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사무실.최의현의 비웃음과 함께 강지찬은 핸드폰으로 자신의 입술 사진을 찍었다.“흐흐, 정유진 씨가 너를 얼마나 싫어했으면 그랬겠어? 조금 더 힘줬더라면 너 살 떨어졌겠다야.”오전 내내 어쩔 수 없이 회의를 진행해야 했던 최의현이 푸념을 늘어놓았다.“이건 내가 널 뭐라 하는 게 아니라, 너 어떻게 이렇게 못될 수가 있냐? 지금 그거로 인해 정유진 씨 소문 돌게 하고 말이야. 유진 씨가 지금쯤 널 진짜 싫어할 듯?”강지찬은 입술의 상처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리며 최의현을 바라봤다.“오후에 있는 영상 회의도 네가 참석해야겠다.”그 말에 최의현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넌 내가 얼마나 바쁜지 모르지?”그러자 강지찬이 턱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내가 지금이 상태인데 어떻게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겠어!”말을 마친 그는 서랍을 열더니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차 키를 하나 꺼내 내던졌다.최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뭔 뜻이야?”강지찬:“네가 욕심냈었잖아? 너 줄게.”말이 끝나기 무섭게 책상 위의 차 키는 이미 최의현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그 차는 강지찬이 구매 후 2회 정도 사용했던 구하기도 어려운 값비싼 차였다.“연말 보너스라고 생각해.”“그래, 난 상관없어.”최의현이 나가려 할 때쯤, 임우연이 다급히 들어왔다.“강 대표님, 전태연 씨 왔습니다.”그 말에 최의현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우리 회사에 스파이라도 심어놓은 거 아니야? 소식 너무 빠른데?”그러자 강지찬이 담담하게 답했다.“얼마든지 난리 피우라고 해. 다른 사람 해치지 않는지만 신경 쓰고.”그러자 임우연이 잠시 머뭇거렸다.“아…알겠습니다”그는 자기 대표가 대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최의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또 뭐 하려고 그래? 조심해, 전태연 씨 호락호락한 성격 아니니까.”그 말에 강지찬은 차갑게 콧방귀만 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아래에서는
“강 대표님, 둘째 도련님 오셨습니다. 때마침 정 대표님과 남태연 씨가 싸울 때 맞춰 오셨어요.”임우연은 강지찬을 보며 대신 걱정하고 있었다.아침에 강지찬이 그렇게 소동을 피운 뒤로 회사 분위기는 뒤숭숭했고, 다들 뒤에서 몰래 흉을 보고 있었다.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게다가 남태연의 그 소동으로 인해 오후에 또 이야깃거리가 생겼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찬의 표정은 차가웠다.“강지현도 왔다고?”남태연이 회사에 스파이를 심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강지현이 가장 먼저 왔다는 건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K그룹이 자기 놀이터인 줄 아나 보네.”강지찬이 차갑게 답하자 임우연이 참지 못하고 그에게 상기시켜줬다.“대표님, 안 내려가 보셔도 되겠습니까?”강지찬이 3초 고민하더니 답했다.“가봐야지.”여자가 마음을 먼저 돌리기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양심이 없는 일인 것이다.강지찬은 그래도 자신의 방법대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그의 불에 기름을 붓는듯한 말투에 임우연은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게 후회스러웠다.한편 아래층.전태연은 여전히 욕설을 퍼붓고 있었고 소리도 엄청 높아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강지현은 정유진의 앞에서 전태연을 제지하고 있었다.“전태연 씨, 제삼자인지 아닌지는 유진 씨가 더 잘 알 테니까 여기서 그만하시죠.”“난 그쪽이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전태연이 매섭게 강지현을 노려봤다.그녀도 강지현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정유진도 이혼을 원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그녀가 제삼자라고 욕하는데 듣고만 있었을 수는 없을 것이다.게다가 전태연은 사실 마음속으로는 엄청나게 당황해하고 있었다. 강지찬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그가 정유진을 자기 옆에 불러다 놓고 있는걸 보면 누가 봐도 이혼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강지현은 더 이상 전태연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몸을 돌려 정유진을 바라봤다.“아니면 나가서 좀 앉아있을래요?”업무시간도 곧이고
정유진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강지찬을 바라봤다. ‘이 사람 미친 거 아니지?’옆에서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멍해 있었다.‘정유진이 사모님이라고?’‘진짜야 가짜야?’강지찬은 여전히 한 손으로 정유진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속으로는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하지만 정유진이 그와 선을 지키려 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이혼하겠다고? 그래 두고 봐!’이윽고 강지찬이 진심 섞인 말투로 말했다.“미안해, 여보. 원래는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려 하지 않았어. 결혼한거 숨기며 지내는 거도 일종의 비밀연애라고 느꼈거든. 근데 오늘 이 상황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더라. 난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건 참을 수 없어.”강지찬의 본모습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의 이 모습에 쉽게 속아 넘어갈 것이다.정유진은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강 대표님, 연기 진짜 잘하네요.”‘이젠 연기도 하네. 어디 남우주연상이라도 줄 가?’“대표님이라 하지 말고 여보라고 불러.”강지찬은 그윽하게 정유진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정유진만 그의 그 연기를 눈치챌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는 그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이혼하겠다고? 어디도 못 가게 내 옆에 둘 건데? 모든 사람이 넌 강지찬의 여자라는 걸 알게 할 거야.’한편, 그들 모습에 남태연은 눈시울이 빨개졌다.“강 대표님, 그, 그럼 저는요?”강지찬이 고개를 들어 남태연을 바라봤다.“남태연 씨,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남태연은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삽시간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삼자 상간녀라고 정유진을 욕하던 그녀였는데, 강지찬에게 이렇게 뒤통수를 맞다니!정유진이 강지찬 와이프이기 때문에, 남태연이야말로 그들 혼인의 제삼자인 것이었다.남태연은 경호원과 함께 울면서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이윽고 강지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유진
강지찬과 정유진의 은밀한 결혼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특히 K 그룹의 직원들은 정유진이 전에 성원과 비지니스를 맺은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마음대로 의논할 수도 없었다.언제 어디에서나 만나면 정 대표님이라며 깍듯이 모셨다.정유진은 할 수 없이 책상을 두드렸다.소미는 시선을 거두고 열심히 일하는 척하며 웃었다.“정 대표님, 뭐 하시는 거예요?”“커피 좀 내려 주세요, 고마워요.”소미는 그녀를 위해 커피를 내려오며 돌아 올때 경악했다.“정 대표님, 공정부의 직원들이 급하게 나가는 걸 봤어요.”정유진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요, 다른 일에 관심 가지지 말고요.”“관심 가지는 게 아니라 그냥 말씀드리는 거예요.”소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정유진과 강지찬의 일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나 계속 물어보지 못했다.정유진도 말하기 싫었다.다음날 정유진은 K 그룹으로 가지 않았다. 최근 연우 인테리어와 비즈니스를 맺었는데 그중의 한 공정이 바로 예술학원이었다.이 예술학원은 규모가 꽤 컸기에 정유진이 직접 현장으로 가서 계량했다.그들이 오전부터 오후 세 시까지 계량을 끝마치고 나서야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학교에서 나오니 갓길에 세워진 경찰차와 함께 시공 중인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저, 저분은 강 대표님?”정유진은 소미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강지찬이 사람들과 함께 그곳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정유진은 이 현장이 강씨 가문의 것임이 기억났다.시중심에서 이런 시공 현장은 비쌌기에 재력이 없는 기업에서는 감당 불가였다.강씨 가문은 여기에 쇼핑센터와 고급 아파트를 지으려고 한다고 들었다.강지찬도 현장에 온 걸 보니 사고가 났을 것이다.정유진은 한번 싹 훑고 옆의 기자들을 발견했다.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현장의 경찰들이 제지하는 바람에 찍지 못했다.옆의 아저씨가 설명하기 시작했다.“시신이 나왔어요. 시신뿐만이 아니라 백골이 다 되었다니까. 이런 집을 누가 사?”그
인터넷의 글은 금세 퍼졌다. 정유진은 샤워를 마친 후 강씨 가문과 강지찬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것을 발견했다.하나는 네티즌이 강씨 가문의 부동산 매물의 안전 통로가 불적합하다고 폭로한 것이었다.또 하나는 한 크리에이트가 강지찬의 사생활이 불결하며 여자 연예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양다리를 걸친다고 폭로했다.정유진은 형사사건이 이렇듯 큰 여론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시신을 발견한 건 부동산 매물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정유진은 이번 일을 엄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씨 가문은 컸기에 강지찬의 직원들이 해결해 줄 것이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다음날 그녀는 강지찬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가 직접 받은 비즈니스이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기에 현장에 가서 보고 싶었다.강지찬의 집은 천장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꽤 빨리 진행되었다.집에서 나올 때 이미 퇴근 시간이어서 정유진이 차를 타려고 할 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몸을 돌려 보니 강지찬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우연이네요.”걸어오는 그를 보며 정유진이 말했다.“집 보러 온 거야? 나 일 있으니까 먼저 갈게.”강지찬은 그녀의 차 문을 눌렀다.“나를 피하는 거예요?”정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와 잘 지낼 방법을 몰랐다.그가 한빈과 한패란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아름다운 백옥에서 티를 발견한 것 마냥...정유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강지찬도 화를 내지 않았다.“시간도 늦었으니까 같이 밥 먹어요.”둘은 그렇게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할 얘기가 없었기에 정유진은 인테리어 얘기만 했다.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강지찬은 얘기했다.“당신의 걱정을 나한테 얘기할 수 있어요?”정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얘기할 게 없어. 너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릴 수 없어.”그녀의 얼굴은 강경했다. 마치 4년 전에 그녀가 강지찬을 떠날 때와도 같았다.강지찬은 쓰게 웃었다.“당신에게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알아요. 근데 나한테는 너무 중
미팅룸은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최의현은 강지찬과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탁자를 짚었다.“말 좀 해보세요.”홍보부서의 책임자는 땀을 닦으며 안절부절 못했다.“여론은 이미 가라앉혔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워낙 영향이 커서 부동산 매몰에는 악영향을 끼칠 것 같습니다.”최의현은 또다시 다른 경영자들을 바라보았다.“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방안 좀 생각해 보세요.”그때 장형준이 갑자기 들어와 강지찬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둘은 미팅룸을 나갔다.그가 나가니 미팅룸의 직원들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이번 여론 몰이에는 배후가 있을 거예요. 아마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것일 거예요.”최의현은 얼굴이 어두워졌다.“남들 다 아는 말은 하지 마세요. 지금 중요한 건 해결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는 거예요. 특히 매몰에는 영향이 가면 안 돼요.”대표님 사무실에서 장형준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형사들이 고고학자들을 요청했는데 경원장이 소개한 분이십니다. 그 시신은 일부러 묻은 것으로 예측됩니다. 상대방의 수단이 대단하여 아직 확실하지 않아 다른 고고학자를 요청했답니다.”강지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결과는 언제 나오지?”“적어도 이틀 걸립니다.”지금 여론의 확산 속도를 보면 이틀은 또 다른 이슈를 만들 수도 있었다.그러나 이틀은 경찰 측에서 내온 최소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경찰들도 매일 야근을 하며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경찰 측에서도 이미 몇 개의 회사를 수색했어요. 하지만 서울에 있지 않았기에 시간이 더 필요할 거예요.”강지찬은 손을 내저으며 나가라는 제스처를 보였다.몇 발짝 나가자 임우연이 딸라 들어왔다.“강 대표님, 전 대표님 오셨습니다. 제가 막지 못했습니다...”말이 끝나자 전태연의 아빠가 들어왔다.강지찬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차만 부탁했다.“차 마시러 온 거 아닙니다.”전 대표는 매우 화나 보였다.“강지찬 씨, 모르는 척 하니 재밌나요?”강지찬의 눈빛은 차가워졌다.“요즘에 바빠서
공정부서의 분위기는 매우 긴장되어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정유진은 소미에게 다른 말 없이 본분만 다 해라고 전했다.그녀는 한규진을 만나려고 했다.그러나 강씨 가문이 지금 일이 발생했으니...강지찬은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정유진은 강씨 가문의 주식을 보니 내려갔다.점심을 먹고 그녀는 커피를 내려오니 소미는 핸드폰을 들고 달려왔다.“정 대표님, 강 대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요.”이번 강지찬의 실시간 검색어는 안나와의 스캔들과 관련 있었다.네티즌들은 그를 나쁜 남자라고 욕하며 강씨 가문이 인테리어한 부동산을 거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언론을 통제하는 자는 역시 네티즌들의 “나쁜 남자”에 대한 역겨움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었다.오후에 주식이 거래가 개시되자 강씨 가문은 곤두박질쳤다.최의현은 강지찬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홍보팀이 검색어를 지우는 걸 허락하시지 않으시고, 무슨 생각인 거예요? 그냥 두실 건가요?”강지찬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검색어는 지울 수 있어도, 네티즌들은 어떻게 할 건데?”“...”임우연이 달려 들어왔다.“강 대표님, 안나가 트위터를 올렸습니다.”강지찬과 최의현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안나도 실검에 올랐기에 자신은 강지친과 친구 사이이며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반박했다.네티즌들은 믿지 않고 안나의 두 작품이 강지천이 투자한 사실을 끄집어냈다.최의현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밤의 행사에 참석하실 건가요?”“강지현도 있나?”“아마도요.”“가야지, 왜 안가?”“어디로 갈 건가요?”강지찬은 최의현에게 답하지 않고 내려가 정유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공정팀의 직원은 강지찬이 정유진을 데리고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뭐 하는 거야?”정유진은 발버둥을 쳤지만 강지찬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엘리베이터에서 강지찬은 화를 풍겼고 정유진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지금은 출근 시간인데 왜 나를 데리고 나오는 거야?”강지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정유진을 한쪽으로 밀
정유진이 강지찬에 의해 집으로 돌아오자 이미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을 보며 머리를 묶은 남자가 놀라며 말했다.“또... 메이크업해 줘야 하는 거예요?”그 남자는 바로 메이크업 아티스트 송 선생님으로 4년 전에 정유진에게 두 번 정도 메이크업을 해 준 적이 있었다.“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하셔도 돼요.”강지찬은 그녀를 짚으며 송 선생님에게 말을 마친 후 올라갔다.정유진은 송 선생님에게 물어 본 후 강지찬이 자신을 데리고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타이밍에 나를 데리고 간다고?’정유진은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강지찬은 바지를 벗어 팬티 바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에요?”“강지찬,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야. 왜 나랑 얘기하지 않고 마음대로 해?”“당신은 내 아내예요. 같이 가는 게 맞지 않나요?”“...”그의 모습은 정말 얄미웠다.강지찬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두 날이나 잠을 자지 못했어요. 여자들은 메이크업에 시간이 많이 든다면서요? 천천히 해요. 그리고 6시에 깨워줘요.”주식이 모두 떨어졌는데 행사에 참석할 기분이 있나?그럼 이 행사는 일반 행사가 아닐 것이다.정유진이 강씨 회사에서 출근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자났기에 그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정도는 잘 알았다.이건 강지찬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 회사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일이다.시간이 충족하니 송 선생님은 그녀에게 얼굴 마사지까지 해주었다.마시지가 끝날 때 벨소리가 울렸다.문을 열자 마치 4년 전의 장면이 펼쳐졌다. 십 여벌의 예복과 그에 어울리는 쥬얼리가 전시장처럼 거실에 펼쳐졌다.“그냥 이 정도로 해요. 제작은 무리예요.”송 선생님은 유진에게 말했다.“사모님, 먼저 예복 골라보세요. 예복이 정해지면 메이크업을 정하죠.”정유진은 그녀의 호칭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그녀는 강지찬이 자신을 데리고 가는 이유를 알았기에 눈에 띄는 예복을 고르는 건 필수였다.그녀의 눈에는 중간의 레드색 예복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