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분이 좋지 않은 강지아는 강지찬이 사고 난 후부터 계속 집에 숨어 있었다. 원래 하려던 스튜디오도 그만두고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 개의 큰 전시회도 연이어 미뤘다.정유진도 그녀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온 선생님과 싸웠어?”강지아의 말이라면 온유한은 전부 들어줬는데 말다툼이라니? 조금 놀라울 뿐이다.정유진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강지아는 무릎을 껴안고 그녀의 몸에 기대며 말했다.“새언니가 부러워요.”“내가 왜 부러워?”“오빠가 첫사랑도 없고 평생 언니 한 사람만 좋아하니까요.”그 말을 들은 정유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예전에 온미정이 그랬다. 강지찬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고. 성격이 난폭하고 강해서 어렵게 마음이 움직여도 별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그렇게 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겼다고 했다.정유진은 강지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온유한이...”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는 강지아는 언급하기 싫은 모양이었다.날이 갈수록 강지찬은 점점 더 소식이 없다.하지만 정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사건 발생지 인근의 크고 작은 마을의 병원을 계속 찾아다녔다.강지찬을 찾지 못했지만 비딩 날짜는 결국 다가왔다.이사회는 고남준 때문에 다시 의견이 두 개로 나뉘었다. 강원훈을 대표로 하는 팀은 고남준과의 협업을 적극 지지했고 정유진 측은 당연히 반대했다.양측은 회의실에서 매우 심하게 말다툼했고 성격이 나쁜 한 어르신은 찻잔을 깨뜨렸다.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정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매우 신기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들의 감정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조예원이 그녀가 차갑고 무정하다고 했던가? 사실 맞는 말이다.지금 이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강원훈의 연기를 보면서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그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녀는 절대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회의가 끝난 후, 다른 주주들은 모두 떠났고 회의실에는 강씨
“모두 비켜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요!”강지현이 정유진을 안고 회의실에서 뛰쳐나오자 대표이사실 사람들은 당황했다.“정 대표님. 왜 그래요? 어떡해. 피가 많이 났어요!”“다들 멀리 비켜요.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요. 119는 불렀어요?”“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119죠, 여기는...”정유진이 눈을 질끈 감자 한 경호원이 깨끗한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려줬다.강지현이 너무 빨리 뛰어서 비서가 못 따라갈 뻔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유진을 우르르 에워싸고 내려왔다.회의실에서 최의현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강원훈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왜 진작 몰랐던 것일까?그저 돈이 많고 한가한 바람둥이가 되려 한다고만 생각했지 이 사람이 이렇게 욕심을 부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강원훈 씨, 형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끝장내줄 테니 기다리세요.”최의현은 휴대전화를 들고 서둘러 쫓아갔다.태안 병원.조유진이 마침 검사 결과를 손에 든 채 나오고 있었다. 재검사에서 아기의 머릿속에 있던 낭종이 모두 흡수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기뻐서 울 뻔했다.초음파상 아기는 잘 크고 있었고 다른 검사 데이터도 모두 정상이었다.옅은 한숨을 내쉰 조예원은 드디어 아기를 안심하고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바로 그때 구급차 한 대가 건물 입구에 멈춰 섰다.강지현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의사를 도와 정유진을 밀어냈다.“비켜요. 비켜요.”응급의료진이 몰려오자 조예원은 한쪽으로 물러섰다.강지현이 바퀴 달린 침대를 밀며 한눈도 팔지 않고 지나갔다.‘정유진이 다쳤네...’강지현은 정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조유진은 마치 공기처럼 아무런 존재감 없이 서 있었다.손에 쥔 보고서를 움켜쥔 조예원은 손톱의 날카로운 따끔거림에 겨우 냉정함을 유지했다.잠시 후 조예원이 돌아서서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정유진은 이미 검사하러 들어갔고 강지현은 밖에서 기다리며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머리를 부딪친 탓에 정유진은 가벼운 뇌진탕으로 병상에 누워도 어지러움을 느꼈다.이마에 거즈를 감고 있는 곳이 지금은 매우 아프다.“유진 씨, 괜찮아요? 상처가 많이 아파요? 물 좀 드실래요?”정유진이 대답했다.“아니요. 고마워요.”이곳에 있던 최의현, 온유한 그리고 소미는 강지현의 남다른 관심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약삭빠른 소미는 얼른 강지현을 밀어내며 말했다.“흑흑, 정 대표님. 깜짝 놀랐잖아요. 어떻게 가장 소중한 머리를 다쳐요. 흉터가 남으면 안 될 텐데...”“흉터가 남아도 상관없어요.”정유진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자 소미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여러분, 먼저 들어가세요. 여기에 있어도 도움이 되지 못하잖아요. 제가 정 대표님 옆에 있을 거예요.”이 큰 남자들이 여기에 있어봤자 확실히 소용이 없다. 회사 일이 많은 최의현이 먼저 자리를 떴다.아직 출근 중인 온유한은 이따가 다시 보러 오겠다고 했다.소미는 떠나기 싫어하는 강지현을 보고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뭐, 정 대표님이 자고 싶어 하니 강 대표님도 먼저 가는 게 어떨까요?”강지현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푹 쉬고 회사 일은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가 간 후, 소미는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핸드폰이 계속 울려서 꺼내 보니 K그룹 쪽에 있는 그녀의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내용을 본 소미는 말문이 막혔고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말해봐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정유진은 너무 힘들어 관자놀이를 주물렀고 속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소미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K그룹 쪽의 그 말 많은 사람들이 또 헛소리를 하니까 그러죠.”오늘 강지현은 정유진을 안고 옥상에서부터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긴 했지만 로비에서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강지현이 정유진을 좋아한다는 것은 K그룹에서도 비밀이 아니다.정유진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조금 궁금했다.“사람들이 뭐라고 하는데요?”소미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정
정유진이 잠에서 깼을 때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잠을 자고 나니 확실히 많이 좋아졌고 머리도 어지럽지 않았다.침대를 짚고 일어나자 옆방에 있던 강지아와 소미가 달려왔다.“새언니, 일어났어요?”“정 대표님, 깼어요? 먹을 것 좀 사 올게요.”정유진을 따라다니며 소미의 일 처리가 더 날렵해졌다. 정유진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강지아도 아주 눈치 있게 등 뒤에 베개를 놓고는 몸을 기대었다.“왜 왔어?”강지아는 시뻘게진 눈시울로 대답했다.“강지현이 병원에 와서 같이 있어 주라고 했어요. 새언니 부모님에게는 다친 거 말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혹시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요.”“나 이제 괜찮아.”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을 잡고 말했다.“새언니, 절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요. 이제 나에게는 언니와 연우밖에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많이 놀란 이 계집애 때문에 정유진도 답답해서 병이 날까 봐 걱정이었다.“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겁내지 마.”“정말 셋째 아버지가 그런 거예요? 오빠에게 일이 생기니까 모두 다 달라졌어요. 너무 끔찍해요. 다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이게 바로 인간성이야.”정유진이 말했다.바로 돌아온 소미는 정유진에게 저녁 식사 외에 강지아와 함께 먹을 야식 두 가지를 가져왔다.저녁을 못 먹은 강지아에게는 배를 채우기 딱 좋았다.여자 셋이 야식을 먹고 짐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의사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정 대표님, 주사 맞을 시간입니다.”소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늦은 시간에 주사를 맞으라고요?”남자 의사는 안경과 마스크를 쓴 채 주사를 준비하며 말했다.“이 주사는 이때 맞아야 해요. 조 주임이 처방한 약이에요.”조 주임은 외상의학과 주임 의사이고 정유진도 잘 알고 있다. 이 병원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의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유진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할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잠깐만요.”강지현을
남자 의사의 일은 병원과 따로 따지기로 하고 정유진은 다음날 퇴원했다.일이 너무 많아서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음모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강원훈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정오가 다 되어서야 회사에 출근했다.대표이사실에 와서 정유진에게 몸이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어젯밤에 사고가 좀 났어. 유진아, 그래도 조심해.”사무실에 있는 임우연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모두가 이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고 의심했지만 어젯밤 붙잡힌 그 의사는 진수한이 시킨 짓이라고 딱 잡아뗐다.진수한이 누구냐면 바로 한빈과 함께 K그룹의 돈을 빼돌리려 했다가 강지찬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간 K그룹 전 재무이사 진영식의 아들이다.지금 감옥에서 생활하는 진씨 부자는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강원훈에게 언급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정말 뻔뻔하다!정유진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걱정해줘서 고맙고 나중에 고 대표님 만나면 죄송하다는 말씀 좀 전해주세요. 우리 K그룹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아 비딩에서는 떨어졌지만 다음에 또 협력할 수 있으니까요.”강원훈의 안색이 잔뜩 어두워졌다.“정말 끝까지 고집부릴 거야?”정유진이 말했다.“나 혼자의 결정이 아니잖아요. 내 편을 드는 주주들이 적지 않은 만큼 공정하고 공평하게 내린 결정이에요.”강원훈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래, 좋아. 본성과 능력은 강지찬과 똑같을 줄 몰랐네. 강압적일수록 통하지 않아.”강지찬과 똑같다는 말을 정유진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부부니까 당연히 닮았겠죠.”정유진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 강원훈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임우연이 들어와 말했다.“정 대표님, 저 사람들이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오늘이라도 비딩 결과를 발표하는 게 어떨까요.”정유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어차피 결과가 나왔으니 지금 발표하는 게 낫다.강원훈이 이제 그녀를 어떻게 압박할지 보고 싶기도 했다.K그룹이 이날 오후 비딩 결과를 통보하자 화가 난 고남준은 귀한 다기 세트를 깨뜨렸다.
반년 후.회의가 끝난 뒤 정유진은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자 여유롭게 전국 각지에서 온 거물들과 인사를 나눴다.그녀는 회의장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여성 대표이사이다.예쁜 여자는 항상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흩어졌을 때 고창원이 다가왔다.“정 대표님, 반가워요.”“고 회장님, 안녕하세요.”고창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나를 알아요?”정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그의 아들과 철천지원수인데 어찌 철천지원수의 아버지를 모를 수 있겠는가?고창원 역시 강지찬의 전 재산을 손에 넣고 망나니 아들이 서울에서 무모한 짓을 하게 만든 여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했다.오늘 정유진을 본 순간 고창원은 망나니 아들이 눈앞의 이런 여자를 좋아한다면 고씨 집안이 적어도 백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임우연과 함께 회의장을 나선 후 정유진은 몇몇 기자들에게 가로막혀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가까스로 겹겹이 에워싼 사람들을 뚫고 차에 오르자 임우연이 다음 스케쥴을 말했다.“방송국의 취재가 30분 후에 시작하니 서둘러 가야 합니다. 오후 인터뷰는 2시간 예정이고 5시에 비상윈드테크의 회장님과 석식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가족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아이들을 위해 간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임우연이 서둘러 인터뷰 내용을 건네자 정유진은 대충 훑어본 후 말했다.“남자아이예요? 아니면 여자아이예요? 몇 살이에요?”“여자아이입니다. 열 살쯤 됐어요.”“팔찌를 사 오세요.”“알겠습니다.”쉴 새 없이 호텔로 돌아오자 경제 채널 스태프들은 이미 녹화 준비를 마친 채 정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인터뷰는 경제 채널에 게재될 예정으로 방금 회의에 참석한 정유진의 메이크업은 오늘 컨셉과 완벽히 맞아떨어져 간단하게 화장을 수정한 후 녹화를 시작했다.오전 업무가 끝나니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났다.방에 들어오자마자 호텔 종업원이 음식을 밀고 들어왔고 그 뒤를 강지
누군가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는 정유진을 찍었는데 사진에는 온통 그녀와 강지현뿐이었다.이 사진들 말고도 조예원의 것도 있다.조예원은 평소처럼 혼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고통스럽게 배를 끌어안고 누워있었다.폭로자는 조예원의 몸에 핏물이 맺히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주차장에 아무도 없었고 조예원은 점점 더 아파지는 심한 자궁 수축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첫 번째 전화를 아무도 받지 않자 조예원은 실망한 듯 핸드폰을 쳐다보더니 이를 악물고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전화하자마자 경비원이 그녀를 발견했고 곧 의사와 간호사가 침대를 밀고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검색어 댓글은 온통 정유진과 강지현을 향한 욕뿐이었다.“남자가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묶었어야지.”“남편이 죽으니 절친의 남편을 빼앗았어. 천한 년, 어쩜 남자를 떠나지 못해?”“시동생과 형수의 사랑, 역겨워!”“불쌍한 여자야. 혼자 산부인과 가고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은 밖에서 다른 여자와 출장을 갔어.”“내연녀가 어떻게 미녀 대표이사가 된 거야? 침대에서 아주 활기차나 봐? 정유진, 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정유진은 누리꾼들의 욕설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온미정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예원이 아들을 낳았고 모자가 무사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그런데...”휴대전화 너머의 온미정은 문을 닫고서야 말했다.“조예원이 사고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친 것 같아. 경찰에 신고했어.”정유진은 순간 멍해졌다.이때 온미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번 일도 아마 너를 노리고 한 것 같아. 실검 봤지? 정보가 그렇게 빨리 새어나간 것은 분명 진작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너의 대학 동창들까지 모두 드러났어. 배후에 분명 누군가가 있을 거야.”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정유진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평온해 보였다.“알겠어요. 제가 처리할게요. 내일 이모님과 아이를 보러 갈게요.”온미정의 아이는 귀여운 소녀로서 벌써 두 달이 되었다.옆에 있던 강지현은 전화
병실에 조예원만 있고 아이는 없었다.의자를 끌어당긴 강지현은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조예원의 마음은 이미 마취가 된 것처럼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낳을 때까지 이 남자에게 그 어떤 기대도 없었고 산부인과 정기 검진 한 번 같이 받아본 적이 없다.“강지현 씨, 할 말 없어요?”강지현은 말없이 일어나더니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조예원의 머리맡에 놓았다.“당신과 아이를 푸대접하지 않을게요.”강지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한마디 했다.“수고했어요.”이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하지만 강지현의 ‘수고했다'라는 몇 글자는 그녀에게 정말 큰 선물이었다.작은 기대를 안고 강지현을 보며 물었다.“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강지현이 대답했다.“남자든 여자든 내 한평생 유일한 핏줄이에요.”그러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가 이 사람의 핏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푹 쉬어요.”말을 마친 강지현은 이곳에 더 있을 의사가 없는 듯 밖으로 나갔다. 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조예원은 눈물을 흘렸다.침대 시트를 잡고 스스로에게 물었다.“왜?”왜 아무도 그녀의 건강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주차장에 혼자 누워있을 때 얼마나 절망에 빠졌는지 모른다.왜?다음날 강지현은 평소처럼 정유진을 따라 K그룹 건물로 들어가려다 장형준에게 제지당했다.“죄송합니다. 정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앞으로 주주총회가 없으면 회사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비켜.”하지만 장형준은 비켜주기는커녕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그는 강지현보다 키가 크고 힘도 더 셌기에 강지현 혼자 힘으로 그를 물리치기는 불가능했다.“둘째 도련님,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강지현도 무모하게 덤벼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어제 실검에 올랐으니 당분간은 곁을 잘 지켜야 할 거야.”장형준이 대답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모님을 보호할 테니.”장형준이 일부러 이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