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호는 음험한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혀로 입가의 핏자국을 고르더니 차갑게 웃었다. 칼을 품고 있는 웃음이었다.남하준은 화를 꾹 누르고 그를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그가 몸을 돌려 가려는데 백하린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열어 가로막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사람 때리고 그냥 가? 적어도 왜 때렸는지는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야?”이 낯선 여자를 바라보는 남하준의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일 초라도 더 보면 백하린의 이름과 신분에 먹칠하는 것 같았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쳐 백씨 저택을 떠났다.백하린은 멍해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급히 서재로 뛰어 들어가 도청 설비를 켰다.그때야 모든 도청 장비가 고장 난 것을 발견했고 그 순간 그녀는 허탈하게 의자에 앉아 얼굴이 창백해졌다.잠시 후 백하린은 서재를 뛰쳐나갔다.소파에 앉아 홀로 약을 바르는 백인호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백인호.”백하린은 그에게 달려들었고 고개를 돌려 하인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숨이 가빠졌다.“큰일 났어. 우리가 설치한 도청 설비가 전부 고장 났어. 남하준이 설마 우리 의심하는 거 아니야?”백인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하준이가 배불러 할 일 없어 여기까지 찾아와 나 때린 것 같아?”“그럼 어떡해?”백하린은 넋이 나갔다.“증거가 없어.”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만약 네가 설치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었다면 바로 너 감옥에 보냈을 거야.”“말도 안 돼. 난 남하준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야. 아무리 지금은 싫어한다고 해도 날 감옥에 보낼 정도는 아니지.”백인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근데 방금 날 보는 남하준 눈빛이 이상했어. 전처럼 다정하지 않았다고 할까? 설마 내 신분을 의심하는 걸까?”“네 신분을 의심하는 건 당연하지.”백인호는 약상자를 치우고
“준, 돌아왔어요?”남하준은 그녀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심장이 움찔했다.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은 비로소 진정으로 살아난 것 같았다.그는 백하린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사랑하고 있었고 다만 예전에 그 짝퉁은 그에게 이런 설레임을 주지 못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느낌이었다. 본능적인 사랑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남하준은 슬리퍼를 갈아 신고 서다인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서다인은 살짝 멍하니 몸이 굳어 그의 단단한 가슴에 안겨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의 품은 따뜻하고 편안하며 익숙한 은은한 향기가 가슴에 스며들었다.서다인은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 심장이 뛰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왜 그래요?”“힘들어. 너 안고 싶어서.”남하준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꼭 껴안고 눈을 감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긴 머리를 두 손을 쓰다듬었다.아주 부드럽고 애틋하게.서다인은 그의 품에 안겨 헤어나올 수 없었다.마음 가득 남하준이 퍼져나갔다.그녀는 심지어 남하준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다.‘왜 매번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안아줄까?’서다인은 두 손으로 천천히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배 안 고파요? 저녁 먹을래요?”“넌 먹었어?”“아니요. 당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음식 다 식었어요.”남하준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며 다정다감하게 말했다.“앞으로는 나 기다리지 마. 배고프면 먼저 먹어.”“네.”서다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이 흐뭇해지자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내가 데울게.”남하준이 그녀를 놓고 가려 하자 서다인이 그의 손을 잡았다.“아줌마한테 시키면 돼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느라 피곤할 텐데 좀 쉬어요.”남하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로 향했다.두 사람이 앉자마자 남하준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그는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
서다인이 남하준을 따라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 밖은 남씨 가문 사람들로 가득 찼다.모두의 안색이 매우 어두웠다.남태준이 5년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생사를 넘는 위급한 순간이라니. 허윤미는 응급실 밖에서 울다 기절하여 병실로 보내져 링거를 맞았다.남태준을 병원에 데려온 두 명의 경찰은 사복 차림이었다.서다인은 물어보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남태준은 무려 6시간 동안 응급수술을 받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의사가 응급실에서 나왔다.모두 긴장한 채 의사 옆을 빙 둘러싸서 물었다.의사는 피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상황이 좋지 않아요. 중환자실로 옮겨서 지켜봐야 해요. 아직 위험한 고비를 넘긴 건 아니니 살아날 수 있을지는 환자분 의지에 달렸어요.”남창민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비틀거리자 남희준과 남이준이 급히 아버지를 부축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하고 슬프고 무기력해 보였다.의사의 말은 듣기 좋아 한 가닥 희망이 있지만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고 살아날 기회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남창민은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어 주저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서다인은 아버님이 이렇게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몇몇 형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슬픔을 참고 아버지를 보살피고 있었다.지금 서다인은 세 명의 형님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슬프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옆에 서서 조용히 지켜야만 했다.마음속으로 남태준이 이 재앙을 이겨내기를 기도했다.그 자리에서 가장 침착한 건 남하준이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다 듣고는 의사를 따라 중환자 관찰실로 들어갔다.유리창 너머로 그는 병상에 누워 튜브가 가득 꽂힌 넷째 형을 보았다. 그의 몸 곳곳에 거즈가 가득 둘러싸였고 어디 성한 곳 하나 없었다.기구의 심전도와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흔들렸고 간호사는 곁에서 돌보며 수시로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남하준은 가만히 서서 꽉 쥔 주먹이 약간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촉촉해지며 눈 아래에서 분노가 솟구쳤다.가족
남자는 눈물이 있어도 쉽게 흘리지 않는 법이지만 그건 어쩌면 마음속 깊숙한 슬픔에 도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또 다른 경찰관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는 동료가 총에 맞아 즉사할지언정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 그 비인간적인 고통을 남태준이 어떻게 견뎌냈는지 알 수 없었다.남하준은 한마디 말도 없이 듣고 있더니 눈가에 맑은 눈물 두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고 핏줄 터지는 듯한 철권을 움켜쥐고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두 명의 마약 사복 경찰이 병원을 떠난 후 남하준은 형 옆을 지키지 않았다.그는 이곳을 형들과 부모님께 맡기고 서다인을 데리고 병원을 떠났다.서다인은 그가 괴로운 것을 알고 돌아가는 길에 조용히 그의 손을 잡고는 방해하지도,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금원으로 돌아간 후.남하준은 그녀에게 앞으로 며칠 동안 좀 바쁠 것이라고 했다. 그녀더러 먼저 방에 들어가 씻고 자라고 하고 자신은 서재로 들어가 계속 일했다.그날 밤, 서다인은 그가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지만 옆자리는 여전히 허전했다.그녀가 일어나 서재에 와서 보니 남하준은 아직도 어제 옷을 입고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묵묵히 문을 닫았다.그 후 이틀 동안 서다인은 매일 병원에 가서 남태준의 상태가 호전되었는지 확인했지만 병원은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않았다.셋째 날, 남하준은 미사일 훈련 지휘를 위해 군전 그룹으로 돌아갔다. 이날 오후 4시 서다인이 거실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하인이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미사일 훈련 생중계 안 보세요?”“생중계라니요?”“류청 씨께서 오늘 저한테 4시에 사모님께 TV를 켜라고 알려주라고 하셨어요. 우리 M 국의 첫 미사일 훈련을 도련님께서 지휘하신다고요.”서다인은 바로 책을 덮고 서둘러 TV를 켜서 하인이 지정한 채널로 넘겼다.TV에서 생중계를 보았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화면은 미사일 발
서다인은 거실에서 아침을 먹으며 휴대전화를 들고 어제 미사일 발사에 실패해 J국 국경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계속 뒤적거렸다.J국과 기타 국제 뉴스에서는 J국이 수백 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보도했으며 M국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M국에 최고의 보상과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다.M국 보도에 따르면 이번 미사일 발사 편향으로 인해 J국 국경에서 M국으로 판매되는 가장 큰 마약 소굴이 파괴되었으며 수십만 톤의 마약과 수백 명의 마약 밀매자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서다인은 보면 볼수록 걱정이었다.전 세계 지도자가 이번 M국 미사일 훈련 실패로 인해 파괴된 것이 마약 소굴이라는 걸 알더라도 그들은 그저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고 서로 갈등을 유발하고 도발해 올 것이다.그때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오셨어요?”서다인은 움찔 놀라더니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거실 현관으로 잽싸게 뛰어갔다.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여전히 잘생기고 위풍당당한 남하준을 긴장하고 불안하게 바라보았다.“준.”서다인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참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흥건해져 가슴이 아팠다.남하준은 입꼬리가 올라가고 미간이 한껏 부드러워졌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 서다인 앞으로 다가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꽉 껴안긴 서다인은 그의 따뜻한 품에서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두 손을 천천히 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속삭였다.“피곤해 보이는데 방에 가서 좀 쉴래요?”남하준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가볍게 흔들었다.“배 안 고파요? 아침 먹을래요?”남하준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손의 힘을 조이고 눈을 감고는 그녀의 몸이 주는 에너지를 느꼈다.“준...”서다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남하준이 쉰 목소리로 한없이 낮고 가볍게 말했다.“나 지금 너 안고 충전하고 싶어.”서다인은 심장이 뛰었다. 마치 몇 마리의 토끼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여자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남하준이 그녀를 안고 충전하겠다는
남하준은 책갈피를 넣고 책을 덮어 탁자 위에 놓았다.서다인은 따뜻하게 웃으며 일어나려 했다.“깼어요? 배 안 고파요? 음식 데우라고 할게요.”남하준은 그녀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겨 옆으로 끌어안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눌렀다. “배 안 고파. 나랑 얘기 좀 해.”“그래요. 무슨 얘기하고 싶은데요?”남자는 가볍게 탄식했다.“형은 좀 어때?”“여전히 중환자실에 있어요.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버티고 있죠.”그는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서다인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그 예쁜 반지를 보았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되고 설레어 말문이 막혔다.결혼 반년 동안 그녀에게 반지를 준 적이 없었다.“형이 자기 첫사랑한테 주라고 부탁했대.”순간 서다인의 안색이 어두워지고 모든 기대와 설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아.”“근데 난 형이 반지를 직접 전하게 하려고.”그는 반지를 서다인의 손에 넣었다.“내일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소독해 달라고 하고 형 손가락에 끼워줘.”서다인은 그의 뜻을 알아챘다.형에게 목표가 생겨 빨리 낫기를 바라는 것이었다.서다인은 밋밋한 반지를 보며 말했다.“중환자실에서 환자한테 반지를 끼우게 할까요?”“이 반지는 형에게 아주 중요해. 사고를 당하기 전에 부모 형제도 언급하지 않고 첫사랑인 여자친구만 언급했대.”서다인은 반지를 보면서 침묵했다.남태준은 아마도 남하준과 마찬가지로 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일편단심인 남자일 것이다.다만, 남태준의 일편단심에 서다인은 매우 감동했지만 남하준의 일편단심에는 아주 슬펐다.남하준이 사랑하는 여자는 백하린이었으니.서다인은 그의 품에서 나오며 물었다.“J국 국경을 폭파한 일에 대해 정통 어르신께서 뭐라고 하세요? 당신 처벌하지 않으셨어요?”남하준은 입술을 오므리고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그럼 M국이 곤란해졌겠네요?”“요즘 국제 여론 상 좀 그렇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야.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니까.”고의가 아니
남하준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눈동자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완아, 기억을 되찾는 것도 좋지만 네 목숨이 더 소중해. 그냥 운명에 맡기자.”“가장 좋은 의사를 찾으면 되잖아요.”그녀는 살구 눈을 깜빡이며 거의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남하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단 0.001%의 위험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 배 안 고파? 밥 먹으러 가자.”남하준이 화제를 돌렸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여자의 손을 잡고 일어섰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하인이 즉시 달려가 문을 열고 긴장한 표정으로 남하준에게 돌아섰다. “도련님, 정통 어르신과 비서님이 오셨어요.”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쳤고 남하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먼저 가서 밥 먹어.”서다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하인이 문을 열자 차가운 얼굴의 정통 어르신이 기세등등하게 성큼성큼 서재로 향하며 한마디 말도 없이 남하준 곁을 지나갔다.“어르신...”남하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통 어르신은 그의 곁을 홱 스쳐 지나갔고 노기가 등등했다.남하준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무거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은 서다인은 서재를 돌아보니 비서실장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고 태도가 매우 엄숙하고 분위기가 냉엄했다.그녀는 남하준이 처벌을 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렸다.서재.정통 어르신은 소파에 앉더니 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자네가 총회에 제출한 미사일 오류 보고서를 난 한마디도 믿을 수 없네. 지금 우리 둘뿐이니 솔직히 말해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남하준은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천천히 앉았다. “차 드릴까요?”정통 어르신의 안색이 어둡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화가 나서 가슴이 벌렁거렸다.“나 속일 생각 말게. 미사일 1호 기술은 이미 완전무결해. 절대 데이터 오류가 생길 리 없다고. 원래 무인 사막에 떨어졌어야 할 미사일이 어떻게 이웃 나라 마약 소굴에 떨어지냐고
“정부 지원으로 양귀비 농사를 지어 전 세계에서 거의 모든 마약이 흘러나오는 나라죠. 저희는 이웃 국가로서 마약이 가장 범람하는 피해국입니다.”“우리 국경수비대원 18명이 강제로 마약 주사를 맞았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지금 매일 독과 싸우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고통이죠. 우리 M국에는 2천만 명의 중독자가 있는데 이 숫자는 여전히 매일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수도 없는 마약 검거 경찰이 참혹하게 죽었지만 여전히 마약이 우리 M국으로 반입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정통 어르신은 비통한 표정으로 앉아 이마를 짚고 흐느끼며 말했다.“미사일로 마약 소굴 하나를 없애면 뭐하나? J국에게는 그저 간지러움을 태운 정도지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남하준은 비통하게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정통 어르신의 말투가 조금 느려졌다. “자네는 절대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네. 대체 왜 그런 건가?”남하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네, 사심이 있었습니다.”“제 부하 정호와 아내가 얼마 전 J국에서 살해당할 뻔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구출돼 참았습니다.”“하지만 이번에는 제 친형이었습니다. 형은 M국 마약 단속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영웅이었습니다.”남하준은 눈물이 반짝이며 울먹였다.“전 형이 영광스럽게 희생될지언정 6일 밤낮으로 매달려 지독한 고문에 시달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입니다.”“형은 아직 병원에 누워 위독한 상황입니다.”남하준은 촉촉한 눈을 천천히 감고 호흡이 점점 무거워지며 낮게 울먹였다.“형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형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었습니다.”정통 어르신의 얼굴이 굳어지며 긴장해서 물었다.“설마 태준이? 요 몇 년 동안 계속 J국에 잠입 수사했던 건가?”남하준은 목구멍이 시큰거렸고 고개를 끄덕였다.정통 어르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주먹을 쥐고 소파에 주먹을 쥐어박았다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