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천천히 다가와 침대 저편에 앉았다. 서로 등진 채 말이다.남자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는 너무 무거웠고, 그의 마음은 이유 없이 지쳐 있었다.서다인은 단 한 마디만 물었고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남하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하린이 왜 들어와 살고 있지?”서다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벌써 한 달 넘었어요.”“막지 않았어?”“난 막을 자격이 없어요.”남하준은 침묵했다가 또 물었다. “자격증 준비해?”“아뇨.”“여기서 사는 거 불편하지 않아?”“괜찮아요.”“백하린이 너 괴롭히진 않았어?”“네.”그들은 또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남하준은 계속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서다인은 단답형으로 대답해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고,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나 씻고 올게요.”서다인은 이 말을 남기고 침대를 떠나 옷장에 가서 잠옷을 가지고는 샤워를 하러 갔다.남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저녁에 집에 돌아온 이후로 눈을 붙이지 않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대화는 점점 더 서먹해졌고, 그녀는 그와 말을 섞는 것조차 꺼려하는 듯했다.반 시간 후, 서다인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남하준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몸을 구부린 채로 말이다. 그의 모습은 고독하고 무거운 슬픔을 내뿜고 있었다.‘회사 일 때문에 이렇게 지쳐있는 거야?’서다인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준 씨, 어제 수술 받고 왔잖아요. 누워서 쉬어야 해요.”남하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깊고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서다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눈빛이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느꼈다.그는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서다인은 긴장하며 말했다.
서다인은 거즈를 싸고 있는 그의 어깨만 뚫어지라 쳐다보며 눈길을 함부로 돌리지 못했고 온몸이 약간 뜨겁고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방이 너무 조용해서 그녀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남자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처럼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의 가슴은 기복이 심하고 호흡은 거칠었다.그는 너무 아픈 탓인지 허리를 곧게 펴고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남하준이 앉아 있었기에 서다인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을 향하고 있어 위치가 애매했고 서다인은 옆으로 좀 옮겼다.“거즈를 뗄 테니 아프면 말해요.”서다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다.“응.”남하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그녀가 거즈를 조심스럽게 걷었지만 너무 팽팽하게 붙인 탓에 피부가 당겨질 정도였다.서다인은 그가 아플까 봐 두 손을 함께 쓰며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씩 천천히 젖히고 있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머리를 숙이고 찢으면서 거즈에 가볍게 바람을 불어넣었다.하지만 그녀는 거즈를 젖히는 이 정도의 고통이 남하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그녀의 입김은 오히려 남자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괴롭게 만들었다.서다인의 몸에서는 은은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풍겼다. 부드럽고 까만 긴 생머리 몇 가닥이 무심코 그의 뺨과 어깨 위로 흘러내려 가볍게 스쳤다.남하준의 마음에는 거친 파도가 일었고 횃불처럼 뜨거웠다. 허벅지에 올려놓은 두 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서다인은 겨우 거즈를 젖히고 피가 배어 있는 상처를 보았다. 이미 꿰맸지만 섬뜩한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총알이 조금만 더 아래로 떨어지면 남하준의 심장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두렵고 괴로웠다.그녀는 요오드를 들고 남하준의 상처를 소독하고 살균한 후 약을 바르고 새로운 거즈를 감싸주었다.남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서다인은 황
서다인은 놀랍고 어리둥절하고 경악했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는 팔꿈치로 몸의 무게를 반쯤 받아내고 나머지는 서다인의 몸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빼어난 얼굴은 지척에서 떨어져 상대의 숨결이 감도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서다인은 피가 솟구치는 긴장을 처음 느꼈고 호흡이 가빠졌고 목소리가 떨렸다.“뭐... 하는 거예요?”남자의 깊은 눈동자는 흐릿하고 호흡은 뜨겁고 가슴은 단단하고 이목구비는 그렇게 가깝고도 아름다웠다.서다인은 넋을 잃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눌려서 그녀는 도덕과 감정에 대해 더 많은 문제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그녀의 의식은 지배당했고 부끄러움과 긴장 심지어 기대까지 했다.남하준의 관능적인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고 쉰 목소리는 끝이 없을 정도로 메마르고, 그녀의 부드러운 앵두 같은 입술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남자의 얇은 입술이 가까워질수록 서다인은 더욱 긴장하여 두 손으로 시트를 꼭 꼬집고 눈을 감았다.마음이 심란하면서도 남하준의 매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남하준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두 사람의 결혼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는 천박하게도 이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녀는 소중히 여겼다.만약 남하준만 개의치 않는다면, 그녀와 입맞춤하고 잠자리를 갖길 원한다면 그녀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남자의 넓은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고 손끝이 그녀의 귀밑머리에 들어가 옆머리에 걸려 머리를 고정해 그녀가 피할 수 없게 했다.서다인은 긴장하여 눈꺼풀이 떨리고 입술을 다스며 기대했다.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닿고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 판을 덮는 순간까지.전광석화처럼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부드러운 온도, 단 1초의 터치로 서다인의 심장은 이미 견딜 수 없이 뛰기 시작했지만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부서졌다.“하준 오빠, 자요?”남하준이 입술을 열고 깊게 키스하려 할 때 뜻밖에도 방해
서다인은 남하준을 등지고 잠든 척 손끝으로 키스한 입술을 남몰래 만지작거렸다.마음이 허전한 것이 이미 설렘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밤새도록 생각해도 남하준이 왜 자신에게 키스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단순 심란함일까? 아니면 욕정 발산일까?전자는 불가능하고 후자는 좀 억지였다. 남하준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고 또 몸에 상처까지 입은 상태였다.남하준은 더 이상 그녀의 몸에 손대지 않고 불을 끄고 침대 반대편에 누워 조용히 잠이 들었다.서다인은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이튿날 아침.노크 소리에 눈을 뜬 서다인은 희미하게 남하준의 뒷모습을 보았다.그가 문을 열었다.백하린이 아침 먹으라고 부르자 그가 따라 나갔다.잠이 다 깨버린 서다인은 느릿느릿 일어나 시무룩해서 씻고 양치질을 했다.그녀는 여느 때처럼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그녀가 계단 입구에 내려서자마자 그녀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그중에는 고모 남연희, 고모의 수양딸인 온가윤, 게다가 백하린과 그녀의 삼촌 백인호도 있었다.분위기는 화목해 보이지만 사실은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서다인은 총알받이가 되기 싫어 아침도 먹지 않고 대문 쪽으로 돌아섰다.그녀가 계단을 내려갈 때 남하준은 여광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녀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문을 나서는 순간, 그의 눈빛은 어두워지더니 문 입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그릇 속의 아침 식사가 순식간에 맛이 없어졌다.이 사람들은 모두 다친 남하준을 방문한다는 핑계로 여기에 있지만 사실은 모두 각자의 목적이 있었다.별장 뒤뜰.햇볕이 따스하여 화원의 구석구석에 쏟아졌다.서다인은 정자의 돌 탁자에 나른하게 엎드려 꽃이 만발한 정원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맡으며 봄바람의 부드러움을 느꼈다.배가 고프지만 모든 것이 평온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귓가에 갑자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침은 왜 안 먹어
서다인은 남자의 진심이 드러난 말에 충격을 받았다.그의 눈물은 연기가 아니었다.대체 어떤 감정이 이 점잖은 남자를 갑자기 눈물짓게 했을까?너무 가슴 깊이 사랑하는 고통 때문일까?서다인은 당황했지만 백인호의 미세한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진실한 감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의 심리를 추측했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백인호가 갑자기 그녀를 자기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서다인은 깜짝 놀라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놔요!”백인호는 그녀를 꼭 껴안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는 목이 잠긴 채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한테 왜 이래? 대체 왜? 기억을 잃기 전의 너도, 잃은 후의 너도 어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해?”남자는 천성적으로 여자보다 강하고 힘이 세서 서다인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그녀가 도망칠수록 남자는 그녀를 더 꽉 껴안고 심지어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만큼 세게 끌어안았다.그녀는 어깨가 짓밟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결국 그녀는 저항을 포기하고 허수아비처럼 서서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화를 냈다. “백 선생님, 계속 놓지 않으면 소리 지를 거예요.”“다인아, 사랑해. 정말 너무 많이 사랑해. 나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서다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남하준이랑 이혼해. 내가 너 꼭 행복하게 해줄게. 평생 목숨 걸고 사랑해줄게. 우리...”백인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강한 힘에 의해 심하게 당겨졌다.그는 중심을 잃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비틀거리며 땅에 주저앉았다.서다인도 이 강한 힘에 충격을 받아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하준이 어두운 얼굴로 그들 사이에 서 있었고,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고드름처럼 만물을 관통했다.백인호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엉덩이의 먼지를 툭툭 털며 은근히 노기를 띠었다. “난 그
이 말은 매서운 칼날이 되어 서다인의 마음을 후벼 팠다. 마치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묵직한 고통이 간간이 느껴졌다.그녀는 숨조차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못난 눈물이 눈에 가득 고였지만 그녀는 한사코 참았다. 남하준 때문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아 이를 갈았다.남하준과 백하린의 감정으로는 포옹 같은 친밀한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침대에서 키스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그녀가 계속 모른 척하고 신경 쓰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여전히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었다.남하준은 부인하지 않았다.당시 투신 소란을 피우던 백하린을 의사가 안아 주라고 해서 남하준은 인도적 차원에서 그녀를 안아줬을 뿐이다.감정과 상관없는 포옹은 부도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아내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백인호가 이렇게 얘기하니 성격이 변했다.남하준은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고 크게 소리쳤다.“백하린과 한 가족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어쩜 똑같네.”백인호는 흠칫 놀랐다.남하준은 그의 옷깃을 뿌리치고 돌아서서 서다인의 손목을 잡아당기고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서다인은 눈을 늘어뜨리고 별장으로 질질 끌려갔다. 남자의 힘이 너무 세서 손목에서 통증이 전해졌다.거실로 들어가니 백하린이 눈치도 없이 남하준에게 달려와 물었다.“하준 오빠, 방금 어디 갔었어요? 나 한참 찾았잖아요.”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손으로 남자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닿기도 전에 남자에 의해 밀쳐지고 말았다.강한 힘에 의해 밀려난 그녀는 뒤로 몇 발짝 물러서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모두 깜짝 놀라 부축해 주며 남하준의 무례함과 엉뚱한 화를 꾸짖었다.그러나 남하준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백하린은 쳐다보지도 않고 서다인을 단숨에 끌고 올라갔다.모두 남하준의 분노를 알아차렸다.걱정스러운 듯 서다인을 바라보니 야생 독수리에게 잡혀가는 병아리처럼 목숨이 위태로워 보였다.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세게 닫히고 문이 잠
서다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꾹꾹 참았지만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고 쓰라린 심장은 이따금 찢어지는 듯 아팠다.그녀는 더 이상 이 남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서다인은 울먹이며 소리쳤다.“남하준, 나쁜 놈. 이거 놔!”그녀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밀어냈다.이때 서다인은 남자의 어깨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여자의 발버둥 침을 힘으로 제어하면서 상처가 아팠지만 그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이미 심장의 통증이 온몸을 덮은 지 오래고 분노가 그의 눈을 가렸다.남하준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잡은 채 그녀를 두 걸음 뒤로 밀어 벽에다 그대로 눌렀다.등에 통증이 엄습해 오자 서다인은 깜짝 놀랐고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그녀에게 있어서 남하준은 키가 크고 강건하며 호랑이처럼 맹렬했다. 그 앞에서 서다인은 작고 연약하여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그녀는 무서웠고, 화가 났고, 무력했고, 어쩔 줄 몰라 납작한 입술로 울음을 터뜨렸다.남하준은 마음속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억누르고 냉담하고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아직 이혼하지 않은 이상 넌 남하준의 아내야. 감히 나를 배신하면 죽을 줄 알아.”서다인은 심장이 떨렸다. 두피가 저리고 등골이 오싹해 났고 눈물이 멈췄다.남자는 말을 이었다.“욕구를 채우려고 남자가 필요하다면 내 앞에서 청순한 척 그만해.”한 글자 한 글자 적나라한 모욕이 되어 서다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이 순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를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이 나쁜 놈. 이거 놔. 내가 아무리 남자가 고파도 절대 당신은 아니야. 나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다인의 입술이 막혔다.그녀의 몸은 벽에 세게 눌렸다.남자의 힘은 강했고 그녀의 발버둥 치는 두 손을 잡고 머리 위 벽에 세게 눌러 고정했다.그녀는 손목이 눌려 계속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남자는 그녀의 입술을 거칠고 거침없이 탐했다. 미친 듯이 키스하는 남자의 행동에
서다인은 남자에게 안겨 힘없이 흐느꼈다.그녀는 생각할수록 괴로워 두 손으로 남하준의 가슴을 밀었다. 제대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남자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문득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어깨를 보았다.흰 셔츠에 이미 피가 배어 나왔다.이 순간 그녀의 원망과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상처에 피가 났어요.”남하준은 자신의 상처를 방치한 채 그녀의 어깨를 안은 손을 놓지 않았고 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앞으로 그 자식이랑 멀리해.”어리둥절한 서다인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의아한 빛을 띠고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남하준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과 키스로 붉어진 입술을 바라보았다.순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서다인은 화가 나서 반박했다.“나도 멀리하고 싶어요. 근데 그 나쁜 인간이 당신처럼 나를 껴안고 놓지 않잖아요. 힘껏 발버둥 쳤는데도 벗어나지 못한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요?”이 말은 백인호와 남하준을 동시에 욕한 셈이다.남하준은 그녀를 살짝 풀어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그녀의 설명은 진위를 막론하고 무조건 믿기로 했다.남하준은 냉담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도와달라고 소리라도 쳐야지.”서다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씩씩거렸다.“그 인간은 뻔뻔해서 창피한 걸 모르겠지만 난 아니거든요? 온 가족이 달려 나와 그 자식이 나 안고 있는 거 보면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가 터지겠어요?”남하준은 침묵했다.서다인은 그의 곁을 지나 장롱 속으로 가서 약을 꺼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그런데 당신은 다짜고짜 내가 결혼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니 당신도 나쁜 놈이에요.”“그리고 또...”강제로 키스했다는 말이 서다인의 목구멍에 끼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고 결국 화난 듯 중얼거렸다.“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요!”“당신은 계속 백하린을 좋아하고 인연도 못 끊으면서 나와 이혼도 안 해주고.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은 무엇일까?여자 사진?남서연은 기분이 가라앉아 말했다.“나 먼저 돌아갈게요.”그러자 백건이 그녀에게 다가갔다.“나랑 같이 집에 가서 어른들께 상황을 설명해 드리자.”“안돼요.”남서연은 긴장감에 못 이겨 안절부절했다.“일단 아직은 안돼요. 내가 먼저 가서 가족들 생각을 알아보고 다시 결정해요.”“어떤 상황이든, 어떤 결과든, 나 혼자 감당할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서두르지 말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요. 내가 우리 가족들 설득하고 오빠는 오빠 가족들 설득해요. 네?”백건은 여전히 변수가 있을까 봐 걱정했다.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행동해 남서연을 놀라게 해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그래. 네 말대로 해.”남서연은 그가 덮은 앨범을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덤덤하게 물었다.“누구 사진이에요?”백건은 고개를 돌려 협탁을 보더니 마음이 찔려 말했다.“내 사진이야.”그건 백건이 전에 몰래 찍었던 남서연의 사진이었다.결혼 후에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가 한 모든 것들이 오랫동안 계획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어머니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그는 강력한 권한을 동원하여 인사팀을 통해 남서연의 면접을 합격시키고 그녀를 ND에 무사히 입사하게 했다.또 직권을 이용하여 남서연을 데리고 해외 출장을 갔다. 그 목적은 바로 남서연을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만든 다음 그 기회를 빌려 잠자리를 갖고 그녀를 임신시키는 것이었다.두 차례의 성관계에도 보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도 그녀를 임신시키기 위함이었다.그는 감히 남서연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남서연이 그를 비열하다고, 수단이 더럽다고, 파렴치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결혼하고 나서 다시 그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천천히 용서를 빌어야 했다.남서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백건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이 미끄러질까 봐 보호했다. 남서연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호하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서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초롱초롱한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백건을 바라보며 머리가 하얘졌다.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백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큰 유혹이었다.그녀가 당황하고 있을 때, 백건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왼쪽 무릎을 그녀 앞에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그녀는 소파에 붙으며 경악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뜨거운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는데 매우 절실해 보였다.“서연아, 나와 결혼해줘. 응?”‘지금 아이를 위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한 거야?’남서연은 아주 기뻤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괴롭고 불안했다.“두 집안 어른들 모두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너만 원한다면 그런 것들은 전부 내가 알아서 해.”남서연은 차마 배 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가족 모두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현실 생활에서 많은 부부가 선을 보고 결혼하니 먼저 결혼하고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결혼 후에 그녀가 잘 보인다면 백건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남서연은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감격에 겨워 붉어진 눈시울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어지러운 숨결로 소파에 앉더니 남서연을 덥석 품에 끌어안았다.남자의 동작은 절박했고 강렬한 포옹에 그녀는 몸이 아팠다.남서연은 그의 등 뒤에 두 손을 널어놓고 턱을 그의 어깨에 괴고는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다.귓가에 남자의 무거운 호흡과 함께 약간 울먹이는 쉰 목소리가 들렸다.“고마워. 서연아. 정말 고마워. 반드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될게.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최선을 다해서 네게 가장 행복한 미래를 줄게.”남서연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다만,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대해야 할까?아이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백건은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까?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슬픈 듯 중얼거렸다.“나 임신했어요.”백건은 심장이 움찔했고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거의 뛰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났다. 가슴의 흥분을 터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서연이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 나 아빠가 되는 거야? 서연이 아이의 아빠? 이거 지금 꿈 아니지?’그는 갑작스러운 행복을 애써 눌렀다.남서연은 그의 반응에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이 남자가 대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그녀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그녀처럼 망연자실할까?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남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책임지라고 찾아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에 오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나와 함께 가줘요.”백건은 무거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그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얼굴빛은 굳어졌고 말투는 엄숙했다.“뭐? 수술한다고?”남서연은 주눅이 들어 쳐다보며 말했다.“네. 혼전 임신은 안 돼요.”가족들이 만약 그녀가 혼전임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백건을 때려죽일 것이다.숨이 가빠진 백건은 두 손을 꼭 잡았고 엄숙한 말투에 약간의 온기를 더해 부드럽게 달랬다.“서연아, 아이는 포기할 수 없어. 내게 책임질 기회를 줄 수 없어? 나 좋은 아빠가 될게.”남서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백건을 바라보며 멍해졌다.그녀의 생각과 달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보다 더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아이의 존재가 그를 위험하게 만들 테니까.백건은 긴장된 듯 입술을 오므리고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나... 좋은 남편이 될 수도 있어.”남자는 주먹을 문지르며 가늘게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남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시주를 기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