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서 항상 따뜻했던 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원수를 엄마라고 부르는 거니?”윤하경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아!”그리고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 병실 천장이 먼저 보였고 바로 옆에는 소지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하경아, 괜찮아? 무슨 꿈이라도 꿨어?”한동안 숨을 고르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윤하경은 이제야 꿈에서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여전히 답답했다.그녀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소지연은 병실 옆에 놓인 물병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 건네주며 말했다.“너한테 전화했는데 간호사가 받더라? 너 입원했다길래 바로 왔지.”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문득 떠올라, 조용히 말했다.“근데 나 병원에 입원한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소지연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근데 있잖아, 간호사 말로는 널 데려온 남자가 엄청 잘생겼다고 하던데? 근데 듣자 하니 구지호는 아닌 것 같고... 누구야?”그녀의 눈빛이 완전히 호기심 가득한 수다쟁이 모드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강한 그룹이랑 진행하던 계약은 어때? 언제 마무리돼?”소지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뭐야, 그렇게까지 숨길 일이야?”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거의 이번 달 말쯤이면 마무리될 거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고 소지연은 그녀를 흘긋 보며 입을 다물었다.화면을 확인한 윤하경은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구지호의 전화였지만 그녀는 짜증을 감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지호야, 무슨 일이야? 응, 알겠어. 금방 갈게. 데리러 올 필요 없어.”짧게 대화를 마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
“오늘 네가 주인공인 날이잖니. 네 동생이 아침부터 들떠서 준비했다니까. 언니한테 절대 누가 되면 안 된다고 하더라.”임수연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윤하경의 손을 잡았고 곧장 주미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하경이, 사돈께서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제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겠어요.”그녀의 말투는 다정했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치 진짜 친모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그러나 주미나는 그녀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주미나는 윤하경의 친엄마와 절친한 사이였기에 항상 임수연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서 대놓고 무안을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배려였다.윤하경은 임수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걸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고 부드럽지만 확실한 한마디를 덧붙였다.“우리 엄마랑 미나 아줌마는 아주 각별한 사이셨죠. 별말씀을요.”그녀는 일부러 ‘우리 엄마’라는 단어를 강조했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임수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경직되었고 억지로 유지하던 미소가 흔들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런 변화를 이미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그때, 구지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리고 그녀를 본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늘 그녀는 평소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도발적이고 세련된 분위기가 아닌, 단아하고 순수한 이미지여서 구지호는 속으로 만족감을 느꼈다.사실 그는 원래 순수하고 다루기 쉬운 여자를 좋아했다. 윤하연이 그의 곁에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하지만 윤하연과 윤하경을 비교하자면? 비교 자체가 무의미했다.윤하연은 윤하경과 비교하면 비주얼이 너무 평범했다. 윤하경이 오늘 이렇게 자신을 위해 스타일을 바꿨다는 사실에 구지호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그는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하경아, 오늘 정말 예쁘다.”그녀는 피하고 싶었지만 자연스럽게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결국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고마워.”그들의 모습에 주
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은 윤하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하연은 도발하듯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언니, 난 오후에 딱히 할 일도 없고. 아빠가 나더러 같이 가서 언니랑 형부랑 쇼핑 좀 하라고 하셨어. 설마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지?”윤하경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더니 눈에 가득한 질투심이, 마치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 선명하게 보였다.윤하경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방해된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왔네? 역시 얼굴 참 두껍다.”그녀는 한 치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고 가차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순간적으로, 윤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소처럼 순진한 척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 목이 막힌 듯 침묵했다. 윤하경은 손톱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고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뭐, 그래도 오고 싶으면 따라와. 괜히 정색할 필요 없잖아?”한편, 운전석에 앉은 구지호는 미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사실 그도 윤하연이 따라오는 게 거슬렸지만 윤하경이 태연하게 받아들인 이상 그가 딱히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결국 그는 말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차 안에서도 내내 윤하연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특히나 구지호가 운전하면서도 한 손으로 윤하경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걸 보자 그녀의 눈빛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하지만 윤하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있었고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구지호의 팔을 살며시 끼고 다정한 커플처럼 행동했고 뒤따라오는 윤하연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윤하경은 거울에 비친 반사된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이렇게까지 따라와서 이 꼴을 당하고 싶었나 보네.’오후 내내 쇼핑몰을 돌며 반지를 맞춘 뒤 윤하경은 일부러 지친 듯 구지호의 어깨에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호야, 나 너무 피곤해. 집에 가고 싶어.”구지호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윤하연에게 보냈다. 그녀가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오늘 밤 윤하경과 좀 더
윤하경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늘 별일도 없고 해서, 지호가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요.”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미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윤하경은 구지호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주미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어젯밤에 회사 일이 좀 생겨서, 지호 아빠가 급히 불러서 야근하게 됐어. 그래서 아직 안 들어왔어.”그녀는 다정하게 덧붙였다.“잠깐 기다려 봐. 내가 지호한테 전화해 볼게.”‘야근? 어쩌면 침대 위에서 야근했겠지.’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지호가 회사 일로 바쁜데 굳이 방해할 필요 없어요.”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듯하며 자연스럽게 말했다.“그럼, 저 지호 방에서 기다려도 될까요?”사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구씨 저택에 자주 드나들어서 집 구조는 손바닥 보듯 익숙했다. 그렇기에 주미나도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렴. 방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윤하경은 능숙하게 구지호의 방문을 열었다. 이 방에 오는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전과 지금의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구지호가 윤하연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니 윤하경도 그들에게 체면 따위 남겨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가방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그러고는 주위를 살피다가 침대 맞은편 꽃병 위에 그것을 조용히 올려두었다.꽃병에는 꽃이 가득 들어 있어 그 안에 작은 물건 하나쯤 들어가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그녀가 막 휴대폰을 확인하며 침대에 기대었을 때, 구지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윤하경을 본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타이트한 원피스가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더욱 강조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구지호는 순간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윤하연이랑은 비교도 안 돼.’비록 윤하연은 그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외적인 매력에서
윤하경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거의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조금만 더 있었으면 구지호의 머리를 주먹으로 날려버릴 뻔했네.'사실, 구지호는 어릴 적만 해도 꽤 괜찮은 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그는 종종 그녀를 보호해 주곤 했었다.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그에게 오랫동안 헌신하며 살아왔다.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점점 낯선 사람처럼 변해갔다.예전에는, 구지호가 그녀를 보호하려고 앞장서서 싸웠던 모습도 있었는데 그때의 구지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그녀는 복도를 지나면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올 때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어느새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그녀는 피식 웃었다.“하늘도 변덕스럽지만 사람 마음도 그에 못지않게 변덕스럽지.”거실에 내려오니,주미나가 미리 준비한 과일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주미나는 환한 미소를 띠며윤하경을 다정하게 소파로 이끌었다.“하경아, 네가 마침 잘 왔어. 우리 오늘 예식장에서 입을 드레스를 맞추러 가려고 하는 데 같이 가자. 아까 미리 디자이너에게 연락해 놨어. 지호가 내려오면 바로 출발하자.”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오늘은 원래 별다른 일정이 없었지만 연기를 하는 김에 끝까지 제대로 해야 했다.그리고 드레스를 맞추는 것쯤은 그녀에게는 그저 쇼핑에 불과했다. 주미나가 부른 디자이너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고 명품 브랜드의 고급 맞춤 디자이너였으며 일반적으로 예약을 잡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하지만 구씨 가문은 패션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그와의 친분도 두터웠다.윤하경이 도착했을 때 디자이너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구 여사님. 다만 다른 손님이 갑자기 방문하셔서 우선 그쪽을 먼저 응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고는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제가 방금 특별한 커피를 받아놨는데요. 제 친구가 해외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겁니다.잠시만 기다리시는 동안, 커피 한잔하시겠어요?”이 디자이너는 오랫동안 상류
한선아도 주미나를 보자 환하게 웃었고 두 사람은 동갑내기라 그런지 몇 마디 나누더니 금세 수다에 빠졌다.주미나는 방금 얼굴에 스쳤던 불쾌감을 털어내고 디자이너에게 말했다.“괜찮아요, 다 아는 사이니까 잠깐 기다릴 수 있어요.”그러고는 윤하경과 구지호를 향해 말했다.“하경아, 너희 먼저 가서 원하는 스타일 좀 골라봐.”한선아는 주미나의 말을 듣고 윤하경을 흘깃 바라본 뒤,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축하해요. 이렇게 예쁜 며느리를 얻다니. 곧 약혼식 한다면서요?”주미나는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네, 맞아요. 초대장 보내려고 했었어요.”두 사람은 그렇게 웃으며 한쪽으로 가 커피를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윤하경은 그냥 돌아설 수도 없어 구지호에게 이끌려 옷을 고르러 갔다. 다행히 강현우는 언제나처럼 냉담한 태도를 유지한 채, 단 한 번도 윤하경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는 속으로 안도하며 조용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본래 몸매가 좋은 데다 피부도 하얀 편이라 어떤 옷을 입어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맞춘 듯했다.특히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으면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놓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구지호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넋이 나갔다. 윤하경의 몸매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평소와 다른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하경아, 이거 어때? 진짜 예쁘다.”구지호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윤하경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검은색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바로 뒤에서 강현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책을 들고 있었지만 시선은 분명 윤하경에게 닿아 있었다.늘 무표정하고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몇 번 함께 밤을 보낸 윤하경은 알고 있었다.그가 가장 격정적인 순간에도, 저 눈빛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는 걸.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했다.‘이 남자, 정말 이상하게 사람을 자극하네.’
“하경아, 네 작은 회사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취미로 하는 거잖아? 너무 애쓰지 말고. 안 되겠다 싶으면 나중에 지호랑 결혼하고 구성 그룹에서 자리 하나 마련하면 되지. 어차피 가족끼리 도와주면서 사는 거잖아.”주미나의 말이 들려왔지만 윤하경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구성 그룹에서 일할 일은 절대 없을 거란 걸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오늘은 차를 가져오지 않아 택시를 잡고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강현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던 순간,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고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놀라야 할 상황이었지만 익숙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강현우임을 알았다.그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침대 위로 눕혔지만 막상 사랑을 나누려 하자 갑자기 몸을 살짝 일으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강현우의 깊고 강렬한 눈빛에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왜 그렇게 봐요?”참다못한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가가 살짝 떨리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구지호랑 정말 약혼할 거야?”윤하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봤잖아요.”강현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고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그는 아무 말 없이 협탁 위에 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그는 그 너머로 윤하경을 바라보았다.“약혼하지 않는다면 얼마면 돼?”순간, 윤하경은 멍해졌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자, 강현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얼마면 돼? 아니면 원하는 조건을 말해 봐.”그의 말은 여전히 간결하고 직설적이었다. 윤하경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지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녀와 강현우는 그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을 뿐 원
윤하경은 침대에 앉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강현우 같은 사람은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자신을 쉽게 놓아버리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건 처음이겠지.그녀는 그냥 권력 있는 남자들이 흔히 가지는 소유욕이라 생각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택시를 잡으려고 길가로 걸어 나가던 중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화면을 내려다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가방끈이 점점 조여들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택시를 잡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휴일이라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었고 심지어 윤하연까지 집에 와 있었다.윤하경이 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서자, 윤수철이 먼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여자가 왜 그렇게 부산스럽게 구는 거야?”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이러다가 구씨 집안에 시집가서도 그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네가 버릇없다고 할 거야.”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버릇?”윤하경이 비웃듯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집안의‘버릇’이란 게 뭔데요? 남의 물건 훔치는 법이라도 가르쳐 주는 거예요?”윤수철의 얼굴이 굳었다.“윤하경! 아버지한테 그런 말투가 뭐야?”옆에 있던 임수연과 윤하연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차가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그럼, 아버지. 제발 좀 설명해 주세요.”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성남 별장이 왜 윤하연 명의로 바뀐 거죠?”“뭐?”윤수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고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임수연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말했다.“하경아, 집안의 재산 문제는 원래 아버지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잖니?”임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윤하경이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윤하경은 머릿속이 새하
“너 대체 우리 윤씨 가문을 온 경성의 웃음거리로 만들 셈이냐?”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손이 허공을 가르며 윤하경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익숙한 듯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고 대신 그녀의 손이 뻗어 윤하연을 거칠게 끌어당겼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크게 휘둘렀다. “아버지가 묻고 계셔. 넌 윤씨 가문이 경성의 화제가 되길 바라는 거야?” 윤하연은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 순간 충격에 얼어붙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윤수철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화를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말한 거야!” 그러나 윤하경은 콧방귀를 뀌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니 참 이상하네요? 집안이 창피해지는 게 싫다면 몸을 이렇게 만든 딸이 창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그에 대해 따지고 드는 저를 창피해하시는 거 보면 혹시라도 아빠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죠?”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윤수철의 얼굴을 훑었다. “확실히 검사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윤수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윤하경의 말에는 반박할 틈이 없었어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유 집사, 당장 이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유 집사가 황급히 나섰다. “하경 씨, 이제 그만 올라가서 쉬세요. 밤이 늦었잖아요.” 윤하경은 굳이 더 붙잡고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혀를 차며 뒤돌아서는 순간, 뭔가 미련이 남은 듯 되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싸워볼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유 집사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억지로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윤수철과 윤하연만 남았다. 윤하연은 뺨이 화끈거렸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윤수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 윤수철은 길게 숨을 내쉬며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이 일에 대해 누구든 밖에 나가 입을 놀리면 그땐 봐주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강압적이었고 잠시나마 ‘집안의 가장’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연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리고 다시 윤하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너는 따라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윤하경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기서 말하면 안 돼요? 한밤중에 굳이 서재까지 갈 필요 있나요? 내일 회사 출근해야 해서 피곤하거든요.” 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서재로 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고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서재 문을 열었더니 윤수철은 이미 걸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둑한 조명 아래서 더욱 깊어진 주름과 어두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하경은 별로 개의치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고 강현우와의 일로 지친 그녀는 다시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빠, 무슨 이야기든 빨리 해요. 저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그녀가 말하는 태도에 윤수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하연이가 오늘 이런 꼴을 당한 거, 너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저녁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발짝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하연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저도 궁금하네요. 아까 그녀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 모든 건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다’라고 하더라고요.”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끝에 묻어나는 차가운 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 “아빠, 저한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녀의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 역시 윤하연이 어리석고 경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윤하경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며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일부러 하품을 하곤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한밤중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사람이 자야 살지.” 갓 잠에서 깬 듯한 살짝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며 거실을 본 순간, 윤하경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유 집사와 다른 가정부들도 다 깨서 거실에 모여 있었고 윤수철 역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서는 완전히 망가진 윤하연 있었다. 옷은 찢겨 제대로 몸을 가리지도 못했고 여기저기 남은 상처들이 말해주듯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만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강현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걸어 내려가며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데 대체 무슨 꼴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담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가 윤하연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힘없이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윤하경... 너지? 이거 다 네가 한 짓이지?” 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또 시치미 떼네!” 윤하연은 미칠 듯이 화가 나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릴수록, 윤하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거 전부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어!” 그 말에 윤하경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슬쩍 윤수철 쪽을 힐끔 보며 코끝을 찡긋했다. “하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거야 알지만... 네가 겪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다고 나한테 함부로 원망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그녀의 연기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남자는 목을 곧추세우며 끝까지 버텼다. “전부 증거가 있어요. 당신이 보낸 계좌 이체 내역도 있고 문자도 남아 있다고.” 그 말에 윤하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강현우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우지원이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냉소를 머금으며 강현우에게 폰을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보세요. 이게 윤하연 씨가 보낸 메시지입니다.” 윤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삭제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들켜버렸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강현우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대표님, 저... 저를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뭐든 다 할게요. 원하시는 대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문득 비교했다. ‘똑같이 윤씨 집안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클까? 윤하경이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모습조차 매혹적이었는데...’그러다 불현듯 윤하경이 지난번 침대 위에서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야말로 유혹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하연의 울음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윤하연은 강현우의 반응을 보고 그가 넘어왔다고 착각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맞아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말을 듣자 강현우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묶여 있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씨 가문에서 이미 돈도 지불했으니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우리가 윤하경 씨를 찾아서...” 짝! 우지원이 손을 들어 그중 한 남자의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이전에도 윤하연이 밤마다 몰래 남자를 만났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표정이 어두워진 그를 뒤로하고 윤하경은 가볍게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휴대폰을 확인하니 강현우가 보낸 새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아이고 배짱이 제법 커졌네.]‘???’윤하경은 황당한 얼굴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답장을 했다.그러자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내가 네 비서야? 어떤 쓰레기든 다 나한테 보내서 처리해달라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역시 강현우는 머리가 비상했고 어떤 일이든 다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후, 침대에 앉아 차분히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굳이 제 체면을 봐서 살살해줄 필요는 없어요.]이번엔 정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젯밤 그녀를 끔찍한 일에 말려들게 하려 했던 윤하연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어떻게 응징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스스로 구지호의 행방을 물으러 온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강현우를 이용하면 확실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정말 일거양득이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주 독하네.]메시지 뒤에 덧붙은 웃는 이모티콘이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꽤 흥미롭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곧 방 안을 가득 메운 신음이 그의 기분을 흐트러뜨렸다.“대표님! 제발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윤하연이 잔뜩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그녀는 처음엔 구지호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납치당해 끌려오더니 눈앞엔 피투성이가 된 구지호가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문 앞에 서 있던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켜서지 않았다.강현우는 윤하연이 너무 시끄
“정신이 나갔으면 정신병원에 가.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구지호가 어디 갔는지 나한테 묻지 마. 난 몰라.” 윤하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윤하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분명히 네가 먼저 그 얘길 꺼냈잖아! 너 분명히 알고 있지? 어젯밤 너 또 지호 오빠랑 있었던 거 아니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씹고 있는데 네가 꾸민 짓이지?” 윤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진짜 대단하다. 남을 의심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알고 있어. 궁금해?” 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다그쳤다. “장난치지 말고 당장 말해! 지호 오빠 어디 있어?!”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 근데 말이야. 내가 굳이 네가 원하는 걸 그냥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느릿한 말투가 윤하연을 더욱 열받게 했다. “그럼 뭘 원해?” 윤하경은 손톱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뭘 받을까 고민 중인데... 네가 무릎 꿇고 정중히 부탁하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윤하경! 적당히 해!” 윤하연이 소리쳤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무릎 꿇으라고 했잖아. 싫으면 말고.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내 노트북값부터 보내. 총 600만 원. 계좌 여기야.” 그녀는 계좌 번호를 보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 윤하연은 치를 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조건이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지호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건데?” 윤하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너한테 받을 만한 게 뭐가 있겠어. 네 물건은 죄다 더러워서 필요 없고.”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됐어, 그래도 한집에 사는 정이 있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어젯밤 지호 오빠가
윤하경은 윤하연을 비웃듯이 쳐다봤다. 역시 상대가 악랄하게 나오면 그에 맞서야 속이 풀리는 법이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유 집사에게 간단한 반찬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도 거실로 내려왔고 윤하경의 독이 잔뜩 서린 눈빛을 보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윤하경, 내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너 절대 가만 안 둬. 기다려 봐.”말투만 보면 마치 지금까진 자신이 참아준 것처럼 들렸다.윤하경은 가볍게 눈을 굴리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녀가 반응조차 하지 않자, 윤하연은 발을 쾅 내디디며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녀가 나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더 서둘러. 여긴 상황이 바뀌었어.]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유 집사가 음식을 가져왔다.“하경 씨, 식사하세요.”“고마워요.”윤하경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사실 아침에 강현우의 집에서 뭘 좀 먹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또 이상하게 굴어서 제대로 식사할 기회를 놓쳤다.게다가 어젯밤의 ‘운동’에 이어 아침부터 긴장과 감정 소모가 심했으니 속이 비어 있는 게 당연했다.유 집사는 그녀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경 씨, 방금 전에 하신 일... 혹시라도 회장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요?”“아시면 뭐요?”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유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알기에 그 따뜻한 마음은 감사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착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매번 참고 넘어갔다면 지금쯤 그녀의 존재조차 지워졌을 것이다.“그게 아니라, 이따가 하연 씨가 이 일을 회장님께 말하면... 회장님이 또 하경 씨를 나무라실까 봐요.”“그럴 여유가 있을까요?”윤하경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며
윤하경이 윤하연의 방에 도착했을 때, 윤하연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마도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온갖 난리를 치느라 지쳤는지, 침대 위에서 돼지처럼 늘어져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을 지키다가, 손에 들고 있던 국을 그대로 윤하연의 침대 위로 쏟아버렸다.“아!”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뜨겁진 않지만 식은 국이라도 몸에 닿으면 충분히 따가운 법이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고통에 윤하연은 침대에서 벌떡 뛰쳐나왔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 윤하경이 창가에 서서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윤하경! 너 미쳤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거야?”윤하경은 윤하연이 평소 흘리는 눈물 연기를 그대로 따라 하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누가 보면 또 나한테 억울한 일 당한 줄 알겠네. 아버지가 우리 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오래 자면 배고플까 봐 직접 국까지 떠서 가져왔는데 아차! 내가 그만 손을 미끄러뜨렸지 뭐야. 실수야, 그런데 네가 왜 이렇게 날 오해하는 거야?”윤하경은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윤하연은 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몸이 따갑고 욱신거리는 고통도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윤하경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전날 있었던 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덤볐다가 오히려 윤하경에게 쉽게 제압당했다.윤하경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러 바닥에 깔아버렸다.“윤하경! 당장 놔! 너 죽여버릴 거야!”윤하연은 온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힘이 빠져버린 몸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피부가 얼얼하게 따가운 데다, 혹여나 얼굴에 흉터라도 남게 되면 인생이 망한다는 생각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반드시 윤하경을 없애야 했다.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뒤로 꺾어 고정한
“상처가 더 심해진 것 같네요.”“그렇지. 그래서 네가 책임져야지.”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에 네가 너무 날뛰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까진 안 됐을 거야.”윤하경은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꼭 그런 말만 골라서 하네, 진짜.’그녀는 어젯밤의 장면들을 일부러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는데 강현우가 한마디 꺼내는 순간 그 장면들이 우르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상처 제대로 안 처리돼서 그런 거예요. 제가 다시 치료해 드릴게요.”강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상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피부는 벌어져 있었고 붉게 부어오른 자국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방치한 흔적이 역력했고 예전부터 있던 흉터들까지 더해져 그의 등이 보는 사람조차 아찔할 정도였다.윤하경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뒤, 다시 붕대로 감아 마무리했다. 마치 습관처럼 마지막에 가슴팍에 리본을 묶었는데 그 커다란 가슴 근육 위에 작고 정성스러운 리본이 묘하게도 시선을 끌었다.강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귀찮은 기색이 스쳤지만 윤하경이 열심히 리본을 묶는 모습을 보고는 그 불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됐어요.”윤하경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강현우는 말없이 셔츠를 입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윤하경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복도를 걷던 중, 끝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비명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은 구지호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목소리가 문가 쪽에서 들려왔다.“마음이 쓰이면 말해. 네가 한마디 하면 내가 자비 좀 베풀 수도 있지.”고개를 돌린 윤하경은 문가에 기대 서 있는 강현우를 마주했다. 셔츠 단추를 다 채운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