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회의가 채 끝나지 않아 점심을 아래층 식당에서 먹고 오후에 다시 회의를 마저 해야 했다.정유진은 회의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소미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두 사람은 밥을 따르고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식사 시작하기도 전에 임우연이 찾아왔다.“정 대표님, 강 대표님께서 오시랍니다.”정유진이 답했다.“저 거절해도 돼요?”임우연이 답했다.“강 대표님께서 정 대표님이 안 오시면 자기가 직접 오셔서 모셔 가신답니다.”정유진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찬 이 나쁜 놈이 무조건 자기를 핍박할 그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을 거라는 걸 정유진은 알고 있었다.강지찬은 룸에서 음식을 한 상 시켰다. 정유진이 도착했을 때 음식은 이미 다 나왔고 정유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룸 문은 정유진이 들어간 후 바로 닫혔다. 정유진은 강지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정유진은 강지찬이 오만가지 방법을 써가며 자기를 강지찬 곁에 두려는 것은 자기를 모욕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무슨 시추에이션이지?왜 밥까지 사주는 거지?“앉아, 서서 뭐 해?”강지찬은 재촉했다.“오후에 회의도 있는데 빨리 먹자고.”정유진은 급해하지 않고 물었다.“강지찬, 우리의 합작 내용에는 당신이랑 같이 밥도 먹어야 한다는 조항이 없지 않아요?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불필요한 오해만 생길 게 두렵지 않아요?”강지찬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무슨 오해?”“다른 사람들 눈에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당신은 우리 사이가 들통날까 두렵지 않아요?”강지찬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당신이 무서운 게 아니고?”정유진은 대뜸 대답했다.“그래요. 난 무서워요. 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이 말을 남기고 강지찬과 한 상의 음식들을 그 자리에 버려둔 채 문을 열고 룸에서 나갔다. 급하게 선을 긋는 모습에 강지찬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상을 엎을 뻔했다.최의현은 껄렁껄렁하며 걸어 들어와 눈을 찌푸렸다.
전태연은 확실히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비서실 사람한테 가로막혔다.“전 아가씨, 강 대표님 아직 회의 중이십니다.”전태연도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얘기했다.“정유진 어딨어요? 나 정유진 보러 왔어요.”비서실 직원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정 대표님도 외의 중이십니다.”“정 대표?”전태연은 얼굴색이 확 변했다.“정유진이 언제 정 대표가 됐어?”정유진이 K그룹에서 직무를 맡은 건 비밀도 아니었다. 이 일은 전태연이 사람을 써서 슬쩍 알아보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비서실 직원도 숨기지 않았다.전태연은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굳었다.‘강지찬 무슨 뜻이지?’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지난번에 안나를 손보고 난 후부터, 안나는 마침내 조용해졌다. 이에 전태연은 득의만만해하고 있었다.근데 강지찬이 정유진이랑 또 엮일 줄 생각도 못 했다.이혼한다면서? 왜 같이 출근하는 거지?정유진이 K그룹에 온 첫날 하루 종일 회의만 하다가 회의 끝날 무렵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사무실에 들어와 앉기도 전에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그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점점 급해졌다. 분명한 건 좋은 사람 같진 않았다.“정유진!”전태연은 큰소리로 정유진의 이름을 외쳤다.정유진은 돌아서는 동시에 몸을 한쪽으로 피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정유진을 향해 내리치는 전태연의 손목을 딱 잡았다.“뭐 하는 짓이에요?”전태연은 화가 잔뜩 났다.“정유진, 당신 참 뻔뻔하네. 한 편으로 나한테 강 대표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강 대표랑 엮여 있고, 같은 여자로서 참 수치스럽네요!”정유진은 전태연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강지찬한테 가서 따지세요. 나랑은 상관이 없어요.”“내숭 떨지 마시죠. 당신이랑 상관이 없다고? 그럼, 강 대표가 당신을 귀찮게 한다는 소리예요?”정유진은 속으로 ‘진짜인데 당신이 안 믿을까 봐.’라고 생각했다.소미가 달려 들어왔다. 비록 소미는
강지찬은 정말 전태연을 강 씨 본가로 데려왔다.장형준도 미리 집사한테 전화했다. 집사는 푸짐하게 저녁을 준비하라고 주방 분들한테 당부하고 또 둘째 네 부인들을 불렀다.비록 갑작스러운 방문이지만 전태연은 체면을 아주 중요시하고 또 손도 큰 성격이라 백화점을 한바탕 돌아본 후 송지윤한테 준비한 선물마저 아주 고급스러웠다.류선은 선물을 받고 마음이 쓰라렸다. 마음속으로는 강지찬이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이렇게 새 여자를 데려온 것을 보고 이번에도 분명 자기 아들의 앞을 가로챌 거라고 생각했다.류선은 자기 아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큰 회사를 차렸는데 절대로 이렇게 강지찬한테 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마음속으로 이렇게 궁리를 하며 류선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태연아, 지찬이 이렇게 너를 데리고 집안 어르신까지 만나는데 언제 그 여자랑 이혼을 한다는 소리는 없었냐?”후배를 배려하는 표정을 하고는 걱정스레 물었다.“아무리 강지찬이 몰래 결혼을 한 거라지만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잖아. 만일 어느 날 소문이라도 난다면 네가 남의 결혼에 끼어든 내연녀가 되는 거잖아? 넌 생긴 것도 예뻐, 집안도 정유진에 비해 훨씬 좋잖아. 내연녀로 오해받으면 얼마나 억울해, 안 그러니?”이 말은 그야말로 전태연의 정곡을 찔렀다. 전태연은 바로 류선의 자기의 지음으로 삼았다.남자들이 옆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전태연은 낮은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그 일로 속을 태우고 있어요. 둘째 숙모님께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요?”류선은 강지찬과 정유진이 평생 같이하기를 그 누구보다 원했다. 류선은 강지찬이 집안이 부유한 여자와 결혼해서 강지현을 제압하는 걸 볼 수는 없었다.입으로는 능청스럽게 말했다.“지찬이가 너를 본가에 데려온 걸 보아하니 지찬이 맘속에도 네가 있다는 걸 말해. 넌 그저 방법을 써서 정유진을 내쫓으면 돼. 여자는 말이야, 적당히 응석을 부릴 줄 알아야 해.”마음속으로는 달리 생각했다.“그래 난리를 피워. 강지찬이 제일
강홍택은 원래 송지윤의 집에 가서 쉬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류선한테 억지로 끌려갔다.심지어 가기 전 송지윤을 한번 째려보았다.“나, 이 사람하고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내일에 너한테 보낼게.”송지윤은 웃으며 답했다.“괜찮아요. 사부님 맘 편한 대로 하시면 되죠.”실은 마음속으로는 혼자인 게 홀가분했다. 내심 강홍택이 자기 집에 안 왔으면 했다.“당신 뭐 하려고?”강홍택은 류선의 행동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류선의 마음이 편협하고 대범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류선은 강홍택의 이런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송지윤이 강 씨 저택에 들어온 다음부터 이 남자는 완전히 그 모자한테 정신이 팔렸다. 강지현에 대해 신경을 안 쓰는 것 둘째 치고 사람이 투지마저 잃었다.완전히 찌질이랑 다름이 없었다.“내가 용건이 뭐 더 있겠어요? 당신 마음속에 저 두 사람 빼고 나랑 지현이가 있기나 해요?”류선이 또 이 얘기를 꺼내자 강홍택은 짜증이 났다.“됐어, 됐어. 빨리 용건이나 말해.”류선은 그제야 불쾌해하며 말했다.“지찬이가 전태연을 집에 데리고 왔는데 우리도 빨리 지현이를 재촉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강홍택은 낯 색이 한 층 어두워졌다.“당신 또 무슨 꿍꿍이야? 지현이 지금 성원 일 때문에 지찬이에게 방비 당하고 있어. 이 시기에 또 불난 데 부채질하려고? 당신 정말 한가해서 탈이 났어?”“지찬이 우리 지현이를 방비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에요? 그래도 우리 지현이 자기 능력으로 저렇게 큰 회사를 차렸지, 뭐예요?”말할수록 류선은 화가 났다.“당신은 왜 자기 사람의 기세를 꺾어요! 강지찬이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우리 지현이가 걔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요? 구소원 집안이 전태연네보다 재력이 좀 못하긴 해도 구소원 삼촌이 아주 능력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구씨 가문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 내부 정보들 강지찬한테 넘어갔을 리가 없잖아요.”강홍택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류선이 드디어 한번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구씨
정유진은 점차 두 곳의 출근 템포에 적응했다.그녀와 서정호가 담당한 프로젝트는 서로 달랐다. 서정호는 정부 청사업무를 담당했고, 정유진은 "신규지역 개발"업무를 담당했다.신규지역 개발 업무 역시 정부가 시작한 새로운 프로젝트로, 전 서울에서 가장 큰 단지를 구축하고 새로운 상권을 개발한다는 내용이었다.만약 K그룹에서 이 프로젝트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정유진의 연우 인테리어 또한 아마 단번에 높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회의를 끝마친 소미는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한 상태로 두 눈을 반짝였다.“대표님, 이대로만 간다면 저희 연우 인테리어가 대박 나지 않을까요?”정유진도 마음속으로는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열심히 해서 이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도록 해야죠.”그러자 소미가 가까이 다가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제가 듣기로는 이 프로젝트가 원래는 K그룹에서 손에 넣었다고 하던데 왜 갑자기 온 나라에서 이 두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많은 국내 부동산 거물들이 이것 때문에 서울로 몰려오고 있거든요. 제가 그때 커피 타러 갔을 때 들어보니 강 대표님 쪽에서 지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는 것 같더라고요.”쇼핑몰은 전쟁터와도 같다. 강지찬이 다른 사람을 깊이 모함하면, 본인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 의해 모해 당할 것이다.정유진이 소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이 일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맡은 본업만 잘하면 될 거에요.”사무실에 돌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의 유선 전화가 울렸다.수화기 너머로는 강지찬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녁에 나랑 같이 가야 할 접대 자리가 있어.”그 말에 정유진이 멈칫했다.“강 대표님, 접대 같은 자리에 굳이 이 디자인 총 디렉터가 갈 필요는 없지 않나요?”강지찬이 비아냥거리며 답했다.“뭐가 겁나서 그러는데? 혹시 내가 널 팔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야? 걱정하지 마, 난 한빈이 아니니깐.”말을 마친 강지찬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에게는 항상 그녀의 마음
온 저녁 동안 정유진은 술 한 잔만 마셨다.중간에 화장실 한번 갔다 오면서 하마터면 실수로 웬 여인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 없죠?”상대방의 정교한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고, 목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정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괜찮아요.”하지만 그 여인은 그래도 내키지 않는 듯 보였다.“제가 신발을 밟은 것 같은데 너무 죄송해요. 제가 한 켤레 새로 사드리는 건 어때요?”정유진은 오늘 흰색 하이힐을 신었는데, 조금 전에 하도 살짝 밟은지라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이윽고 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진짜 괜찮아요. 화장실에 가서 한번 닦으면 되니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정유진의 태도에 그 여인은 손을 내밀어 보였다.“안녕하세요, 저는 구소원이라고 해요.”“정유진입니다.”정유진도 구소원에게 악수하며 둘은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그녀는 휴지를 가지고 구두코에 묻은 자국을 닦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저 진짜 괜찮아요.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구소원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조금 전에 너무 예쁘신 것 같아서 얼굴을 감상하다가 부딪히고 말았네요. 근데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네요.”“고마워요. 구소원 씨도 예뻐요.”상대는 딱 봐도 아주 교양 있는 부잣집 딸 같았고, 전태연과는 사뭇 달랐다.한참 뒤, 화장실에서 나오니 임우연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정 대표님, 조금 전 그 아가씨가 누군지는 아세요?”그 말에 정유진이 멈칫하며 물었다.“임 비서 말을 들어보니, 임 비서는 아나 봐요?”임우연이 웃으며 답했다.“구 씨 가문도 서울에서 이름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죠. 저 또한 잘 알고 있고요. 구소원 씨 삼촌 직위가 낮은 게 아니거든요.”그의 말에 정유진은 오늘 소미가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아마 구소원의 삼촌은 강지찬 쪽의 사람이 아니라서 오늘 저녁 접대 리스트에 없었던 듯하다.정유진의 무언가 깨달은듯한 모습에 임우연이 또 한마디 더
강지찬은 사실 그 정도로 취한 게 아니었고, 단지 정신이 온전치 않을 뿐이었다.그는 답답한 듯 셔츠 단추를 잡아당기며 ‘물’이라고 중얼거렸다.정유진은 그에게 따뜻한 물 한잔 따라주었다.물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강지찬은 이미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상태였다. 그는 상의를 벗고 자는 습관이 있어 그대로 누워있기는 불편한 듯 보였다.이윽고 정유진이 힘겹게 그를 일으켜 물을 먹였다.강지찬은 물을 마시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알코올에 젖은 그의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눈빛에서는 빛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아쉽게도 정유진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형준 씨 숙취해소제 사러 갔으니 곧 올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정유진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다시 눕히려 하였다.하지만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 강지찬이 갑자기 그녀를 침대에 눕혀버렸다.강지찬은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무섭게 바라봤다.“누가 너보고 가래?”말을 마친 뒤 그는 정유진의 반항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키스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의 행동에 정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속으로 설마 강지찬이 사람을 오해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그녀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쳐보았지만 아쉽게도 190의 큰 키를 가진 강지찬을 밀쳐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침실의 인기척은 꽤 컸고, 약을 사 갖고 온 장형준과 임우연은 문밖에서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이윽고 장형준이 먼저 눈치를 주었다.“들어갈까요?”그러자 임우연이 잠시 고민하다 그냥 물러서자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장형준도 그의 뜻을 알아채고 약을 밖의 서랍에 올려놓은 뒤 조용히 뒤따라 그 자리를 떠났다.침실에서는 정유진이 아직도 그를 밀치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밀쳐내지 못한 그녀는 급한 나머지 장형준을 깨물어버렸다.너무도 꽉 깨문 나머지 장유진은 입에서 피 맛을 느낄 정도였고, 강지찬에게서는 피가 흘러나왔다.강지찬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아래에 깔린 그녀를 바라봤다.“정유진, 너
정유진은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그의 표정을 보면 누가 봐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이윽고 강지찬은 이미 그녀 앞까지 걸어왔고, 손을 내밀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그러고는 정유진을 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어제 내 침대에 두고 갔더라고.”그 말에 정유진의 머리는 순식간에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다른 사람들도 놀랍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렸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강지찬과 정유진을 바라보았다.정유진은 그 순간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다.‘이 자식, 이거 고의일 거야.’그의 손에는 확실히 그녀가 어제저녁 실수로 두고 간 귀걸이가 있었다.하지만 정유진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강경하게 화를 내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강 대표님, 지금 뭔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건 제 물건이 아닙니다.”말을 마친 뒤 그녀는 강치찬과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를 든 채 사무실로 걸어갔다.강지찬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점점 교활해지네?’사무실에 도착한 정유진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고, 하마터면 커피도 쏟을 뻔하였다.‘강지찬 미친놈, 대체 뭘 하려는 거야?’그가 한 말 때문에 보나 마나 이상한 소문이 돌 것이다.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소미가 아침을 사 들고 급히 들어왔다.“대표님, 밖에 사람들 미친 거 아니에요?”“왜 그래요?”“밖에서 지금 대표님 소문이 돌고 있어요. 대표님이 강 대표님이랑 잤다고요.”그녀는 사 들고 온 아침과 핸드백을 한쪽에 놓으며 이어서 말했다.“기다려봐요. 제가 가서 그 여자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에 정유진은 얼른 그녀를 말렸다.이런 일을 제대로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강지찬은 누가 봐도 일부러 그렇게 한 거라 더욱이 어려울 것이다.“저는 당당해요. 그러니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처리될 거에요.”정유진은 소미의 의심 섞인 눈빛과 마주하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