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슬기는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대표님.”그녀는 다가오며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선물 상자를 들어 보였다.“이 정도면 괜찮을까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오건우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르자, 입술을 살짝 눌렀다.“그 사람, 아예 우리 얼굴조차 보기 싫을 수도 있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병실 앞에 도착했지만 곧장 길이 막혔다.오건우의 경호원이 앞을 가로막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으로 제지했다.그 표정은 ‘낯선 사람 출입 금지’라는 말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듯했다.우슬기가 재빨리 다가가 공손하게 설명했다.“안녕하세요. 이분은 저희 한빛 그룹 부대표 윤하경 님이십니다. 오늘 오건우 대표님을 정중히 뵈러 온 자리입니다.”그러나 경호원은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합니다.”마치 누군가에게 돈이라도 떼인 듯한 싸늘한 표정이었지만 우슬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정말 잠시만이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대표님께 한번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어렵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고 윤하경은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이건 오건우가 직접 자기를 들이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이다.어젯밤 상황은 서로에게 꽤 민망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했다.그렇게 자존심 높은 사람이, 그 망가진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니 굳이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나를 보기만 해도 그 순간이 떠오를 테고 그러니 아예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겠지.’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윤하경은 이내 익숙한, 완벽하게 가다듬은 미소를 얼굴에 띠고 고개를 들었다.“저기요, 경호원님. 안에 계신 오건우 대표님께 꼭 전해주세요. 어젯밤 그 일, 절대밖에 말하지 않겠다고요.”말은 경호원에게 했지만 실제로는 병실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오건우가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젯밤 일
오건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젯밤처럼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사건이 공개라도 됐다면 그저 단순한 상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정말 그렇게 됐다면 오 대표님 지금쯤 이 정도 상처로 끝났을 리 없죠.”윤하경의 말에 오건우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제야 그는 책을 내려놓고 윤하경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며 은은한 노란빛을 띠었다.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이 오히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만약 그 눈빛마저 이렇게 차갑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매력적이었을지도 모른다.윤하경은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 꿋꿋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고 오건우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정도로 말 잘하는 줄은 몰랐네요. 윤 대표님 같은 사람도 있는 걸 보니 한빛 그룹 딸들이 다 무능한 건 아닌가 봅니다.”윤하경은 순간 미간이 살짝 움직였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그 말에서 오건우가 윤하연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윤하연은 자신보다 훨씬 일찍부터 회사에서 일해 왔고 오건우는 한빛 그룹의 핵심 거래처이니 분명 그녀가 먼저 접촉했을 것이다.다만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그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윤하경은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이제, 한빛 그룹 부대표인 제가 대표님과의 협력에 대해 다시 이야기 나눠볼 수 있겠네요?”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녀를 한 번 훑었다.“그럼 하나 묻죠. 어젯밤, 왜 저를 거절한 겁니까?”“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윤하경은 눈을 깜빡였다.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어젯밤 그 상황이 떠올랐다.그가 말하는 건, 그녀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일이었다.입술을 다문 윤하경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일하러 온 거지 몸을 팔러 온 건 아니에요.”그는 윤하경의 붉은 입술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강현우 때문입니까?”그 말에 윤하경은
“진짜 미친놈이야.”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윤하경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우슬기가 다가오며 물었다.“대표님, 어땠어요?”“어떻긴. 그냥 돌아가자.”윤하경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오건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뒤틀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우슬기는 그래도 병실까지 들어갔으니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수확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윤하경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 있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따라나섰다.병실 안.오건우는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 눈빛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때,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윤하경 씨 일행은 떠났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살짝 눈치를 보며 망설였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오건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경호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가 나가면서... 대표님한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습니다.”“미친놈?”오건우는 그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흥... 재밌네.”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경호원은 속으로 욕을 먹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자기 보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퇴원 수속 해. 그리고 한빛 그룹 관련 자료 정리해서 가져와. 인사 변동 사항까지 전부.”“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윤 대표님, 그럼 오 대표님 쪽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몰라.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오산 그룹 자료 다시 정리해 줘. 혹시라도 틈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다른
윤하경은 자료를 검토하던 중이었다.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마주한 건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윤수철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덮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누가 너더러 경찰에 신고하랬어?”윤수철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내가 묻잖아. 누가 너보고 멋대로 신고하래?”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웃었다.“제가 했어요.”“회사의 재무랑 인사를 제가 관리하고 있는데 장부에 이상이 있으면 당연히 신고해야죠. 뭐가 문제죠?”윤수철이 씩씩거리는 사이, 그녀는 말끔한 표정 그대로 침착하게 받아쳤다.그 태도에 윤수철은 더 화가 났고 손을 부르르 떨며 그녀를 가리켰다.“넌 지금 이 회사에 누가 주인인지 잊은 거야?”윤하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죠. 아버지요.”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하지만 이 회사를 위태롭게 만든 것도, 거의 파산 직전까지 끌고 간 것도 아버지셨죠. 이 회사가 아버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잖아요.”“아직도 임수연이랑 윤하연 두 사람한테 미련이 있으세요?”윤수철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찾아온 걸 보면 분명 그들 때문일 것이다.전에 회계 내역을 조사하려 했을 때도 막아섰던 윤수철의 태도를 떠올리면 그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건 명백했지만 그때는 그냥 눈 감고 넘기려 했던 거였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고조되자 사무실 밖 직원들까지 안을 힐끔힐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그러자 윤수철이 홱 돌아서며 유리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다 꺼져! 볼 일 없는 사람 다 나가!”직원들은 바람처럼 흩어졌다고 누구 하나 눈 마주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윤하경은 다시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윤수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고소, 취하해.”윤하경은 손바닥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죄송하지만 형법에 저촉되는 건
강현우는 그 말을 듣고 길게 찢어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그래요?”그는 오건우 맞은편에 앉으며 눈길을 들었다.“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오 대표님의 눈에 들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말투는 가볍고 무심했지만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시는 동작엔 은근한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대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짧은 시선으로 오건우를 훑어보자 오건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말이 나온 김에 얘기지만 그 사람... 강 대표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강현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그래요? 그럼 더 궁금해지네요.”그는 왼손 엄지에 낀 반지를 천천히 굴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오건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아직 무슨 관계도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공연히 얘기했다가 그 사람 이름에 누가 될 수도 있잖아요. 강 대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오 대표님, 생각 참 깊으시네요.”강현우는 눈을 좁히며 말을 받아쳤다.“그래서 오늘 이렇게 오신 건...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오건우는 그 말에 여유롭게 등을 소파에 기댔다.“들으니까 강 대표가 요즘 유성구 재개발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던데... 혹시 협력할 생각은 없습니까? 우리 둘이 경쟁자가 되면 서로에게 손해일 수도 있으니까요.”강현우의 눈에 살짝 농담 섞인 기색이 비쳤다.“제 기억이 맞다면 재개발 사업은 오 대표님의 전문 분야는 아닌 걸로 아는데요? 갑자기 관심이 생긴 이유라도?”“돈이 되는 일이라면 관심 가져야죠. 그렇지 않습니까?”오건우는 그를 향해 고요한 눈빛을 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고 그 안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강현우는 코웃음을 흘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시가 한 개를 집었다. 그러자 센스 있는 여자가 곧장 다가와 시가를 잘라주고 능숙하게 불까지 붙여주었다.그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눈썹을 한 번 들었다.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지만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조심
강현우는 시가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고 무심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쓱 바라봤다.“오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협력 못 할 이유도 없죠.”오건우처럼 상황 파악에 능한 사람이라면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항상 원칙만 따진다고 들었는데 강 대표님도 결국 뒤로 길을 열어주시는 날이 있긴 하네요.”“뭐, 말씀만 해주신다면야, 저는 당연히 환영이죠.”서로 말이 많을 필요 없는 사이라 강현우는 잔을 살짝 들며 웃었다.“그럼 미리 축하하죠.”오건우도 미소를 지으며 잔을 맞들었다.“나중에 윤하경 씨가 알게 되면 강 대표님이 본인을 위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고 기뻐하겠네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어둠이 스쳐 갔다.그 깊은 시선은 강현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강현우는 가만히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차 안에서 봤던 윤하경의 얼굴을 떠올라 조용히 말했다.“그 일에 내가 관련됐다는 건, 굳이 그녀가 알 필요 없어요.”오건우는 눈을 좁히며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강 대표님, 꽤 감성적인 면도 있으시군요.”강현우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에 누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죠.”오건우도 일어서며 짧게 응했다. 그리고 강현우가 등을 돌리는 순간, 슬쩍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최상층 스위트 룸.강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미간이 살짝 들렸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분위기부터가 유난히 짙었다.그때, 욕실 문 사이로 얼굴을 내민 민하경이 수줍은 눈빛으로 그를 불렀다.“강 대표님...”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조용히 손짓했다. “이리 와.”민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욕실 문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검은색 레이스 슬립 차림이었고 키 큰 몸매에 딱 붙는 그 옷은 절묘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민하경은 조용히 다가와
민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았고 눈엔 눈물까지 맺혀 있었으며 목소리는 애처로웠다.“저... 정말 몰라요. 강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이 반지도 그냥 예뻐서 샀을 뿐이에요. 그런 용도인지도 몰랐어요...”강현우는 반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그녀 얼굴로 옮겼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래? 뭐, 굳이 말하기 싫다면... 괜찮아. 말하게 만드는 방법은 많거든.”그는 손뼉을 칠 듯 손을 들었다.하지만 그 순간, 민하경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죽어버려!”그녀는 이성을 잃은 듯 그대로 강현우를 향해 달려들었고 하지만 그 순간 강현우는 한 발 옆으로 피하더니 힘 있게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퍽!민하경은 허공을 날아가듯 그대로 튕겨져 나가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강현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들어와.”그가 명령하자, 곧 우지원이 다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민하경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님.”강현우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제대로 혼내 줘. 누가 보낸 건지 입을 안 열면...”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낮고 무겁게 덧붙였다.“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우지원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강현우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에게 그 정도 암시는 충분했다.“네, 알겠습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들을 불러 민하경을 끌어냈다.“강현우... 너 같은 인간, 절대 가만 안 둬!”민하경은 이를 갈며 소리쳤고 우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입 막아.”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그제야 우지원은 강현우의 손에 들린 은색 반지를 힐끗 보며 혀를 찼다.“형님, 원수 진 사람 참 많으신 거 아시죠? 오늘은 운 좋게 살아남으신 겁니다. 전 오늘 밤이 형님의 로맨스인 줄 알았거든요.”그는 멋쩍게 웃었지만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 웃음은
그곳은 고급 사설 클럽, ‘빌리’였다.휴식과 오락이 결합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강현우의 ‘헤븐’이 회색 지대라면 이곳은 세상에 대놓고 고급스러움을 팔고 있었다.승마, 사격, 골프 등 없는 게 없고 규모도 엄청났다. 여기서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사람들뿐이었다.윤하경은 차를 세우고 막 내리려던 찰나, 핸드폰에 ‘돈줄’ 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어디야?]이 밝은 대낮에 강현우가 자길 찾다니.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솔직하게 답장을 보냈다.[빌리에 있어요. 오건우 대표가 계약 이야기하자고 불러서.]문자를 보낸 뒤로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넣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고객님, 예약하셨나요?”“아니요. 오건우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직원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를 시작했다.좌우로 복잡하게 꺾인 복도를 지나, 조용한 프라이빗 룸 앞에 멈췄다.윤하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엔 오건우가 VIP석에 앉아 트랙 너머 경마를 바라보고 있었다.차가운 분위기의 남자는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고 어제 감싸고 있던 붕대는 이미 사라졌으며 대신 이마에는 옅은 멍 자국만 남아 있었다.그걸 본 윤하경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어제 일부러 다친 척하고 자기한테 덮어씌우려던 거였던 건가?입술을 한 번 꾹 눌러 누르고 나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오 대표님.”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더니 반갑지도 무뚝뚝하지도 않게 말했다.“하경 씨, 또 보네요.” 그는 옆자리를 가리켰다.“앉으시죠.”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다가갔다.하지만 오건우가 가리킨 자리에는 앉지 않고 중간에 일부러 한 자리를 비워둔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왠지 모르게,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이 싫었다. 첫 만남도, 두 번째도 기분 나빴고 오늘 역시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오건우는 그녀가 그렇게 거리를 두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비웃듯 말했다.“설마 제가
강현우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시선을 돌려 강호석을 바라봤다.“할아버지, 둘째 형은 좀 단단히 가르치셔야 할 것 같네요.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강호석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출입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강현우는 한 발짝 멈춰서더니 고개를 다시 돌렸다.“그리고요, 할아버지. 앞으로 결혼으로 저를 협박하지 마세요. 제 허락 없이는, 아무리 여자를 제 침대에 집어넣는다 해도 전 똑같이 다시 내쫓을 겁니다.”그 말투는 존댓말이었지만 말 속의 단 한 마디도 상대를 존중하는 기색은 없었다.오히려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속을 뒤집는 칼날 같았다.강호석은 분노로 떨리는 손을 들어 강현우를 가리켰지만 강현우는 그 손끝조차 외면한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콜록, 콜록!”그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안쪽에서 강호석의 격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우는 걸음을 멈칫했지만 이내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강호석의 집을 빠져나오던 길, 멀리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어머니 한선아였다.한선아는 그를 보자마자 다급히 달려왔다.“너... 너 또 네 할아버지 화나게 한 거 아니지? 아까 하인들 말로는 강현석 돌아왔을 때 어찌나 화가 나 있던지... 너랑 연관돼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강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엄마랑은 상관없어요. 별일 없으면 엄마는 그냥 엄마 별장에 계세요. 본가엔 너무 자주 오지 마시고요.”“내가 이 집에 안 오면 누가 널 챙기냐?” 한선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겉으론 조용해 보여도, 이 집 안에 뭔 속셈 없는 사람이 있겠어? 내가 안 지켜보면 넌 그 인간들한테 뼈도 못 추려. 너희 아버지 때도 그랬고.”“됐어요.”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곧게 바라보았다.“더 하실 말씀 없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할 일 남았어요.”그 말에 한선아는 말문을 닫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강현우의 팔을 붙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말끝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명확했다.우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멈칫하다가 결국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더는 붙잡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제가 너무 무례했네요. 솔직히 말해서 저라도 누가 총을 겨눴다면 그렇게 용서 못 했을 거예요. 이건 강 대표님이 직접 주방에 부탁해서 끓인 거예요. 깨어나면 꼭 먹이랬거든요. 그래도... 조금만 드시고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윤하경은 여전히 창밖만 바라봤고 삼계탕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강씨 저택.강현우가 도착했을 때, 거실 중앙에 앉아 있던 강호석은 지팡이를 손에 짚은 채 무표정하게 그를 맞이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들것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강현석이 누워 있었다.강호석이 입을 떼기도 전에, 강현우가 먼저 능청스럽게 소리를 냈다.“어이쿠, 이게 누구야? 둘째 형님 아니셔? 형, 누워 있는 모습이 아주 예술인데? 얼굴도 안 보여서 못 알아볼 뻔했네.”붕대에 칭칭 감겨 눈만 간신히 드러난 강현석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입을 열 힘조차 없는 상태라, 겨우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으로 강호석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뿐이었다.강호석은 무겁게 지팡이로 카펫을 내려치며 단호하게 외쳤다.“닥쳐라.”그러고는 붉어진 눈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네가 이런 소리 할 처지냐? 네 형 저 모양 된 거, 네 짓이지?”강현우는 두 손을 천천히 들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소파에 털썩 앉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뗐다.“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오히려 형이 어디서 굴러떨어졌나 보죠.”그 얄미운 표정에 강호석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수염마저 부들부들 떨렸다.“좋아, 사람 불러와.”곧 거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강현석의 수하로 보이는 그 남자는 긴장한 눈으로 강현우와 강호석 사이를 오갔다.“너, 똑바로 말해. 이 자식이
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가, 강현우의 눈이 살짝 붉게 충혈된 걸 보고서야 자신이 꿈꿨다는 걸 알아차렸다.강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악몽 꿨어?”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고 익숙하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열은 내렸네.”그러곤 침대 옆 버튼을 눌렀다. 곧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와 윤하경의 상태를 점검했고 진료를 마친 뒤 강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강 대표님, 하경 씨의 열은 다 내렸습니다. 상처 부위만 잘 관리해 주시면 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강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도 마침내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고 말을 꺼내기도 전, 병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대표님,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들어오시랍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바쁘다고 전해.”그러자 문밖에서 우지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번에도 안 오시면 박씨 가문과의 혼인을 본인이 직접 발표하시겠다고 하십니다.”그 말에 강현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고 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창가에는 햇살이 반짝였고 나뭇잎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강현우는 잠시 시선을 떨구더니 조용히 말했다.“여기서 잘 있어. 금방 올게.”윤하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강현우는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윤하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박씨 가문과의 혼인이라니 이제 정말 나를 놓아주는 걸까.’강현우가 떠난 병실엔 그녀의 숨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고요함은 오히려 두려울 정도였다.그때, 병실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우지원은 슬쩍 웃었다.“혹시... 배고프실까 봐 주방에 부탁해서 삼계탕 준비했어요.”윤하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우지원은 조심스럽게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정성스럽게 놓고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단지 삼계
윤하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지금 여기가 어디죠?”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무인도.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몰라.”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그럼 현우 씨 사람들은 우리 위치를 알아낼 수는 있어요?”강현우는 고개를 한 번 더 저으며 불가에 장작을 덧댔다.“모르지.”그의 말은 너무도 담담했고 전혀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마치 진짜로 바캉스를 즐기러 온 사람처럼 여유롭기까지 했다.그때, 어깨의 상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스치며 올라왔고 윤하경은 옷깃을 살짝 젖혀 확인했다가 그제야 알게 되었다.이미 상처는 붕대로 감겨 있었고 그 붕대는 다름 아닌 강현우의 흰 셔츠를 찢어 만든 것이었다.윤하경은 몸에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말라 있었고 속옷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 말인즉, 강현우가 그녀의 젖은 옷을 갈아입히며 말려준 것이다.그 순간 떠오른 장면에 얼굴이 달아오르며 울컥했다.“현우 씨가 제 옷 벗긴 거예요?”강현우가 다가와, 짙은 눈매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한쪽 들어 올렸다.“여기서 나 말고 누가 있겠어?”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냥 눈을 감고 자버리자고 생각했는데 강현우가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줬다.그리고 다음 순간, 강현우가 바로 옆에 누웠다.남자의 체온이 너무 가까웠고 숨결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가 눕는 순간, 윤하경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되어 굳어버렸고 조심스럽게 몸을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움직이면 피 나. 과다 출혈로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누워.”강현우는 여전히 무심한 말투였지만 윤하경은 그의 말 속에서 미묘한 걱정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그녀는 결국 다시 누웠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밖에선 거센 바람과 폭우, 번개가 이어졌고 그 소리를 듣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현우 씨.”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우리 여기서 죽는 거 아니죠?”유람선에서 떨어질 때, 주변에 어떤 섬도 보이지 않았고 여기가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강현우의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 불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왜 당신이죠?”강현우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고 물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그는 손에 나무꼬챙이를 들고 있었고 윤하경의 목소리를 들은 뒤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깼어? 내 얼굴 봐서 실망했냐?”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금 전 총에 맞은 게 그의 사람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올라와 결국 말없이 몸을 돌려 다시 누웠다.강현우는 나무꼬챙이를 불가에 꽂았다. 그제야 윤하경은 그 위에 통통한 생선 두 마리가 꿰어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바다에 빠졌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는 시끄럽게 꼬르륵 소리를 냈고 윤하경은 민망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등을 돌려 강현우에게서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몸을 옆으로 돌리자마자 어깨의 상처가 바닥에 눌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도록 이를 악물고 참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시 반듯이 누웠다.강현우는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댔다.“다행이네. 열은 없어.”동굴 안은 희미한 불빛만이 깜박이고 있었고 강현우는 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총을 쏘라 해놓고 왜 구한 거예요?”윤하경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바다에 빠지기 직전, 그녀는 이미 죽을 준비가 돼 있었다. 엄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윤수철에게 사랑받은 기억도 없다. 어쩌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고 오히려 윤수철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거슬릴 일 없다고 기뻐할지도 몰랐다.그런데도 운명은 그녀를 이렇게 다시 살려놓았다.그리고 그 손길의 주인이 강현우라는 건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 사람이, 대체 왜 바다로 뛰어든 걸까.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찰나, 강현우의
“강현우, 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이명한이 이를 갈며 소리치더니 갑자기 손에 든 총을 들어 강현우를 겨눴다.강현우가 눈을 살짝 좁히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용천수가 재빠르게 손을 들어 총을 쐈다.탕! 탕!이명한의 총은 빗나갔지만 용천수의 총알은 정확히 이명한을 꿰뚫었다.그런데 그 총알은 이명한만 맞춘 게 아니었고 그 앞에 서 있던 윤하경도 함께 명중했다. 이명한을 맞추려면 당연히 먼저 앞에 있는 그녀를 지나야 했으니까.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벌어졌고 윤하경은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총에 맞고 말았다.그녀가 통증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어깨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순식간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그런 그를 향해 윤하경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의 표정은 분명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윤하경은 용천수가 강현우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명령하지 않았는데 감히 총을 쐈을 리가 없었다.통증이 너무 심해 더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고 총을 맞은 이명한은 여전히 윤하경을 놓지 않았다.오히려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더니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갑판 아래로 몸을 날렸다.순간,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온몸을 덮쳤고 바로 그 순간, 강현우의 절규가 들렸다.“윤하경!”그녀는 비웃듯 속으로 중얼거렸다.‘이제 와서?’갑판 위에서 강현우는 그대로 난간을 넘어 바다로 뛰어들려 했지만 용천수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대표님! 지금 근처에 상어 떼 있습니다. 위험합니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용천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고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용천수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누가 총 쏘랬어.”용천수는 멍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저, 저는...”하지만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대로 갑판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이제 어떻게 해요?”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당황하며 용천수를 바라봤고 잠시 숨을 골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갑판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지금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멀찍이서 윤하경은 강현우가 갑판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눈앞에 매달린 누군가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눈 부신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어 확인했더니 매달려 있는 건 다름 아닌, 강현석이었다.강현우의 등 뒤로는 용천수를 비롯해, 겉보기에 전투 능력이 상당해 보이는 남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역시...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던 거네.’“밖에선 강 대표가 무섭고 냉정하단 말 많더니 자기 친형한테까지 저럴 줄은 몰랐네. 근데 말이야, 강 대표 생각엔... 하경 씨 목숨 하나가, 네 친형이랑 바꿀 만큼 값어치가 있냐?”이명한의 비웃음 섞인 말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렸다.그 시선이 향한 곳엔, 윤하경이 붙잡혀 이명한에게 끌려오는 모습이 있었고 순간 강현우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갔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강현우는 태연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느긋하게 말했다.“그래서 걔 하나로 너희 둘 목숨값이 해결될 거라 생각한 거냐?”강현우는 짙고 깊은 눈동자로 이명한을 째려보았고 이명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네가 어떤 놈인진 잘 알아. 네 형 목숨도 거리낌 없이 버리는 놈인데 하물며 나 같은 건 뭐 대수겠냐. 근데 말이야, 강현우. 나도 만만한 놈은 아니거든. 그동안 내가 너한테 어떤 더러운 일들까지 해줬는지, 기억 안 나냐? 이젠 됐어. 더는 못 하겠다.”이명한은 윤하경을 거칠게 끌어다가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이제 선택해. 이 배, 내 앞으로 넘기고 끝내든가... 아니면 이 여자랑 나랑 여기서 같이 끝이야.”그 말에 윤하경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고 이명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봤다.“뭐가 웃겨?”“당신이요.”윤하경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강현우 같은 남자가 저 때문에 뭔가를 포기할 거라 생각하세요? 전 그냥 그 사람한텐 스트레스 풀 데가 필요해서 두는 여자예
“말해, 강현우가 데려온 그 여자 어디 갔어?”이명한의 목소리는 급박했다. 마치 윤하경을 찾아야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절박한 기세였다.이때 노한성은 그를 흘끗 쳐다보며 대답했다.“몰라요.”이명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앞발로 노한성의 가슴을 차버렸다.“너, 이 새끼! 말 안 할 거야? 그 여자 내놔, 그러면 네 목숨은 살려줄게! 안 그러면...”윤하경은 노한성을 걱정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옷장 틈새로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다.그렇게 보니 노한성이 무릎을 꿇고 묶여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의 몸에는 총알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그 순간, 이명한은 총을 그의 머리에 대고 위협했다.“말하면 돈 줄게. 10억 어때?”노한성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 순박해 보이는 얼굴에 이명한에 대한 경멸이 가득했다.“필요 없어요.”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머릿속에서 빠르게 생각을 돌렸다.이명한이 이렇게 급히 찾는다는 건, 강현우가 밖에서 유리한 상황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아마 자신을 찾은 뒤, 강현우를 위협하려 할 거라는 생각에 윤하경은 조금 안심이 됐다.하지만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그녀의 마음을 더 졸여왔다.“필요 없다고? 하하, 좋아. 그럼 죽어!”이명한은 총을 들고 노한성의 머리를 겨누며 말했다.그러자 순식간에 윤하경은 총을 들어 이명한을 겨냥했다.탕!이명한은 잠시 얼떨떨해하며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옷장 안에 있어. 저년 끌어내! 젠장!”그는 윤하경에게 맞은 다리를 움켜잡으며 욕을 했다.윤하경은 옷장으로 다가오는 두 명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지금은 더 이상 많은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고 이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윤하경의 총알은 한정적이었고 그녀는 총을 잘 다루지 못했다. 방금 이명한에게 맞춘 총알도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결국 윤하경은 옷장에서 끌려 나왔고 이명한은 다리가 절며 그녀에게 다가와서 얼굴을 한 대 쳤다.“젠장, 결국 너한테 당하다니.”윤하경은 얼굴을 살짝 비켰다. 노
윤하경은 강현우가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긴장을 풀었고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현우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윤하경은 그를 불렀다.“강현우.”이번에는 ‘강 대표님’이 아니라 그냥 이름을 부르자 강현우가 돌아보며 윤하경을 바라보았다.윤하경은 입술을 약간 떨며 말했다.“조심하세요.”강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심심하면 씻고 기다려도 돼.”윤하경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고 강현우는 다시 노한성에게 말하며 지시를 내렸다.“여기 있어.”노한성은 강현우의 지시를 받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강현우는 더 이상 말없이 총을 들고 노한성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윤하경은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문이 갑자기 꽝 하고 닫혔다.“강 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오기 전까지 이 방에서 나가지 마세요.”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노한성을 한 번 보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손에 쥔 총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총에서 강현우의 온기가 느껴져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손이 땀에 젖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그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시간이 가는 게 너무나도 느리게만 느껴졌다.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그녀는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노한성에게 물었다.“간 지 얼마나 됐죠? 왜 아직도 안 돌아오죠?”노한성은 머리도 돌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모르겠습니다.”윤하경은 그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관광객 몇 명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강현우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윤하경은 점점 더 불안해지며 다시 노한성에게 물었다.“두 시간 넘게 나갔어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노한성은 여전히 단호하게 대답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