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더 지켜본 결과, 정유진의 상태는 더욱 안정되었다. 목숨이 더 이상 위태롭지도 않았다. 병원에서는 그제야 일반 병실로 옮기게 했다.정명학과 이명자도 왔다. 정유진이 깨어 있는 것을 보고 눈물만 흘렸다. 적어도 기절하지는 않았다.일의 경과를 안 두 어르신은 그저 한탄만 할 뿐이었다.정유진이 강지찬에 대해 별로 감정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목숨마저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오해가 많아지고 모순이 많아져 그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되었다.병실에는 또 강지찬만 남았다.강지찬은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입고 있는 옷도 장형준이 병원으로 가져온 후 갈아입은 것이다.정유진이 깨어난 후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강지찬은 샤워했다. 면도까지 하니 훨씬 깨끗해 보였다.눈 밑 다크서클에 정유진도 깜짝 놀랐다.하지만 얼른 시선을 피했다. 정유진은 자신이 강지찬을 위해 칼을 막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지금 돌이켜보면 그 순간 그녀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부모도 자식도 생각하지 않고 일촉즉발의 순간에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서 더 깊게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인공호흡기를 뗀 정유진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다.강지찬은 면봉을 가져와 물을 묻히더니 그녀의 마른 입술을 꼼꼼하게 적셔주었다.“물 마실래?”요 며칠 강지찬은 매일 조급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말을 별로 하지 않아 목소리가 한껏 잠겨있었다.확실히 물을 마시고 싶었던 정유진은 ‘응'이라고 대답했다.강지찬은 빨대가 달린 물컵을 가져와 몇 모금 마시게 했다.이후, 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 병실에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강지찬은 이번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정유진이 깨어나기 전, 만약 이 여자가 죽으면이라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이 사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중환자실 밖에 서서 눈 하나
정유진의 상처는 다행히 잘 회복되어 인제는 일어나 앉거나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게 되었다.요 며칠 강지찬은 병원을 사무실처럼 거의 살다시피 했고 정유진의 곁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원래는 간병인도 있었지만 간병인에게 실력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모처럼 두 사람은 며칠 동안이나 아무런 탈 없이 조용히 지냈다.“새언니, 오빠는요?”강지아가 고개를 내밀고 들어왔다.“옆 칸에서 회의 중이야.”“그럼 내가 언니와 같이 있을게요.”요 며칠 강지아가 와서 많이 도와줬다. 아침저녁으로 연우를 데려다주고 일이 없으면 병원에 와서 정유진을 돌봤다.“쇼 디자인 때문에 바쁘잖아요. 볼일 보세요. 전 괜찮아요.”“시안은 주최 측에 보냈어. 그쪽 피드백을 기다리는 중이야.”강지아는 옆 방의 닫힌 문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새언니, 언니가 모르는 일이 하나 있어요.”“뭔데?”“강지현이 매일 오는데 장형준이 밖에서 막고 있어요.”강지아는 말을 하며 눈짓을 했다.“우리 오빠가 지금 언니를 보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강지아는 예전에 강지현을 둘째 오빠라고 불렀다.하지만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은 정유진은 말머리를 돌렸다.“경찰에서는 별 연락이 없어?”“오빠가 말 안 했어요?”사실 요즘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았다. 대부분 강지찬이 ‘배고프지 않아?’ ‘목이 마르지 않아?’ ‘힘들지 않아’ 등 묻는 것이 전부였다.“오빠는 김주환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의심해요. 경찰더러 고세연을 여러 번 조사하라고 했지만 소득이 없어요. 김주환은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있고요. 경찰이 아무리 물어도 입을 열지 않아요.”김주환을 떠올린 강지아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오빠가 그러는데 김주환더러 평생 바깥의 빛을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대요.”정유진도 김주환이 강지찬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하려 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이때 장형준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조예원이 아래층에서 기다린다고
눈빛은 차분했지만 말투에서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강지찬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부족하지.”말을 마친 뒤 또다시 다가갔다.이번에는 입만 맞추고 놔주는 게 아니라 깊은 키스를 나눴다.하지만 상대방의 건강을 생각해 힘을 쓰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입술만 물고 이리저리 거칠게 뒤척였다.정유진은 심장이 떨렸다. 몸에 힘이 없어서인지 강지찬을 밀어내지 않았다.일주일간 병원에서 휴식을 취한 정유진은 끝내 퇴원했다.이명자와 정명학은 그녀가 걱정되어 같이 부경원으로 갔다. 정유진의 몸이 완전히 나으면 돌아가겠다고 했다.그동안 최의현은 성원을 완전히 인수했고 연우 인테리어도 노을빛 프로젝트를 따내게 되었다.이런 결과는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정유진은 운명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 모든 운명의 굴레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에이프릴 홀, 강지찬은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한규진이 전화를 여러 통 걸지 않았더라면 마누라와 아이를 두고 달려와 술을 마시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우리 강 대표님은 이제 정말 가정적인 남자가 다 되었어, 전화를 여러 번 하지 않으면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니 말이야.” 강지찬은 아무도 없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가족이 없는 것들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최의현도 장난기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우리는 당연히 급이 안 되지. 만약 어떤 여자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면 매일 집에 두고 황제처럼 모실 거야.”강지찬도 이 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한규진이 물었다.“결혼식 한다고 하지 않았어? 날짜는 정했어?”“아직. 유진이의 몸이 회복되지 않았어. 하지만 이미 준비하고 있어.”장모님과 장인어른이 계실 때 강지찬도 기회를 봐서 언급할 생각이다.결혼은 반드시 성대하게 할 것이다. 급해서는 안 된다.화장실에서 나온 최의현은 낄낄대며 말했다.“내가 누굴 봤는지 알아맞혀 볼래?”“누군데?”최의현은 강지찬을 보며 말했다.“고남준. 우리가 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
강지찬은 실검에 오른 사실을 모른 채 집에 들어갔다. 샤워한 뒤 정유진이 방문을 잠그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흐뭇해하며 슬그머니 침대에 올라가 사람을 끌어안고 잤다.다음날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장형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어젯밤 미키 씨와 함께 실검에 오르셨습니다.”강지찬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장형준이 계속 말했다.“못된 소리를 하는 패거리들이 있어요.”강지찬에게 캡처 사진을 몇 장 보여주자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런 스캔들이 아무렇게 떠도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여론의 움직임이 확실히 잘못되었다.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정유진과 미키를 비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심지어 정유진의 개인 정보까지 낱낱이 파헤쳤다. 대학 시절 사진까지 인터넷에 떠돌았다.그녀가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운이 좋네. 역시 얼굴만 반반하면 인생 승리라니까. 재벌 집에 시집갈 수도 있고 말이야.”“원래 남자친구가 있었대요. 그런데 강지찬과 어울린 후에 전 남자친구를 바로 차버렸대요.”“미키와 비교할 수 없죠. 우리 미키는 자신의 실력으로 한 걸음씩 걸어 여기까지 왔어요. 남의 침대에 기어올라 재벌 집에 들어간 여자와는 다르죠.”어떤 사람은 연우와 정유진이 출국한 4년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네티즌들의 추측이 난무했고 심지어 연우는 외국에서 다른 남자와 만나 낳은 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강지찬은 정유진에 대해 불만이 많아 결혼식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누군가 정유진이 아이를 안고 유치원에 가는 사진을 올렸다. 아이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강지찬은 인상을 찌푸렸다.“실검을 내리지 않고 멍하니 뭐해?”장형준이 얼른 대답했다.“이미 홍보팀에서 연락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강지찬은 어두운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세수를 마친 정유진은 2층 거실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강지찬이 올라온 것을 보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힐끗 바라봤다.그녀의 눈
강지찬이 집에 온 이유는 어르신의 헛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아이는 내 아이예요. 와이프도 내 와이프이고. 결혼 준비 중이에요. 날짜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확정되면 알려드릴게요.”이 말은 내 결혼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으니 때가 되면 제시간에 결혼식에 참석하라는 뜻이다.테이블을 치는 소리가 또 들렸다. 이전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손바닥이 아팠는지 강홍식의 얼굴이 좀 어색해 보였다.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영감탱이가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지 궁금했다.“이 결혼 허락할 수 없어. 정유진 그 아이, 강지현과의 사이도 불분명해. 강씨 집안이 그런 사람 때문에 얼굴에 먹칠할 수는 없어!”강지찬이 말했다.“아버지가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아니면 고세연이 싫다고 하는 거예요?”강홍식의 표정이 변했다.아들 앞에서 줄곧 나약한 사람이었다. 방금 책상을 치는 것으로 모든 용기를 다 써버렸다. 강지찬의 차가운 눈빛에 강홍식은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이런 모습을 보면 몰래 엿보던 고세연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다.고세연이 아무리 구슬리고 달래도 강홍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약해 빠졌으니 이렇게 큰 가업을 아들에게 빼앗겼겠지... 그저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는 아버지에 불과했다.“그게, 그게 세연이와 무슨 상관인데?”강홍식의 얼굴이 빨개졌다.“너의 아버지는 나야. 결혼에 대해 충분히 발언권이 있어. 오늘 똑똑히 얘기할게. 정유진 같은 여자를 우리 집에 들일 생각 마, 난 허락할 수 없어.”말을 마친 후, 빠른 걸음으로 위층에 올라갔다. 혹시라도 강지찬이 화를 낼까 봐 겁이 났다.강지찬은 화가 나서 저녁도 먹지 않고 갔다.며칠 후 강홍식은 강지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본인은 몸이 좋지 않다며 강지찬더러 친척의 생신 잔치에 대신 참석하라고 했다.강지찬이 집안의 친척과 친구들을 방문하는 일은 모두 강홍식이 도맡아 했다. 강지찬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참에 정유진을 친척들에게
강지찬은 임미연의 말을 못 들은 듯 눈살을 찌푸리며 장형준을 쳐다보았다.“사모님과 아가씨는?”“밖에 있습니다.”옆에 있던 고모할머니는 강지찬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서둘러 말했다.“숙모한테 저쪽 꽃집에 데리고 가서 차를 마시라고 했어.”강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여기 친척들 대부분 유진이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오늘 얼굴을 익힐 겸 소개해주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이고요.”말을 마친 뒤 다른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꽃집으로 정유진을 찾아갔다.임미연은 너무 난처했다. 어르신이 옆으로 끌고 가 호통쳤다.“얼굴이 왜 빨개져? 네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지. 지찬이가 먼저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야?”임미연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할머니, 지찬 오빠가 정말 저를 좋아할까요?”“그건 장담할 수 없어. 전에 지찬이 아버지도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줬는데 만나러 가지도 않았어. 지찬이 정도면 주변에 어떤 여자든 다 있어. 너는 아들 낳을 생각만 하면 돼. 그러면 지찬이 아버지가 알아서 할 거야. 강씨 집안에 자연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하지만, 지찬 오빠가 저 여자와 이혼하지 않았어요.”“흥, 지찬이가 너를 좋아하게 된다면 저 여자는 바로 강씨 집안 사모님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어르신은 임미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부했다.“오늘 잘해. 쉽지 않은 기회니까 잘 잡아야 해.”임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 알겠어요.”정유진과 강지아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열정적으로 대했고 어떤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바라보기도 했다.“얼마 전 실검에 오늘 내용 봤어요?”“봤어요. 정말 듣기 싫은 말들이었어요. 시어머니가 물어봤는데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결혼했으면 조신하게 살 것이지 이렇게 망신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나 봐요.”여자 몇 명이 모여 잡담을 나누며 정유진을 쳐다봤다.강지아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아이고 지아야,
임미연에게 외숙모라고 불리던 여자가 뭔가 말하려다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강지찬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오는 바람에 한발 늦었다.임미연은 강지찬이 바로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대담해졌다.“외숙모가 원래 직설적인 사람이잖아요. 화내지 말아요. 언니와 아이 모두 지찬 오빠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인터넷에 떠도는 것들은 모두 헛소문이잖아요. 절대 믿지 마세요.“외숙모는 어색한 듯 하하 웃었다.“이 계집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인터넷에 떠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연히 안 믿지. 지찬아, 왔어? 어서 앉아.“임미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지찬이 뒤에 있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어깨를 움츠린 채 옆으로 다가섰다.강지찬은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차갑게 말했다.“유진이가 친척분들에게 인사를 못 드렸는데 잘 적응하고 있는지 보려고 왔어요.“말을 마친 뒤, 정유진 옆에 서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안색이 왜 이렇게 어두워? 피곤해?“이제 막 퇴원한 상태라 강지찬은 그녀가 힘들까 봐 걱정되었다.정유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강지아는 콧방귀를 뀌었다.“여기 하나도 재미없어. 오빠, 우리 언제 가?“강지아가 가겠다고 아우성치자 임미연이 얼른 다가와 말했다.“곧 생신 잔치가 시작될 거야. 지아야, 언니, 밥 먹고 가세요.“정유진은 임미연을 유심히 쳐다봤다. 소녀 같던 여자아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5년 전과 다른 느낌이었다.도리를 잘 알고 있는 정유진도 강지찬에게 말했다.“밥 먹고 가요. 방금 왔는데 친척들에게도 아직 인사를 못 드렸어요.“임미연은 웃으며 말했다.“지찬 오빠, 오빠는 볼일 봐. 내가 언니와 지아랑 같이 정원에 있다가 생일잔치 시작되면 돌아올게.“강지찬은 그제야 임미연을 바라봤다. 다만 힐끗 보는 데 그쳤다. 임미연은 눈빛에 겁먹은 듯 정유진을 향해 걸어갔다.“그래. 그럼 나는 먼저 인사하고 있을 테니 조용한 곳에서 쉬고 있어.“말을 마친 후, 다시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네요.“강지현은 정유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혼자예요? 아니면...““지찬 씨와 지아랑 같이 왔어요.““그렇군요.“강지현은 웃으며 깨끗한 찻잔을 들어 자신에게 한 잔 따랐다.“친척들이 많은데 왜 혼자 여기 앉아 있어요?“사실 정유진은 여기에서 강지현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언제부터인가 강지현과 함께 있는 것을 마음속에서 거부하고 있었다.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오늘 또 가면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갑자기 강지찬이 생각났다. 가끔 정말 짜증 나고 화가 나서 물어뜯어 죽이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은 항상 대놓고 당당하게 말했다.“지아는 대나무 숲 쪽으로 갔어요. 금방 올 거예요.“강지현이 물었다.“다친 데는 괜찮아요?““네, 다 나았어요.“분위기가 어색해졌다.정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강지현의 눈빛이 점점 뜨거워졌다.“유진 씨,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보러 갔는데 강지찬이 못 만나게 했어요.“정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방의 눈빛이 너무 불편했다.“고마워요.“정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곧 생일잔치가 시작되니 지아 찾으러 가야겠어요.“강지현이 따라 일어서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놓고 물었다.“왜 대신 칼을 맞은 거예요?“정유진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내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예요. 사고가 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이것은 강지현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소리쳤다.“분명 이혼했다고 했잖아요. 잊었어요?““어떤 일들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정유진은 강지현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그만 해요.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아요. 진작 말했잖아요. 지찬 씨가 있든 없든 나와 지현 씨는 불가능해요. 나에게 지현 씨는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진짜로 사랑하게 된 거예요?“강지현이 나지막이 물었다.강지찬 대신 칼을 맞은 게 사랑일까?이 문제를 정유진은 줄곧 회피했다. 깊이 생각하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