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조예원은 요 며칠 계속 이곳에 있었다. 빚 독촉자들의 발걸음을 돌리느라 입 마를 날이 없었다.어시스턴트가 물을 따라주면서 말했다.“조 대표님, 아까 또 강 대표님께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케팅 부서, 재무 부서, 프로젝트 부서, 등등...”조예원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강 대표님께서 뭐라셔?”어시스턴트가 말했다.“승인하셨어요. 지금 강 대표님께서 회사를 팔아버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많이들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들 살길 찾느라 바쁜 것 같아요.”사회초년생 어시스턴트의 눈빛은 맑고 상냥해 보였다.조예원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웃으면서 말했다.“아직은 일러. 맡은바 업무를 열심히 하다 보면 강 대표님께서 섭섭지 않게 해줄 거야.”어시스턴트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요 며칠 대표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다들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어요. 조 대표님께서도 강 대표님을 말려보세요. 힘내시라고, 포기하지 말라고요.”“알았어.”조예원은 강지현이 처음부터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포기한 이유는 강지찬이 준 충격보다 정유진의 거절 때문이었다.‘유진이가 지찬 씨랑 이혼한 거 말해줘야 하나?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어!’조예원은 이미 강지현을 도와준다고 모든 재산을 내놓은 상태였다. 성원을 잃을 순 있어도 절대 이 남자를 정유진에게 양보할 수는 없었다.절대 그럴 수 없었다.강지현은 사무실에서 일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때리고 있었다.조예원이 그에게 차를 건넸다.“어제 받은 돈으로 몇몇 사장님들께 빚을 갚아줬더니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강지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수고했어요.”조예원이 또 말했다.“방금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반화 그 집 살 사람이 나타났대요. 그런데 값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적어요.”강지현이 차로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괜찮아요. 파세요.”조예원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쳐다보면서 물었다.“정말 성원을 파시게요?”강지현은 그제야 조예원을 쳐다보았
“정 대표님, 어제부터 스튜디오 예담에서 파업한 관계로 노을빛 프로젝트가 중단되었습니다.”강예중의 표정은 심각했다.“그쪽 직원한테 물어보니 조 대표님께서 최근에 계속 성원에 계셔서 스튜디오 예담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정유진은 맨날 돈 버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던 조예원이 남자한테 미칠 줄 몰랐다.“신경 쓰지 마세요. 파업하든 말든.”속으로는 강지현 쪽에 무조건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예원은 절대로 노을빛 프로젝트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역시나 며칠도 지나지 않아 성원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이날은 연말이라 눈꽃이 흩날리는 날씨였다.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정유진은 따뜻한 커피를 타다 강지현에게 연락해 보려고 했다.강지현은 병원에서 감사받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조예원이었다.“성원이 망했어.”조예원이 말했다.“이제야 만족해?”정유진은 할 말이 없어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지찬과의 모순은 4년이 지난 오늘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무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조예원이 자신을 향한 원망은 슬펐지만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정유진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해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휴식일을 맞이해 날이 추워서 감기에 걸린 이명자와 연우를 태안병원으로 데려갔다.온미정과 친해진 연우는 바로 온미정 만나러 갔다.하지만 마침 환자가 대기 중이었고, 진료가 끝났을 때는 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연우는 어디 갔지?”간호사가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해서 인턴이랑 함께 갔어요.”온미정은 인턴과 함께 있다는 말에 그제야 안심되었다.눈이 소복이 쌓인 화원에서 연우는 실습 인턴과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최근에 엄마한테서 판다 그리기를 배운 연우는 둥글둥글하고 포동포동한 판다 눈사람을 만들었다.“누나, 판다가 다크서클이 없잖아요.”실습 인턴이 진지하게 말했다.“판다가 아파.”“무슨 병에 걸
실습 인턴은 연우가 사고 친 모습을 보고 얼른 달려와 사과했다.아직도 눈덩이를 잡고있는 연우는 그저 강지찬을 바라볼 뿐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내 엽서를 밟고도 사과하지 않았던 아저씨 아니야?’태안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꽤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실습 인턴은 강지찬의 심상치 않은 포스에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 나겠다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연우가 그녀를 잡아당기면서 위로했다.“누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 아저씨한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응?”실습 인턴은 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강지찬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제야 그때 그 상황이 생각했다.이때 연우가 삿대질하면서 말했다.“지난번에 저 아저씨가 제 물건을 밟고도 사과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사과할 필요 없어요.”실습 인턴은 할 말을 잃었다.“연우야, 저 아저씨 알아?”연우는 고개를 흔들었다.아무것도 모르는 연우와는 달리 실습 인턴은 허리 굽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죄송해요. 아까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쪽을 보지 못했네요. 정말 죄송해요.”연우는 실습 인턴이 자기 말을 무시하자 찌뿌둥해서 입을 삐쭉 내밀었다.강지찬은 실습 인턴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거두고 녀석을 내려다보았다.“여기서 뭐 해?”강지찬이 물었다.연우는 강지찬의 질문이 바보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눈싸움이요.”강지찬이 계속해서 물었다.“병원에 왜 왔냐고.”“감기 걸려서 의사 선생님 보러 왔죠.”연우는 더욱 의문이 가득했다.‘병원에 왜 왔겠어요. 당연히 의사 선생님 보러 왔지.’강지찬은 녀석의 빨개진 코끝을 보더니 녀석의 패딩을 잡아 들어 올렸다.깜짝 놀란 실습 인턴은 얼른 나서서 말렸다.“뭐 하시려고요...”“저는 강지찬이라고 해요. 이따 온미정 씨한테 나중에 찾으러 간다고 전해주세요.”강지찬은 연우를 손에 든 채 온유한 찾으러 갔다.실습 인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강지찬이라고 했나?’실습 인턴은 냉큼 온미정 찾으러 갔다.이제 막 수술을 마친
온유한이 믿기지 않는 듯이 강지찬을 쳐다보았다.“얘가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되었구나?”그러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웬일이야? 우리 강 대표님께서 아이한테 관심 가지는 날이 오다니.”강지찬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만약 그때 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컸겠지?”온유한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두고 강지찬의 등을 다독여 주더니 마법같이 서랍에서 간식을 꺼냈다.막대 사탕이며, 초콜릿이며, 쿠키며 없는 것이 없었다...딱 봐도 여자가 챙겨준 간식인 것 같았다.“꼬마야, 아저씨한테 이름 알려줄 수 있어? 그러면 아저씨가 사탕 줄게.”연우는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아저씨, 사탕으로 어린이를 꾀는 거, 3살인 저도 넘어가지 않아요.”그러면서 자랑스럽게 한쪽 손에 정확히 손가락 두 개를 접었다.온유한은 멈칫하더니 연우와 강지찬을 번갈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글쎄 어딘가 낯익다 했어. 이 표정, 너랑 똑같잖아.”강지찬이 그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언제부터 눈이 먼 거야?”그러면서 괜히 연우를 힐끔 쳐다보게 되었다.솔직히 자신보다 정유진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정유진이 생각났을 리도 없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생각났을 리가 없었다.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진 강지찬은 화제를 돌렸다.“그쪽은 어때? 상태가 악화되었어?”온유한은 그가 묻는 사람이 강지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유한은 간식을 연우에게 건네주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원래부터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어. 그 난리를 치는 바람에 당연히 악화되었고. 또 암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어.”강지찬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성원은 그냥 빈껍데기인데 정말 인수하려고?”“아무리 그래도 상장회사잖아. 잘만 정리하면 다시 상장할 수도 있어.”새로 회사를 창립하는 것보다 아직 이용 가치가 있는 성원을 인수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노을빛 프로젝트 역시 사람들이 탐내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얘를 고모한테 맡기
연우는 또 멋없이 들려 나가 화가 났다.강지찬이 워낙 키 크고 덩치 좋은 사람이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옷깃 하나 잡지 못했다.결국 창피한 마음에 머플러로 얼굴을 가릴 뿐이다.온미정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안에는 환자가 있어 연우를 아까 실습 인턴한테 맡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이곳을 떠났다.연우는 강지찬을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실습 인턴에게 간식을 나눠주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지찬은 마침 정유진과 이명자를 마주하게 되었다.정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강지찬은 서서히 인상을 펴면서 인사했다.이명자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강 서방, 왜 여기 있어...”‘이 층은 산부인과인데?’“고모 찾으러 왔어요.”강지찬은 정유진이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같이 밥 먹을 땐 언제고, 왜 또 인상을 쓰는 거지?’정유진은 그의 매서운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저희도 고모 만나러 왔어요.”강지찬은 정유진 손에 쥐고 있는 검진 결과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아파?”정유진이 바로 대답했다.“엄마가 감기 걸려서요. 의사 선생님께 보였더니 괜찮다고 했어요.”강지찬이 이명자에게 말했다.“얼른 나으세요. 나중에 또 보러 갈게요.”이명자가 웃으면서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강지찬은 이명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정유진은 냉큼 온미정 쪽으로 달려갔다.‘이 병원에 오면 안 되겠어. 너무 쉽게 만나네.’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유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연우야, 오늘 재밌는 일 없었어?”“있었어. 온 씨 아저씨를 알게 되었는데 잘생기고 웃는 모습도 멋있었어.”온유한을 말하는 줄 알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온 씨 아저씨를 만나러 간 건데?”“흥! 오늘도 저번에 그 버릇없는 나쁜 아저씨를 만났어. 그 아저씨가 연우를 데리고 갔어.”정유진은 할
이튿날 날이 밝아지고, 강지찬은 침대 위에서 한참 동안 멍을 때려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그저 실성하듯이 웃을 뿐이다.‘정말 별 꿈을 다 꾸네.’옷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 임우연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대표님, 인수 프로젝트 이미 수정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확인하실 건가요?”“가져와 봐.”이따 바로 회의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강지찬은 밥을 먹으면서 한번 쑥 훑어보았다.최근에는 성원 인수를 신경 쓰느라 집에 돌아온 시간이 별로 없었다.회의가 끝나고, 최의현이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글쎄 성원이 일찍 망했다 했어. 지현 씨는 전혀 극복할 생각도 없었네. 아주 엉망이야.”최의현이 혀를 끌끌 찼다.“일부러 우리한테 떠넘긴 거 아니야? 집까지 팔았다며?”강지찬이 냉랭하게 말했다.“불쌍한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실패자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집까지 팔았으니 엄마, 친구 때문에 파산까지 당하고 건강도 악화하였다고 소문날 거야.”최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보면 정말 불쌍하긴 해. 이제는 별로 밉지도 않아.”강지찬이 힐끔 보면서 말했다.“성원 쪽은 네가 좀 신경 써줘. 부탁할게.”최의현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무슨 뜻이야? 지금 나한테 떠넘기겠다고?’“왜? 자신 없어?”“내가 너 심부름이나 해도 직접 책임지기에는 부족해.”“잘 생각해 봐. 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되니까.”최의현은 할 말을 잃었다.남자라면 혼자서 무언가 해내고 싶었다. 강지찬 밑에서 일하면 큰 부담은 없었지만 출세하기는 어려웠다.그는 한참 생각해 보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내가 해볼게.”‘강지현 그 이상한 놈이랑 접촉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뭐 어때서? 지금 성원을 노리고 있는 건 K 그룹뿐이 아니야. 일단 인수에 성공하고 보자고.’곧 연말이라 정유진도 바쁘고 있었다. 직원들 휴가일도 다가오고 있어 연말 총회, 보너스 등등 일일이 챙겨야 했다. 다행히도 슬슬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기 때
“눈이 많이 내리네요!”소미는 더욱 흥분했다.“정 대표님, 저희 내일 산 꼭대기에 가서 설경을 구경하면 되겠네요.”마침 사진기도 가져왔겠다, 두 사람은 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예쁜 것을 보면 참지 못했다.눈이 너무 많이 내려 고속도로도 막혀서 당분간 돌아가지도 못했다.집 문을 나서자마자 훤칠한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추 도련님, 어떻게 오셨어요?”소미는 추호와 정유진을 번갈아 보더니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추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정유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그쪽 사장님 찾으러 왔죠.”‘어젯밤 분명 눈이 엄청나게 왔는데.’정유진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언제 오셨어요? 어떻게 오셨어요?”“어젯밤에 운전해서 왔죠.”추호는 껄렁거리기만 했다.정유진이 깜짝 놀랐다.“눈이 많이 내려서 고속도로가 막힌 거 아니에요?”추호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모든 도로가 막힌 건 아니잖아요.”“미쳤어...”‘사고가 안 났길 다행이지. 만약에 사고가 났으면... 어우, 상상도 못 하겠네.’추호는 여전히 건들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깟 눈이 뭐 대수라고. 저는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전차, 오프로드 카를 몰던 사람이에요. 제가 뚫을 수 없는 길이 없어요.”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내가 너무 무시했나?’“추호 씨도 이제 성인인데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면 안 되죠. 이런 날씨에 운전하는 거 얼마나 위험해요. 그것도 캄캄한 저녁에 길도 잘 모르는데. 만약 사고 나면 제가 어떻게 부모님께 말씀드려요.”추호가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제 여자친구도 아니고, 제 와이프도 아닌데 왜 설명이 필요해요.”“그게...”정유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추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다.“밥먹어요. 누나, 저 배고파요.”세 사람은 민박집 식당으로 향했다.지금은 겨울방학이라 민박집에 손님이 많았다. 많은 가족들이 함께 여행하러 와서 바비큐도 해 먹고 온천도 즐겼다.정유진과 소미가 등신하겠다고 하니 추호도 따라가겠다고
세 사람은 바람 막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간단히 점심 먹고 이어서 등산하기로 했다.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자 추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먹고 얼른 서둘러야겠어요.”“서두르지 않아도 산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어요.”빵을 먹고 있던 소미는 정유진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고는 옆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추호가 타일렀다.“멀리 가지 마요.”그러고는 소미가 앉았던 곳에 앉았다.소미가 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미가 없으니 이제는 말하기로 했다.“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저희 둘은 불가능한 사이에요.”추호가 입을 삐쭉 내밀면서 말했다.“이혼한 거 아는데 왜 불가능해요? 전 누나가 싫지 않아요.”정유진이 멈칫했다.“어, 어떻게 알았어요?”“그게 뭐 대수라고. 물어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잖아요.”추호가 피식 웃었다.무쌍에 가느다란 눈을 한 그는 웃으면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다.하지만 정유진은 그를 그저 추민해의 아들로만 보고 있었다.“그러면 잘 알겠네요. 추씨 가문도 명문가인데 절대 이혼한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연애하고 결혼하는 건 저의 일이에요. 아무도 간섭하지 못해요.”그에게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이자 정유진은 필살기를 써보려고 했다.“돌싱녀는 괜찮지만, 애 딸린 여자는요?”추호가 멈칫하고 말았다.“무슨 뜻이에요? 애가 있어요?”정유진은 표정이 확 변했다.‘보기에는 어리숙해 보여도 반응이 꽤 빠르네.’추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누나는 비밀도 참 많네요. 정말 애가 있어요? 아빠는 누군데요? 강지찬 씨는 아니겠죠? 강씨 가문의 대를 이를 아이라면 이렇게 내쫓을 일도 없겠죠.”그의 오해에도 정유진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엄숙히 말할 뿐이다.“저는 일이 중요하지, 연애같은 거 할 시간이 없어요.”사랑도, 우정도 필요 없었다.추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계속 지내보죠. 나중에 제가 누나가 싫어 실지 어떻게 알아요.”“소미 씨 왜 아직도 안 오죠? 눈이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