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잠시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강현우는 그녀를 한 번 흘긋 보고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진태호한테 속셈을 다 들켰나?”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회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만난죠. 누가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겠어요.”윤하경은 그에게 살짝 다가가면서 한숨을 쉬었다.“현우 씨, 저 지금 먹고살기도 힘든데 밥이라도 한 끼 사 주세요.”강현우는 그녀를 흘긋 보며 눈에 재미있는 기색을 띠었다.“이제 깨달은 거야?”윤하경은 잠시 당황했다. 그녀는 똑똑했기에 강현우가 말하는 게 바로 전에 두 사람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라는 걸 바로 알았다.강현우가 그녀에게 관계를 지속하자고 했을 때 윤하경은 그것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걸 보니 여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윤하경은 결코 고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강현우와 함께하는 것이 그녀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그가 잘생기고 몸도 좋다는 점에서 윤하경은 그가 가진 매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그런데 당시 강현우가 진해리와 결혼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 상황에서 그의 애인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진태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윤하경은 더 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그리고 무엇보다 강현우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면 그가 만약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강현우는 절대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그녀는 그가 자신을 데리고 진태호가 있는 자리에도 갔던 이유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강현우의 차에 타고 있었다.윤하경은 코를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그럼 현우 씨가 말한 건 아직 유효한 거죠?”직접적으로 물어보자 강현우는 그녀를 슬쩍 쳐다보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윤하경은 그가 무슨 뜻인지를 확실히 알
윤하경은 구지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갑자기 오늘 유 집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윤하연이 구지호때문에 강제로 유산했고 그날 밤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는 얘기였다.윤하경은 입술을 굳게 물고 소지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그 사람 얘기하지 마. 진짜 구역질 나서 토할 것 같아.”그 전에 윤하경은 구지호가 나쁜 사람이라 해도 결국 그저 바람둥이 부유한 이른바 재벌 2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좀 쓰레기 같긴 했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다.하지만 지금 구지호가 저지른 일은 정말로 혐오스러웠다.그리고 윤하연 역시 착한 사람은 아니다.어쨌든 이제 회사 문제는 해결됐고 그녀도 이제 아버지와 마음 아픈 윤하연을 봐야 할 때였다.소지연과의 전화를 끊고 윤하경은 운전기사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집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집 대문이 꽉 닫혀 있는 걸 보고 집이 차갑고 쓸쓸한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미소를 띠며 차에서 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유 집사가 윤하경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하경 씨, 돌아오셨군요. 밥은 드셨나요?”유 집사는 진심으로 그녀가 밥을 먹었는지 걱정했다.그러자 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직 안 먹었어요.”윤하경은 실제로 진태호와의 일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확실히 배가 고팠다.그러자 유 집사는 재빨리 말했다.“그럼 제가 면을 좀 끓여드릴게요.”윤하경은 대답하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자 유 집사에게 물었다.“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죠?”유 집사는 잠시 위를 쳐다보고는 답했다.“방금 하연 씨가 대량 출혈이 있었어요. 임수연이 데리고 병원에 갔어요. 회장님은 지금 위층 서재에 계세요. 요즘은...”그때 위층에서 윤수철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돌아온 거야? 밖에서 죽은 줄 알았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보니 윤수철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집은 제 집이죠.
윤하경은 윤수철의 말을 듣고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할 말 없어요.”윤수철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항상 일이 꼬였기 때문에 윤하경은 더 이상 그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선 뒤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윤하연이 없으면 내일 다시 올게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윤수철은 윤하경의 태도에 불쾌해하며 금세 표정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문을 향해 나가려 했다.어차피 윤수철은 그녀에게 친절할 일도 드물었고 그가 친절한 척할 때면 항상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그 순간, 윤수철이 갑자기 그녀를 붙잡았다.“무슨 일 있었던 거야?”윤수철은 그녀의 찢어진 옷을 보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이 꼴이 뭐야? 밖에서 뭐 한 거냐고.”윤수철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고 윤하경은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윤씨 가문의 체면을 걱정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뒤돌아보니 자신이 입고 있던 옷 뒤쪽에 홑겹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윤하경은, 그제야 씩 웃으며 대답했다.“괴롭힘을 당했어요. 아빠가 대신 해결해 줄 건가요?”윤수철은 입술을 꽉 깨물며 물었다.“무슨 일이냐고?”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그냥 좀 불쾌한 일을 당했어요. 간신히 빠져나왔죠. 아빠가 대신 복수라도 해줄 건가요?”윤하경은 이미 그가 결코 자신을 돕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 말을 하면서 윤수철을 자극하고 싶었다.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너는 왜 항상 밖에서 그런 모습으로 다니냐? 그렇게 다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 책임질 수 없잖아.”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윤수철은 또 한 번 그녀의 웃음에 짜증을 내며 물었다.“왜 그렇게 웃어?”윤하경은 그 미소를 더 넓게 지으며 말했다.“그럼 아빠, 오늘 윤하연이 만약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때도 이렇게 생
윤수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앞으로 하경이 얘기는 꺼내지도 마.”유 집사는 윤수철의 말을 듣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하지만 하경 씨는 아직 밥도 안 드셨어요.”윤수철은 이를 악물며 유 집사가 만든 면을 차갑게 째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그냥 굶어 죽어도 상관없어.”그는 정말로 윤하경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냉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숨길 수 없었다.말을 마친 윤수철은 그대로 큰 소리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집 안을 울리며 그의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그대로 드러났다.유 집사는 그런 윤수철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고...”윤하경은 혼자 윤씨 저택을 빠져나왔다. 윤수철의 말은 여전히 그녀를 자극하며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들었다.차 안은 불편한 침묵만 가득했고 그 고요함이 갑자기 너무 불편해져서 윤하경은 결국 라디오를 켰다.창문을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고 그제야 그녀는 잠시나마 마음이 풀린 듯했다.집에 도착한 윤하경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아직 여덟 시까지 5시간이나 남았네.”잠시 생각에 잠긴 윤하경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팩도 했다.‘강현우는 괜찮은 사람이야. 계약도 해주고 나를 도와줬으니까 고마움을 표현해야지.’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윤하경은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만큼 그가 자신에게 준 도움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이 필요했다.저녁 7시, 윤하경은 정해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고 오늘은 외모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살짝 맑은 피부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베이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두었다.그녀가 강현우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강현우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윤하경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현우 씨, 저 오늘 늦지 않았어요.”강현우는 그가 시간에 민감하다는 걸 알기에 미리 집을 떠났고 도착했을 때 마침
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겉으로는 꽤 개방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동안 그녀가 관계를 맺었던 남자는 강현우가 유일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강현우와 함께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런 상황에서 그의 비아냥에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강현우는 그런 그녀에게 반론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윤하경을 가볍게 침대 위에 던졌고 윤하경은 그가 다가오는 모습에 불안함을 느끼며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강현우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그는 윤하경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윤하경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요?” 그녀가 물었지만 강현우는 대답 없이 침대 옆 탁자에서 계약서를 꺼내 윤하경 앞에 던졌다. 윤하경은 그 계약서를 집어 들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약서의 내용에 눈을 찡그리며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놀랐다. 계약서에는 강현우가 매달 그녀에게 지급할 금액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매달 지급...]윤하경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이런 계약서에 자존심이 상해 화가 났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울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 같은 여자는 더더욱 힘들다. 그런 현실에서 강현우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다. 게다가 강현우는 외모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원하는 남자였다. 구지호와의 과거 경험 덕분에 이제는 감정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계약서에 서명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자세히 봤어?”그는 담배를 피우며 윤하경을 바라봤다. 흰 연기가 입에서 빠져나오며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냉정해졌다. 계약서에 기뻐하는 표정은 없었지만 윤하경은 그가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웃었다.“현우 씨 성품
강현우는 잠시 뒤돌아보며 윤하경을 한 번 쳐다본 뒤 짧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그러고는 방문을 쾅 닫자 넓은 스위트룸에는 윤하경만 홀로 남게 되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방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리를 쥐어짜 봐도 도무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정말 이상한 사람이야.”윤하경은 속으로 한탄하더니 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계약서는 이미 서명했으니 강현우가 그것을 부인할 리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돈이 들어오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최근 회사 일과 별장 화재 사건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시간이 없었기에, 이제야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밤, 클럽 안에서.추성운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바라보았다.“강현우, 너 이게 뭐냐? 여기 와서 말도 없이 술만 마시고 있어?”그는 강현우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혹시 그 여자한테 차인 거야?”추성운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시간 전, 강현우가 자신에게 위치를 물어본 뒤, 금방 클럽에 도착했었지만 강현우는 클럽에 들어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추성운은 이런 강현우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한 시간 넘게 술만 마시고 있는 그를 보고 추성운은 답답함을 느껴 참다못해 물어봤다.강현우는 그제야 얼굴에 조금 표정을 드러내며 추성운을 찡그린 채 바라보았다.“닥쳐.”추성운은 그가 드디어 입을 열자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뭔 일인데? 나도 한때는 여자 많이 만났어.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해 줄게.”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러자 강현우는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은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추성운은 비웃으며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강현우를 향해 말했다.“그럼 뭐야? 요즘
윤하경이 깊이 잠들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확인한 윤하경은 익숙하지 않은 번호를 보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상대방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윤하경은 짜증이 나서 전화를 받으며 불친절하게 말했다.“여보세요, 누구세요? 지금 몇 시인데 이렇게 전화하세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전화기 너머에서 민진혁은 잠시 말없이 멈추고 겨우 입을 열었다.“하경 씨, 저는 민진혁입니다.”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톤을 바꾸며 대답했다.“아, 네. 무슨 일이에요?”“사실, 대표님이 술에 취해 혼자 계시는데 지금 혹시 오실 수 있으신가요?”윤하경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시계를 확인했는데 벌써 자정을 넘겨 두 시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오늘 강현우와 계약을 체결했으니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전화 너머로 친절하게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가겠습니다.”그렇게 윤하경은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강현우의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민진혁은 이미 강현우를 침실에 눕혀놓은 상태였다.윤하경은 침대에서 평온하게 자고 있는 강현우를 보고 민진혁에게 물었다.“그래서 제가 뭐 해야 하나요?”민진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한눈에 윤하경을 쳐다보며 말했다.“남은 건 하경 씨에게 맡길게요.”그러고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기회를 잘 잡으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말을 마친 민진혁은 급히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이제 윤하경과 잠든 강현우만 남았다. 조명이 어두운 방 안에서 윤하경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강현우의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물었다.“현우 씨, 물 좀 드릴까요?”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강현우의 아무런 반응도 없이 들리는 무거운 숨소리뿐이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아 손을 받치고 강현우를 지켜봤다.강현우는 술을 마셔도 잠만 자는 타입이라, 잠든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의 잘
강현우가 욕실에서 나오자, 윤하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계단 끝에서 부엌에서 나는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강현우는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고 부엌에서 윤하경이 뭔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다.어디서 구했는지,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꽤 전문적인 모습이었지만 행동은 초보자처럼 서툴렀다. 강현우는 미소를 띤 채 팔짱을 끼고 계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윤하경이 준비를 마친 뒤, 돌아보았을 때, 강현우가 계단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밥이 다 됐어요. 내려와서 드세요.”그녀는 만든 면을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엄마가 항상 술 마신 다음엔 뭔가 먹어야 속이 편해진다고 했어요.”강현우는 밥을 먹으러 다가가며 그릇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을 드러냈다.“정말 먹어도 되는 거 맞아?”윤하경은 내심 불쾌했지만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그녀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찾아봤고 그런 만큼 맛없을 리가 없다고 자신했다.강현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자리에 앉았고 음식을 한입 먹은 그는 그대로 멈췄다.윤하경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때요?”강현우는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겨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생각보다 괜찮네.”그 말을 들은 윤하경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만들었으니까.”윤하경은 주방에서 자기 그릇도 들고 오면서 한입 먹더니 소리를 질렀다.“아, 물! 물!”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급히 물을 찾았고 강현우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주었다.“자신 있다며?”강현우에게 잘 보이려고 처음 요리한 거였는데 실수하자, 윤하경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냥, 제가 좀 덜 깼나 봐요.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아요. 다시 만들어 올게요.”그리고 부엌으로 가려는데 강현우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렇게까
윤하경은 자료를 검토하던 중이었다.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마주한 건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윤수철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덮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누가 너더러 경찰에 신고하랬어?”윤수철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내가 묻잖아. 누가 너보고 멋대로 신고하래?”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웃었다.“제가 했어요.”“회사의 재무랑 인사를 제가 관리하고 있는데 장부에 이상이 있으면 당연히 신고해야죠. 뭐가 문제죠?”윤수철이 씩씩거리는 사이, 그녀는 말끔한 표정 그대로 침착하게 받아쳤다.그 태도에 윤수철은 더 화가 났고 손을 부르르 떨며 그녀를 가리켰다.“넌 지금 이 회사에 누가 주인인지 잊은 거야?”윤하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죠. 아버지요.”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하지만 이 회사를 위태롭게 만든 것도, 거의 파산 직전까지 끌고 간 것도 아버지셨죠. 이 회사가 아버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잖아요.”“아직도 임수연이랑 윤하연 두 사람한테 미련이 있으세요?”윤수철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찾아온 걸 보면 분명 그들 때문일 것이다.전에 회계 내역을 조사하려 했을 때도 막아섰던 윤수철의 태도를 떠올리면 그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건 명백했지만 그때는 그냥 눈 감고 넘기려 했던 거였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고조되자 사무실 밖 직원들까지 안을 힐끔힐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그러자 윤수철이 홱 돌아서며 유리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다 꺼져! 볼 일 없는 사람 다 나가!”직원들은 바람처럼 흩어졌다고 누구 하나 눈 마주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윤하경은 다시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윤수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고소, 취하해.”윤하경은 손바닥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죄송하지만 형법에 저촉되는 건
“진짜 미친놈이야.”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윤하경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우슬기가 다가오며 물었다.“대표님, 어땠어요?”“어떻긴. 그냥 돌아가자.”윤하경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오건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뒤틀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우슬기는 그래도 병실까지 들어갔으니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수확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윤하경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 있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따라나섰다.병실 안.오건우는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 눈빛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때,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윤하경 씨 일행은 떠났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살짝 눈치를 보며 망설였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오건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경호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가 나가면서... 대표님한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습니다.”“미친놈?”오건우는 그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흥... 재밌네.”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경호원은 속으로 욕을 먹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자기 보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퇴원 수속 해. 그리고 한빛 그룹 관련 자료 정리해서 가져와. 인사 변동 사항까지 전부.”“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윤 대표님, 그럼 오 대표님 쪽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몰라.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오산 그룹 자료 다시 정리해 줘. 혹시라도 틈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다른
오건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젯밤처럼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사건이 공개라도 됐다면 그저 단순한 상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정말 그렇게 됐다면 오 대표님 지금쯤 이 정도 상처로 끝났을 리 없죠.”윤하경의 말에 오건우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제야 그는 책을 내려놓고 윤하경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며 은은한 노란빛을 띠었다.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이 오히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만약 그 눈빛마저 이렇게 차갑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매력적이었을지도 모른다.윤하경은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 꿋꿋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고 오건우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정도로 말 잘하는 줄은 몰랐네요. 윤 대표님 같은 사람도 있는 걸 보니 한빛 그룹 딸들이 다 무능한 건 아닌가 봅니다.”윤하경은 순간 미간이 살짝 움직였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그 말에서 오건우가 윤하연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윤하연은 자신보다 훨씬 일찍부터 회사에서 일해 왔고 오건우는 한빛 그룹의 핵심 거래처이니 분명 그녀가 먼저 접촉했을 것이다.다만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그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윤하경은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이제, 한빛 그룹 부대표인 제가 대표님과의 협력에 대해 다시 이야기 나눠볼 수 있겠네요?”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녀를 한 번 훑었다.“그럼 하나 묻죠. 어젯밤, 왜 저를 거절한 겁니까?”“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윤하경은 눈을 깜빡였다.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어젯밤 그 상황이 떠올랐다.그가 말하는 건, 그녀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일이었다.입술을 다문 윤하경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일하러 온 거지 몸을 팔러 온 건 아니에요.”그는 윤하경의 붉은 입술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강현우 때문입니까?”그 말에 윤하경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슬기는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대표님.”그녀는 다가오며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선물 상자를 들어 보였다.“이 정도면 괜찮을까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오건우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르자, 입술을 살짝 눌렀다.“그 사람, 아예 우리 얼굴조차 보기 싫을 수도 있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병실 앞에 도착했지만 곧장 길이 막혔다.오건우의 경호원이 앞을 가로막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으로 제지했다.그 표정은 ‘낯선 사람 출입 금지’라는 말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듯했다.우슬기가 재빨리 다가가 공손하게 설명했다.“안녕하세요. 이분은 저희 한빛 그룹 부대표 윤하경 님이십니다. 오늘 오건우 대표님을 정중히 뵈러 온 자리입니다.”그러나 경호원은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합니다.”마치 누군가에게 돈이라도 떼인 듯한 싸늘한 표정이었지만 우슬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정말 잠시만이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대표님께 한번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어렵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고 윤하경은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이건 오건우가 직접 자기를 들이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이다.어젯밤 상황은 서로에게 꽤 민망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했다.그렇게 자존심 높은 사람이, 그 망가진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니 굳이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나를 보기만 해도 그 순간이 떠오를 테고 그러니 아예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겠지.’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윤하경은 이내 익숙한, 완벽하게 가다듬은 미소를 얼굴에 띠고 고개를 들었다.“저기요, 경호원님. 안에 계신 오건우 대표님께 꼭 전해주세요. 어젯밤 그 일, 절대밖에 말하지 않겠다고요.”말은 경호원에게 했지만 실제로는 병실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오건우가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젯밤 일
[하경아, 나 혼자 있고 싶어. 찾지 말아줘.]윤하경은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고 곧 짧게 한 줄만 답장을 보냈다.[조심해.]소지연의 어머니 유해는 당분간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상태였다.윤하경은 법적 가족이 아니라서 직접 처리할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눈빛에는 서서히 차가운 기운이 맺혔다.“안현주.”윤하경은 이를 살짝 깨물며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그 순간, 진동이 울리며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자, 화면엔 ‘우슬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윤 대표님, 오늘 아침에 오건우 대표님 만나시기로 하셨죠? 지금 병원으로 갈까요?”그제야 윤하경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병원에서 바로 봐.”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오건우가 있는 병원도 지금 있는 곳과는 달랐다.우슬기는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윤하경은 병원 건물 아래로 내려와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엉망이었던 어젯밤의 흔적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지만 눈에 띄게 빠진 장식품들이 공간을 어색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계단 끝에서 윤수철과 마주쳤다.윤수철은 막 잠에서 깬 듯했다. 평소 단정하게 손질하던 머리는 엉망이었고 그의 얼굴은 단 하루 만에 열 살은 늙은 듯 보였다.임수연의 실종이 꽤 큰 충격이었나 보다 생각하며 윤하경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저런 표정조차 본 적 없는데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화가 났다.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윤하경을 보고 윤수철은 곧장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제 네가 나 대신 오건우 대표 파티에 참석했다더라?”입을 열자마자 술과 담배 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그 냄새에 윤하경은 속이 울렁거렸다.“네.”그녀는 담담히 대답하고 곧장 발걸음을 돌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향했다.하지만 윤수철은 또다시 말을 걸었다.“내가 들은 바로는, 또 계약 망
윤하경은 소지연을 한 번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조용히 돌아섰다.지금의 소지연에게는 누군가의 위로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이힐 소리를 남기며 병실을 나가던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문까지 닫아주었다.바로 그 순간, 병실 안에서는 참을 수 없이 터지는 소지연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그 소리에 윤하경의 가슴도 미어졌고 어느새 눈물이 흘렀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고 조용히 병실 옆 의자에 앉아 소지연이 감정을 정리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윤하경은 조심스레 도시락 상자를 들고 병실 문을 열었다.소지연은 지쳐버린 듯 침대 위에 웅크려 누워 있었다. 움직임 하나 없이 굳은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느껴졌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다가가 도시락을 그녀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일단 뭐라도 먹자.”소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고 멍한 눈으로 벽만 바라봤다.윤하경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런 네 모습, 이모님이 보셨다면 얼마나 속상하셨겠어. 하늘에서도 마음 아프실 거야.”여전히 반응 없는 소지연을 보자 윤하경은 이를 꽉 물고 이불을 걷어 올렸다.그제야 소지연이 몸을 움찔하며 눈길을 그녀에게로 돌렸다.“지금 이 상태... 안현주가 바랐던 게 이거 아니야? 내가 너라면 똑똑히 살아남아 안현주한테 반드시 갚아 줄 거야. 이렇게 무너져 있으면 너를 아끼는 사람만 아프고 원수들은 웃고 난리야.”그 말에 소지연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윤하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그 순간, 소지연이 갑자기 침대 머리맡에 있던 과일칼을 움켜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맞아. 네 말이 맞아. 내가 죽여야 해. 우리 엄마를 죽인 그 여자, 내가 끝장낼 거야!”윤하경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그 말 그런 뜻 아니야!”하지만 지금의 소지연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날뛰며 몸부림쳤고 윤하경은 말한 걸 후회했다. 살아갈 힘을 주고 싶었던 말이, 오히려 그녀를 자극한
손에 깁스를 한 채, 소지연은 수술실 문 앞 한구석에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지연아, 괜찮아?”윤하경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소지연이 고개를 돌렸고 이내 벌떡 일어나 윤하경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하경아... 으흑... 하경아...”윤하경은 그녀가 안긴 채 울음을 터뜨리는 걸 느끼며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천천히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소지연은 한참을 흐느끼다가, 겨우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엔 말로 다 못 할 깊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어젯밤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고 소지연은 옆에서 조용히 어머니와 함께 잠이 들었다.그런데 한밤중,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고 소지연의 어머니가 위층에서 뛰어내린 것이다.그 소리에 잠에서 깬 지연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 그저 멍하니 창가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소지연은 창백한 얼굴로 윤하경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엄마가... 수술 들어간 지 벌써 두세 시간은 됐어. 근데 벌써 여러 번... 위독하다고...”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빛엔 극심한 두려움이 가득했다.“하경아, 나 무서워... 정말 무서워...”소지연에게 엄마는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둘이 의지하며 살아왔고 믿고 의지할 친척 하나 없이 지낸 세월이었다.그런 그녀가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윤하경뿐이었다.윤하경은 이를 꽉 물며 소지연을 껴안았다.“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모님, 분명 괜찮으실 거야.”하지만 마치 하늘이 장난이라도 치는 듯,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술실 문이 덜컥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왔고 마스크를 벗으며 무거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소지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의사를 향해 달려갔고 눈에는 마지막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의사 선생님, 엄마는요? 위험한 고비 넘긴 거죠?”의사는
하지만 지금 윤하경은 그 아침의 고요한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그저 멍하니 서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도 나가요?”강현우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어젯밤 꽤 피곤해 보이던데 운전할 힘도 없을까 봐.”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강현우는 늘 그렇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듣는 사람의 속을 뒤흔드는 말을 툭 내뱉는다.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이른 아침, 밤과 낮이 교차하는 이 시간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하늘 끝자락엔 금빛이 아련하게 스며들고 있었지만 윤하경의 마음속엔 오로지 하나, 병원에 빨리 도착해 소지연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소지연에게서 온 메시지는 단 세 글자였다.[빨리 와.]소지연은 일이 클수록 말을 아끼는 성격이다.이렇게 단답형으로 연락이 왔다는 건, 분명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불안한 마음으로 가슴이 자꾸 조여오는 가운데 옆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오건우 만나려는 거, 계약 때문이지?”윤하경은 순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네.”강현우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요즘 한빛 그룹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굳이 오건우한테 매달릴 필요까진 없지.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잖아.”그 말투는 무심한 듯 평온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뻔했다.그녀는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힘으로 해보고 싶어요.”강현우는 분명 비즈니스맨이다. 지금까지 그녀를 도와준 적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신세도 졌다.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무언가를 줄 땐, 언제나 대가를 바란다는 걸 잘 알고 있다.그리고 지난번 그가 내건 조건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지금 그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가 요구할 조건조차 감당할 자신이 없다.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그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고 그 진리를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심지어 점점 더 과해지고 있었다.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윤하경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강현우의 팔을 꼭 붙잡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그러더니 휴대전화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설마... 사모님?’윤하경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강현우를 바라봤다.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더 심한 장난을 칠까 봐 간신히 참았다.‘이 타이밍에 친엄마 전화를 받는다고?’강현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장난스럽게 그녀의 민감한 곳을 손끝으로 살살 건드렸다.“...”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강현우의 팔을 깨물었다.그렇게 해야만 입에서 새어 나올 뻔한 신음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강현우는 이 장면이 흥미로운 듯 감상하며 전화를 이어받았다.“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연회가 끝나면 소희 데리고 저녁 약속 잡으라고 했잖아?”“그런데 소희가 다쳐서 병원에 갔다던데, 무슨 일이야?”강현우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귀찮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저, 걔랑 안 친해요.”“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끊을게요.”사모님은 그의 재수 없는 태도에 바로 언성을 높였다.“네가 알아서 친해지려 해야지?”“너 30분 안에 당장 병원으로 가봐.”“시간 없어요.”강현우는 짧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고는 여전히 자기 팔을 물고 있는 윤하경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개띠야?”그제야 그녀는 힘을 빼고 그의 팔에서 입을 뗐다.그러고는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사모님이 급한 일로 찾으신 거면 가봐야 하시는 거 아니...”그러나 윤하경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픽 웃고는 몸을 숙였다.강현우의 몸에서만 나는 특유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너나 신경 써.”그 말은 마치 협박처럼 들리겠지만 윤하경은 그것이 협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