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비켜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요!”강지현이 정유진을 안고 회의실에서 뛰쳐나오자 대표이사실 사람들은 당황했다.“정 대표님. 왜 그래요? 어떡해. 피가 많이 났어요!”“다들 멀리 비켜요.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요. 119는 불렀어요?”“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119죠, 여기는...”정유진이 눈을 질끈 감자 한 경호원이 깨끗한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려줬다.강지현이 너무 빨리 뛰어서 비서가 못 따라갈 뻔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유진을 우르르 에워싸고 내려왔다.회의실에서 최의현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강원훈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왜 진작 몰랐던 것일까?그저 돈이 많고 한가한 바람둥이가 되려 한다고만 생각했지 이 사람이 이렇게 욕심을 부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강원훈 씨, 형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끝장내줄 테니 기다리세요.”최의현은 휴대전화를 들고 서둘러 쫓아갔다.태안 병원.조유진이 마침 검사 결과를 손에 든 채 나오고 있었다. 재검사에서 아기의 머릿속에 있던 낭종이 모두 흡수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기뻐서 울 뻔했다.초음파상 아기는 잘 크고 있었고 다른 검사 데이터도 모두 정상이었다.옅은 한숨을 내쉰 조예원은 드디어 아기를 안심하고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바로 그때 구급차 한 대가 건물 입구에 멈춰 섰다.강지현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의사를 도와 정유진을 밀어냈다.“비켜요. 비켜요.”응급의료진이 몰려오자 조예원은 한쪽으로 물러섰다.강지현이 바퀴 달린 침대를 밀며 한눈도 팔지 않고 지나갔다.‘정유진이 다쳤네...’강지현은 정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조유진은 마치 공기처럼 아무런 존재감 없이 서 있었다.손에 쥔 보고서를 움켜쥔 조예원은 손톱의 날카로운 따끔거림에 겨우 냉정함을 유지했다.잠시 후 조예원이 돌아서서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정유진은 이미 검사하러 들어갔고 강지현은 밖에서 기다리며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머리를 부딪친 탓에 정유진은 가벼운 뇌진탕으로 병상에 누워도 어지러움을 느꼈다.이마에 거즈를 감고 있는 곳이 지금은 매우 아프다.“유진 씨, 괜찮아요? 상처가 많이 아파요? 물 좀 드실래요?”정유진이 대답했다.“아니요. 고마워요.”이곳에 있던 최의현, 온유한 그리고 소미는 강지현의 남다른 관심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약삭빠른 소미는 얼른 강지현을 밀어내며 말했다.“흑흑, 정 대표님. 깜짝 놀랐잖아요. 어떻게 가장 소중한 머리를 다쳐요. 흉터가 남으면 안 될 텐데...”“흉터가 남아도 상관없어요.”정유진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자 소미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여러분, 먼저 들어가세요. 여기에 있어도 도움이 되지 못하잖아요. 제가 정 대표님 옆에 있을 거예요.”이 큰 남자들이 여기에 있어봤자 확실히 소용이 없다. 회사 일이 많은 최의현이 먼저 자리를 떴다.아직 출근 중인 온유한은 이따가 다시 보러 오겠다고 했다.소미는 떠나기 싫어하는 강지현을 보고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뭐, 정 대표님이 자고 싶어 하니 강 대표님도 먼저 가는 게 어떨까요?”강지현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푹 쉬고 회사 일은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가 간 후, 소미는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핸드폰이 계속 울려서 꺼내 보니 K그룹 쪽에 있는 그녀의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내용을 본 소미는 말문이 막혔고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말해봐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정유진은 너무 힘들어 관자놀이를 주물렀고 속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소미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K그룹 쪽의 그 말 많은 사람들이 또 헛소리를 하니까 그러죠.”오늘 강지현은 정유진을 안고 옥상에서부터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긴 했지만 로비에서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강지현이 정유진을 좋아한다는 것은 K그룹에서도 비밀이 아니다.정유진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조금 궁금했다.“사람들이 뭐라고 하는데요?”소미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정
정유진이 잠에서 깼을 때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잠을 자고 나니 확실히 많이 좋아졌고 머리도 어지럽지 않았다.침대를 짚고 일어나자 옆방에 있던 강지아와 소미가 달려왔다.“새언니, 일어났어요?”“정 대표님, 깼어요? 먹을 것 좀 사 올게요.”정유진을 따라다니며 소미의 일 처리가 더 날렵해졌다. 정유진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강지아도 아주 눈치 있게 등 뒤에 베개를 놓고는 몸을 기대었다.“왜 왔어?”강지아는 시뻘게진 눈시울로 대답했다.“강지현이 병원에 와서 같이 있어 주라고 했어요. 새언니 부모님에게는 다친 거 말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혹시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요.”“나 이제 괜찮아.”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을 잡고 말했다.“새언니, 절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요. 이제 나에게는 언니와 연우밖에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많이 놀란 이 계집애 때문에 정유진도 답답해서 병이 날까 봐 걱정이었다.“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겁내지 마.”“정말 셋째 아버지가 그런 거예요? 오빠에게 일이 생기니까 모두 다 달라졌어요. 너무 끔찍해요. 다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이게 바로 인간성이야.”정유진이 말했다.바로 돌아온 소미는 정유진에게 저녁 식사 외에 강지아와 함께 먹을 야식 두 가지를 가져왔다.저녁을 못 먹은 강지아에게는 배를 채우기 딱 좋았다.여자 셋이 야식을 먹고 짐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의사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정 대표님, 주사 맞을 시간입니다.”소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늦은 시간에 주사를 맞으라고요?”남자 의사는 안경과 마스크를 쓴 채 주사를 준비하며 말했다.“이 주사는 이때 맞아야 해요. 조 주임이 처방한 약이에요.”조 주임은 외상의학과 주임 의사이고 정유진도 잘 알고 있다. 이 병원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의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유진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할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잠깐만요.”강지현을
남자 의사의 일은 병원과 따로 따지기로 하고 정유진은 다음날 퇴원했다.일이 너무 많아서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음모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강원훈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정오가 다 되어서야 회사에 출근했다.대표이사실에 와서 정유진에게 몸이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어젯밤에 사고가 좀 났어. 유진아, 그래도 조심해.”사무실에 있는 임우연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모두가 이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고 의심했지만 어젯밤 붙잡힌 그 의사는 진수한이 시킨 짓이라고 딱 잡아뗐다.진수한이 누구냐면 바로 한빈과 함께 K그룹의 돈을 빼돌리려 했다가 강지찬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간 K그룹 전 재무이사 진영식의 아들이다.지금 감옥에서 생활하는 진씨 부자는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강원훈에게 언급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정말 뻔뻔하다!정유진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걱정해줘서 고맙고 나중에 고 대표님 만나면 죄송하다는 말씀 좀 전해주세요. 우리 K그룹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아 비딩에서는 떨어졌지만 다음에 또 협력할 수 있으니까요.”강원훈의 안색이 잔뜩 어두워졌다.“정말 끝까지 고집부릴 거야?”정유진이 말했다.“나 혼자의 결정이 아니잖아요. 내 편을 드는 주주들이 적지 않은 만큼 공정하고 공평하게 내린 결정이에요.”강원훈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래, 좋아. 본성과 능력은 강지찬과 똑같을 줄 몰랐네. 강압적일수록 통하지 않아.”강지찬과 똑같다는 말을 정유진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부부니까 당연히 닮았겠죠.”정유진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 강원훈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임우연이 들어와 말했다.“정 대표님, 저 사람들이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오늘이라도 비딩 결과를 발표하는 게 어떨까요.”정유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어차피 결과가 나왔으니 지금 발표하는 게 낫다.강원훈이 이제 그녀를 어떻게 압박할지 보고 싶기도 했다.K그룹이 이날 오후 비딩 결과를 통보하자 화가 난 고남준은 귀한 다기 세트를 깨뜨렸다.
반년 후.회의가 끝난 뒤 정유진은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자 여유롭게 전국 각지에서 온 거물들과 인사를 나눴다.그녀는 회의장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여성 대표이사이다.예쁜 여자는 항상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흩어졌을 때 고창원이 다가왔다.“정 대표님, 반가워요.”“고 회장님, 안녕하세요.”고창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나를 알아요?”정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그의 아들과 철천지원수인데 어찌 철천지원수의 아버지를 모를 수 있겠는가?고창원 역시 강지찬의 전 재산을 손에 넣고 망나니 아들이 서울에서 무모한 짓을 하게 만든 여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했다.오늘 정유진을 본 순간 고창원은 망나니 아들이 눈앞의 이런 여자를 좋아한다면 고씨 집안이 적어도 백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임우연과 함께 회의장을 나선 후 정유진은 몇몇 기자들에게 가로막혀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가까스로 겹겹이 에워싼 사람들을 뚫고 차에 오르자 임우연이 다음 스케쥴을 말했다.“방송국의 취재가 30분 후에 시작하니 서둘러 가야 합니다. 오후 인터뷰는 2시간 예정이고 5시에 비상윈드테크의 회장님과 석식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가족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아이들을 위해 간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임우연이 서둘러 인터뷰 내용을 건네자 정유진은 대충 훑어본 후 말했다.“남자아이예요? 아니면 여자아이예요? 몇 살이에요?”“여자아이입니다. 열 살쯤 됐어요.”“팔찌를 사 오세요.”“알겠습니다.”쉴 새 없이 호텔로 돌아오자 경제 채널 스태프들은 이미 녹화 준비를 마친 채 정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인터뷰는 경제 채널에 게재될 예정으로 방금 회의에 참석한 정유진의 메이크업은 오늘 컨셉과 완벽히 맞아떨어져 간단하게 화장을 수정한 후 녹화를 시작했다.오전 업무가 끝나니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났다.방에 들어오자마자 호텔 종업원이 음식을 밀고 들어왔고 그 뒤를 강지
누군가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는 정유진을 찍었는데 사진에는 온통 그녀와 강지현뿐이었다.이 사진들 말고도 조예원의 것도 있다.조예원은 평소처럼 혼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고통스럽게 배를 끌어안고 누워있었다.폭로자는 조예원의 몸에 핏물이 맺히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주차장에 아무도 없었고 조예원은 점점 더 아파지는 심한 자궁 수축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첫 번째 전화를 아무도 받지 않자 조예원은 실망한 듯 핸드폰을 쳐다보더니 이를 악물고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전화하자마자 경비원이 그녀를 발견했고 곧 의사와 간호사가 침대를 밀고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검색어 댓글은 온통 정유진과 강지현을 향한 욕뿐이었다.“남자가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묶었어야지.”“남편이 죽으니 절친의 남편을 빼앗았어. 천한 년, 어쩜 남자를 떠나지 못해?”“시동생과 형수의 사랑, 역겨워!”“불쌍한 여자야. 혼자 산부인과 가고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은 밖에서 다른 여자와 출장을 갔어.”“내연녀가 어떻게 미녀 대표이사가 된 거야? 침대에서 아주 활기차나 봐? 정유진, 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정유진은 누리꾼들의 욕설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온미정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예원이 아들을 낳았고 모자가 무사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그런데...”휴대전화 너머의 온미정은 문을 닫고서야 말했다.“조예원이 사고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친 것 같아. 경찰에 신고했어.”정유진은 순간 멍해졌다.이때 온미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번 일도 아마 너를 노리고 한 것 같아. 실검 봤지? 정보가 그렇게 빨리 새어나간 것은 분명 진작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너의 대학 동창들까지 모두 드러났어. 배후에 분명 누군가가 있을 거야.”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정유진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평온해 보였다.“알겠어요. 제가 처리할게요. 내일 이모님과 아이를 보러 갈게요.”온미정의 아이는 귀여운 소녀로서 벌써 두 달이 되었다.옆에 있던 강지현은 전화
병실에 조예원만 있고 아이는 없었다.의자를 끌어당긴 강지현은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조예원의 마음은 이미 마취가 된 것처럼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낳을 때까지 이 남자에게 그 어떤 기대도 없었고 산부인과 정기 검진 한 번 같이 받아본 적이 없다.“강지현 씨, 할 말 없어요?”강지현은 말없이 일어나더니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조예원의 머리맡에 놓았다.“당신과 아이를 푸대접하지 않을게요.”강지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한마디 했다.“수고했어요.”이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하지만 강지현의 ‘수고했다'라는 몇 글자는 그녀에게 정말 큰 선물이었다.작은 기대를 안고 강지현을 보며 물었다.“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강지현이 대답했다.“남자든 여자든 내 한평생 유일한 핏줄이에요.”그러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가 이 사람의 핏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푹 쉬어요.”말을 마친 강지현은 이곳에 더 있을 의사가 없는 듯 밖으로 나갔다. 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조예원은 눈물을 흘렸다.침대 시트를 잡고 스스로에게 물었다.“왜?”왜 아무도 그녀의 건강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주차장에 혼자 누워있을 때 얼마나 절망에 빠졌는지 모른다.왜?다음날 강지현은 평소처럼 정유진을 따라 K그룹 건물로 들어가려다 장형준에게 제지당했다.“죄송합니다. 정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앞으로 주주총회가 없으면 회사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비켜.”하지만 장형준은 비켜주기는커녕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그는 강지현보다 키가 크고 힘도 더 셌기에 강지현 혼자 힘으로 그를 물리치기는 불가능했다.“둘째 도련님,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강지현도 무모하게 덤벼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어제 실검에 올랐으니 당분간은 곁을 잘 지켜야 할 거야.”장형준이 대답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모님을 보호할 테니.”장형준이 일부러 이
강지찬이 돌아왔다!정유진은 강지찬을 붙잡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봤다.반년 넘게 소식이 없어서 정말로 죽은 줄 알았다...옆에 있는 장형준은 그녀보다 훨씬 더 흥분했고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더니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대표님, 드디어 오셨군요!”“언제 돌아온 거예요?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요?”“몸은 괜찮아요?”강지찬의 곁에서 수년간 함께했던 장형준은 눈시울을 붉혔다.강지찬의 시선은 정유진에게 꽂힌 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도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다녀왔어.”강지찬의 어조는 그 어떤 기복이 없었고 심지어 한기마저 느껴졌다.거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장형준은 순간 자리에 얼어붙었다.이때 뒤에서 달달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지찬 오빠, 여기 물 갖고 왔으니 약부터 드세요.”고개를 돌려보니 임미연이다.한 손에는 물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아랫배에 걸치고 있었다. 이 행동은...강지찬이 몇 발자국 다가서며 말했다.“이런 일은 하인에게 시켜. 왜 직접 뛰어다녀?”임미연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요.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순순히 약을 먹을지 누가 알아요?”귀엽고 애교 있는 말투는 정유진이 평생 따라 할 수 없을 것이다.정유진은 순간 누군가가 머리 위로 얼음물 한 통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저렸다.정유진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봅니다.강지찬은 임미연이 건네준 물컵을 받아들자 임미연은 서둘러 약을 건넸다. 그러자 강지찬은 임미연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쳐들고 약을 먹었다.이 모든 행동에 눈이 따가운 정유진은 참다못해 소리쳤다.“강지찬!”강지찬은 물컵을 임미연에게 건네주더니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살아 돌아오는 바람에 실망이 큰 것 같네.”그를 바라보는 정유진은 강지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강지찬 씨,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옆에 있던 장형준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지찬아, 유한이가 미친 거 아닐까? 임유희를 집에서 쫓아내고 현채영을 온씨 저택에 데려갔어. 최신애가 엄청 화를 낼 것 같은데?”최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현채영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몰랐네... 그때 지아를 신경 쓰는 것보다 더...”강지찬이 힐끗 바라보자 최의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임유희 때문에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이도 안 좋아졌어. 임씨 가문이 체면을 완전히 구겼잖아. 아마 이번 기회에 단단히 복수하려 할 거야. 그 임씨 부부도 생각이 있는 어른들은 아닌 것 같아. 온유한이 임유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딸을 이용해 온씨 가문에 바싹 달라붙어 가문의 지위를 올리려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최신애만 그걸 모르고 어떻게든 유한이와 임유희를 엮어주느라 골머리를 앓았지. 온유한은 임씨 가문의 속셈을 알았을까?”한규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그 자식 계속 약속 펑크내서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것 같아.”경은우가 말했다.“유한이 형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 거야. 유한이 형이 절대 함부로 누구를 대하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최의현이 말했다.“며칠 전 만났을 때 임씨 가문 얘기를 몇 마디 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지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루 종일 잠을 잔 현채영은 가방을 들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잠깐!”거실에 앉아 있던 최신애는 현채영의 화려한 차림을 보고 화를 냈다.온유한이 석식이 있어 집을 비우니 현채영은 한밤중에 외출을 하려 했다.현채영이 뒤돌아서서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어디 가는 거야?”“친한 여자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 오늘 밤엔 안 들어올 거예요.”그 말에 최신애는 바로 화를 냈다. “친한 여자친구들?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밖에 안 하는 날라리 여자들?”현
임유희도 온유한에게 쫓겨난 후 몸져누워 열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임유희는 이제 주위에서 웃음거리가 됐다.이 때문에 임씨 부부와 임유희 오빠는 온씨 가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바쁜 일과를 마치고 병원으로 향한 온유한은 문 앞에서 온혁진과 최신애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그때 임유희를 집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싸움에 휘말리기 싫은 온유한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병실에서 최신애가 병상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그럼 내 탓이란 말이에요? 당신 하나뿐인 아들이 현채영 그 여자와 엮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강지아가 어때서?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최신애, 우리 온씨 가문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온혁진의 말을 들은 최신애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평생 사랑한 이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내가 그런 거라고요? 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온혁진은 더 이상 이 일로 최신애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얘기했잖아. 유한이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당신이 기어코 유한이와 지아를 갈라놓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강씨 가문과 원수가 되었고 임씨 가문의 미움도 샀어. 만약 임씨 가문이 그때 강지찬처럼 작정하고 우리를 괴롭힌다면 이번에는 누구에게 부탁해서 도와달라고 할 거야?”집안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도 바짝 긴장했다.“투자자들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투자하는데 임씨 가문 때문에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어요?”“당신이 뭘 알아?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우리보다 우수한 의료 회사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경쟁업체에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새로운 의료기기를 도입했다고 들었어. 우리가 올해 주력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였는데...”온혁진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봤자 당신이 뭘 알겠어.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씨 가
강지아도 명성 빌딩에 오래 묵을 생각이 없었기에 아침을 먹자마자 서원준과 함께 집을 나섰다.현관문 너머로 서원준의 목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그제야 어젯밤에 서원준도 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내리쳤다.한편 기분이 좋아진 서원준은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하기 위해 한마디 했다.“지아야, 이 집 어차피 비어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는 게 어때?”강지아는 서원준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꿈 깨.”서원준이 일부러 다가가서 강지아를 품에 꽉 껴안자 강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뭐 하는 거야?”서원준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 여자친구에게 뭘 하겠어?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중요한 걸 못했네.”강지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함부로 행동하기만 해 봐!”강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무언가를 기대하던 서원준은 순간 주눅이 들었다.이런 상황에 사랑하는 남녀들이라면 분명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다음 진도로 넘어갔을 것이다.놀라움만 가득한 눈빛으로 서원준을 바라보는 순수한 강지아에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하긴 강지아가 왜 고백을 받았는지 서원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온유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서원준은 아쉬운 마음에 강지아의 볼을 꼬집은 뒤 말했다.“내일 나 출장 가. 저녁 비행기인데 같이 갈래? 꽤 재미있는 곳인데.”서원준은 연예계 활동 때문에 출장을 가야 했다. 강지아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거기에 가면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안 가. 요즘 작업실에서 현지 수주를 받은 게 있어서 자리 비우면 안 돼.”“알았어. 그럼 빨리 갔다 올게.”두 사람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만날 수는 없었다.오늘 서원준은 석식 약속이 있었고 내일도 바쁘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야 강지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차에 타기 전에 서원준은 우물쭈물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여기
오늘 기분이 좋은 서원준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강지아는 진수혁의 도움을 받아 서원준을 명성 빌딩에 데려다줬다. 그나마 여기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진수혁은 이미 자신의 물건을 모두 옮겨갔기에 집은 예전 상태로 되었으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두 사람은 서원준을 게스트 룸, 즉 진수혁이 묵었던 방에 데려다 눕혔다.이불을 끌어안은 서원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지아야... 나 너무 좋아... 정말 기뻐...”강지아는 진수혁에게 말했다.“이 집 어차피 비워둘 건데 그냥 있어도 되는데.”“여태까지 묵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워.”진수혁은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전기와 가스 카드는 모두 원래 있던 곳에 놓아뒀어. 비용은 이미 지불했고.”말을 마친 진수혁은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떴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수혁은 온유한에게 명성 빌딩에서 이사를 했기에 더는 가지 않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온유한은 휴대전화를 힐끗 본 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병상에 누워있는 최신애는 최씨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이 자식 머릿속에 온통 그 여자 생각뿐이야. 우리 온씨 가문과 이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봐. 내가 죽어야 본인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내 팔자야! 힘들게 키운 아들이 얼마 전까지 멀쩡했는데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어. 하느님, 제가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얘기하고 계세요. 야식 좀 사 올게요.”황은숙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고 최신애의 하소연을 한참 동안이나 들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됐어. 나도 금성이 집에 가봐야 해. 유한아, 엄마 화나게 하지 말고 잘 모셔.”황은숙과 최금성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병실에는 온씨 모자만 남아 있었다.최신애의 얼굴에 있던 슬픔이 어느새 원망으로 변했다.“왜, 나와 같이 있기도 싫은 거야?”온유한이 말했다.“채영이 집
강지아의 인터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회자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령이 차를 우리면서 잡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서 강지아의 다도 실력도 선보이게 되었다.녹화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어 화령이 강지아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얼마 전에 온씨 집안이 떠들썩했던 거 알아?”강지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령이 말을 이었다.“나도 금성 씨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아직 외부로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국물을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화령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도 않았다.“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 첫 번째는 최신애가 온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보를 현채영이 훔쳤다면서 누명을 씌웠지.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대. 온유한이 최신애와 싸우고 나서 경찰이 갔고 현채영은 별일 없었대. 두 번째 일은 어젯밤 온유한이 현채영을 위해 최신애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임유희를 온씨 저택에서 쫓아냈고 최신애는 한밤중에 화를 내며 병원에 입원했대.”강지아는 국물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잘됐네. 두 사람 다 힘든 것보다 낫네. 적어도 현채영 씨는 힘들지는 않으니까.”강지아가 별 반응이 없자 화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유한이 많이 변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강지아가 말했다.“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지 뭐. 현채영 씨, 괜찮잖아.”화령은 온유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작업실로 돌아온 강지아는 커피 한 잔을 끓였다.서랍을 열어보니 서원준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아직 전달하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휴대폰이 울려서 수신자를 보니 진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새집을 찾았기에 명성 빌딩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다.월세도 내지 않고 강지아의 집에 산 것에 대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남자친구 데려가도 돼?”“당연하지. 단골 술집에서 만나. 사장님더러 십몇 년 동안 간직해온 술을 오픈하라고 해야겠네.”“그래.”강지아
순간 임유희는 오늘 밤 온유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천천히 다가가 온유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임유희였다.임씨 가문이 온유한을 몰아세우면 그녀는 온유한 앞에서 이해심 많은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임근우와 장희수도 잘 협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콜록... 유한 오빠... 그게...”“봤냐니까?”온유한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표정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아니, 아니...”임유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방금 본 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네네, 알겠어요!”임유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이 순간 온유한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이 한참 후에야 손을 뗐고 임유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하마터면 온유한의 손에 죽을 뻔했다.이 남자는 더 이상 3년 전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다.지금의 온유한은 강지아를 위해 미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지'자를 문신했다.미친 거 아닐까?너무 무섭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온 목적은 분명했다.강지아를 위해서라면 친엄마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이런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옆에 둘 수 있겠는가?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다.임유희는 기다시피 하며 온유한의 방을 뛰쳐나갔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라도 온유한이 따라올까 봐 서둘러 문을 닫은 뒤 방문을 잠갔다.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니 목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온유한이 진짜로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뻔했다!침대에 몸을 웅크린 뒤 장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엄마, 온유한이랑 결혼하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장희수는 지금 한창 신이 난 상태였다. 최신애가 장희수와 친해지기 위해 카드도 많이 양보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장희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
“진짜 열받아 죽겠어. 정말!”화가 난 최신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엄마인 나를 점점 안중에도 안 두는구나. 같이 지옥에 가자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온혁진은 이런 최신애가 너무 귀찮았다. 낮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면 그들은 온유한과 임유희의 혼사를 언제 치를 것이냐고만 물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온유한이 임유희와 약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애초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우리가 오히려 발목이 잡혔어.”온혁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유한이 결혼에 대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경고하는데 당신도 좀 똑똑하게 굴어,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지 말고. 임씨 가문 사람들도 속셈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최신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속셈이가 있어 봤자 무슨 속셈이가 있겠어요? 유희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가 유한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임씨 가문도 그저 말로만 재촉하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라고 상관하고 싶겠어요? 현채영 같은 여자가 강지아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이겠어요? 그런 여자를 들였다가는 서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온혁진은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온유한이 진짜로 현채영과 결혼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일은 최신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날 오후 최신애는 장희수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대화가 잘 통했는지 저녁에는 카드 놀이하러 함께 갔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임유희만 있었고 현채영은 다른 일이 있어서 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유한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죠?”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자 임유희는 얼른 하인을 시켜 밥을 차리게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겠대요. 아버님도 석식이 있으시다고 했고 현채영 씨도 저녁에 늦게
온유한이 회의를 마치자마자 전성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왔다.“선생님, 집에 일이 생겼습니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 경찰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고 경찰에게 사건 경위를 말하고 있었다.“보석이 박힌 그 장신구를 지금 사람들은 잘 안 써요. 다만 온씨 가문 며느리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 정말 돈이 급할 때 쓰기 위해 남겨둔 것이에요. 오늘 전문적인 청소 담당자를 불러서 청소를 할 때 금고를 깜빡하고 안 잠근 채 주방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위층에 올라가 보니 가보와 장신구 몇 점이 보이지 않았어요. 몇천 만원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요. 경찰분들, 아마 분명 이런 물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훔쳐 갔을 거예요. 현채영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집이 파산해 돈이 부족한 여자예요. 이 여자가 보석들을 방에서 가지고 나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혹시나 인정하지 않을까 봐 동영상까지 촬영했어요. 증거까지 있는데 계속 발뺌할 수 있을까요?”경찰 몇 명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온씨 가문 사모님은 억울한 척하며 말했지만 말 한 마디마다 빈틈이 있었다.진짜로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이 집안사람 모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장신구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건의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온유한이 돌아왔다.현채영은 그가 돌아오자 웃음을 지을 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최신애는 흥분하며 앞으로 걸어갔다.“아들아, 마침 잘 왔어. 이 여자 손버릇이 아주 나빠. 빨리 내보내.”온유한은 경찰 몇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두운 얼굴로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돌아오는 길에 대충 들었어요. 하지만 채영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채영이를 믿어요.”“또 이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야?!”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최신애가 아니었다.“이
현채영이 잠에서 깼을 때 최신애는 점심을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어머니, 점심 먹을 때 부르라니까요. 왜 안 부르셨어요?”최신애는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깼잖아?”“그래도 불렀어야죠. 그러다가 배를 곯으면 유한 씨가 어머님을 나무랄 거예요.”최신애는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현채영이 밥 먹으면서 음식 투정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야채가 너무 많네요. 이 음식은 아무 맛이 안 나요.”최신애는 겨우 화를 참았다.“내가 나이가 들어 입맛이 담백해졌어. 못 먹겠으면 이 집에서 꺼져도 돼. 널 불잡을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현채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유한 씨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짭짤하면서도 단 것을 좋아해요. 탕수육 같은 거 좋아하니까 다음번에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하인은 최신애의 눈치를 살피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현채영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한마디 했다.“왜요? 밥 먹는 것조차 어머님이 허락해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현채영이 젓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최신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하고 놓았다.“네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테이블을 내리쳐!”최신애가 격노했다.“현씨 집안이 이 지경으로 전락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정말 교양이 하나도 없네!”그 말에도 현채영은 화를 내는 대신 ‘흥’하고 콧방귀만 뀌었다.“최씨 가문 식구들은 교양이 있어서 성격이 이렇게 모났나 봐요. 유일한 친아들마저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너 정말...”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여봐라, 어른은 안중에도 없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누가 감히 할 수 있는지 나야말로 보고 싶네요.”현채영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어머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걸 힘들어하면 유한 씨도 같이 나간다고 했어요. 집도 이미 다 장만했어요.”“뭐라고?”최신애는 어리둥절해 했다.“너에게 집도 사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