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서다인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나랑 나가서 살래?”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그를 따라 나가야 했다.이 집, 이 가족 사람들 중에 누가 범인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올라가서 짐 챙겨.”남하준이 부드럽게 말했다.“네.”서다인은 곧장 대답하고는 급히 올라갔다.모두가 거실에 앉아 안색이 좋지 않고 분위기가 무거웠다.남하준은 서다인의 짐을 챙겨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차에 올라타자 서다인이 호기심에 물었다.“근데 우리 어디 가요?”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온화한 눈빛으로 놀란 그녀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금원에 갈까?”금원?그곳은 서다인 마음속의 응어리였다.금원은 백하린을 위해 맞춤 제작한 신혼집이었다. 인테리어든 스타일이든 모두 그의 첫사랑이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금원도 싫고 남씨 저택도 싫으면 남하준에게 새집을 마련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좋아요.”서다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었다.남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서다인은 남자의 다정하고 친밀한 행동에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약간 긴장해서 말했다.“하지만 금원에도 수사대를 보내 수색하라고 하면 안 될까요?”남하준이 멍해 있자 서다인이 급히 설명했다.“셋째 형님이 당신을 좋아했었고 지금도 저를 싫어하지만 그렇게 변태적인 행동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남하준은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그래? 형수가 날 좋아했다고?”“첫째 형님이요.”남하준은 어이 없어 피식 웃었다.“그걸 믿어?”“나도 형님이 당신 좋아하는 거 눈치챘어요. 그래서 나한테 적개심이 큰 거고요.”남하준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깊고 검은 눈동자로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서다인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또 심각하고 차갑고 위엄 있는
40분 후 차량이 금원 입구에 주차되었다.서다인은 남하준을 따라 차에서 내려 금원의 거실로 들어갔다.그들이 막 앉자마자 류청이 손에 십여 개의 도청기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도련님, 이것 좀 보세요.”류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긴장하고 분노한 모습이었다.남하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 무더기의 소형 도청기를 보더니 안색이 갑자기 변했고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서다인도 수많은 도청기에 놀라 류청과 남하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거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냉엄하고 엄숙하게 변했다.수사팀은 안팎을 모두 한 번 검사했고 바깥 정원과 잔디밭도 놓치지 않고 몰래 카메라가 없는지 확인한 후 보고 후 철수했다.서다인이 불안에 떨며 물었다.“대체 누가 설치한 거죠?”류청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남하준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에 대통령과 이곳에서 회의했는데 안개 찾기 계획이 누설되어 그는 한때 서다인의 정체를 의심했고 심지어 그녀가 누설한 것으로 의심했다.지금 보니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그는 자신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에 수치스러움과 분노를 느꼈다.이제 그는 짝퉁의 정체가 누구인지 매우 확신하고 있었다. 덩굴을 따라 참외를 찾으려면 경솔하게 굴어서 뱀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서다인은 남하준이 생각에 잠겨 줄곧 말이 없자 호기심에 또 물었다.“혹시 백하린 아닐까요?”남하준 눈을 치켜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완아, 절대 모른 척해야 돼. 소문도 내지 말고 질문도 하지 말고 조사도 하지 마.”“왜요?”남하준은 인내심 있게 달랬다.“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내 말대로 해.”서다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백하린은 대체 왜 그런 거죠? 당신을 너무 사랑해 미쳐버린 건가요?”이것은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아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남하준은 그녀를 다독이고 류청에게 말했다.“이것들 다 치워.”“네, 도련님.”“전에 내가 시킨 일 계속 조사
남하준의 눈 밑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서재로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너도 서재로 와.”서다인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진중하고 냉엄한 외모에 반해 감정에 서툰 초보의 느낌이 들었다.서다인은 책장 앞으로 걸어가 책을 한 권 뽑아 가슴에 안고 돌아서서 그를 응시했다.남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긴장했다.그는 서재로 향했고 서다인이 뒤를 따랐다.서재.그는 사무용 책상 앞에서 공무를 처리하고 서다인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두 사람은 아무도 상대방을 방해하지 않았다.밝고 따뜻한 방, 베란다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꽃향기 섞인 잔잔한 향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따스한 햇살이 창가에 비쳐 따뜻하고 낭만적이며 고즈넉했다.세월이 그렇게 조용할 수 없었다.남하준은 여전히 10년 전처럼 그녀 옆에 있으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매혹적인 핑크빛 얼굴을 보면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10년 전만 해도 그랬고, 오늘 밤도 그랬다.남하준은 감개무량해서 가볍게 탄식했다.역시 누구도 그의 할머니 눈을 속일 수 없었다.과학은 조작할 수도 있지만 노인의 안목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완아.”서다인은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살굿빛 눈은 여전히 맑고 초롱초롱했다.“네?”“심심해?”서다인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뭐 좀 먹을래?”남하준은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서 과일 가져올게.”“괜찮아요. 난...”서다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하준의 모습은 이미 방안에서 사라졌다.그녀는 좀 어리둥절했다.잠시 후 남하준이 잘게 썬 과일을 들고 들어와 서다인 옆에 앉았다.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서다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를 옮겨 탁자 위의 과일을 보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먹어.”서다인은 순순히 포크
서다인은 그의 튼튼한 허벅지에 앉혀졌다.그녀는 몸이 팽팽해졌고 온몸이 긴장감에 휩싸여 걷잡을 수 없었다.남하준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릿하고 깊은 눈매는 특히 매혹적이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완아, 앞으로 나 준이라고 불러. 아니면 여보라고 부르던지.”여보라는 두 글자가 전광석화처럼 서다인의 심장에 터져 순간 반짝반짝 빛나고 떨리고 막막했다.그녀는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준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그래 그럼.”남하준은 목젖을 위아래로 굴리며 그윽하고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여자는 긴장감에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나랑 친하게 지내려고 너무 노력할 필요 없어요. 감정을 키우는 일은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시간이 필요하잖아요.”남하준은 마른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귀밑머리에 천천히 들어가 그녀의 붉어진 귀를 우회하여 뒤통수를 잡았다.남자는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누르고 천 년 동안 금욕한 듯한 욕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혀 노력할 필요 없는데?”서다인은 긴장하여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호흡이 흐트러졌다.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했고 온몸이 나른하고 무기력해지며 미칠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그의 키스를 기대했다.그의 키스는 가볍고 매혹적이며 그녀의 입술을 살짝 쫓고 핥은 다음 천천히 깊숙이 들어가며 부드러운 동작이 심금을 울렸다.서다인은 녹초가 되어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 몸은 부드럽게 그에게 달라붙어 그가 마음껏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남하준의 키스는 항상 매우 난폭하고 자극적이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너무 부드러웠다. 적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이었고 그녀를 미지의 감각 탐구로 차근차근 안내했다.그녀는 그의 정욕과
이튿날 아침.여전히 좋은 날씨였다.남하준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서다인은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봤다.갑자기 벨이 울렸고 그녀가 확인해보니 낯선 번호였다.서다인은 이어폰을 귓가에 댔다.“여보세요?”휴대전화 너머로 여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다인 양? 아직도 이 늙은이 기억하나?”서다인은 움찔 놀라서 몇 초 동안 멍해 있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주방을 들여다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어르신, 무슨 일이세요?”“그냥 궁금해서. 둘이 이혼은 했어?”서다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어르신, 죄송하지만 저랑 하준 씨 이혼하지 않기로 했어요.”휴대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서다인은 할머니의 노기를 알아채고 거듭 설명했다.“무엇보다 하준 씨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아서 다시 잘살아 보기로 했어요.”여은수는 코웃음을 쳤다.“하준이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아? 지금 농담해?”“어르신, 정말 죄송하지만 이혼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기로 했어요.”“자네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뻔뻔하고 고약한 여자야. 자네가 지금 오랫동안 서로 사랑했던 연인을 억지로 갈라놓고 있다는 거 알아?”서다인은 꾹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근히 참고 묵묵부답.“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준이는 내 손녀를 아주 사랑해. 적어도 20년은 사랑했을 거야. 그런데 빈민가에서 태어난 천한 자네가 성형한 얼굴로 내 손녀 자리를 대신하려고 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서다인은 참다못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휴대전화 끝에 대어 또박또박 말했다.“어르신께서 손녀를 아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정중히 말씀드릴게요.”“첫째, 저는 성형을 하지 않았고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 만약 제 생김새가 하준 씨 스타일이라면 아주 다행이고 기쁠 것 같네요.”“둘째, 이혼을 거부한 사람은 하준 씨에요. 군전 그룹 장군이라 나라 군혼법이 하준씨 권익을 보호하고 있어요. 하준 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혼은 불가능해요.”“셋째, 고약한 거로 따지면 제가 어르신 손녀의 1만분의 1
남하준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앞에 있는 서다인을 쳐다보고는 휴대전화를 들고 걸으면서 엄숙하게 말했다.“할머니, 서다인은 제 아내예요. 언행에 주의해주시죠.”서다인은 멀리 간 남하준을 보며 화가 잔뜩 난 채 소파에 앉아 쿠션 하나를 집어던졌다.백하린이 괘씸한 건 그렇다 치고, 이제 그녀의 할머니도 이렇게 억지를 부리다니. 부자들은 원래 이렇게 횡포할까?잠시 후 남하준이 돌아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어르신이 안 좋은 얘기하신 거 너무 신경 쓰지 마.”서다인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난 3년 동안 이런 말에 면역력이 생겨 혼자 삭히곤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자신이 서다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신경 쓰는 건 남하준의 태도였다.“지금 백하린을 감싸는 거예요? 아니면 그 할머니를 감싸는 거예요?”서다인이 불쾌해서 물었다.남하준은 그녀의 언짢은 말투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그런 거 아니야.”“그 할머니 겉으로는 인자해 보이는데 하는 짓은 너무 역겨워요. 방금 나보고 글쎄...”서다인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하준이 그녀의 옆에 앉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완아, 어르신 좋은 분이셔. 단지 자기 손녀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미워하지도 말라고요?”서다인은 듣자 하니 남하준은 마음속으로 계속 백씨 가문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욕을 먹어도 그녀에게 참으라고 하고 이해하라고 했다.서다인은 어쩔 수 없는 듯 머리를 숙였고 마음이 좀 괴로웠다.“가자, 밥 먹으러. 이따가 병원 가자.”“병원엔 왜요?”서다인이 놀라서 물었다.남하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긴 머리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왔다.“너 기억 상실에 대해 한번 검사해봐야지.”서다인은 침묵했다.남자의 그윽하고 고운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니 그렇게 따뜻했다.그녀도 자신의 신분을 기억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갈래?”남자는 그녀의 의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남하준이 물었다.“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손상된 신경을 수술로 복구하면 천천히 회복할 수 있어요. 다만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해서 잘못하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어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서다인이 긴장하며 물었다.“그럼 국내에서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어느 분이죠?”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하준 즉시 말을 끊었다.“안 돼.”“왜요?”서다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모처럼 기억을 되살릴 기회가 있고,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100% 위험하지는 않았다.남하준은 대꾸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 세 명의 의사에게 인사하고는 서다인을 끌고 떠났다.그들은 병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두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차 안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금원에 돌아와 서다인이 막 내리려고 할 때 남하준이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 나 일 보고 돌아올게.”“그래요.”서다인이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가장자리에 서서 남하준의 차가 천천히 금원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손을 들어 가볍게 손짓했다.그가 이번에 일하러 나가면 예전처럼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녀는 눈을 뗄 수 없었다그래도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별장으로 들어섰다.30분 후.차량은 백씨 가문 저택 입구에 주차되어 있었다.남하준은 차에서 내려 손목시계를 벗고 별장으로 성큼성큼 들어서자 류청이 급히 따라갔다.거실에서 백하린은 남하준을 보고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빠.”눈치 빠른 류청이 즉시 그녀를 막았다.남하준은 백하린을 차갑게 흘끗 쳐다보고는 물었다.“백인호 어딨어?”백하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삼촌은 위층에 있는데 무슨 일로 찾아요?”“내려오라 그래.”남하준의 안색이 어둡자 백하린은 당황하여 하인을 시켜 위층으로 올라가 사람을 부르라고 했다.2분 후, 백인호가 우유 작작 내려왔다.점잖
백인호는 음험한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혀로 입가의 핏자국을 고르더니 차갑게 웃었다. 칼을 품고 있는 웃음이었다.남하준은 화를 꾹 누르고 그를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그가 몸을 돌려 가려는데 백하린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열어 가로막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사람 때리고 그냥 가? 적어도 왜 때렸는지는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야?”이 낯선 여자를 바라보는 남하준의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일 초라도 더 보면 백하린의 이름과 신분에 먹칠하는 것 같았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쳐 백씨 저택을 떠났다.백하린은 멍해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급히 서재로 뛰어 들어가 도청 설비를 켰다.그때야 모든 도청 장비가 고장 난 것을 발견했고 그 순간 그녀는 허탈하게 의자에 앉아 얼굴이 창백해졌다.잠시 후 백하린은 서재를 뛰쳐나갔다.소파에 앉아 홀로 약을 바르는 백인호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백인호.”백하린은 그에게 달려들었고 고개를 돌려 하인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숨이 가빠졌다.“큰일 났어. 우리가 설치한 도청 설비가 전부 고장 났어. 남하준이 설마 우리 의심하는 거 아니야?”백인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하준이가 배불러 할 일 없어 여기까지 찾아와 나 때린 것 같아?”“그럼 어떡해?”백하린은 넋이 나갔다.“증거가 없어.”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만약 네가 설치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었다면 바로 너 감옥에 보냈을 거야.”“말도 안 돼. 난 남하준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야. 아무리 지금은 싫어한다고 해도 날 감옥에 보낼 정도는 아니지.”백인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근데 방금 날 보는 남하준 눈빛이 이상했어. 전처럼 다정하지 않았다고 할까? 설마 내 신분을 의심하는 걸까?”“네 신분을 의심하는 건 당연하지.”백인호는 약상자를 치우고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