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구지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갑자기 오늘 유 집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윤하연이 구지호때문에 강제로 유산했고 그날 밤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는 얘기였다.윤하경은 입술을 굳게 물고 소지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그 사람 얘기하지 마. 진짜 구역질 나서 토할 것 같아.”그 전에 윤하경은 구지호가 나쁜 사람이라 해도 결국 그저 바람둥이 부유한 이른바 재벌 2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좀 쓰레기 같긴 했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다.하지만 지금 구지호가 저지른 일은 정말로 혐오스러웠다.그리고 윤하연 역시 착한 사람은 아니다.어쨌든 이제 회사 문제는 해결됐고 그녀도 이제 아버지와 마음 아픈 윤하연을 봐야 할 때였다.소지연과의 전화를 끊고 윤하경은 운전기사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집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집 대문이 꽉 닫혀 있는 걸 보고 집이 차갑고 쓸쓸한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미소를 띠며 차에서 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유 집사가 윤하경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하경 씨, 돌아오셨군요. 밥은 드셨나요?”유 집사는 진심으로 그녀가 밥을 먹었는지 걱정했다.그러자 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직 안 먹었어요.”윤하경은 실제로 진태호와의 일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확실히 배가 고팠다.그러자 유 집사는 재빨리 말했다.“그럼 제가 면을 좀 끓여드릴게요.”윤하경은 대답하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자 유 집사에게 물었다.“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죠?”유 집사는 잠시 위를 쳐다보고는 답했다.“방금 하연 씨가 대량 출혈이 있었어요. 임수연이 데리고 병원에 갔어요. 회장님은 지금 위층 서재에 계세요. 요즘은...”그때 위층에서 윤수철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돌아온 거야? 밖에서 죽은 줄 알았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보니 윤수철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집은 제 집이죠.
윤하경은 윤수철의 말을 듣고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할 말 없어요.”윤수철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항상 일이 꼬였기 때문에 윤하경은 더 이상 그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선 뒤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윤하연이 없으면 내일 다시 올게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윤수철은 윤하경의 태도에 불쾌해하며 금세 표정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문을 향해 나가려 했다.어차피 윤수철은 그녀에게 친절할 일도 드물었고 그가 친절한 척할 때면 항상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그 순간, 윤수철이 갑자기 그녀를 붙잡았다.“무슨 일 있었던 거야?”윤수철은 그녀의 찢어진 옷을 보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이 꼴이 뭐야? 밖에서 뭐 한 거냐고.”윤수철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고 윤하경은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윤씨 가문의 체면을 걱정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뒤돌아보니 자신이 입고 있던 옷 뒤쪽에 홑겹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윤하경은, 그제야 씩 웃으며 대답했다.“괴롭힘을 당했어요. 아빠가 대신 해결해 줄 건가요?”윤수철은 입술을 꽉 깨물며 물었다.“무슨 일이냐고?”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그냥 좀 불쾌한 일을 당했어요. 간신히 빠져나왔죠. 아빠가 대신 복수라도 해줄 건가요?”윤하경은 이미 그가 결코 자신을 돕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 말을 하면서 윤수철을 자극하고 싶었다.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너는 왜 항상 밖에서 그런 모습으로 다니냐? 그렇게 다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 책임질 수 없잖아.”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윤수철은 또 한 번 그녀의 웃음에 짜증을 내며 물었다.“왜 그렇게 웃어?”윤하경은 그 미소를 더 넓게 지으며 말했다.“그럼 아빠, 오늘 윤하연이 만약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때도 이렇게 생
윤수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앞으로 하경이 얘기는 꺼내지도 마.”유 집사는 윤수철의 말을 듣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하지만 하경 씨는 아직 밥도 안 드셨어요.”윤수철은 이를 악물며 유 집사가 만든 면을 차갑게 째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그냥 굶어 죽어도 상관없어.”그는 정말로 윤하경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냉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숨길 수 없었다.말을 마친 윤수철은 그대로 큰 소리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집 안을 울리며 그의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그대로 드러났다.유 집사는 그런 윤수철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고...”윤하경은 혼자 윤씨 저택을 빠져나왔다. 윤수철의 말은 여전히 그녀를 자극하며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들었다.차 안은 불편한 침묵만 가득했고 그 고요함이 갑자기 너무 불편해져서 윤하경은 결국 라디오를 켰다.창문을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고 그제야 그녀는 잠시나마 마음이 풀린 듯했다.집에 도착한 윤하경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아직 여덟 시까지 5시간이나 남았네.”잠시 생각에 잠긴 윤하경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팩도 했다.‘강현우는 괜찮은 사람이야. 계약도 해주고 나를 도와줬으니까 고마움을 표현해야지.’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윤하경은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만큼 그가 자신에게 준 도움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이 필요했다.저녁 7시, 윤하경은 정해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고 오늘은 외모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살짝 맑은 피부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베이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두었다.그녀가 강현우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강현우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윤하경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현우 씨, 저 오늘 늦지 않았어요.”강현우는 그가 시간에 민감하다는 걸 알기에 미리 집을 떠났고 도착했을 때 마침
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겉으로는 꽤 개방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동안 그녀가 관계를 맺었던 남자는 강현우가 유일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강현우와 함께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런 상황에서 그의 비아냥에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강현우는 그런 그녀에게 반론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윤하경을 가볍게 침대 위에 던졌고 윤하경은 그가 다가오는 모습에 불안함을 느끼며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강현우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그는 윤하경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윤하경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요?” 그녀가 물었지만 강현우는 대답 없이 침대 옆 탁자에서 계약서를 꺼내 윤하경 앞에 던졌다. 윤하경은 그 계약서를 집어 들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약서의 내용에 눈을 찡그리며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놀랐다. 계약서에는 강현우가 매달 그녀에게 지급할 금액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매달 지급...]윤하경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이런 계약서에 자존심이 상해 화가 났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울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 같은 여자는 더더욱 힘들다. 그런 현실에서 강현우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다. 게다가 강현우는 외모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원하는 남자였다. 구지호와의 과거 경험 덕분에 이제는 감정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계약서에 서명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자세히 봤어?”그는 담배를 피우며 윤하경을 바라봤다. 흰 연기가 입에서 빠져나오며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냉정해졌다. 계약서에 기뻐하는 표정은 없었지만 윤하경은 그가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웃었다.“현우 씨 성품
강현우는 잠시 뒤돌아보며 윤하경을 한 번 쳐다본 뒤 짧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그러고는 방문을 쾅 닫자 넓은 스위트룸에는 윤하경만 홀로 남게 되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방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리를 쥐어짜 봐도 도무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정말 이상한 사람이야.”윤하경은 속으로 한탄하더니 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계약서는 이미 서명했으니 강현우가 그것을 부인할 리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돈이 들어오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최근 회사 일과 별장 화재 사건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시간이 없었기에, 이제야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밤, 클럽 안에서.추성운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바라보았다.“강현우, 너 이게 뭐냐? 여기 와서 말도 없이 술만 마시고 있어?”그는 강현우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혹시 그 여자한테 차인 거야?”추성운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시간 전, 강현우가 자신에게 위치를 물어본 뒤, 금방 클럽에 도착했었지만 강현우는 클럽에 들어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추성운은 이런 강현우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한 시간 넘게 술만 마시고 있는 그를 보고 추성운은 답답함을 느껴 참다못해 물어봤다.강현우는 그제야 얼굴에 조금 표정을 드러내며 추성운을 찡그린 채 바라보았다.“닥쳐.”추성운은 그가 드디어 입을 열자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뭔 일인데? 나도 한때는 여자 많이 만났어.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해 줄게.”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러자 강현우는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은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추성운은 비웃으며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강현우를 향해 말했다.“그럼 뭐야? 요즘
윤하경이 깊이 잠들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확인한 윤하경은 익숙하지 않은 번호를 보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상대방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윤하경은 짜증이 나서 전화를 받으며 불친절하게 말했다.“여보세요, 누구세요? 지금 몇 시인데 이렇게 전화하세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전화기 너머에서 민진혁은 잠시 말없이 멈추고 겨우 입을 열었다.“하경 씨, 저는 민진혁입니다.”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톤을 바꾸며 대답했다.“아, 네. 무슨 일이에요?”“사실, 대표님이 술에 취해 혼자 계시는데 지금 혹시 오실 수 있으신가요?”윤하경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시계를 확인했는데 벌써 자정을 넘겨 두 시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오늘 강현우와 계약을 체결했으니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전화 너머로 친절하게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가겠습니다.”그렇게 윤하경은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강현우의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민진혁은 이미 강현우를 침실에 눕혀놓은 상태였다.윤하경은 침대에서 평온하게 자고 있는 강현우를 보고 민진혁에게 물었다.“그래서 제가 뭐 해야 하나요?”민진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한눈에 윤하경을 쳐다보며 말했다.“남은 건 하경 씨에게 맡길게요.”그러고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기회를 잘 잡으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말을 마친 민진혁은 급히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이제 윤하경과 잠든 강현우만 남았다. 조명이 어두운 방 안에서 윤하경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강현우의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물었다.“현우 씨, 물 좀 드릴까요?”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강현우의 아무런 반응도 없이 들리는 무거운 숨소리뿐이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아 손을 받치고 강현우를 지켜봤다.강현우는 술을 마셔도 잠만 자는 타입이라, 잠든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의 잘
강현우가 욕실에서 나오자, 윤하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계단 끝에서 부엌에서 나는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강현우는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고 부엌에서 윤하경이 뭔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다.어디서 구했는지,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꽤 전문적인 모습이었지만 행동은 초보자처럼 서툴렀다. 강현우는 미소를 띤 채 팔짱을 끼고 계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윤하경이 준비를 마친 뒤, 돌아보았을 때, 강현우가 계단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밥이 다 됐어요. 내려와서 드세요.”그녀는 만든 면을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엄마가 항상 술 마신 다음엔 뭔가 먹어야 속이 편해진다고 했어요.”강현우는 밥을 먹으러 다가가며 그릇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을 드러냈다.“정말 먹어도 되는 거 맞아?”윤하경은 내심 불쾌했지만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그녀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찾아봤고 그런 만큼 맛없을 리가 없다고 자신했다.강현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자리에 앉았고 음식을 한입 먹은 그는 그대로 멈췄다.윤하경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때요?”강현우는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겨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생각보다 괜찮네.”그 말을 들은 윤하경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만들었으니까.”윤하경은 주방에서 자기 그릇도 들고 오면서 한입 먹더니 소리를 질렀다.“아, 물! 물!”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급히 물을 찾았고 강현우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주었다.“자신 있다며?”강현우에게 잘 보이려고 처음 요리한 거였는데 실수하자, 윤하경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냥, 제가 좀 덜 깼나 봐요.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아요. 다시 만들어 올게요.”그리고 부엌으로 가려는데 강현우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렇게까
강현우는 말없이 점점 더 깊어지는 눈빛으로 윤하경을 쳐다봤다. 윤하경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강현우의 표정을 보자 잠시 멈칫한 후, 그의 손을 풀어 놓았다.“현우 씨, 저와 구지호의 과거를 모를 리 없잖아요. 신경 쓰이면 그냥 됐어요.”그녀는 말하면서 서서히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아 가방을 챙기며 강현우에게 말했다.“계약은 그냥 없던 일로 해요. 그럼, 저는 갈게요.”정리를 마친 윤하경은 하이힐을 신으며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가자 강현우가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았다.윤하경은 깜짝 놀라 멈췄고 금세 목에서 아픈 느낌이 들었다.보지 않아도 강현우가 다시 그녀의 목을 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아!”강현우는 자주 이렇게 사람을 물곤 했다. ‘뭐야? 강아지야? 왜 이래?’하지만 강현우는 냉소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계약서에는 네 마음대로 취소할 수 있는 항목이 없다고.”윤하경은 그에게 돌아보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가 말할 틈도 없이 갑자기 입술을 붙잡았다. 윤하경은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질렀고 강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탐닉했다.윤하경은 그 순간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정말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어젯밤 이유도 없이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난 뒤, 자신을 호텔에 두고 갔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마치 윤하경이 그의 원수인 것처럼 표정이 굳어 있었더니 지금은 부서질 듯 격렬하게 그녀를 껴안았다.윤하경이 멍을 때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이미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윤하경은 마지막 남은 이성을 짜내어 그를 밀어냈다.“그만 여기서는 안 돼요.”이곳에는 하인들이 있을 텐데 만약 그들이 들어오면 너무 난처해질 것이다. 하지만 강현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녀의 입술을 더 강하게 막았다.그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더욱 깊게 다가가 입술을 탐했다.윤하경은 속으로 한탄했지만 곧 그녀는 의식을 잃은 듯, 그의 리듬에 따라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다.어떻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