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뒤집어쓴 강원훈은 화도 내지 않았다.담담한 얼굴로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으려 할 때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침울한 얼굴로 걸어 들어온 강지현은 강원훈의 옷에 커피가 묻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멱살을 잡고 한 방 먹였다.얻어맞은 강원훈은 강지현과 정유진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이봐, 너에게 남자가 이렇게 많은데 나 하나 더 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그 말을 들은 강지현은 다시 달려들어 때리려 했지만 강원훈은 미리 준비하고 바로 피했다.“지현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뭘 그렇게 화를 내? 잊지 마. 우리야말로 강씨 집안의 사람이고 K그룹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꺼져!”강지현은 너무 화가 났는지 창백했던 얼굴이 시뻘게졌다.강원훈은 그제야 얼굴에 묻은 커피를 닦은 뒤 옷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정유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3일의 시간을 줄게. 고남준과 협력하면 영상을 돌려줄게.”말을 마친 뒤 온몸이 엉망진창인 채로 쿨하게 떠났다.강지현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요? 유진 씨, 무슨 일 있어요?”정유진은 지금 이 사람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대했다.“강지현 씨도 이만 가세요.”강원훈이 초라하게 대표이사실을 나왔다는 말은 이내 최의현과 임우연의 귀에 들어갔고 두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괜찮아요. 다툼이 좀 있었던 것뿐이에요.”정유진은 그런 일을 쉽게 입에 담기 어려워 가볍게 설명했다.최의현과 임우연은 눈을 마주치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저녁에 최의현과 한규진은 임우연까지 불러 술을 마셨다.이미 호텔 CCTV를 확보한 임우연은 한규진과 경은우에게 보여주었다.추호가 갑자기 찾아와 정유진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CCTV에 그대로 포착되었다.오해인 줄은 알지만 이런 일은 여자들에게 아무래도 좋지 않은 것이고 정유진이 추호을 완전히 밀어낸 것도 아닌 데다가 CCTV가 멀리 있어 두 사람 사이가 애매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쉽지 않겠는데.”한규진이
중요한 시점에 터진 엄제후의 스캔들 때문에 결국 남우주연상은 다른 사람이 받게 되었다.현장 카메라에 잡힌 엄제후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매니저가 주의를 줘서야 정신을 차렸다.엄제후는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떴고 차에 오른 그는 얼굴빛이 완전히 굳었다.비서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말했다.“형,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어요.”휴대전화 너머의 사람은 추호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추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다시는 너희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남준이 요즘 내 눈에 너무 띄어. 엄제후, 한 배우가 일생에 몇 편의 대히트작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남우주연상을 뺏겼으니 화 많이 나지? 지금 황제처럼 떠받들려 살다가 하루아침에 지하실로 옮기면 아마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할 거야!”엄제후는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 작은 만두와 간단한 냉채로 끼니를 때우던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러나 추호가 겁내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당시 고남준을 꼬시기 위해 다른 커플을 갈라놓은 것은 사실이었고 온갖 떳떳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한 것을 추호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이 일이 터지면 그는 절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추호가 전화를 끊자 엄제후는 바로 고남준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고남준도 실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추호가 엄제후의 남우주연상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도 친아버지에게 욕설을 들었다.엄청난 돈을 주고 실검을 내린 고남준은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부쉈다.오늘 최의현과 시내에서 회의를 한 정유진은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추호가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비서를 통해 전해 들었다.녀석은 빳빳한 정장 차림에 매우 활기차 보였다.“누나, 이 일은 내가 해결했어요.”최의현은 ‘쓰읍’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확실히 고남준을 건드린 것 같은데 복수하면 어쩌려고요?”입을 삐죽거린 추호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어찌 무섭지 않겠는가?하지만 정유진을 도운 것이기에 추민해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요즘 기분이 좋지 않은 강지아는 강지찬이 사고 난 후부터 계속 집에 숨어 있었다. 원래 하려던 스튜디오도 그만두고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 개의 큰 전시회도 연이어 미뤘다.정유진도 그녀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온 선생님과 싸웠어?”강지아의 말이라면 온유한은 전부 들어줬는데 말다툼이라니? 조금 놀라울 뿐이다.정유진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강지아는 무릎을 껴안고 그녀의 몸에 기대며 말했다.“새언니가 부러워요.”“내가 왜 부러워?”“오빠가 첫사랑도 없고 평생 언니 한 사람만 좋아하니까요.”그 말을 들은 정유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예전에 온미정이 그랬다. 강지찬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고. 성격이 난폭하고 강해서 어렵게 마음이 움직여도 별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그렇게 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겼다고 했다.정유진은 강지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온유한이...”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는 강지아는 언급하기 싫은 모양이었다.날이 갈수록 강지찬은 점점 더 소식이 없다.하지만 정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사건 발생지 인근의 크고 작은 마을의 병원을 계속 찾아다녔다.강지찬을 찾지 못했지만 비딩 날짜는 결국 다가왔다.이사회는 고남준 때문에 다시 의견이 두 개로 나뉘었다. 강원훈을 대표로 하는 팀은 고남준과의 협업을 적극 지지했고 정유진 측은 당연히 반대했다.양측은 회의실에서 매우 심하게 말다툼했고 성격이 나쁜 한 어르신은 찻잔을 깨뜨렸다.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정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매우 신기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들의 감정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조예원이 그녀가 차갑고 무정하다고 했던가? 사실 맞는 말이다.지금 이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강원훈의 연기를 보면서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그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녀는 절대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회의가 끝난 후, 다른 주주들은 모두 떠났고 회의실에는 강씨
“모두 비켜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요!”강지현이 정유진을 안고 회의실에서 뛰쳐나오자 대표이사실 사람들은 당황했다.“정 대표님. 왜 그래요? 어떡해. 피가 많이 났어요!”“다들 멀리 비켜요.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요. 119는 불렀어요?”“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119죠, 여기는...”정유진이 눈을 질끈 감자 한 경호원이 깨끗한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려줬다.강지현이 너무 빨리 뛰어서 비서가 못 따라갈 뻔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유진을 우르르 에워싸고 내려왔다.회의실에서 최의현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강원훈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왜 진작 몰랐던 것일까?그저 돈이 많고 한가한 바람둥이가 되려 한다고만 생각했지 이 사람이 이렇게 욕심을 부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강원훈 씨, 형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끝장내줄 테니 기다리세요.”최의현은 휴대전화를 들고 서둘러 쫓아갔다.태안 병원.조유진이 마침 검사 결과를 손에 든 채 나오고 있었다. 재검사에서 아기의 머릿속에 있던 낭종이 모두 흡수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기뻐서 울 뻔했다.초음파상 아기는 잘 크고 있었고 다른 검사 데이터도 모두 정상이었다.옅은 한숨을 내쉰 조예원은 드디어 아기를 안심하고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바로 그때 구급차 한 대가 건물 입구에 멈춰 섰다.강지현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의사를 도와 정유진을 밀어냈다.“비켜요. 비켜요.”응급의료진이 몰려오자 조예원은 한쪽으로 물러섰다.강지현이 바퀴 달린 침대를 밀며 한눈도 팔지 않고 지나갔다.‘정유진이 다쳤네...’강지현은 정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조유진은 마치 공기처럼 아무런 존재감 없이 서 있었다.손에 쥔 보고서를 움켜쥔 조예원은 손톱의 날카로운 따끔거림에 겨우 냉정함을 유지했다.잠시 후 조예원이 돌아서서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정유진은 이미 검사하러 들어갔고 강지현은 밖에서 기다리며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머리를 부딪친 탓에 정유진은 가벼운 뇌진탕으로 병상에 누워도 어지러움을 느꼈다.이마에 거즈를 감고 있는 곳이 지금은 매우 아프다.“유진 씨, 괜찮아요? 상처가 많이 아파요? 물 좀 드실래요?”정유진이 대답했다.“아니요. 고마워요.”이곳에 있던 최의현, 온유한 그리고 소미는 강지현의 남다른 관심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약삭빠른 소미는 얼른 강지현을 밀어내며 말했다.“흑흑, 정 대표님. 깜짝 놀랐잖아요. 어떻게 가장 소중한 머리를 다쳐요. 흉터가 남으면 안 될 텐데...”“흉터가 남아도 상관없어요.”정유진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자 소미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여러분, 먼저 들어가세요. 여기에 있어도 도움이 되지 못하잖아요. 제가 정 대표님 옆에 있을 거예요.”이 큰 남자들이 여기에 있어봤자 확실히 소용이 없다. 회사 일이 많은 최의현이 먼저 자리를 떴다.아직 출근 중인 온유한은 이따가 다시 보러 오겠다고 했다.소미는 떠나기 싫어하는 강지현을 보고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뭐, 정 대표님이 자고 싶어 하니 강 대표님도 먼저 가는 게 어떨까요?”강지현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푹 쉬고 회사 일은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가 간 후, 소미는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핸드폰이 계속 울려서 꺼내 보니 K그룹 쪽에 있는 그녀의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내용을 본 소미는 말문이 막혔고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말해봐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정유진은 너무 힘들어 관자놀이를 주물렀고 속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소미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K그룹 쪽의 그 말 많은 사람들이 또 헛소리를 하니까 그러죠.”오늘 강지현은 정유진을 안고 옥상에서부터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긴 했지만 로비에서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강지현이 정유진을 좋아한다는 것은 K그룹에서도 비밀이 아니다.정유진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조금 궁금했다.“사람들이 뭐라고 하는데요?”소미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정
정유진이 잠에서 깼을 때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잠을 자고 나니 확실히 많이 좋아졌고 머리도 어지럽지 않았다.침대를 짚고 일어나자 옆방에 있던 강지아와 소미가 달려왔다.“새언니, 일어났어요?”“정 대표님, 깼어요? 먹을 것 좀 사 올게요.”정유진을 따라다니며 소미의 일 처리가 더 날렵해졌다. 정유진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강지아도 아주 눈치 있게 등 뒤에 베개를 놓고는 몸을 기대었다.“왜 왔어?”강지아는 시뻘게진 눈시울로 대답했다.“강지현이 병원에 와서 같이 있어 주라고 했어요. 새언니 부모님에게는 다친 거 말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혹시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요.”“나 이제 괜찮아.”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을 잡고 말했다.“새언니, 절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요. 이제 나에게는 언니와 연우밖에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많이 놀란 이 계집애 때문에 정유진도 답답해서 병이 날까 봐 걱정이었다.“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겁내지 마.”“정말 셋째 아버지가 그런 거예요? 오빠에게 일이 생기니까 모두 다 달라졌어요. 너무 끔찍해요. 다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이게 바로 인간성이야.”정유진이 말했다.바로 돌아온 소미는 정유진에게 저녁 식사 외에 강지아와 함께 먹을 야식 두 가지를 가져왔다.저녁을 못 먹은 강지아에게는 배를 채우기 딱 좋았다.여자 셋이 야식을 먹고 짐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의사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정 대표님, 주사 맞을 시간입니다.”소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늦은 시간에 주사를 맞으라고요?”남자 의사는 안경과 마스크를 쓴 채 주사를 준비하며 말했다.“이 주사는 이때 맞아야 해요. 조 주임이 처방한 약이에요.”조 주임은 외상의학과 주임 의사이고 정유진도 잘 알고 있다. 이 병원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의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유진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할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잠깐만요.”강지현을
남자 의사의 일은 병원과 따로 따지기로 하고 정유진은 다음날 퇴원했다.일이 너무 많아서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음모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강원훈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정오가 다 되어서야 회사에 출근했다.대표이사실에 와서 정유진에게 몸이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어젯밤에 사고가 좀 났어. 유진아, 그래도 조심해.”사무실에 있는 임우연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모두가 이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고 의심했지만 어젯밤 붙잡힌 그 의사는 진수한이 시킨 짓이라고 딱 잡아뗐다.진수한이 누구냐면 바로 한빈과 함께 K그룹의 돈을 빼돌리려 했다가 강지찬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간 K그룹 전 재무이사 진영식의 아들이다.지금 감옥에서 생활하는 진씨 부자는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강원훈에게 언급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정말 뻔뻔하다!정유진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걱정해줘서 고맙고 나중에 고 대표님 만나면 죄송하다는 말씀 좀 전해주세요. 우리 K그룹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아 비딩에서는 떨어졌지만 다음에 또 협력할 수 있으니까요.”강원훈의 안색이 잔뜩 어두워졌다.“정말 끝까지 고집부릴 거야?”정유진이 말했다.“나 혼자의 결정이 아니잖아요. 내 편을 드는 주주들이 적지 않은 만큼 공정하고 공평하게 내린 결정이에요.”강원훈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래, 좋아. 본성과 능력은 강지찬과 똑같을 줄 몰랐네. 강압적일수록 통하지 않아.”강지찬과 똑같다는 말을 정유진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부부니까 당연히 닮았겠죠.”정유진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 강원훈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임우연이 들어와 말했다.“정 대표님, 저 사람들이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오늘이라도 비딩 결과를 발표하는 게 어떨까요.”정유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어차피 결과가 나왔으니 지금 발표하는 게 낫다.강원훈이 이제 그녀를 어떻게 압박할지 보고 싶기도 했다.K그룹이 이날 오후 비딩 결과를 통보하자 화가 난 고남준은 귀한 다기 세트를 깨뜨렸다.
반년 후.회의가 끝난 뒤 정유진은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자 여유롭게 전국 각지에서 온 거물들과 인사를 나눴다.그녀는 회의장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여성 대표이사이다.예쁜 여자는 항상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흩어졌을 때 고창원이 다가왔다.“정 대표님, 반가워요.”“고 회장님, 안녕하세요.”고창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나를 알아요?”정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그의 아들과 철천지원수인데 어찌 철천지원수의 아버지를 모를 수 있겠는가?고창원 역시 강지찬의 전 재산을 손에 넣고 망나니 아들이 서울에서 무모한 짓을 하게 만든 여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했다.오늘 정유진을 본 순간 고창원은 망나니 아들이 눈앞의 이런 여자를 좋아한다면 고씨 집안이 적어도 백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임우연과 함께 회의장을 나선 후 정유진은 몇몇 기자들에게 가로막혀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가까스로 겹겹이 에워싼 사람들을 뚫고 차에 오르자 임우연이 다음 스케쥴을 말했다.“방송국의 취재가 30분 후에 시작하니 서둘러 가야 합니다. 오후 인터뷰는 2시간 예정이고 5시에 비상윈드테크의 회장님과 석식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가족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아이들을 위해 간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임우연이 서둘러 인터뷰 내용을 건네자 정유진은 대충 훑어본 후 말했다.“남자아이예요? 아니면 여자아이예요? 몇 살이에요?”“여자아이입니다. 열 살쯤 됐어요.”“팔찌를 사 오세요.”“알겠습니다.”쉴 새 없이 호텔로 돌아오자 경제 채널 스태프들은 이미 녹화 준비를 마친 채 정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인터뷰는 경제 채널에 게재될 예정으로 방금 회의에 참석한 정유진의 메이크업은 오늘 컨셉과 완벽히 맞아떨어져 간단하게 화장을 수정한 후 녹화를 시작했다.오전 업무가 끝나니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났다.방에 들어오자마자 호텔 종업원이 음식을 밀고 들어왔고 그 뒤를 강지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