 걸음으로 뒷걸음질 쳤다.“진짜 내 손녀라고?”정안과 백하린이 동시에 손을 뻗어 여은수를 잡으려 했지만 백하린이 먼저 받아 정안의 두 손이 허공에 멈췄다.“할머니, 이 여자 헛소리하는 거예요. 이런 얘긴 인터넷에 뒤지면 다 나와요.”백하린이 설명하자 정안이 덧붙였다.“할머니, 어릴 때 있었던 일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나 다 기억하니까.”여은수는 눈시울이 빨개져서 백하린을 보고 또 정안을 바라보았다.정안은 한숨을 내쉬고는 예지로운 판단이 어려운 할머니를 외면한 채 계속 하객들을 보며 말
“백하린 맞네!”진이수가 감격하며 말했다.모두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특히 남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넋을 잃고 무대 위의 정안을 바라보며 놀라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누군가는 흥분하고, 누군가는 후회하고, 누군가는 믿지 않고 있었다.“하준아.”누군가가 소리쳤다.“어릴 적부터 하린이랑 함께 자란 네가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네가 말해봐. 저 여자 말이 사실이야?”가장 친숙한 세 글자에 남하준은 죄책감이 밀려왔다.그도 오랫동안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남하준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백하린 맞아요.”이 말이 나오자 아무도 정안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다.곧이어 누군가가 속삭였다.“어쩐지! 남하준이 왜 저 여자랑 결혼하나 했어. 이제야 이해가 되네.”여은수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고 백하린은 어찌할 줄 모르며 그녀를 지켜줄 유일한 할머니를 잡고 울었다.“할머니, 나 믿어요. 나야말로 할머니 손녀예요. 저 여자는 사기꾼이란 말이에요. 지금 거짓말하고 있어요.”“엄마 아빠랑 자주 영상통화 했던 거 다 잊으셨어요?”“그리고 친자확인 검사를 어떻게 조작해요? 저 영상도 진짜예요. 엄마랑 아빠가 설마 자기 딸을 못 알아보겠어요?”여은수는 정신을 차리더니 백하린의 옆에 서서 허리를 쭉 펴고 정안을 의심했다.“이봐요들. 내 아들과 며느리는 전에 우리랑 자주 영상 통화했어요. 손녀도 자주 얼굴을 비췄고. 한번이 아니라 아주 여러 번! 설마 내 아들과 며느리가 거짓말했겠어요? 설마 자기 딸을 못 알아보겠어요?”여은수는 또 백진을 가리켰다.“우리 영감도 몇 번이나 함께 영상 통화했어요. 내 손녀가 10년 동안 M국에 오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 하린이는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영감, 어서 와서 설명 좀 해봐.”여은수는 조급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우리 손녀가 사기꾼으로 몰리고 있잖아? 친자확인 검사도 이미 했는데 설마 과학을 안 믿고 자네 눈을 믿는 거야? 자기 아들과 며느리도 못 믿는 거냐고!”화가 나서 온몸이 불편해진 백진은 욱신거
지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백건을 바라보았다.백건은 긴장하며 침을 삼키고 지우가 청혼서를 돌려줄까 봐 두려웠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슬쩍 바지를 만졌다.지우가 청혼서를 들더니 말했다.“건아, 사실은...”지우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백건은 긴장감에 허리를 굽혔다.“제가 아주머니보다 더 서연이를 아껴줄게요. 부디 허락해주세요.”지우는 어리둥절했고 남태준은 싱긋 웃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건이가 아주 놀랐나봐.”지우는 서둘러 해명했다.“난 이런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던 거야. 우리 가족들은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백건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어서 앉아.”지우는 자리에 앉아 손을 뻗어 백건도 앉으라고 했다.자리에 앉은 백건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눈에 띄게 긴장한 백건의 모습에 집안 어른들은 모두 기뻐했다.특히 몇몇 큰아버지들은 집안에서 가장 아끼는 공주님이 M국의 갑부와 결혼할 수 있고, 심지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남자라고 생각하니 더욱 만족스러웠다.모두들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남서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와. 웬 선물이 이렇게 많아요? 이거...”말을 반쯤 마친 그녀는 이미 남우영을 따라 거실로 갔다.백건을 보자마자 그녀는 얌전하게 변했다. 장난기 많고 발랄하던 모습의 그녀는 곧 부끄러움에 휩싸여 긴장한 채 백건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눈빛은 뜨거웠다.“이거 건이가 가져온 예물이야.”허윤미가 말했다.예물이라는 말을 들은 남서연은 심장이 쿵쾅거리고 더욱 부끄럽고 긴장했다.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지우는 딸의 반응을 보고 또 백건을 보더니 아무래도 두 사람이 연인 사이 같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서먹한 수줍음이 감돌고 있었는데 마치 썸을 타는 시기 같았다.허윤미가 또 입을 열었다.“서연아, 며칠 후에 너도 선물을 갖고 정식으로 건이 부모님께 인사드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양쪽 가족
백건은 모든 예물을 갖고 차에 올라 별장을 떠났다.유승아는 서윤아를 부축한 채 별장 문에 서서 떠나가는 차를 보며 안색이 극히 어두웠다.서윤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유승아는 분노가 점점 끓어올랐지만 꾹 참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주머니, 서연이는 곱게 자란 공주님이고 건이와 어울리지 않지만 건이가 좋아하니 허락해주세요. 정말 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전 괜찮아요.”유승아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서윤아가 안쓰럽게 여겨 더욱 열심히 도울 줄 알았다.그런데 서윤아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우리 건이와 결혼하기에는 서연이가 아깝지.”유승아는 어리둥절해 하며 서윤아를 바라보았다.곧 서윤아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서연이는 온실에서 작은 화초라 백지장처럼 단순해. 내 아들이 아니라 자기처럼 단순한 남자를 만나야 해.”그 말인 즉, 백건에게는 단순하지 않은 여자가 어울린다는 뜻인가?예를 들면 신분, 성격이나 능력 같은 것...유승아는 마침내 서윤아가 남서연을 좋아하지만 왜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그녀는 아들을 내조할 수 있는 사업적 파트너를 찾아주고 싶어 했다. 듣기 싫은 말로 서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자였다.유승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서윤아처럼 똑똑한 사람은 유승아가 단순하지 않고 수단이 있고 정치적 힘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그녀가 의심하고 있을 때, 서윤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가 너희 둘 결혼식을 책임질 테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유승아는 막막한 척 말했다.“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서윤아는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 미소는 또렷하게 말해주고 있었다.“넌 똑똑한 애니까 알고 있잖아.”서윤아는 말없이 천천히 별장을 떠났고 유승아가 서둘러 쫓아갔다.그녀는 당연히 이해했다.결혼식은 이미 준비되었고 그녀는 백건과 남서연의 혼사를 망치고 그들의 감정을 깨뜨리기만 하면 순조롭게 백건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유승
여자는 크면 집에 묶어둘 수 없는 법.남서연은 기쁨에 젖어 있었지만 가족들이 모두 자신의 혼사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왜냐하면 백건과 결혼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반드시 그의 부모님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으니....다음날 백건은 이미 푸짐한 예물을 준비했다.모두 직접 준비한 것으로 성의를 다했다.거실에서 하현우는 열심히 예물을 체크하고 있었다.그때 거실문이 열리고 유승아가 서윤아를 부축해 들어왔다.하현우는 들어온 사람을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사모님, 승아 씨 오셨어요?”서윤아는 온화하게 웃었다.“이거 승아에게 주는 예물인가?”하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 백건이 빨리 나오기만을 기도했다.서윤아는 하현우 앞에 다가가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물었다.“내가 묻잖아?”하현우는 바짝 긴장해 대답했다.“서연 아가씨에게 주는 예물입니다.”유승아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그러나 서윤아는 피식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승아네 집에 갖다 주게.”“하지만...”하현우는 망설이며 뒤를 돌아보았다.서윤아는 소파에 앉아 차갑고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볼 필요 없어. 내가 갖다 주라면 갖다 주면 돼. 그 녀석 허락받을 필요 없어.”말을 마친 서윤아는 유승아에게 손을 내밀었다.“승아야, 앉아.”유승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윤아의 곁에 앉아 나지막이 말했다.“아주머니, 이건 건이가 남씨 가문에 주려고 준비한 예물이잖아요. 하 비서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건이와 결혼하는 여자는 너이니 당연히 이 예물도 네 것이지. 나도 서연이를 아주 좋아하지만 아직은 건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어.”“사업적으로 건이를 도울 수 없고 또 일상생활에서도 건이가 서연이를 돌봐줘야 해. 너만큼 성숙하지도, 능력이 강하지도 않아. 게다가 우리 두 가문은 친척 관계잖아.”백건은 방문을 나서서 양복의 커프스를 정리하면서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갔다.그의 싸늘한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워 뼛속을 파고들 것 같았다.“서연이는 나를 행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백건은 차에 올랐고 차량은 서서히 남씨 본가를 떠났다.뒷좌석에서 백건은 한마디 말도 없이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하현우도 기뻐하며 말했다.“축하합니다. 대표님.”“고마워.”한 번도 이렇게 대답한 적 없었는데 보아하니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하현우는 찬물을 끼얹어야만 했다.“대표님, 근데 사모님 고비는 어떻게 넘기실 거예요?”백건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리고 차 안은 말이 없었다....남씨 본가 거실.모든 사람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남태준과 지우는 딸이 가족들 앞에서 백건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듣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남서연은 가족에게 둘러싸여 불심 검문을 당했다.“두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만났어? 진도가 왜 이렇게 빨라? 갑자기 결혼 얘기까지 나오다니?”이러한 문제에 대해 남서연은 모두 털어놓았다.“우리는 정식으로 만난 적 없어요. 제가 어릴 적부터 오빠를 짝사랑했어요.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그럼 건이는 어떤 생각인데?”“오빠도 저와 결혼하고 싶대요.”남태준은 주먹을 쥐며 격분했다.“넌 단순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애야. 분명 백건 그 자식이 오랫동안 음모를 꾸민 게 틀림없어.”지우가 나서서 말렸다.“당신 화부터 내지 말아요. 건이가 음모를 꾸몄든 아니든 인품은 좋은 애잖아요. 가짜 약혼녀 유승아를 빼고 다른 스캔들도 없었고.”남태준은 딸이 아까워 격노하며 물었다.“건이는 차갑고 예민해서 말도 잘 안 하는데 어떻게 우리 서연이와 어울려?”지우가 답했다.“난 두 사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서연이는 어릴 때부터 단순하고 걱정 없이 잘 웃으니 예민하고 차가운 건이 성격과 딱 상보적이잖아요.”허윤미는 시무룩해서 말했다.“하지만 서연이는 아직 너무 어려. 이렇게 일찍 결혼할 필요 없어.”“맞아요. 저도 동의해요.”“맞아요. 너무 어려요. 결혼을 서두를 필요 없어요.”남우
남서연은 빠른 걸음으로 뛰어내려 계단 모퉁이에 서서 백건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오빠, 우리 결혼해요!”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또렷했다.떠들썩한 거실이 폭탄을 떨어뜨린 듯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입을 딱 벌린 채 남서연을 충격적으로 바라보았다.온 집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드러난 충격이 그에게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그는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돌아서서 남서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반달 눈을 한 채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세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백건이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면 남서연은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있었다.남서연은 다시 한번 외쳤다.“오빠, 우리 결혼해요.”백건은 눈가가 흠뻑 젖어 그녀를 향해 입술을 오므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소리로 대답했다.“좋아!”거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남우영이 일어나서 말했다.“난 반대야. 내 삼촌이 내 사촌 동생과 결혼한다니. 이게 말이나 돼?”남창민이 남우영의 손을 덥석 잡아당겨 소파에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넌 네 결혼이나 신경 써. 네 삼촌과 서연이 일은 걱정할 필요 없어.”남우영은 고민 끝에 남서연의 아래에 뛰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서연아, 지금 두 사람 농담하는 거지? 두 사람.. 두 사람 늘 차갑고 낯선 사이였잖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너 진우석이랑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어?”백건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걸어가서 남우영의 목을 조르고 소파로 끌고 갔다.장면이 좀 난처하게 되었다.백건은 어른들께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오늘 급하게 왔어요.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다음에는 정식으로 혼수 예물을 갖고 찾아뵙겠습니다.”허윤미가 서둘러 말했다.“그래. 어서 돌아가. 우리도 서연이와 잘 얘기해볼게. 너무 오냐오냐 키
“왜 내 방에 들어왔어요?”남서연은 긴장해서 그를 내쫓으려 했다.“얼른 나가요. 오빠가 몰래 내 방에 들어온 거 가족들이 알면 큰일 나요.”백건은 이미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오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더라도 결과를 얻어야 했다.“가족들에게 우리 결혼에 대해 직접 말하겠다고 시간을 달라며?”백건은 실망스럽기 그지없고 눈 밑에 슬픔이 가득했다.“방금 네 할아버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눠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던데?”“그게...”남서연은 말문이 막혔다.백건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뜨거운 호흡이 남서연의 피부에 뿜어져 나와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백건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나와 결혼하기 싫어?”남서연은 거짓말이 언젠가 들통 날 것이니 사기 결혼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죄책감을 안고 말했다.“미안해요 오빠. 나 임신하지 않았어요.”백건은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남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미안해요. 일부러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요. 생리가 늦어져서 약국에 가서 유통기한이 지난 테스트기를 샀더니 이런 오해가 생겼어요.”“내가 임신하지 않았으니 오빠도 저 책임질 필요 없고 우리도 결혼할 필요 없어요.”남서연이 한마디 덧붙이자 백건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그녀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무력감은 그를 쓸쓸하기 짝이 없게 만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고 그는 씁쓸하게 냉소를 지었다.남서연은 축 늘어진 그의 머리를 보며 긴장한 채 물었다.“오빠, 왜 그래요?”“남서연, 천국에서 지옥까지 떨어진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아?”백건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남서연은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대체 얼마나 아이를 원했으면 이렇게 슬퍼할까?“미안해요.”남서연이 나지막이 사과했다.백건은 깊은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남서연을 바라보았다.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비분이 교차하는 눈빛에 남서연은 겁을 먹고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오빠, 너무 슬
[나 기다리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말씀드릴게.][싫어요. 안 돼요. 그냥 제가 말할게요.]사흘째 되던 날, 남서연이 어렵게 용기를 내어 가족에게 고백하려고 했을 때 피가 흘렀다.그녀는 유산인 줄 알고 놀라서 혼자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다.근데 알고 보니 생리였다.의사는 테스트기가 틀릴 가능성도 있으니 임신을 확정하려면 반드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알고 보니 이 모든 건 오해였다.그녀가 임신하지 않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녀는 한없이 서글프고 괴로웠다.슬프게도 백건에게 시집가는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아이를 빌미로 그와 결혼할 가망이 없어졌다.그녀는 백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백건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일주일 뒤.기업 디자인 부서에서.하현우는 직접 디자인 부서에 와서 남서연을 찾았고 공손히 말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찾으세요.”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미안해요. 집에 일이 좀 생겨서 시간이 없다고 전해주세요.”남서연은 가방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그녀는 아직 백건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하지 못했다.백건을 속이고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한 후에 그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했다.그런데 가짜 임신으로 속여서 결혼해야 백건에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했다....대표 사무실.백건은 인터넷에서 임신 기간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어떻게 임산부를 보살피는지, 산전 검사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간호해야 하는지 등등...그때 하현우가 노크했다.남서연인 줄 알았던 백건은 순간 마음이 가라앉아 혼자 온 하현우를 보며 물었다.“서연이는?”“아가씨는 먼저 집에 돌아가셨어요.”백건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고는 마음의 답답함을 달랬다.남서연은 대체 무슨 뜻일까?이미 일주일 동안 그를 피했다.잠시 후 그는 눈을 뜨고 책상 위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대표님, 어디 가세요?”백건은 성
유승아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짓더니 남서연이 가장자리에 앉아 조용히 경청하는 것을 보고 즉시 화제를 돌렸다. “서연아, 촌수로 따지면 네가 건이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 만나게 되면 양쪽 어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네 작은 엄마가 어떻게 그런 복잡한 관계를 처리하겠어?”남서연은 멍해졌다.그녀가 설명하기도 전에 백건이 버럭 화를 냈다.“지금 내 앞에서 시비를 거는 거야?”유승아는 서둘러 해명했다.“네 친구로서 서연이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을 뿐인데 왜 시비를 건다고 말해?”“이건 나와 서연이 일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너 할 말 끝났으면 돌아가.”유승아는 얼굴의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태도가 진지해졌다. “백건, 비록 우리 연인 사이는 가짜였지만 오랜 우정은 가짜 아니지?”“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친구로서 충고 한마디 하고 싶어. 너와 서연이는 절대 불가능해. 양쪽 어른들께서 동의하지 않을 거야. 괜히 어린 서연이 상처 주지 마.”백건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유승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나 할 말 끝났으니까 돌아갈게. 두 사람 잘 생각해봐.”두 사람 모두 일어나서 유승아를 배웅하지 않았다.문이 심하게 닫혔고 거실이 조용해졌다.남서연과 백건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어색한 듯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승아 언니 말이 맞아요. 양쪽 집안에서 쉽게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겠다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동의하면 돼.”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 침묵을 삼키더니 물었다.“서연아, 키스해도 돼?”남서연은 이런 문제일 줄은 몰랐다.그녀는 머리가 텅 비었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멍해 있을 때, 남자는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키스를 했다.기습적인 키스에 남서연은 당황스러웠다.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키스를 나눴다.저녁 무렵.집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