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꽂고 있던 강지아는 문 쪽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온유한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늘 하던 대로 서원준에게 말했다. “진짜 주책이야, 누가 그쪽 마누라라는 거예요?”서원준은 온유한을 힐끗 보며 웃었다. “날 챙겨주면 그 사람이 내 마누라지.”강지아의 꽃꽂이 솜씨는 형편없었고 인내심도 부족했다. 꽃을 다 뽑아서 그냥 대충 꽃병에 꽂고는 끝냈다. 손을 털고 돌아서며 서원준에게 한마디 더 하려고 했는데 온유한을 보고 멈칫했다.온유한은 아예 문을 열고 들어와 서원준에게 말했다. “다쳤다고 해서 와봤어요.”“고마워요.” 서원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강지아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과일 바구니를 풀기 시작했다.온유한은 병상 옆에 다가가 습관처럼 침대 머리에 걸린 병력 카드를 뒤적였다. 외상이 전부여서 그저 잘 쉬기만 하면 됐다. 그는 병력 카드를 다시 걸어놓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른 환자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푹 쉬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강지아는 과일을 씻고 나서 과일 칼을 들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바보, 두 사람 싸웠어?”“싸우긴 뭘요, 싸울 수 있으면 오히려 다행이죠.”서원준은 그녀가 사과를 깎는 모습을 보면서 칼을 한번 내리자마자 사과 반쪽이 사라지는 걸 보고 입 꼬리를 씰룩거렸다.“그 사람 좋아하지 마.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잖아.” 서원준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남자친구 소개해줄까?”“누군데요?”“나지!” 서원준의 잘생긴 눈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네가 내 여자 친구 해주면 이제부터는 널 ‘바보’라고 부르는 대신 ‘자기야’라고 부를게. 어때?”강지아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유치해요.”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사과를 서원준의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생애 처음으로 깎은 사과예요. 그걸로 만족해요.”그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는지 밤새 잠을 못 잤던 서원준은 사과를 먹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강지아는 그대로 갈 수 없어서 휴대폰을
“뭐야? 방금 온 교수님이 벽 치기하는 거야? 너무 자극적이다!”“우리 병원 최고의 미남이 드디어 강지아 씨랑 이어졌나 보네?”“너무 답답해서 내가 나서서 밀어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온 교수님이 먼저 나섰네.”“여자는 돈 많고 남자는 외모가 훤칠해!”밖에서는 간호사들이 하나같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지만 휴게실 안의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창가의 테이블 위에는 이미 몇 개의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온유한이 진짜로 강지아를 밥 먹이려고 부른 것이었다.하지만 강지아는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최신애가 저지른 일을 온유한에게 화풀이하지 않으려 최대한 애썼지만 그가 자꾸만 그녀에게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밥 먹어. 밥 먹는다고 네가 환자를 돌보는 데 지장 있진 않잖아.” 온유한은 흰 가운을 벗었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강지아는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오빠, 나 이제 다 컸어. 오빠가 진짜 내 친오빠처럼 이래저래 간섭할 필요는 없어. 사람들이 오해한단 말이야. 밥 같은 건 배고프면 알아서 먹을 수 있다고.”온유한은 옷을 걸던 손이 잠시 멈췄다.그는 확신했다. 최신애가 한 일을 강지아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하지만 잠깐 멈췄을 뿐,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다가와 강지아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밥 먹어.”“...”‘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온유한은 젓가락을 집어 그녀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온유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게실 문이 열리더니 주유정이 들어왔다.강지아를 본 주유정은 순간 당황하며 문 앞에 멈춰 섰다.“지아 씨도 있었어요? 아, 미안해요. 두 사람 이미 밥 먹고 있었네요.”“나 원래 유한이 너랑 같이 나가서 먹자고 했는데.”강지아는 ‘탁’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차갑게 온유한을 한 번 노려보고는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이번엔 온유한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지아, 너...”강지
저녁시간이 되어 강지아는 병원 밖에서 저녁 두 세트를 사왔다.그녀가 도시락을 들고 들어오자 서원준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난 네가 나 혼자 두고 도망간 줄 알았는데, 양심은 있네.”강지아는 기운 없이 말했다. “원준 씨한테 아침 많이 얻어먹었으니 갚아야죠.”“무슨 아침...” 서원준은 말끝을 흐리며 다음 말을 삼켰다.“일어날 수 있어요?” 강지아는 병간호를 해본 적이 없어 아무것도 몰랐다.서원준이 침대 머리를 가리켰다. “저쪽에 버튼 있어. 그거 눌러서 침대 머리 올리면 돼.”서원준의 상반신은 고정되어 있었지만 하반신은 움직일 수 있었다.“먼저 와서 나 좀 일으켜 줘. 화장실 좀 가게.”강지아는 ‘말도 안 돼'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해요?”“그럼 누구한테 말해?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 죽겠는데 네가 안 도와주면 어쩌라고. 병간호할 줄 몰라?”“...간병인 부를게요.”서원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네가 나 화장실에 가게 도와달라는 거지, 다른 걸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이 무례한 자식!’강지아는 서원준을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머지는 혼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사실 서원준은 혼자서 걸을 수 있었으니 더는 강지아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서원준은 강지아가 병원에서 밤을 새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돌려보냈다.병원이 준비해 준 전담 간병인이 있어서 사실 강지아가 굳이 병실에 남을 필요는 없었다.강지아가 떠난 후 온유한이 다시 병실을 찾았다.“지아 찾는 거예요? 이미 집에 갔어요.” 서원준이 온유한을 보며 말했다.온유한은 문가에 서서 병실으로 들어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푹 쉬어요.”서원준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강지아가 먹은 아침은 분명 온유한이 가져온 것이었다. ‘온유한,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강지아가 본가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집 안의 상황을 보고
결국 강지찬은 강원훈을 만나러 갔다.경찰 쪽에서 따로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강지찬을 만나지 못하면 강원훈은 조사에 협조하지도 않고 변호사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이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며칠 만에 본 강원훈은 한층 더 늙어 보였다. 수염도 깎지 않았고 다크서클이 심했지만 강지찬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여전히 검고 깊었다.강홍식 삼형제 중에서도 강원훈이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고 젊었을 때는 마치 요괴처럼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늙어버린 모습에 강지찬은 잠시 멍해졌다.“왔니?”강지찬은 그와 마주 앉으며 말했다. “꼭 절 만나야 한다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세요?”“별일 아니야. 그저 축하하려고. 이제 강씨 가문엔 너 혼자 남았잖아.”강지찬은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강씨 가문을 제 손에 넘기고, 저를 이 집안의 주인으로 만들었을 때부터 가문이 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나머지 분은 다르게 생각했나 봅니다.”강원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억울한 거지. 왜 하필 손자 세대가 집안을 물려받게 됐는지 말이야. 아들이 셋이나 멀쩡히 있는데.”강지찬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건 당신 어머니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강원훈의 얼굴이 굳었다.그는 평생 동안 누군가가 자신의 어머니와 출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강지찬도 이전에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대놓고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뭐가 그리 잘났다고? 너도 그냥 좋은 집안에 태어난 거잖아.”“네, 태어나는 것도 능력이니까요. 다음 생엔 운 좋길 바래요.”“...”강지찬은 강원훈이 자신을 만나려 한 이유를 이미 알았기에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강지찬은 그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지금 너한테 아무리 부탁해도 소용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두고 싶다. 내 아내와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어. 내가 한 짓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강지찬의 눈빛이 깊어졌다. “전 당신처
임미연은 겁에 질린 듯, 온몸이 흔들리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보였다.“언니가 나를 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내 뱃속의 아이는 아무 죄도 없어요. 나 정말 무서워요.”“그럼 지찬 씨를 찾아가요.” 정유진이 말했다.“누군가 제 아이를 이용하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찬 오빠한테는 못 가고, 언니한테 왔어요.”임미연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둘 다 여자잖아요. 언니도 한 아이 엄마니까 절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정유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날 의심하는 거예요?”임미연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분명 정유진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감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당신 뱃속 아이에도 관심 없고요.” 정유진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어요.”임미연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언니가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언니 외에 누가 이 아이를 신경 쓰겠어요? 언니는 이 아이가 태어나면 언니 딸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요.”정유진은 임미연을 바라보았다. 이제 강원훈이 감옥에 들어간 마당에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는 굳이 이 문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임미연에게 더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입을 열려는 순간 문 밖에서 여러 여자가 우르르 들어왔다.정유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임미연이 또 그녀의 고모 가족을 데리고 온 것이다.“준비를 잘하고 왔나 보네요.” 정유진은 약간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임미연은 마치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듯 가슴을 펴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언니, 날 탓하지 말아요. 나도 내 몸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러고는 돌아서서 그들에게 달려갔다. “여러분, 와주셨네요.”네 명의 여자가 임미연을 둘러싸고 정유진
임미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정유진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아이가 지찬 오빠 핏줄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걸까? 그렇다면 지찬 오빠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인가?’옆에 있던 사람들도 서로 당황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르신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유진, 똑바로 말해라. 네가 이 아이를 의심하고 있는 거냐?”정유진은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미연 씨가 아이를 낳고 나면 친자 확인을 해보면 될 거예요. 임미연 씨, 어때요?”임미연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모습을 본 큰며느리의 얼굴도 굳어졌다. 정유진의 차분한 태도를 보니 진실은 이미 명확해 보였다. 설마 이 아이가 강지찬의 자식이 아니라는 건가? 더 큰 문제는 그동안 이 아이가 강지찬의 아들이라 믿고 정유진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온 자신들이 너무 부끄러워졌다.큰며느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임미연에게 화살을 돌렸다. “미연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네 할머니는 널 아끼지만, 강씨 집안의 어르신이시기도 해. 혈통 문제에서는 절대로 너를 편 들지 않으실 거야. 빨리 사실을 말해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야.”임미연은 겁에 질려서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 아이는 정말로 지찬 오빠 아이예요. 제가, 제가 맹세할게요!”정유진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시간도 늦었고 이렇게 하죠. 제가 호텔에 식사를 예약해 둘게요. 고모할머니와 이모님들은 식사하시고 돌아가세요. 저는 죄송하지만 회사 일이 있어서 함께하지 못하겠네요.”그리고 임미연에게 덧붙였다. “아이 문제는 급할 필요 없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자연히 진실이 밝혀지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미연 씨를 미행하고 있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 거예요.”그 말을 남기고 정유진은 미소를 짓고 일어났다. 임우연에게 마무리를 부탁한 뒤 그녀는 회사를 나섰다.“...”정유진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정유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압도적인 기세를 보여줬고 그들이 한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오늘도 또 그 사람들이 귀찮게 했어?” 강지찬이 정유진을 품에 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유진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 해결됐어요.” “우리 아내가 점점 더 대단해지네. 이거 어쩌면 좋지? 평생 너한테 기대고 싶을 지경이야.” 정유진은 그제야 째려보며 말했다. “너무 오버하지 마요.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데 나 정말 정신없어요.” 강지찬은 사랑하는 아내의 허리를 놓고 싶지 않은 듯, 계속 붙들고 있었다. “며칠만 더 참아줘. 드러난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로 움직이면 더 수월해질 거야.” 정유진은 그가 나름의 계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당연히 지지했다.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강지찬이 연우만 집에 있는 것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지아는 아직도 안 들어왔어?” 정유진은 설명했다. “원준 씨가 교통사고가 났잖아요. 그래서 병원에서 간호 중이에요.” 강지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정유진에게 물었다. “며칠 후에 있을 온씨 집안 생신 연회, 옷은 준비됐어?” “오늘 도착했어요. 아직 지아는 입어보지 않았지만요.” 이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의 표정이 모두 무거워졌다. 최신애의 생일에 강지아가 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다. 다음 날, 강지아는 집에 돌아왔고 정유진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냈다. “갈 거예요. 왜 안 가겠어요.” 강지아가 과일을 먹으며 말했다. “안 가면 사람들이 내가 쫄았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정유진은 그녀에게 주의를 줬다. “그때 유정 씨가 분명히 있을 거야.” “있으면 있는 거죠, 뭐.” 강지아는 마음의 준비를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최신애가 마치 미래 며느리를 소개하듯 주유정과 팔짱을 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생각만큼 대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정유진은 그녀의 얼굴빛이 달라진 걸 보고 살며시 손을 잡아줬다. “언
강지아가 허리를 굽혀 연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 그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두 여자 중 한 명은 매우 당황한 표정을, 다른 한 명은 ‘내가 잘못 말했나? 뭐 어쩌라고’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큰 편이었고 강지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마주 보고 있는 여자들보다 반 머리 정도 더 컸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정유진이 귀찮게 구는 사람들을 대할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담담한 표정.그래서 그녀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역시 어린 탓에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경멸의 기색이 묻어났다.“내가 바보라고? 그럼 남 뒤에서 험담하는 당신들은 뭐지? 교양 없는 애들인가?”이 두 소녀도 모두 서울의 유명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교양 없다는 말을 듣는 건 매우 창피한 일이었다.문제는 그들이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남 뒤에서 말하다 현장에서 들킨 거니까.“너,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 유한 오빠는 널 싫어해. 오빠는 줄곧 유정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이 말은 최근 강지아의 머릿속을 수없이 맴돌던 말이었기에 그녀에겐 별로 상처가 되지 않았다.“온유한이 주유정을 기다리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강지아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온유한을 좋아한다고 했어? 울면서 온유한과 결혼하고 싶다고 한 적 있어? 이 세상에 온유한만 남자인 것도 아니고.”두 소녀는 그녀의 날카로운 반박에 할 말을 잃고 치마를 들고 도망쳤다.강지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다.이때 치마가 연우에 의해 살짝 당겨졌다.“연우, 방금 고모 멋있었지?”연우는 옆을 가리키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치즈스틱 드실래요?”“!!”온유한은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다 들은 것 같았다.뭐 들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강지아는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연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