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안 보았더니 강지찬은 많이 핼쑥해 보였다.“제호 그룹 프로젝트 괜찮네. 너한테 디자인을 맡기는 거 보면.”강지찬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형준이더러 추민해라는 사람을 조사해 보라고 했더니 꽤 착한 사람이더라고. 가정에도 충실하고. 그런데 아들은 좀 별로야. 딸은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고. 아들이 계속 정신 차리지 못하면 제호 그룹을 딸한테 물려줄 수도 있어. 추민해라는 사람은 꼭 아들한테 회사를 물려줘야겠다는 전통적인 마인드가 없어서 좋아.”강지찬이 이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줄 몰랐다. 정유진은 추민해가 슬쩍 딸을 언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추호를 언급할 때와는 달리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추 대표님 괜찮은 분이시지.”정유진이 말했다.강지찬은 정유진을 힐끔 보더니 그녀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몰랐다.‘지금 추민해를 칭찬하는 건가? 난 분명 추호가 능력 없다고 말하는 건데?’정유진은 강지찬이 어쩌다 진지한 얘기를 꺼내 정말 숨은 말뜻을 몰랐다.하지만 이런 대화방식이 너무 좋았다.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두 사람은 강지현도, 한빈도 언급하지 않았다.강지찬은 그저 류선의 사건을 언급할 뿐이다.류선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고소하려고 했지만 증거가 빼도 박도 못한 상황에서는 고소해도 소용없었다.밖에는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고, 강지찬의 차는 맞은편에 있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비록 춥지는 않았지만 강지찬은 코트를 벗어 정유진에게 걸쳐주더니 그녀의 핸드백까지 들어주었다.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강지찬도 자신이 우스웠다.“이혼할 때까지 내가 너 핸드백을 한 번도 들어준 적 없네?”정유진은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이혼해서야 강지찬은 정유진이 더 이상 자기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 실감 났다.제삼자의 각도에서 봤을 때, 정유진은 더는 5년 전의 만만한 정유진이 아니었다.비록 주차장이 길 건너편에 있었지만 몇 걸음도 가지 않아 바로 주차장에 도착했다.흩날리는 눈송이가 정
성원.조예원은 요 며칠 계속 이곳에 있었다. 빚 독촉자들의 발걸음을 돌리느라 입 마를 날이 없었다.어시스턴트가 물을 따라주면서 말했다.“조 대표님, 아까 또 강 대표님께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케팅 부서, 재무 부서, 프로젝트 부서, 등등...”조예원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강 대표님께서 뭐라셔?”어시스턴트가 말했다.“승인하셨어요. 지금 강 대표님께서 회사를 팔아버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많이들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들 살길 찾느라 바쁜 것 같아요.”사회초년생 어시스턴트의 눈빛은 맑고 상냥해 보였다.조예원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웃으면서 말했다.“아직은 일러. 맡은바 업무를 열심히 하다 보면 강 대표님께서 섭섭지 않게 해줄 거야.”어시스턴트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요 며칠 대표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다들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어요. 조 대표님께서도 강 대표님을 말려보세요. 힘내시라고, 포기하지 말라고요.”“알았어.”조예원은 강지현이 처음부터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포기한 이유는 강지찬이 준 충격보다 정유진의 거절 때문이었다.‘유진이가 지찬 씨랑 이혼한 거 말해줘야 하나?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어!’조예원은 이미 강지현을 도와준다고 모든 재산을 내놓은 상태였다. 성원을 잃을 순 있어도 절대 이 남자를 정유진에게 양보할 수는 없었다.절대 그럴 수 없었다.강지현은 사무실에서 일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때리고 있었다.조예원이 그에게 차를 건넸다.“어제 받은 돈으로 몇몇 사장님들께 빚을 갚아줬더니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강지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수고했어요.”조예원이 또 말했다.“방금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반화 그 집 살 사람이 나타났대요. 그런데 값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적어요.”강지현이 차로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괜찮아요. 파세요.”조예원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쳐다보면서 물었다.“정말 성원을 파시게요?”강지현은 그제야 조예원을 쳐다보았
“정 대표님, 어제부터 스튜디오 예담에서 파업한 관계로 노을빛 프로젝트가 중단되었습니다.”강예중의 표정은 심각했다.“그쪽 직원한테 물어보니 조 대표님께서 최근에 계속 성원에 계셔서 스튜디오 예담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정유진은 맨날 돈 버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던 조예원이 남자한테 미칠 줄 몰랐다.“신경 쓰지 마세요. 파업하든 말든.”속으로는 강지현 쪽에 무조건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예원은 절대로 노을빛 프로젝트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역시나 며칠도 지나지 않아 성원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이날은 연말이라 눈꽃이 흩날리는 날씨였다.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정유진은 따뜻한 커피를 타다 강지현에게 연락해 보려고 했다.강지현은 병원에서 감사받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조예원이었다.“성원이 망했어.”조예원이 말했다.“이제야 만족해?”정유진은 할 말이 없어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지찬과의 모순은 4년이 지난 오늘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무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조예원이 자신을 향한 원망은 슬펐지만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정유진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해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휴식일을 맞이해 날이 추워서 감기에 걸린 이명자와 연우를 태안병원으로 데려갔다.온미정과 친해진 연우는 바로 온미정 만나러 갔다.하지만 마침 환자가 대기 중이었고, 진료가 끝났을 때는 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연우는 어디 갔지?”간호사가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해서 인턴이랑 함께 갔어요.”온미정은 인턴과 함께 있다는 말에 그제야 안심되었다.눈이 소복이 쌓인 화원에서 연우는 실습 인턴과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최근에 엄마한테서 판다 그리기를 배운 연우는 둥글둥글하고 포동포동한 판다 눈사람을 만들었다.“누나, 판다가 다크서클이 없잖아요.”실습 인턴이 진지하게 말했다.“판다가 아파.”“무슨 병에 걸
실습 인턴은 연우가 사고 친 모습을 보고 얼른 달려와 사과했다.아직도 눈덩이를 잡고있는 연우는 그저 강지찬을 바라볼 뿐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내 엽서를 밟고도 사과하지 않았던 아저씨 아니야?’태안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꽤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실습 인턴은 강지찬의 심상치 않은 포스에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 나겠다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연우가 그녀를 잡아당기면서 위로했다.“누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 아저씨한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응?”실습 인턴은 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강지찬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제야 그때 그 상황이 생각했다.이때 연우가 삿대질하면서 말했다.“지난번에 저 아저씨가 제 물건을 밟고도 사과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사과할 필요 없어요.”실습 인턴은 할 말을 잃었다.“연우야, 저 아저씨 알아?”연우는 고개를 흔들었다.아무것도 모르는 연우와는 달리 실습 인턴은 허리 굽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죄송해요. 아까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쪽을 보지 못했네요. 정말 죄송해요.”연우는 실습 인턴이 자기 말을 무시하자 찌뿌둥해서 입을 삐쭉 내밀었다.강지찬은 실습 인턴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거두고 녀석을 내려다보았다.“여기서 뭐 해?”강지찬이 물었다.연우는 강지찬의 질문이 바보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눈싸움이요.”강지찬이 계속해서 물었다.“병원에 왜 왔냐고.”“감기 걸려서 의사 선생님 보러 왔죠.”연우는 더욱 의문이 가득했다.‘병원에 왜 왔겠어요. 당연히 의사 선생님 보러 왔지.’강지찬은 녀석의 빨개진 코끝을 보더니 녀석의 패딩을 잡아 들어 올렸다.깜짝 놀란 실습 인턴은 얼른 나서서 말렸다.“뭐 하시려고요...”“저는 강지찬이라고 해요. 이따 온미정 씨한테 나중에 찾으러 간다고 전해주세요.”강지찬은 연우를 손에 든 채 온유한 찾으러 갔다.실습 인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강지찬이라고 했나?’실습 인턴은 냉큼 온미정 찾으러 갔다.이제 막 수술을 마친
온유한이 믿기지 않는 듯이 강지찬을 쳐다보았다.“얘가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되었구나?”그러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웬일이야? 우리 강 대표님께서 아이한테 관심 가지는 날이 오다니.”강지찬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만약 그때 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컸겠지?”온유한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두고 강지찬의 등을 다독여 주더니 마법같이 서랍에서 간식을 꺼냈다.막대 사탕이며, 초콜릿이며, 쿠키며 없는 것이 없었다...딱 봐도 여자가 챙겨준 간식인 것 같았다.“꼬마야, 아저씨한테 이름 알려줄 수 있어? 그러면 아저씨가 사탕 줄게.”연우는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아저씨, 사탕으로 어린이를 꾀는 거, 3살인 저도 넘어가지 않아요.”그러면서 자랑스럽게 한쪽 손에 정확히 손가락 두 개를 접었다.온유한은 멈칫하더니 연우와 강지찬을 번갈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글쎄 어딘가 낯익다 했어. 이 표정, 너랑 똑같잖아.”강지찬이 그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언제부터 눈이 먼 거야?”그러면서 괜히 연우를 힐끔 쳐다보게 되었다.솔직히 자신보다 정유진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정유진이 생각났을 리도 없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생각났을 리가 없었다.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진 강지찬은 화제를 돌렸다.“그쪽은 어때? 상태가 악화되었어?”온유한은 그가 묻는 사람이 강지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유한은 간식을 연우에게 건네주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원래부터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어. 그 난리를 치는 바람에 당연히 악화되었고. 또 암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어.”강지찬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성원은 그냥 빈껍데기인데 정말 인수하려고?”“아무리 그래도 상장회사잖아. 잘만 정리하면 다시 상장할 수도 있어.”새로 회사를 창립하는 것보다 아직 이용 가치가 있는 성원을 인수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노을빛 프로젝트 역시 사람들이 탐내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얘를 고모한테 맡기
연우는 또 멋없이 들려 나가 화가 났다.강지찬이 워낙 키 크고 덩치 좋은 사람이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옷깃 하나 잡지 못했다.결국 창피한 마음에 머플러로 얼굴을 가릴 뿐이다.온미정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안에는 환자가 있어 연우를 아까 실습 인턴한테 맡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이곳을 떠났다.연우는 강지찬을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실습 인턴에게 간식을 나눠주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지찬은 마침 정유진과 이명자를 마주하게 되었다.정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강지찬은 서서히 인상을 펴면서 인사했다.이명자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강 서방, 왜 여기 있어...”‘이 층은 산부인과인데?’“고모 찾으러 왔어요.”강지찬은 정유진이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같이 밥 먹을 땐 언제고, 왜 또 인상을 쓰는 거지?’정유진은 그의 매서운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저희도 고모 만나러 왔어요.”강지찬은 정유진 손에 쥐고 있는 검진 결과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아파?”정유진이 바로 대답했다.“엄마가 감기 걸려서요. 의사 선생님께 보였더니 괜찮다고 했어요.”강지찬이 이명자에게 말했다.“얼른 나으세요. 나중에 또 보러 갈게요.”이명자가 웃으면서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강지찬은 이명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정유진은 냉큼 온미정 쪽으로 달려갔다.‘이 병원에 오면 안 되겠어. 너무 쉽게 만나네.’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유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연우야, 오늘 재밌는 일 없었어?”“있었어. 온 씨 아저씨를 알게 되었는데 잘생기고 웃는 모습도 멋있었어.”온유한을 말하는 줄 알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온 씨 아저씨를 만나러 간 건데?”“흥! 오늘도 저번에 그 버릇없는 나쁜 아저씨를 만났어. 그 아저씨가 연우를 데리고 갔어.”정유진은 할
이튿날 날이 밝아지고, 강지찬은 침대 위에서 한참 동안 멍을 때려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그저 실성하듯이 웃을 뿐이다.‘정말 별 꿈을 다 꾸네.’옷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 임우연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대표님, 인수 프로젝트 이미 수정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확인하실 건가요?”“가져와 봐.”이따 바로 회의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강지찬은 밥을 먹으면서 한번 쑥 훑어보았다.최근에는 성원 인수를 신경 쓰느라 집에 돌아온 시간이 별로 없었다.회의가 끝나고, 최의현이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글쎄 성원이 일찍 망했다 했어. 지현 씨는 전혀 극복할 생각도 없었네. 아주 엉망이야.”최의현이 혀를 끌끌 찼다.“일부러 우리한테 떠넘긴 거 아니야? 집까지 팔았다며?”강지찬이 냉랭하게 말했다.“불쌍한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실패자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집까지 팔았으니 엄마, 친구 때문에 파산까지 당하고 건강도 악화하였다고 소문날 거야.”최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보면 정말 불쌍하긴 해. 이제는 별로 밉지도 않아.”강지찬이 힐끔 보면서 말했다.“성원 쪽은 네가 좀 신경 써줘. 부탁할게.”최의현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무슨 뜻이야? 지금 나한테 떠넘기겠다고?’“왜? 자신 없어?”“내가 너 심부름이나 해도 직접 책임지기에는 부족해.”“잘 생각해 봐. 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되니까.”최의현은 할 말을 잃었다.남자라면 혼자서 무언가 해내고 싶었다. 강지찬 밑에서 일하면 큰 부담은 없었지만 출세하기는 어려웠다.그는 한참 생각해 보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내가 해볼게.”‘강지현 그 이상한 놈이랑 접촉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뭐 어때서? 지금 성원을 노리고 있는 건 K 그룹뿐이 아니야. 일단 인수에 성공하고 보자고.’곧 연말이라 정유진도 바쁘고 있었다. 직원들 휴가일도 다가오고 있어 연말 총회, 보너스 등등 일일이 챙겨야 했다. 다행히도 슬슬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기 때
“눈이 많이 내리네요!”소미는 더욱 흥분했다.“정 대표님, 저희 내일 산 꼭대기에 가서 설경을 구경하면 되겠네요.”마침 사진기도 가져왔겠다, 두 사람은 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예쁜 것을 보면 참지 못했다.눈이 너무 많이 내려 고속도로도 막혀서 당분간 돌아가지도 못했다.집 문을 나서자마자 훤칠한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추 도련님, 어떻게 오셨어요?”소미는 추호와 정유진을 번갈아 보더니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추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정유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그쪽 사장님 찾으러 왔죠.”‘어젯밤 분명 눈이 엄청나게 왔는데.’정유진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언제 오셨어요? 어떻게 오셨어요?”“어젯밤에 운전해서 왔죠.”추호는 껄렁거리기만 했다.정유진이 깜짝 놀랐다.“눈이 많이 내려서 고속도로가 막힌 거 아니에요?”추호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모든 도로가 막힌 건 아니잖아요.”“미쳤어...”‘사고가 안 났길 다행이지. 만약에 사고가 났으면... 어우, 상상도 못 하겠네.’추호는 여전히 건들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깟 눈이 뭐 대수라고. 저는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전차, 오프로드 카를 몰던 사람이에요. 제가 뚫을 수 없는 길이 없어요.”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내가 너무 무시했나?’“추호 씨도 이제 성인인데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면 안 되죠. 이런 날씨에 운전하는 거 얼마나 위험해요. 그것도 캄캄한 저녁에 길도 잘 모르는데. 만약 사고 나면 제가 어떻게 부모님께 말씀드려요.”추호가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제 여자친구도 아니고, 제 와이프도 아닌데 왜 설명이 필요해요.”“그게...”정유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추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다.“밥먹어요. 누나, 저 배고파요.”세 사람은 민박집 식당으로 향했다.지금은 겨울방학이라 민박집에 손님이 많았다. 많은 가족들이 함께 여행하러 와서 바비큐도 해 먹고 온천도 즐겼다.정유진과 소미가 등신하겠다고 하니 추호도 따라가겠다고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