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애는 소파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눈빛이 엄중했다.“그러니까 강지아가 정말로 그런 저질스러운 곳에 갔고, 물에 뭔가 섞인 걸 먹었다는 거야? 명문가의 아가씨가 자존심도 자애심도 없군!”온유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건 전형적인 피해자 비난이에요. 범죄를 저지른 건 지아가 아니잖아요.”옆에 있던 주유정이 머쓱해지며 해명했다.“그 술집은 작년에 막 문을 연 곳인데 정말 인기 많아요. 평소에도 깨끗하고요. 저도 귀국한 후에 유한이랑 한 번 가봤는데 그때도 지아 씨가 거기서 춤을 추고 있었어요. 평소엔 아무 문제 없었거든요.”“술집에서 춤까지 춘다고?” 최신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곳에서 춤을 춘다고? 도대체 그 애는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보아하니 자주 가는 곳이겠구나. 너희가 가선 괜찮았는데 왜 하필 그 애만 그런 일이 생겼지?”“아주머니, 그게 아니에요...”“편 들어 줄 필요 없어.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니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온유한은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그런 건 어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에요.”아들이 반박했지만 최신애는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어제 강홍식을 만났는데 강지아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눴어. 원래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일을 겪고 나니 그때 좀 더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네.”온유한의 눈빛이 깊어졌다. “무슨 얘길 하셨어요?”최신애는 담담히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며느리 후보가 따로 있다는 걸 강홍식에게 살짝 암시했지.”온유한은 벌떡 일어나 어머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어떻게 강씨 집안에 그런 얘길 할 수 있어요? 저랑 지아가 사귀기라도 했어요? 아니면 뭐 결혼이라도 하기로 했어요? 왜 굳이 남의 집 딸을 모욕하세요?”“그렇게 흥분할 일이야?” 최신애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네 태도를 보니까 마음에 꺼리는 게 있나 보
두 남자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서원준이 먼저 물러섰다.“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다음에 시간 내서 같이 한잔할까요?”온유한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서원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떠나갔다. 돌아서는 순간 서원준의 입가엔 가벼운 비웃음이 스쳤다.오늘의 강지아는 평소와 달랐다. 아침에는 차갑게 굴더니 오후에는 행사에 가자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내내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마치 무언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서원준은 그 내려놓은 것이 온유한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발코니에서 강지아가 이미 집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옆집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강홍식의 성격과 강지아에 대한 태도를 보면 어제 그렇게 큰 망신을 당했으니 분명 강지아에게 화를 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강지아의 상태는 전혀 예상과 다르다.온유한은 강지아의 속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안경을 벗고 눈가를 주무르며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강지아는 매우 들뜬 상태였다.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마친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의 작업실 디자인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이제 확실히 마음을 먹었다. 작업실을 빨리 시작해야겠다고.밤을 꼬박 새며 작업하다 결국 피곤해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허리는 뻐근했고 목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다.‘차라리 새언니를 불러볼까?'‘안 돼, 스스로 해야지.'배가 고파 슬리퍼를 질질 끌며 문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문손잡이에 아침이 걸려 있었다. 오늘 아침은 다른 가게에서 온 것 같은데 맛도 꽤 괜찮았다. 식사를 마치고 침대로 가서 반나절을 깊이 잤다.한창 자고 있던 중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서원준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는 듯했다. “바보야, 병문안 좀 와.”강지아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누구 병문안을...”“나, 사고 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서원준은 태안
꽃을 꽂고 있던 강지아는 문 쪽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온유한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늘 하던 대로 서원준에게 말했다. “진짜 주책이야, 누가 그쪽 마누라라는 거예요?”서원준은 온유한을 힐끗 보며 웃었다. “날 챙겨주면 그 사람이 내 마누라지.”강지아의 꽃꽂이 솜씨는 형편없었고 인내심도 부족했다. 꽃을 다 뽑아서 그냥 대충 꽃병에 꽂고는 끝냈다. 손을 털고 돌아서며 서원준에게 한마디 더 하려고 했는데 온유한을 보고 멈칫했다.온유한은 아예 문을 열고 들어와 서원준에게 말했다. “다쳤다고 해서 와봤어요.”“고마워요.” 서원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강지아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과일 바구니를 풀기 시작했다.온유한은 병상 옆에 다가가 습관처럼 침대 머리에 걸린 병력 카드를 뒤적였다. 외상이 전부여서 그저 잘 쉬기만 하면 됐다. 그는 병력 카드를 다시 걸어놓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른 환자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푹 쉬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강지아는 과일을 씻고 나서 과일 칼을 들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바보, 두 사람 싸웠어?”“싸우긴 뭘요, 싸울 수 있으면 오히려 다행이죠.”서원준은 그녀가 사과를 깎는 모습을 보면서 칼을 한번 내리자마자 사과 반쪽이 사라지는 걸 보고 입 꼬리를 씰룩거렸다.“그 사람 좋아하지 마.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잖아.” 서원준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남자친구 소개해줄까?”“누군데요?”“나지!” 서원준의 잘생긴 눈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네가 내 여자 친구 해주면 이제부터는 널 ‘바보’라고 부르는 대신 ‘자기야’라고 부를게. 어때?”강지아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유치해요.”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사과를 서원준의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생애 처음으로 깎은 사과예요. 그걸로 만족해요.”그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는지 밤새 잠을 못 잤던 서원준은 사과를 먹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강지아는 그대로 갈 수 없어서 휴대폰을
“뭐야? 방금 온 교수님이 벽 치기하는 거야? 너무 자극적이다!”“우리 병원 최고의 미남이 드디어 강지아 씨랑 이어졌나 보네?”“너무 답답해서 내가 나서서 밀어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온 교수님이 먼저 나섰네.”“여자는 돈 많고 남자는 외모가 훤칠해!”밖에서는 간호사들이 하나같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지만 휴게실 안의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창가의 테이블 위에는 이미 몇 개의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온유한이 진짜로 강지아를 밥 먹이려고 부른 것이었다.하지만 강지아는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최신애가 저지른 일을 온유한에게 화풀이하지 않으려 최대한 애썼지만 그가 자꾸만 그녀에게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밥 먹어. 밥 먹는다고 네가 환자를 돌보는 데 지장 있진 않잖아.” 온유한은 흰 가운을 벗었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강지아는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오빠, 나 이제 다 컸어. 오빠가 진짜 내 친오빠처럼 이래저래 간섭할 필요는 없어. 사람들이 오해한단 말이야. 밥 같은 건 배고프면 알아서 먹을 수 있다고.”온유한은 옷을 걸던 손이 잠시 멈췄다.그는 확신했다. 최신애가 한 일을 강지아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하지만 잠깐 멈췄을 뿐,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다가와 강지아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밥 먹어.”“...”‘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온유한은 젓가락을 집어 그녀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온유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게실 문이 열리더니 주유정이 들어왔다.강지아를 본 주유정은 순간 당황하며 문 앞에 멈춰 섰다.“지아 씨도 있었어요? 아, 미안해요. 두 사람 이미 밥 먹고 있었네요.”“나 원래 유한이 너랑 같이 나가서 먹자고 했는데.”강지아는 ‘탁’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차갑게 온유한을 한 번 노려보고는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이번엔 온유한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지아, 너...”강지
저녁시간이 되어 강지아는 병원 밖에서 저녁 두 세트를 사왔다.그녀가 도시락을 들고 들어오자 서원준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난 네가 나 혼자 두고 도망간 줄 알았는데, 양심은 있네.”강지아는 기운 없이 말했다. “원준 씨한테 아침 많이 얻어먹었으니 갚아야죠.”“무슨 아침...” 서원준은 말끝을 흐리며 다음 말을 삼켰다.“일어날 수 있어요?” 강지아는 병간호를 해본 적이 없어 아무것도 몰랐다.서원준이 침대 머리를 가리켰다. “저쪽에 버튼 있어. 그거 눌러서 침대 머리 올리면 돼.”서원준의 상반신은 고정되어 있었지만 하반신은 움직일 수 있었다.“먼저 와서 나 좀 일으켜 줘. 화장실 좀 가게.”강지아는 ‘말도 안 돼'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해요?”“그럼 누구한테 말해?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 죽겠는데 네가 안 도와주면 어쩌라고. 병간호할 줄 몰라?”“...간병인 부를게요.”서원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네가 나 화장실에 가게 도와달라는 거지, 다른 걸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이 무례한 자식!’강지아는 서원준을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머지는 혼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사실 서원준은 혼자서 걸을 수 있었으니 더는 강지아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서원준은 강지아가 병원에서 밤을 새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돌려보냈다.병원이 준비해 준 전담 간병인이 있어서 사실 강지아가 굳이 병실에 남을 필요는 없었다.강지아가 떠난 후 온유한이 다시 병실을 찾았다.“지아 찾는 거예요? 이미 집에 갔어요.” 서원준이 온유한을 보며 말했다.온유한은 문가에 서서 병실으로 들어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푹 쉬어요.”서원준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강지아가 먹은 아침은 분명 온유한이 가져온 것이었다. ‘온유한,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강지아가 본가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집 안의 상황을 보고
결국 강지찬은 강원훈을 만나러 갔다.경찰 쪽에서 따로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강지찬을 만나지 못하면 강원훈은 조사에 협조하지도 않고 변호사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이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며칠 만에 본 강원훈은 한층 더 늙어 보였다. 수염도 깎지 않았고 다크서클이 심했지만 강지찬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여전히 검고 깊었다.강홍식 삼형제 중에서도 강원훈이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고 젊었을 때는 마치 요괴처럼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늙어버린 모습에 강지찬은 잠시 멍해졌다.“왔니?”강지찬은 그와 마주 앉으며 말했다. “꼭 절 만나야 한다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세요?”“별일 아니야. 그저 축하하려고. 이제 강씨 가문엔 너 혼자 남았잖아.”강지찬은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강씨 가문을 제 손에 넘기고, 저를 이 집안의 주인으로 만들었을 때부터 가문이 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나머지 분은 다르게 생각했나 봅니다.”강원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억울한 거지. 왜 하필 손자 세대가 집안을 물려받게 됐는지 말이야. 아들이 셋이나 멀쩡히 있는데.”강지찬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건 당신 어머니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강원훈의 얼굴이 굳었다.그는 평생 동안 누군가가 자신의 어머니와 출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강지찬도 이전에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대놓고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뭐가 그리 잘났다고? 너도 그냥 좋은 집안에 태어난 거잖아.”“네, 태어나는 것도 능력이니까요. 다음 생엔 운 좋길 바래요.”“...”강지찬은 강원훈이 자신을 만나려 한 이유를 이미 알았기에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강지찬은 그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지금 너한테 아무리 부탁해도 소용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두고 싶다. 내 아내와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어. 내가 한 짓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강지찬의 눈빛이 깊어졌다. “전 당신처
임미연은 겁에 질린 듯, 온몸이 흔들리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보였다.“언니가 나를 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내 뱃속의 아이는 아무 죄도 없어요. 나 정말 무서워요.”“그럼 지찬 씨를 찾아가요.” 정유진이 말했다.“누군가 제 아이를 이용하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찬 오빠한테는 못 가고, 언니한테 왔어요.”임미연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둘 다 여자잖아요. 언니도 한 아이 엄마니까 절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정유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날 의심하는 거예요?”임미연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분명 정유진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감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당신 뱃속 아이에도 관심 없고요.” 정유진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어요.”임미연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언니가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언니 외에 누가 이 아이를 신경 쓰겠어요? 언니는 이 아이가 태어나면 언니 딸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요.”정유진은 임미연을 바라보았다. 이제 강원훈이 감옥에 들어간 마당에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는 굳이 이 문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임미연에게 더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입을 열려는 순간 문 밖에서 여러 여자가 우르르 들어왔다.정유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임미연이 또 그녀의 고모 가족을 데리고 온 것이다.“준비를 잘하고 왔나 보네요.” 정유진은 약간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임미연은 마치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듯 가슴을 펴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언니, 날 탓하지 말아요. 나도 내 몸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러고는 돌아서서 그들에게 달려갔다. “여러분, 와주셨네요.”네 명의 여자가 임미연을 둘러싸고 정유진
임미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정유진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아이가 지찬 오빠 핏줄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걸까? 그렇다면 지찬 오빠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인가?’옆에 있던 사람들도 서로 당황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르신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유진, 똑바로 말해라. 네가 이 아이를 의심하고 있는 거냐?”정유진은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미연 씨가 아이를 낳고 나면 친자 확인을 해보면 될 거예요. 임미연 씨, 어때요?”임미연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모습을 본 큰며느리의 얼굴도 굳어졌다. 정유진의 차분한 태도를 보니 진실은 이미 명확해 보였다. 설마 이 아이가 강지찬의 자식이 아니라는 건가? 더 큰 문제는 그동안 이 아이가 강지찬의 아들이라 믿고 정유진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온 자신들이 너무 부끄러워졌다.큰며느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임미연에게 화살을 돌렸다. “미연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네 할머니는 널 아끼지만, 강씨 집안의 어르신이시기도 해. 혈통 문제에서는 절대로 너를 편 들지 않으실 거야. 빨리 사실을 말해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야.”임미연은 겁에 질려서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 아이는 정말로 지찬 오빠 아이예요. 제가, 제가 맹세할게요!”정유진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시간도 늦었고 이렇게 하죠. 제가 호텔에 식사를 예약해 둘게요. 고모할머니와 이모님들은 식사하시고 돌아가세요. 저는 죄송하지만 회사 일이 있어서 함께하지 못하겠네요.”그리고 임미연에게 덧붙였다. “아이 문제는 급할 필요 없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자연히 진실이 밝혀지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미연 씨를 미행하고 있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 거예요.”그 말을 남기고 정유진은 미소를 짓고 일어났다. 임우연에게 마무리를 부탁한 뒤 그녀는 회사를 나섰다.“...”정유진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정유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압도적인 기세를 보여줬고 그들이 한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