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구지호를 바라보았다.“나 피곤해. 집에 가서 쉬고 싶어.”단호하게 말을 끝낸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구지호가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고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하경아, 여기까지 왔는데 내 체면 좀 세워주면 안 돼? 친구들한테 망신당하고 싶지 않거든.”그 순간, 윤하경의 머릿속에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출장으로 다른 도시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밤, 갑자기 구지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열이 난다며 자신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차를 몰아 두 시간 동안 달려왔지만 도착했을 때,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게 헌신하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오늘 이 상황도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대체 왜 이 남자를 좋아했던 걸까? 무슨 정신으로 이런 인간에게 마음을 줬던 걸까?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야 하나둘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더 이상 구지호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던 바로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그리고 윤하연이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고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구지호에게 향했다.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저기... 친구들이랑 놀다가 언니랑 지호 오빠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와봤어요.”윤하연은 이런 회식 자리에 완전히 스며들지 못한 상태라 그녀와 친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 자리에서도 그녀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이 윤하경과 구지호인 만큼, 그녀가 윤하경의 여동생이라는 말에 몇몇 사람이 자리를 내주었다.“아, 하경이 동생이구나! 이리 와서 앉아.”윤하연은 살짝 부끄러운 듯 미소 지으며 시
구지호는 주변을 살피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됐어. 너 먼저 돌아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하연이 한발 다가서더니 갑자기 발돋움해 그의 입술을 덮쳤다. 밤이라 조명이 어두웠지만 윤하경은 그 장면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처럼 화가 나지 않았고 그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스웠다.두 사람의 키스는 한참을 이어졌다. 거의 일 분이 넘도록 이어진 뒤에야 떨어졌고 구지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거친 숨이 섞여 있었다.“윤하연, 미쳤어? 이러지 마.”그러나 윤하연은 멈추지 않고 구지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애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맞아, 나 미쳤어. 오빠가 언니랑 약혼하면... 난 정말 오빠를 잃게 될까 봐 무서워.”그녀는 품 안에서 더욱 애처롭게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오빠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난 명분도 필요 없고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계속 오빠 곁에 있으면 언니가 화낼 거야. 그러니까... 난 그냥 오빠의 행복을 빌 거야.”말을 마치자, 그녀는 힘겹게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구지호가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조용히 비웃었다. 이 두 사람은 드라마를 찍지 않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이미 충분한 영상을 확보한 그녀는 더 이상 이 코미디를 볼 필요가 없어 그만 자리를 뜨려는 순간 발밑에서 바삭,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크게 난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용한 밤의 정원에서는 그마저도 선명하게 들렸다.순식간에 두 사람이 움찔했고 구지호는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윤하연을 밀어내며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누구야?”윤하경은 눈을 마주칠 새도 없이 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건 재미가 없었다. 이 정도 상황에서 바로 폭로해 버리는 건, 두 사람에게 너무 쉬운 벌일 테니까.윤하경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구지호도 본능적으로 불안
몇 걸음 채 가지 못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보니 구지호였다.윤하경은 짜증이 밀려오는 걸 꾹 참고 전화를 받았다.“하경아, 어디야?”그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듯 조심스러웠다.윤하경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술을 좀 마셨더니 속이 안 좋아서 먼저 나왔어. 너희끼리 잘 놀아.”구지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화난 거야?”윤하경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꾹 눌렀다.“아니. 내일 봐. 내일 두 집안이 약혼식 장소랑 일정 정하러 만나기로 했잖아?”그제야 구지호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조심히 들어가.”윤하경은 대꾸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제 시간이 꽤 늦어졌고 이 클럽은 비교적 한적한 곳에 있어 택시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어차피 금방 잡히지도 않을 것 같아,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고 밤바람이 불어 긴 머리를 살짝 휘날렸다. 그녀는 문득 강현우의 차가운 태도가 떠올랐고 그가 진해리를 대할 때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처럼 냉정하지 않았기에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답답해졌다.윤하경은 가방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바람이 강해 몇 번을 시도해도 제대로 붙지 않았다.그렇게 불을 붙이려 집중하고 있을 때, 쌩하고 갑자기 한 대의 차가 그녀의 바로 앞을 스치듯 빠르게 지나갔다.너무 가까워 조금만 더 움직였어도 부딪힐 뻔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휘청였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았다.익숙한 차였고 그녀는 말없이 차를 노려보았다. 차는 한순간 속도를 줄이더니,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바로 강현우였다.그는 심지어 창문조차 내리지 않았고 그녀가 있는 곳을 힐끗 한 번 바라보지도 않자 윤하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또 다른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조용히 내려간 창문 사이로, 날카로운 선이 돋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아까
강현우는‘약혼자’라는 단어를 강조하듯 또렷하게 발음했고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강 대표님, 뭘 말씀하고 싶은 거예요?”그는 비웃듯 짧게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꺼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으며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이곳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였지만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30평도 채 안 되는 이 공간에서,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강현우가 들어서자 방이 한층 더 좁아 보였다.“네 배짱이 꽤 크다고 말하고 싶어서.”그는 그녀를 벽에 몰아세우며 나직하게 말했다.“구지호랑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더니 정말 잘생긴 비주얼에 완벽한 얼굴선과 날렵한 턱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피부도 유난히 깨끗해서, 순간적으로 그가 무슨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을 쓰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그녀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강현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대답해.”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얼굴만 아니었으면 이런 무례함을 어느 여자가 참아 줬을까?그녀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질투하는 거예요?”그 말에 그의 얼굴이 한순간 싸늘해졌고 그녀의 턱을 놓으며 낮게 말했다.“너 진짜 웃긴다.”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난 더러워서 싫을 뿐이야.”속으로 눈을 굴리던 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듣기 좋은 게 한마디라도 있던가?하지만 그녀는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이 관계는 처음부터 계약 같은 것이었고 그가 자신에게 제공한 이익도 무시할 수 없었고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길을 갈 예정이기에 굳이 기분 상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이렇게 흥분할 필요 없잖아요. 어차피 우리 관계도 곧 끝날 거잖아요?”그녀는 일부러 천천히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구지호랑의 약혼식은 이 계
아마 세상에서 이보다 더 창피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딱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을 순간 생리통이 찾아왔다.원래도 생리 주기가 일정하지 않았던 그녀였고 게다가 올 때마다 심한 복통이 동반되었고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처음에 강현우는 그녀가 연기하는 줄 알았지만 이마를 짚어보는 순간,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왜 그래?”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몰아붙이던 남자가, 갑자기 완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윤하경은 몸을 웅크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마치 누군가 배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최소한 강현우 앞에서는 체면을 유지하고 싶어 힘겹게 정신을 부여잡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냥 가세요.”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처럼 약해 보였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들어 올렸다.혼란스러움에 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의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 이건 너무나도 어색한 분위기였다.그녀는 거의 옷을 다 벗은 상태였고 그도 그 사실을 알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러다 문득, 강현우도 지금의 상황을 인식했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어디 가는데요?”그녀는 힘겹게 팔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병원.”그는 단 한마디만 남긴 채, 그녀를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올랐다.“현우 씨, 저 정말 괜찮아요.”그녀는 뒷좌석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이런 걸로 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냥 조금만 쉬면 괜찮아져요. 병원까지 갈 필요 없다고요.”그러나 강현우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운전대를 잡고 가속페달을 밟았다.그녀는 그제야 이 남자는, 자기가 신경 쓰고 싶을 때만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결정하면 어떤 말도 듣지 않는다는 것까지.그렇게 차는 병원으로 향했고 결국 가까운 병원 앞에서
기억 속에서 항상 따뜻했던 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원수를 엄마라고 부르는 거니?”윤하경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아!”그리고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 병실 천장이 먼저 보였고 바로 옆에는 소지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하경아, 괜찮아? 무슨 꿈이라도 꿨어?”한동안 숨을 고르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윤하경은 이제야 꿈에서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여전히 답답했다.그녀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소지연은 병실 옆에 놓인 물병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 건네주며 말했다.“너한테 전화했는데 간호사가 받더라? 너 입원했다길래 바로 왔지.”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문득 떠올라, 조용히 말했다.“근데 나 병원에 입원한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소지연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근데 있잖아, 간호사 말로는 널 데려온 남자가 엄청 잘생겼다고 하던데? 근데 듣자 하니 구지호는 아닌 것 같고... 누구야?”그녀의 눈빛이 완전히 호기심 가득한 수다쟁이 모드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강한 그룹이랑 진행하던 계약은 어때? 언제 마무리돼?”소지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뭐야, 그렇게까지 숨길 일이야?”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거의 이번 달 말쯤이면 마무리될 거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고 소지연은 그녀를 흘긋 보며 입을 다물었다.화면을 확인한 윤하경은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구지호의 전화였지만 그녀는 짜증을 감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지호야, 무슨 일이야? 응, 알겠어. 금방 갈게. 데리러 올 필요 없어.”짧게 대화를 마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
“오늘 네가 주인공인 날이잖니. 네 동생이 아침부터 들떠서 준비했다니까. 언니한테 절대 누가 되면 안 된다고 하더라.”임수연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윤하경의 손을 잡았고 곧장 주미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하경이, 사돈께서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제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겠어요.”그녀의 말투는 다정했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치 진짜 친모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그러나 주미나는 그녀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주미나는 윤하경의 친엄마와 절친한 사이였기에 항상 임수연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서 대놓고 무안을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배려였다.윤하경은 임수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걸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고 부드럽지만 확실한 한마디를 덧붙였다.“우리 엄마랑 미나 아줌마는 아주 각별한 사이셨죠. 별말씀을요.”그녀는 일부러 ‘우리 엄마’라는 단어를 강조했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임수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경직되었고 억지로 유지하던 미소가 흔들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런 변화를 이미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그때, 구지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리고 그녀를 본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늘 그녀는 평소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도발적이고 세련된 분위기가 아닌, 단아하고 순수한 이미지여서 구지호는 속으로 만족감을 느꼈다.사실 그는 원래 순수하고 다루기 쉬운 여자를 좋아했다. 윤하연이 그의 곁에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하지만 윤하연과 윤하경을 비교하자면? 비교 자체가 무의미했다.윤하연은 윤하경과 비교하면 비주얼이 너무 평범했다. 윤하경이 오늘 이렇게 자신을 위해 스타일을 바꿨다는 사실에 구지호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그는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하경아, 오늘 정말 예쁘다.”그녀는 피하고 싶었지만 자연스럽게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결국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고마워.”그들의 모습에 주
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은 윤하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하연은 도발하듯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언니, 난 오후에 딱히 할 일도 없고. 아빠가 나더러 같이 가서 언니랑 형부랑 쇼핑 좀 하라고 하셨어. 설마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지?”윤하경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더니 눈에 가득한 질투심이, 마치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 선명하게 보였다.윤하경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방해된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왔네? 역시 얼굴 참 두껍다.”그녀는 한 치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고 가차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순간적으로, 윤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소처럼 순진한 척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 목이 막힌 듯 침묵했다. 윤하경은 손톱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고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뭐, 그래도 오고 싶으면 따라와. 괜히 정색할 필요 없잖아?”한편, 운전석에 앉은 구지호는 미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사실 그도 윤하연이 따라오는 게 거슬렸지만 윤하경이 태연하게 받아들인 이상 그가 딱히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결국 그는 말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차 안에서도 내내 윤하연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특히나 구지호가 운전하면서도 한 손으로 윤하경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걸 보자 그녀의 눈빛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하지만 윤하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있었고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구지호의 팔을 살며시 끼고 다정한 커플처럼 행동했고 뒤따라오는 윤하연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윤하경은 거울에 비친 반사된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이렇게까지 따라와서 이 꼴을 당하고 싶었나 보네.’오후 내내 쇼핑몰을 돌며 반지를 맞춘 뒤 윤하경은 일부러 지친 듯 구지호의 어깨에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호야, 나 너무 피곤해. 집에 가고 싶어.”구지호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윤하연에게 보냈다. 그녀가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오늘 밤 윤하경과 좀 더
“놔요.”윤하경은 화가 났다.방금 강현우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나도 너에겐 어른인데 나와 얘기할 때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지금은 윤수철이 집에 없으니 임수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기하지 않았다.“어른이라고요? 그럴 자격 있어요?”임수연은 말문이 막혔다.“너...”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뒤에서 윤수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임수연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난 그저 너와 얘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너의 아빠가 요즘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너 돈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부탁하지 마.”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수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원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수연의 손을 뿌리치며 매우 귀찮다는 듯이 닦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세요.”윤하경은 임수연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올라가려다가 또 고개를 돌려 윤수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빠, 시간이 급하니 제가 말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세요.”윤하경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도 곧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건 임수연에게 배운 것이다.이틀 후면 약혼식이다.방에 돌아온 윤하경은 주미나의 연락을 받았는데 옷과 액세서리를 보냈다고 했다.문자를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말이 없었다.구지호가 어떻든 지간에 주미나는 그녀를 아껴줬고 심지어 딸처럼 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약혼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윤하경은 주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주미나가 아무리 좋아도 구지호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주미나가 좋다고 해서 구지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녀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강현우의 앞에서 고결한 척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특히 그녀도 이런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한꺼번에 충분히 사는 게 좋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위험한 사람이기라 한 번 관계를 맺는 것에 그쳐야지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그녀도 이 감정에 빠질 수 있다.구지호는 물론 강현우도 좋은 인연은 아니다.그도 인정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니 이참에 돈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이 카드는 도로 넣으세요. 다른 것은 우리 다 계산 끝난 거로 해요.”강현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윤하경은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산 물건을 들고 일어섰다.“그럼 다른 일이 없다면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몸을 돌려 떠나갔다.유리 벽을 통해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는 기쁘든 슬프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때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현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추성운이 갑자기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아까 윤씨 가문의 아가씨를 본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강현우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잘못 봤어.”추성운은 오만방자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찌르며 말했다.“현우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까 분명히 윤하경 씨가 여기에 앉아있는 걸 봤어.”강현우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추성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윤하경 씨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 쯧쯧, 윤하경 씨를 구지호 이놈에게 주긴 너무 아까워. 구지호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잖아.”추성운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가볍게 대꾸하며 되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나는 어때?”강현우는 포크를 집은 손을 잠시 멈칫하
윤하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차가 약국 앞을 지나갈 때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옆에 잠깐 세워 주세요.”강현우가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그는 질문했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하이힐을 신고 차에서 내리던 윤하경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그녀는 차 문을 잡고 바로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정말 능청스러웠다. 아까는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지만 지금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고상한 척한다.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속았을 것이다.그녀는 콧웃음 치고 나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손에 비상 피임약이 한 통 들려있었다.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건 뭐야?”윤하경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현우 씨,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게 무엇인지도 몰라요?”항상 여자가 옆에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강현우가 이게 무슨 약인지 모른다고 윤하경은 믿지 않았다.“아니면 현우 씨는 제가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책임을 져달라고 찾아오길 바라세요?”윤하경은 약통에서 약 알을 꺼내고는 생수와 함께 먹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몇 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두 피임조치를 했지만 아까는 갑작스럽게 하다 보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 약이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약을 먹는 것이 나중에 수술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는 여자와 아이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강현우는 차를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음식을 주문한 후 윤하경은 심심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다.주문을 마친 후 강현우를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양복 주머니를 더듬어
그는 만족해하며 커다란 손으로 좌석 아래쪽을 만지자 곧게 세워져 있던 의자가 뒤로 졎혀졌다.윤하경은 갑작스럽게 애매한 자세로 강현우의 품에 안겨졌다.‘강현우는 너무 잘 생겼어.’아래로부터 위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윤하경은 결국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화가 나서 노려보았다.“현우 씨는 너무 매너 없는 거 아니에요?”강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매너? 있어.”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강현우가 다시 몸을 숙였다.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자 목젖이 드러났다.윤하경의 코끝에는 남자에게서 나는 공격성을 띤 차가운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짓이다.그녀가 처음으로 강현우와 엮일 때도 강현우는 거절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머뭇거리다가 반항하기도 귀찮아 아예 손을 뻗어 강현우의 목을 끌어안고 도발적으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강현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한 번 쳐다봤는데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은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다.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두 몸뚱이가 이 좁은 공간에서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한번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다행히 강현우가 사는 이곳이 단독 별장이고 지하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윤하경은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윤하경은 점점 정신을 차리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는데 뼈마디가 부서진 것처럼 시큰거리며 아파 났다.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그러나 이때 강현우는 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영성용 원피스 한 벌을 작은 사이즈로 주차장에 가져와.”그녀를 놓아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강현우는 벌써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변했
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나를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그가 방금 배신당한 것을 보고 그녀는 순순히 시동을 걸었다.어쨌든 조금 전에 그가 자신을 도운 적이 있으니 말이다.차가 차고를 벗어나자, 윤하경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에게 물었다.“어디 가요?”강현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별장으로.”지난번에 자신이 갔던 그 별장을 말한다고 생각한 윤하경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간 조용해져 두 사람이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차고에 도착해 차에 시동을 끈 그녀는 그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힐끗 돌아보았다.강현우는 이목구비가 훤칠했는데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매, 심지어 옆모습으로도 사춘기 소녀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그런 얼굴이었다.하지만 꾹 다문 입술은 지금 그가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강현우와 조금 동병상련인 것 같았다.물론 감정적으로만 말이다.그녀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으로 주먹을 살며시 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그에게 충고했다.“현우 씨, 사실 배신 당한 것도 그냥 그래요. 저도 약혼자에게 배신당했잖아요? 사실 조금만 참으면 다 지나갈 수 있어요...”강현우가 자신을 힐끗 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강현우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그 한 마디가 전혀 위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강현우에게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려던 순간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날 위로하는 거야?”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고 쳐요.”“헐!”강현우는 차갑게 웃으며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손을 들어 윤하경을 끌어당겼다. 윤하경이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었다.그녀의 이 차는 공간은 좁은 편은 아니었고 그녀의 체중도 가벼웠기에 강현우는 그녀를 쉽게 안아 매우 부끄러운 자세로 자
두 사람은 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실랑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진해리와 배지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윤하경은 담뱃재를 털고 나서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것을 구경했다.“무슨 말이야? 내가 강현우랑 결혼하는 걸 정말 보고 싶어?”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윤하경의 귀에 들려왔다.배지훈은 손을 들어 콧등을 살짝 눌렀다.“진해리, 그만 소란 피워.”“내가 소란을 피운다고?”진해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배지훈, 남자라면 지금 당장 아버지께 나와 결혼하겠다고 해.”윤하경은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말이지?’진해리는 곧 강현우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해리가 배지훈과 함께 강현우를 배신한 거란 말인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맞은 후 강현우가 자신을 끌고 간 것이 잘한 일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았던 그녀는 사실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시동을 거는 것은 너무 티가 나니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진해리는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배지훈, 꼭 이렇게 매몰차게 굴어야 해?”진해리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배지훈은 차에 기대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윤하경조차 그 무력감과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고 나서야 진해리에게 말했다.“진해리, 그만해,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 강현우는 좋은 사람이야. 너 강현우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거야.”진해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고개를 들어 애잔한 눈빛으로 배지훈을 바라보았다.“배지훈, 너를 만난 걸 정말 후회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밟고 걸어갔는데 뒷모습은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배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거의 다 타버려서야 바닥
윤하경의 무관심한 모습을 본 윤수철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윤하경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을 본 윤수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왜, 한빛 그룹이 완전히 끝나야 네가 행복할 것 같아?”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제 생각은 한결같아요. 한빛 그룹의 주식은 팔 수 없어요.”“흥,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이 주식을 반드시 팔 거야. 네가 한빛 그룹 주식을 팔고 싶지 않은 거라면 구씨 가문을 설득해서 나에게 투자하라고 해. 돈이 들어오면 주식을 파는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윤하경은 눈을 내리깔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찻물 온도가 딱 맞아 뜨겁지는 않았다.“고씨 가문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딸의 말을 들은 윤수철은 곧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당연히 다 이 집안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지.”‘집?’윤하경은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윤수철이 집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자신도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임수연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씨 가문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지만, 성남의 별장은 반드시 제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윤하연과 임수연은 우리 엄마의 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윤하은이 조그마한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어차피 부녀의 인연도 거의 사라졌다. 윤수철이 자신을 속이고 집을 윤하연에게 넘겼을 때 그는 딸을 잃었다.“왜 또 집 얘기를 해? 집이 그렇게 중요해?”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구씨 가문이 투자하고 내가 재기하면 그때 그 집보다 더 큰 집을 사줄게. 어때?”윤하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안 돼요! 아빠 말이 맞아요. 그 집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그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에요.”그녀는 벌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것 같아 보이자 종업원이 급히 부축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저기, 방금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윤 회장님이랑 온 회장님이 어느 룸에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종업원은 웃으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네, 윤 회장님은 308 룸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윤하경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윤수철이 있는 룸에 도착했다. 두 회장님은 그때 마침 차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수철의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온지우의 아버지는 비즈니스 업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닌 사람이라 깜짝 놀란 표정이 한순간 웃음으로 바뀌었다.“오랜만이야. 집에도 놀러 오지 않고. 어서 와서 앉아.”“시간 날 때 온지우랑 뵈러 가려고 했어요.”윤하경은 얌전하게 앉아 온성태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윤수철은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슨 일로 왔어?”윤수철은 표정이 어두웠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윤하경에게 직접 화내지 않았다.윤하경은 그 말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한빛 그룹 지분을 아저씨에게 팔려고 왔다면서요?”그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 윤수철은 순간 멍해졌다.온성태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에게 차를 따랐다.“우리 어른들 일인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윤수철은 아직도 어른들의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윤하경은 빙긋 웃었다.“정말 제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빠,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유산은 아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빛 그룹의 주식을 팔려는 거면 정말로 제가 결정할 일일 거예요.”지난날 한빛 그룹은 윤수철과 그녀의 엄마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했다.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겨진 유산 중 일부는 윤수철이 상속받았고, 다른 일부는 당연
“친구 찾으러 왔어요.”윤하경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경비원이 계속 막았다.“아가씨, 친구 이름이 뭐예요? 몇 호실로 예약하셨나요? 아니면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하세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렇게 많은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레스토랑인데 정보국이나 되는 듯했다.방금 온지우에게 몇 번 방인지 묻는 것을 잊었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엎친 데 덮친 격이다.어떻게 섞여 들어갈까 생각하며 눈을 든 그녀는 맞은편 주차장에서 크고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으니 남자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강현우였다.강현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한 번 훑어본 후, 눈길을 돌려 성큼성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윤하경은 쫓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무슨 일 있어?”강현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른 윤하경 앞에서 그의 큰 몸집이 더 듬직해 보였는데 두 사람의 몸매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미녀와 야수 같았다.윤하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강한 압박감이 덜었다.“저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예약을 안 했어요.”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그래서 저를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그러고는 또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충했다.“어제 아무 보상이나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현우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서로 빚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남자는 정말 조금도 말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작은 일도 도와주려 하지 않다니.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방금까지 윤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