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날이 밝아지고, 강지찬은 침대 위에서 한참 동안 멍을 때려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그저 실성하듯이 웃을 뿐이다.‘정말 별 꿈을 다 꾸네.’옷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 임우연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대표님, 인수 프로젝트 이미 수정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확인하실 건가요?”“가져와 봐.”이따 바로 회의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강지찬은 밥을 먹으면서 한번 쑥 훑어보았다.최근에는 성원 인수를 신경 쓰느라 집에 돌아온 시간이 별로 없었다.회의가 끝나고, 최의현이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글쎄 성원이 일찍 망했다 했어. 지현 씨는 전혀 극복할 생각도 없었네. 아주 엉망이야.”최의현이 혀를 끌끌 찼다.“일부러 우리한테 떠넘긴 거 아니야? 집까지 팔았다며?”강지찬이 냉랭하게 말했다.“불쌍한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실패자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집까지 팔았으니 엄마, 친구 때문에 파산까지 당하고 건강도 악화하였다고 소문날 거야.”최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보면 정말 불쌍하긴 해. 이제는 별로 밉지도 않아.”강지찬이 힐끔 보면서 말했다.“성원 쪽은 네가 좀 신경 써줘. 부탁할게.”최의현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무슨 뜻이야? 지금 나한테 떠넘기겠다고?’“왜? 자신 없어?”“내가 너 심부름이나 해도 직접 책임지기에는 부족해.”“잘 생각해 봐. 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되니까.”최의현은 할 말을 잃었다.남자라면 혼자서 무언가 해내고 싶었다. 강지찬 밑에서 일하면 큰 부담은 없었지만 출세하기는 어려웠다.그는 한참 생각해 보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내가 해볼게.”‘강지현 그 이상한 놈이랑 접촉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뭐 어때서? 지금 성원을 노리고 있는 건 K 그룹뿐이 아니야. 일단 인수에 성공하고 보자고.’곧 연말이라 정유진도 바쁘고 있었다. 직원들 휴가일도 다가오고 있어 연말 총회, 보너스 등등 일일이 챙겨야 했다. 다행히도 슬슬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기 때
“눈이 많이 내리네요!”소미는 더욱 흥분했다.“정 대표님, 저희 내일 산 꼭대기에 가서 설경을 구경하면 되겠네요.”마침 사진기도 가져왔겠다, 두 사람은 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예쁜 것을 보면 참지 못했다.눈이 너무 많이 내려 고속도로도 막혀서 당분간 돌아가지도 못했다.집 문을 나서자마자 훤칠한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추 도련님, 어떻게 오셨어요?”소미는 추호와 정유진을 번갈아 보더니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추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정유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그쪽 사장님 찾으러 왔죠.”‘어젯밤 분명 눈이 엄청나게 왔는데.’정유진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언제 오셨어요? 어떻게 오셨어요?”“어젯밤에 운전해서 왔죠.”추호는 껄렁거리기만 했다.정유진이 깜짝 놀랐다.“눈이 많이 내려서 고속도로가 막힌 거 아니에요?”추호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모든 도로가 막힌 건 아니잖아요.”“미쳤어...”‘사고가 안 났길 다행이지. 만약에 사고가 났으면... 어우, 상상도 못 하겠네.’추호는 여전히 건들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깟 눈이 뭐 대수라고. 저는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전차, 오프로드 카를 몰던 사람이에요. 제가 뚫을 수 없는 길이 없어요.”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내가 너무 무시했나?’“추호 씨도 이제 성인인데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면 안 되죠. 이런 날씨에 운전하는 거 얼마나 위험해요. 그것도 캄캄한 저녁에 길도 잘 모르는데. 만약 사고 나면 제가 어떻게 부모님께 말씀드려요.”추호가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제 여자친구도 아니고, 제 와이프도 아닌데 왜 설명이 필요해요.”“그게...”정유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추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다.“밥먹어요. 누나, 저 배고파요.”세 사람은 민박집 식당으로 향했다.지금은 겨울방학이라 민박집에 손님이 많았다. 많은 가족들이 함께 여행하러 와서 바비큐도 해 먹고 온천도 즐겼다.정유진과 소미가 등신하겠다고 하니 추호도 따라가겠다고
세 사람은 바람 막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간단히 점심 먹고 이어서 등산하기로 했다.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자 추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먹고 얼른 서둘러야겠어요.”“서두르지 않아도 산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어요.”빵을 먹고 있던 소미는 정유진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고는 옆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추호가 타일렀다.“멀리 가지 마요.”그러고는 소미가 앉았던 곳에 앉았다.소미가 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미가 없으니 이제는 말하기로 했다.“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저희 둘은 불가능한 사이에요.”추호가 입을 삐쭉 내밀면서 말했다.“이혼한 거 아는데 왜 불가능해요? 전 누나가 싫지 않아요.”정유진이 멈칫했다.“어, 어떻게 알았어요?”“그게 뭐 대수라고. 물어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잖아요.”추호가 피식 웃었다.무쌍에 가느다란 눈을 한 그는 웃으면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다.하지만 정유진은 그를 그저 추민해의 아들로만 보고 있었다.“그러면 잘 알겠네요. 추씨 가문도 명문가인데 절대 이혼한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연애하고 결혼하는 건 저의 일이에요. 아무도 간섭하지 못해요.”그에게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이자 정유진은 필살기를 써보려고 했다.“돌싱녀는 괜찮지만, 애 딸린 여자는요?”추호가 멈칫하고 말았다.“무슨 뜻이에요? 애가 있어요?”정유진은 표정이 확 변했다.‘보기에는 어리숙해 보여도 반응이 꽤 빠르네.’추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누나는 비밀도 참 많네요. 정말 애가 있어요? 아빠는 누군데요? 강지찬 씨는 아니겠죠? 강씨 가문의 대를 이를 아이라면 이렇게 내쫓을 일도 없겠죠.”그의 오해에도 정유진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엄숙히 말할 뿐이다.“저는 일이 중요하지, 연애같은 거 할 시간이 없어요.”사랑도, 우정도 필요 없었다.추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계속 지내보죠. 나중에 제가 누나가 싫어 실지 어떻게 알아요.”“소미 씨 왜 아직도 안 오죠? 눈이
뒷산에는 아직 개발하지 않은 숲이 웅장했다.이쪽 기후가 특별해서 한겨울이라고 해도 다른 곳보다 숲이 무성했다.지금은 사처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숲속으로 뛰어 들어가서야 눈이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가시거리도 몇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소미가 별로 멀리 가지 않았겠다고 생각해서 목 놓아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눈깜짝할 사이 추호의 발자국 흔적도 눈에 뒤덮여 전혀 보이지 않았다.정유진은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뒷산은 넓기만 했다. 추호가 아무 데도 갈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추호가 소미를 찾아서 돌아왔는데 정유진이 보이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었다.정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다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렸다. 10m 정도 갈 때마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여전히 추호와 소미가 보이지 않자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나 의심되기 시작했다.한참을 걸은 그녀는 더는 멀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 원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이 숲에는 길이라고 없었고, 오면서 남겨진 발자국 흔적도 다시 눈에 뒤덮여 있었다.충분히 조심스럽게 걷노라고 했지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대로 눈밭에 사라지고 말았다.퍽!그러다 머리가 돌에 부딪히고 말았다.의식을 잃기 전, 동굴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을 보고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한편으로 추호는 역시나 발을 헛디뎌 쩔뚝거리는 소미를 부축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가 정유진이 보이지 않자 걱정했다.“정 대표님 저희 찾으러 갔나 봐요.”냉큼 정유진에게 전화해 보았지만 신호가 안 터져 연락할 수가 없었다.“추 도련님, 대표님께 아무런 일도 없겠죠? 연락이 안 돼요.”추호는 소미의 핸드폰을 빼앗아 다시 연락해 보더니 역시나 얼굴이 어두워지고 말았다.“사고를 당한 게 틀림없어요.”소미는 울고 싶었다.“네? 그러면 어떡해요. 눈도 많이 내리는데 어디 가서 찾아요? 제 잘못이에요. 멀리 가면 안 되었었는데...”추호는 그녀와 말할
강지찬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강설량이 조금 줄었지만 완전히 그친 것은 아니었다.그래도 쌓인 눈이 많아 등산길이 보이지도 않았다.강지찬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등산하려고 하자 현지 경찰이 말렸다.“강 대표님, 이미 구조대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올라가서 찾고 있습니다. 꼭 사모님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구조대원이 두 팀이나 있는데 아직 못 찾았다는 말씀이세요?”경찰은 뻘쭘함을 없애려고 말했다.“첫 팀은 아까 이미 추 도련님과 소미 씨를 찾았습니다.”강지찬은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냉정하게 산을 바라보더니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꼭 올라가 봐야겠어요.”‘산길이 얼마나 험악한데... 이대로 올라갔다간 우리한테 짐밖에 되지 않을까?’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최선을 다해 말릴 뿐이다.하지만 강지찬은 전혀 듣지 않았다. 오기 전부터 등산복에 등산 장비까지 갖추고 왔다. 장형준이 데리고 다니는 보디가드도 평범한 보디가드가 아니었다. 강지찬은 이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위풍당당하게 산속을 진입했다.비록 날은 어두웠지만 온통 눈으로 뒤덮여 은색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강지찬 등은 발자국 흔적을 따라 걷다 3시간 뒤에 구조대원과 만나게 되었다.그제야 울음을 그친 소미는 강지찬을 보자마자 펑펑 울기 시작했다.“강 대표님, 죄송해요. 다 저의 잘못이에요. 제가 등산하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제가 멀리 가지 않았다면 정 대표님은 실종되지도 않았을 거예요.”강지찬은 소미를 무시하고 구조대원 팀장에게 물었다.“상황이 어떤가요?”구조대원 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정 대표님이 남긴 흔적을 따라 세 번이나 찾아보았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강지찬은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물었다.“추호 씨는요?”소미가 훌쩍거리면서 말했다.“추 도련님도 정 대표님 찾으러 가셨어요.”강지찬은 두말하지 않고 장형준 등을 데리고 구조대원의 인도하에 정유진 찾으러 갔
“대표님, 여기 구멍이 있습니다.”“대표님, 이 동굴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강지찬은 옆 사람이 말려도 허리에 안전 밧줄을 메고 장형준과 함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정유진은 잠들었는지 쓰러졌는지 바닥에 움츠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숨 쉬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더니 다행히 아직 살아있었다.손전등으로 비추었을 때 돌에 묻은 피 흔적을 보고 그녀의 뒤통수를 확인했다가 다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대표님, 사모님께서 머리를 다치셔서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강지찬은 이미 두꺼운 패딩을 벗어 정유진에게 걸쳐주고는 품에 꼭 안고 있었다.얼굴을 정유진의 이마에 갖다 댔더니 차디차기만 했다.“유진아, 정유진!”정유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손도 만져보았지만 얼음장과도 같았다. 동굴에 눈이 쌓이지 않았기 다행이지 그랬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위에서 구조대원은 사람을 살리기 편하게 동굴구멍을 크게 만들고 있었다.강지찬은 사람들이 전해주는 핫팩을 뜯어 정유진에게 붙여주었다.구조에 성공해서 헬기로 서울에 보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진 뒤였다.이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정유진은 전신 검사받으러 갔고, 소미는 정형외과로 보내졌다.병원에 달려온 추민해는 강지찬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분명 이혼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혼했는데도 왜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거지?’강지찬이 직접 사람을 데리고 정유진 구하러 갔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추호 이놈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강 대표님, 저는 제호 그룹의 추민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강지찬은 별로 상냥하지 않은 눈빛으로 추민해를 쳐다보았다.추민해도 그가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눈치채고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정 대표님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강 대표님께서 이렇게 걱정해 주고 있는데 아무일도 없을 것입니다. 두 분 정말 관계가 좋아 보이네요. 부러울 따름입니다.”아부가 먹혔는지 강지찬은 표정을 풀고 그를 힐끔 쳐
정유진은 동굴에서 쓰러져서 한번 깨어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허약한 상태라 춥기까지 해서 얼마 견디지도 못하고 또다시 쓰러졌다.지금도 허약한 상태라 강지찬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품에서 스르륵 잠들어버리고 말았다.정유진이 잠에 들어서야 강지찬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병실을 떠났다.밖에서 벽에 기대고 있던 추호는 누군가 나오는 인기척에 고개돌려 쳐다보았다.이 녀석도 어제저녁 정유진을 찾느라 얼굴이 상처투성이였다.강지찬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유진이 누나 어때요?”추호가 물었다.강지찬은 그를 힐끔 쳐다볼 뿐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장형준이 근처에 호텔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샤워하고 옷 갈아입으려면 시간이 없었다.강지찬이 그냥 가버리는 모습에 추호도 인내심을 잃었다.병원에 도착하고부터 강지찬만이 병실에서 정유진과 함께했고 다른 사람은 한 발짝도 가까이하지 못했다.‘내가 왜 그래야 하지?’“이혼한 거 아니었어요?”추호는 강지찬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강지찬은 가다 말고 뒤돌아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그런데요?”추호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그쪽이랑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왜 혼자서 차지하고 그러세요? 다른 사람도 유진이 누나를 좋아할 권력이 있다고요.”“네까짓 게?”강지찬은 이 한마디를 내뱉고 이곳을 떠났다.한 번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 없는 추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추호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두 명의 보디가드가 말렸다.“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물러나세요!”건장한 두 보디가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추호의 앞을 막아섰다.추호는 단번에 이들이 일반 보디가드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한 명은 상대가 되겠지만 두 명은 어려워. 그것도 모자라 엘리베이터 쪽에도 두 명이 지키고 있잖아. 젠장!’정유진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오후 1시쯤이었다.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속도 메슥거렸다.다행히 전처럼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았다.옆에는 검은 셔츠를 입고 소파에서 업무를 보고 있
정유진이 자고 있을 때, 온유한과 온미정이 보러온 적 있었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말에 온미정이 또 한 번 보러왔다.강지찬이 전화 받으러 나가고, 병실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둘뿐이었다.온미정이 유심히 쳐다보자 정유진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모님, 왜 저를 그렇게 쳐다봐요?”온미정이 고개를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어젯밤 난리였다고 들었어. 눈이 많이 내려서 고속도로까지 막혔는데 지찬이가 직접 전화해서 길을 뚫은 게 뭐야. 나중에 눈이 그친 덕분에 헬기로 데려왔어. 어때, 뭐 느끼는 거 없어?”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맙죠.”온미정이 멈칫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내가 뭐라고 더 안 할게. 너희들 마음대로 해.”이때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왜 들어가서 보면 안 돼요? 당신이 뭔데요. 저 유진이 누나 회사 동료예요. 좀 비켜주세요...”목소리를 들어보니 추호인 것 같아서 들여보내라고 했다.온미정은 출근해 봐야 해서 이만 이곳을 떠났다.“정 대표님, 드디어 깨셨네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소미는 또 울음이 터졌다.평소 울지 않던 소미가 눈이 충혈될 때까지 운 것을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이제 괜찮아요. 울지 마요.”소미는 발목을 상해서 휠체어에 앉아있었다.“발목 괜찮아요?’“괜찮아요. 살짝 삐었을 뿐이에요.”소미는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제가 너무 멀리 간 것이 문제였어요. 이쁜 풍경을 찍어보려다 발목까지 상하고. 제가 멀리 가지 않았다면 대표님께서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정유진이 웃으면서 말했다.“제가 추호 씨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그러더니 또 추호에게 물었다.“추호 씨는 괜찮아요?”추호는 그저 얼굴이 긁혔을 뿐 다른 문제는 없었다.그저 어젯밤 일로 추민해에게 된통 혼났을 뿐이다. 제일 억울한 건, 얼마나 열심히 찾았는데 강지찬이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다.‘내가 너무 멍청했어.’“저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요.”추호는 불쾌한 표정이었다.“다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어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