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를 보고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강현우는 잠시 고개를 숙여 윤하경이 잡고 있는 옷소매를 보고는 잠깐 생각에 잠긴 뒤 진태호를 바라보았다.“진 대표님, 오랜만이에요.”진태호는 강현우가 윤하경을 도와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급히 일어나 강현우에게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저, 저 사실 태호랑 그냥 장난친 거예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장난이요?”강현우는 윤하경의 옷이 엉망이 되어 있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머리카락 하나도 흩어지지 않게 신경 쓰던 윤하경인데 지금은 완전히 엉망이었다.그는 한 번 더 눈썹을 치켜올리며 진태호를 돌아보았다.“장난이라면 계속 더 놀아볼까요?”진태호는 얼떨떨하게 말했다.“무슨 말씀을...”“진 대표님이 술 잘 마신다고 들었어요. 저는 아직 그 모습을 못 봤는데.”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마치 평범하게 대화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윤하경을 위해 확실히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진태호는 윤하경과 강현우를 번갈아 보며 그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강현우는 그 누구보다 차가운 사람으로 유명하다. 윤하경을 돕는 걸 보니 둘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게 확실해졌다.진태호는 오늘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며 속으로 후회했다.“강 대표님, 농담이죠? 그럼 앉아서 술 한잔하시죠.”강현우는 그를 한 번 쏘아보더니 아무 말 없이 눈길을 돌렸다. 진태호는 더 이상 말을 아끼고 입을 다물고 술병을 집어 들었다.윤하경은 오늘 진태호를 제대로 대접할 생각이었고 술도 꽤 센 걸 준비해 놓았다. 한 모금 마시면 충분히 고생할 만큼 강한 술이었다.그런데 강현우는 그저 진태호를 지켜만 보고 있었고 진태호는 결국 술을 한 병을 통째로 마셔버렸다.그리고 술병을 거꾸로 들면서 털더니 강현우에게 말했다.“강 대표님, 어떠세요?”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말 대단하네요.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 강현우는 말을 끝
그녀는 잠시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강현우는 그녀를 한 번 흘긋 보고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진태호한테 속셈을 다 들켰나?”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회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만난죠. 누가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겠어요.”윤하경은 그에게 살짝 다가가면서 한숨을 쉬었다.“현우 씨, 저 지금 먹고살기도 힘든데 밥이라도 한 끼 사 주세요.”강현우는 그녀를 흘긋 보며 눈에 재미있는 기색을 띠었다.“이제 깨달은 거야?”윤하경은 잠시 당황했다. 그녀는 똑똑했기에 강현우가 말하는 게 바로 전에 두 사람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라는 걸 바로 알았다.강현우가 그녀에게 관계를 지속하자고 했을 때 윤하경은 그것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걸 보니 여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윤하경은 결코 고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강현우와 함께하는 것이 그녀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그가 잘생기고 몸도 좋다는 점에서 윤하경은 그가 가진 매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그런데 당시 강현우가 진해리와 결혼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 상황에서 그의 애인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진태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윤하경은 더 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그리고 무엇보다 강현우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면 그가 만약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강현우는 절대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그녀는 그가 자신을 데리고 진태호가 있는 자리에도 갔던 이유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강현우의 차에 타고 있었다.윤하경은 코를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그럼 현우 씨가 말한 건 아직 유효한 거죠?”직접적으로 물어보자 강현우는 그녀를 슬쩍 쳐다보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윤하경은 그가 무슨 뜻인지를 확실히 알
윤하경은 구지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갑자기 오늘 유 집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윤하연이 구지호때문에 강제로 유산했고 그날 밤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는 얘기였다.윤하경은 입술을 굳게 물고 소지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그 사람 얘기하지 마. 진짜 구역질 나서 토할 것 같아.”그 전에 윤하경은 구지호가 나쁜 사람이라 해도 결국 그저 바람둥이 부유한 이른바 재벌 2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좀 쓰레기 같긴 했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다.하지만 지금 구지호가 저지른 일은 정말로 혐오스러웠다.그리고 윤하연 역시 착한 사람은 아니다.어쨌든 이제 회사 문제는 해결됐고 그녀도 이제 아버지와 마음 아픈 윤하연을 봐야 할 때였다.소지연과의 전화를 끊고 윤하경은 운전기사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집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집 대문이 꽉 닫혀 있는 걸 보고 집이 차갑고 쓸쓸한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미소를 띠며 차에서 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유 집사가 윤하경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하경 씨, 돌아오셨군요. 밥은 드셨나요?”유 집사는 진심으로 그녀가 밥을 먹었는지 걱정했다.그러자 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직 안 먹었어요.”윤하경은 실제로 진태호와의 일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확실히 배가 고팠다.그러자 유 집사는 재빨리 말했다.“그럼 제가 면을 좀 끓여드릴게요.”윤하경은 대답하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자 유 집사에게 물었다.“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죠?”유 집사는 잠시 위를 쳐다보고는 답했다.“방금 하연 씨가 대량 출혈이 있었어요. 임수연이 데리고 병원에 갔어요. 회장님은 지금 위층 서재에 계세요. 요즘은...”그때 위층에서 윤수철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돌아온 거야? 밖에서 죽은 줄 알았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보니 윤수철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집은 제 집이죠.
윤하경은 윤수철의 말을 듣고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할 말 없어요.”윤수철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항상 일이 꼬였기 때문에 윤하경은 더 이상 그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선 뒤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윤하연이 없으면 내일 다시 올게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윤수철은 윤하경의 태도에 불쾌해하며 금세 표정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문을 향해 나가려 했다.어차피 윤수철은 그녀에게 친절할 일도 드물었고 그가 친절한 척할 때면 항상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그 순간, 윤수철이 갑자기 그녀를 붙잡았다.“무슨 일 있었던 거야?”윤수철은 그녀의 찢어진 옷을 보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이 꼴이 뭐야? 밖에서 뭐 한 거냐고.”윤수철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고 윤하경은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윤씨 가문의 체면을 걱정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뒤돌아보니 자신이 입고 있던 옷 뒤쪽에 홑겹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윤하경은, 그제야 씩 웃으며 대답했다.“괴롭힘을 당했어요. 아빠가 대신 해결해 줄 건가요?”윤수철은 입술을 꽉 깨물며 물었다.“무슨 일이냐고?”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그냥 좀 불쾌한 일을 당했어요. 간신히 빠져나왔죠. 아빠가 대신 복수라도 해줄 건가요?”윤하경은 이미 그가 결코 자신을 돕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 말을 하면서 윤수철을 자극하고 싶었다.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너는 왜 항상 밖에서 그런 모습으로 다니냐? 그렇게 다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 책임질 수 없잖아.”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윤수철은 또 한 번 그녀의 웃음에 짜증을 내며 물었다.“왜 그렇게 웃어?”윤하경은 그 미소를 더 넓게 지으며 말했다.“그럼 아빠, 오늘 윤하연이 만약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때도 이렇게 생
윤수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앞으로 하경이 얘기는 꺼내지도 마.”유 집사는 윤수철의 말을 듣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하지만 하경 씨는 아직 밥도 안 드셨어요.”윤수철은 이를 악물며 유 집사가 만든 면을 차갑게 째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그냥 굶어 죽어도 상관없어.”그는 정말로 윤하경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냉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숨길 수 없었다.말을 마친 윤수철은 그대로 큰 소리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집 안을 울리며 그의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그대로 드러났다.유 집사는 그런 윤수철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고...”윤하경은 혼자 윤씨 저택을 빠져나왔다. 윤수철의 말은 여전히 그녀를 자극하며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들었다.차 안은 불편한 침묵만 가득했고 그 고요함이 갑자기 너무 불편해져서 윤하경은 결국 라디오를 켰다.창문을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고 그제야 그녀는 잠시나마 마음이 풀린 듯했다.집에 도착한 윤하경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아직 여덟 시까지 5시간이나 남았네.”잠시 생각에 잠긴 윤하경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팩도 했다.‘강현우는 괜찮은 사람이야. 계약도 해주고 나를 도와줬으니까 고마움을 표현해야지.’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윤하경은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만큼 그가 자신에게 준 도움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이 필요했다.저녁 7시, 윤하경은 정해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고 오늘은 외모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살짝 맑은 피부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베이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두었다.그녀가 강현우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강현우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윤하경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현우 씨, 저 오늘 늦지 않았어요.”강현우는 그가 시간에 민감하다는 걸 알기에 미리 집을 떠났고 도착했을 때 마침
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겉으로는 꽤 개방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동안 그녀가 관계를 맺었던 남자는 강현우가 유일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강현우와 함께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런 상황에서 그의 비아냥에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강현우는 그런 그녀에게 반론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윤하경을 가볍게 침대 위에 던졌고 윤하경은 그가 다가오는 모습에 불안함을 느끼며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강현우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그는 윤하경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윤하경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요?” 그녀가 물었지만 강현우는 대답 없이 침대 옆 탁자에서 계약서를 꺼내 윤하경 앞에 던졌다. 윤하경은 그 계약서를 집어 들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약서의 내용에 눈을 찡그리며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놀랐다. 계약서에는 강현우가 매달 그녀에게 지급할 금액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매달 지급...]윤하경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이런 계약서에 자존심이 상해 화가 났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울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 같은 여자는 더더욱 힘들다. 그런 현실에서 강현우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다. 게다가 강현우는 외모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원하는 남자였다. 구지호와의 과거 경험 덕분에 이제는 감정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계약서에 서명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자세히 봤어?”그는 담배를 피우며 윤하경을 바라봤다. 흰 연기가 입에서 빠져나오며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냉정해졌다. 계약서에 기뻐하는 표정은 없었지만 윤하경은 그가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웃었다.“현우 씨 성품
강현우는 잠시 뒤돌아보며 윤하경을 한 번 쳐다본 뒤 짧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그러고는 방문을 쾅 닫자 넓은 스위트룸에는 윤하경만 홀로 남게 되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방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리를 쥐어짜 봐도 도무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정말 이상한 사람이야.”윤하경은 속으로 한탄하더니 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계약서는 이미 서명했으니 강현우가 그것을 부인할 리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돈이 들어오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최근 회사 일과 별장 화재 사건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시간이 없었기에, 이제야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밤, 클럽 안에서.추성운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바라보았다.“강현우, 너 이게 뭐냐? 여기 와서 말도 없이 술만 마시고 있어?”그는 강현우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혹시 그 여자한테 차인 거야?”추성운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시간 전, 강현우가 자신에게 위치를 물어본 뒤, 금방 클럽에 도착했었지만 강현우는 클럽에 들어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추성운은 이런 강현우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한 시간 넘게 술만 마시고 있는 그를 보고 추성운은 답답함을 느껴 참다못해 물어봤다.강현우는 그제야 얼굴에 조금 표정을 드러내며 추성운을 찡그린 채 바라보았다.“닥쳐.”추성운은 그가 드디어 입을 열자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뭔 일인데? 나도 한때는 여자 많이 만났어.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해 줄게.”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러자 강현우는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은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추성운은 비웃으며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강현우를 향해 말했다.“그럼 뭐야? 요즘
윤하경이 깊이 잠들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확인한 윤하경은 익숙하지 않은 번호를 보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상대방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윤하경은 짜증이 나서 전화를 받으며 불친절하게 말했다.“여보세요, 누구세요? 지금 몇 시인데 이렇게 전화하세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전화기 너머에서 민진혁은 잠시 말없이 멈추고 겨우 입을 열었다.“하경 씨, 저는 민진혁입니다.”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톤을 바꾸며 대답했다.“아, 네. 무슨 일이에요?”“사실, 대표님이 술에 취해 혼자 계시는데 지금 혹시 오실 수 있으신가요?”윤하경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시계를 확인했는데 벌써 자정을 넘겨 두 시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오늘 강현우와 계약을 체결했으니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전화 너머로 친절하게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가겠습니다.”그렇게 윤하경은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강현우의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민진혁은 이미 강현우를 침실에 눕혀놓은 상태였다.윤하경은 침대에서 평온하게 자고 있는 강현우를 보고 민진혁에게 물었다.“그래서 제가 뭐 해야 하나요?”민진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한눈에 윤하경을 쳐다보며 말했다.“남은 건 하경 씨에게 맡길게요.”그러고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기회를 잘 잡으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말을 마친 민진혁은 급히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이제 윤하경과 잠든 강현우만 남았다. 조명이 어두운 방 안에서 윤하경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강현우의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물었다.“현우 씨, 물 좀 드릴까요?”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강현우의 아무런 반응도 없이 들리는 무거운 숨소리뿐이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아 손을 받치고 강현우를 지켜봤다.강현우는 술을 마셔도 잠만 자는 타입이라, 잠든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의 잘
방 안으로 들어온 건 바로 안현주였다.기세등등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훑어보며 비아냥댔다.“또 그 낯짝 두꺼운 친구 대신 고자질하러 온 거예요?”거칠고 모욕적인 말에 윤하경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말조심하세요.”“조심해야 할 건 그 여자죠. 당신 그 잘난 친구가 내 약혼자한테 기웃거리고 있는데, 내가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요?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당신네 쪽부터 조심시키세요.”윤하경은 이를 악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안현주 씨. 당신이 지금까지 한 일들, 전부 불법이라는 거 알고 있죠?”하지만 안현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그래서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요?”그 뻔뻔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걸 억누르며 윤하경이 낮게 말했다.“좋아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시죠.”그녀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안현주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붙들었다.“잠깐.”윤하경이 멈춰서서 돌아보는 순간, 안현주는 차가운 술을 윤하경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강현우를 등에 업었다고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요. 그 사람, 그냥 잠깐의 호기심으로 당신한테 관심 보인 거예요.”안현주의 눈빛엔 조롱과 경멸이 가득했다.“강현우 씨 맞선녀가 벌써 경성에 도착했단 얘기 못 들었나 보죠? 얼마 안 가서, 당신도 버려지겠네요. 쓰레기처럼.”윤하경의 온몸은 술로 흠뻑 젖었다. 머리부터 가슴까지 흐르는 액체가 그녀의 자존심까지도 타고 흘러내렸다.모욕감에 치를 떨며 반격하려는 찰나, 그녀의 뒤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다가왔다.안현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고 목소리가 엉겼다.“강...”그 순간,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현우가 등장했다.“말은 잘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더듬어요?”윤하경이 놀란 듯 뒤돌자,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 시야에 들어왔다.안현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식은땀을 흘렸다.‘혹시... 내가 한 말 전부 들은 건가?'그녀는 다급히 태세
우지원은 그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윤하경은 그의 표정을 보고 단박에 알아챘다.‘또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있구나.’“유호천 씨 찾으러 왔어요. 어디 있는지 안내해 줘요.”우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분... 왜 찾으시려는 건가요? 비록 우리 대표님의 사촌이긴 해도 대표님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헛소리 그만해요.”윤하경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강현우는 그렇게 과묵한데, 왜 이런 애를 부하로 두는 건지...'.“우지원 씨. 저번에 한밤중에 저 불러내 놓고 빚졌다고 했던 거 기억하죠? 그런데 지금 이 정도도 못 도와주겠다는 건가요?”우지원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그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슬쩍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 문자를 보냈다.윤하경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그를 따라갔다.‘헤븐'의 어두운 복도는 여전히 불길했지만 윤하경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우지원은 한 룸 앞에서 멈춰 섰다.“오늘 그분, 기분이 별로라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어요. 정말 들어가실 건가요?”“됐고, 그만 가요.”더는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아 윤하경은 단숨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어두운 조명 속, 술병과 담배꽁초가 널브러진 가운데 유호천이 홀로 앉아 있었다.그는 마치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손에 쥔 술병을 그대로 던졌다.그 술병은 정확히 윤하경을 향해 날아왔고 뒤따라 들어오던 우지원이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우지원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윤하경이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대표님이 날 어떻게 벌을 줄지 상상도 안 가네.’“여자분한테 이렇게 대하는 게 말이 됩니까?”유호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윤하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아, 윤하경
단 두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의사는 두 차례나 위급 통지서를 내렸다.소지연은 너무 놀라 울음조차 잊은 채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다행히도, 의료진의 노력 끝에 김미애는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하지만 진료를 마치고 나온 의사는 차갑게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환자는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았어요. 흥분하면 절대 안 되는 상태였는데, 가족들은 그런 걸 몰랐던 건가요?”소지연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결국 벽에 기대앉은 채 중얼거렸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윤하경은 그런 지연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의사 선생님, 앞으로는 저희가 더 신중히 조심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환자분 치료에 최선을 다해 주세요. 치료비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의사는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병실로 돌아온 뒤, 소지연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지금 이렇게 자책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거야?”소지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아니면 어쩌라고. 안현주는 안씨 가문의 딸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그 말에 하경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소지연의 말대로, 안현주 앞에서 소지연은 아무 힘도 없는 존재였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소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만 가봐. 엄마 옆엔 내가 있을게.”윤하경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려던 순간, 소지연이 덧붙였다.“오늘만큼은 엄마랑 단둘이 있고 싶어.”그 말에 윤하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알겠어. 내일 다시 올게.”윤하경은 병원을 나와 차에 올라탔고 결국 참지 못하고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들었다.원래 오늘은 임수연의 일로 기분이 좋았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 기분도 사라졌다.그녀는 핸드폰을 켜 스크롤을 내리던 중, 문득 한 게시물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놀랍게도, 유호천이 게시물을 올린 것이다.사진 속 배경은 어느
윤하경은 입술을 꼭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 지연이는 정말 아무 잘못 없어요. 누구의 내연녀도 아니고요."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김미애를 진정시키려 했지만,김미애는 흥분한 채 윤하경을 밀쳐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가리켰다.“이걸 보고도 아직 그런 말이 나와? 이 사진들을 보라고!”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사진을 바라봤다.사진 속에는 소지연과 유호천이 마치 껴안고 있는 듯한 장면이 찍혀 있었다.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곧바로 소지연을 바라봤다.소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정말 그런 사이 아니야. 난 그냥 부축했을 뿐이야.”소지연의 말을 윤하경은 믿을 수 있었다.윤하경은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지연은 단순한 구석은 있었지만, 남자에게 쉽게 빠질 인물은 아니었다.더군다나 유호천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친구인 자신을 속일 이유도 없었다.과거 윤하경이 구지호와 사귀었을 때, 소지연은 옆에서 수없이 그녀에게 남자에게 너무 빠지지 말라고 나무랐었다.‘그런 지연이가 내연녀일 리 없어.'윤하경이 돌아서서 김미애를 차분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윤하경은 차분히 돌아서 김미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어머님, 이 사진들만 봐선 절대 어머님 말씀처럼 단정 지을 수 없어요. 지연이도 분명히 아니라잖아요. 따님의 말을 믿어주세요.”“남의 말에 너무 휘둘리시면 안 돼요.”소지연은 머리가 복잡해 어찌 설득해야 할지 몰랐고,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난 정말 그런 적 없어. 정말이에요, 엄마. 제발 믿어줘요.”하지만 김미애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확신에 찬 듯한 표정으로 딸과 윤하경을 문밖으로 밀어내더니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엄마, 이 문 좀 열어봐요!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소지연은 울먹이며 문을 두드렸고 윤하경은 그런 그녀를 껴안아 진정시켰다.“어머님 지금 너무 화가 나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눈물범벅이 된 소지연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임수연이 윤씨 집안에서 판을 치며 날뛴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이번엔 간신히 그녀의 약점을 쥐게 된 이상, 반드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다시는 기회를 잡지 못하도록, 완전히 짓눌러버려야 했다.그래서일까, 윤하경은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녀는 가방에서 두툼한 현금을 꺼내 유 집사에게 건넸다.“이건... 감시하는 사람에게 주는 수고비예요.”유 집사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하경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인 뒤, 높은 굽의 힐을 신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조금 전, 소지연과 통화할 때 분명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목소리 끝에 떨림이 있었고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오랜 친구였기에 윤하경은 소지연이 조금만 달라져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그래서 곧장 차를 몰았다.집에서 병원까지 보통 40분 거리였지만 30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소지연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무슨 일이야?”윤하경은 그녀 옆에 앉으며 물었다.“무슨 일 생긴 거야?”소지연은 훌쩍이며 말했다.“하경아... 나, 같이 집에 좀 가주라.”윤하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어머니... 무슨 일 생긴 거야?”그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소지연은 멀쩡해 보였고 집에 가자는 말을 하는 걸 보니 틀림없이 소지연의 엄마 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윤하경은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소지연을 부축해 병원을 나섰다.집으로 가는 내내 차는 속력을 높였고 도착했을 땐 이미 집 안이 아수라장이었다.온 집안이 엉망진창이었고 마치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처럼, 모든 물건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소지연의 어머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은 허공을 바라본 채, 생기라고는 없었다.“엄마...”그 말에 정신을 차린 소지연의 엄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봤다.소지연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곤,
“나가라고 했지 못 들었어?!”윤수철의 고함이 터지자, 그 기세에 눌려 극심한 기침까지 쏟아졌다.윤하연은 더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그가 ‘쾅’ 소리를 내며 서재 문을 닫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켰다.예전까지만 해도 그런 수모는 늘 윤하경의 몫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모든 게 자신에게 돌아오니 이토록 아플 줄은 몰랐다.입술을 꾹 깨문 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돌아서자마자 윤하경의 비웃음 섞인 시선과 마주쳤다.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다가와 콱 소리를 내고 물었다.“이제야 속이 시원해?”“내가 아빠한테 맞는 거 보니까 아주 기분 좋지?”윤하경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럼. 말 안 해도 알겠구먼.”윤하연은 이를 악물더니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혀 있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런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윤하경에게 외쳤다.“넌 진짜, 악독해.”그 말에 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었다.그러자 윤하연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뭐 하는 거야?”윤하경은 핸드폰을 흔들며 유쾌하게 웃었다.“악독해도, 너처럼 악마 같진 않거든. 내가 너라면 당장 방구석에 처박혀서 아무도 못 보게 숨었을 거야.”사실 윤하연은 외모 자체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단아하고 얌전한 이미지이지만 지금 이 몰골은 딱 사람 놀라게 할 만한 수준이었다.윤하연은 뺨을 붉히며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번엔 더는 덤벼들지 않았다.윤하경이랑 붙어봤자 이득은커녕, 손해만 늘어나고 괜히 윤수철의 눈 밖에 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결국 이를 갈며 굽 높은 구두 소리만 요란하게 남긴 채, 그녀는 위층을 내려갔다.윤하경은 그 뒷모습을 흘끗 보고 미소를 짓다가 다시 서재 쪽을 흘끔 바라봤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윤수철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잘 알고 있었다.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고 그 진실을 딸의 손에 들킨 상황. 그건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서 수치심과 자괴감까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그런
윤하경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땅에 쏟아진 닭고기 국수를 바라봤다. 잠시나마 감정의 파문이 스치듯 일었다.그녀는 짧게 숨을 고르며 지금 당장 윤하연의 뺨을 올려 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더니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사람 말 못 알아듣겠으면 다시 태어나서 인간 교육부터 받아? 이따위로 창피한 짓 하느니 그냥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윤하연은 이를 악물고 윤하경을 노려봤고 그 여유로운 표정이 더 얄밉고 괘씸했다.“윤하경, 시치미 떼지 마. 오늘 일, 네가 한 짓 맞잖아. 당장 말해. 우리 엄마 어디로 보냈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 바보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구나.’“그렇게 네 엄마 걱정하기 전에 먼저 네가 한빛 그룹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부터 해. 괜히 함께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까 그릇 부순 거, 가격 꽤 나가거든? 나중에 물어주고 나가야 할지도 몰라.”윤하경의 톤은 가볍고 속도는 느긋했지만 말끝마다 날이 서 있었다.그러자 윤하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냥... 아빠랑 엄마가 싸운 거잖아?” “왜 우리가 쫓겨나야 해?”윤하경은 그녀가 부르는 “아빠”라는 말에 어이없게 웃음이 났다. 자기보다 더 친근하게 부르니 참 볼만했다.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의 것까지 아끼게 된다’는 말. 윤수철이 임수연을 얼마나 감싸고 돌았는지, 그 감정이 고스란히 윤하연에게도 이어졌던 것이다.하지만 앞으로 임수연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물론, 윤하연까지 어떤 식으로 정리할지는 윤수철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가 너한테 설명해 줘야 할 의무는 없어.”그리고 고개를 돌려 유 집사를 불렀다. “다시 만들어 주세요. 앞으로 음식 버리는 사람한텐, 밥 안 해도 돼요.”그러곤 윤하연을 싸늘하게 쳐다봤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소파로 돌아가 잡지를 펼쳤다.윤하연은 그런 윤하경을 보며 이를 악물고 있었고 손이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윤하경은 다짐했다. 임수연과 윤수철, 두 사람 모두 자기가 저지른 죗값을 치르는 걸 똑똑히 지켜볼 거라고러야 한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수연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발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려 끌려왔다.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수연은 이제 윤하경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 정말, 정말 내가 함정에 빠진 거라니까요! 날 믿어줘요.”어머니를 여읜 사람처럼 목 놓아 우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소파에 앉아 있던 윤하경은 너무 시끄러운 그 울음에, 손가락으로 귀를 툭툭 쳤다. 듣기 싫을 정도로 참 피곤한 소리였다.그렇게 울부짖는 임수연을 향해, 윤수철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잠시 후, 약을 챙겨 올라갔던 유 집사가 내려왔다고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어른거렸다.그녀는 등을 곧게 펴고 임수연을 붙잡고 있던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회장님 말씀입니다. 임 여사님은 뒷마당 지하실에 가두라고 하셨습니다.”그러곤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한 명밖에 없네요?”경호원은 임수연을 힐끔 보며 말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땐, 이분 혼자였습니다.”유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처리하세요. 저는 회장님께 다시 보고드릴게요.”그녀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고 내려올 땐 아예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슬며시 윤하경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하경 씨,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 여자가 왜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진 거예요?”윤하경은 그녀를 힐끔 보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유 집사님, 아는 게 너무 많으면 목숨이 위험해질 텐데요?”유 집사는 머쓱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냥... 좀 신기해서요.”“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오늘 아직 끝난 게 아니니
“뭐라고요?”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눈을 깜빡였다.자기 바람피운 아내에게 화낼 생각은 안 하고 바람 들킨 걸 알려준 딸한테 성질을 낸다고?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아빠라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윤수철은 거친 숨을 내쉬며 현장을 박차고 나갔다.잠시 방 안에 혼자 남은 윤하경은 방바닥에 무릎 꿇고 엉엉 울고 있는 임수연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 그럼 전 이만 갈게요.”임수연은 거의 분노로 이성을 잃은 듯 옆에 있던 찻잔을 들어 윤하경을 향해 던졌다. “꺼져! 당장 꺼지라고!”더 이상 감정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의 눈에는 독기만이 가득했다. “너지? 너 아버지 데리고 온 거! 지난번 사진도 너지, 맞지?”윤하경은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줌마, 이 나이에 화내면 건강에 안 좋아요. 그러다 어디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벌써 조심하셔야죠.” 그녀의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조롱은 차갑기만 했다.임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 너 앞으로 뭘 더 하려는 거야?” 그 말 한마디에 그녀는 뼛속 깊이로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고 윤하경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다.하지만 윤하경은 더는 말을 섞을 생각이 없어 무심하게 발걸음을 돌리고 방을 나섰다.그녀와 윤수철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발코니 위에 숨어 있던 유한빈이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슬쩍 빠져나가려는 순간, 임수연이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챘다.“어딜 가?” “그, 그냥 문 좀 닫으려고...” 유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임수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지금 도망친다고 끝날 것 같아? 윤수철은 나뿐 아니라 너도 절대 가만 안 둘 거야.”유한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럼... 우리 그냥 도망칠까?” “도망?” 임수연은 비웃음을 흘렸다. “세상 끝까지 도망쳐도 쟤가 놓아줄 것 같아?” “해외로 가자고... 유럽 같은 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