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연이 강씨 집안에서의 위치는 진짜 딸인 강지아보다 더 높았다. 적어도 강홍식이 있는 집과 이 마당은 전부 고세연의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정유진에게 쫓겨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고세연의 체면이 깎이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세연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유진! 감히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네까짓 게 뭔데!’정유진이 고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지아가 너를 보면 분명 자극을 받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비켜야지 아니면 누가 비킬까? 잊지 마, 지아야말로 강씨 집안 친딸이야. 성이 강씨인 진정한 아가씨이고.”말문이 막힌 고세연은 입술만 깨물었다. 정유진의 이 한마디는 그때의 납치사건뿐만 아니라 여기가 강씨 가문이라는 것까지 그녀에게 일깨워줬다.강씨 집안에서 외부인은 오직 고세연뿐이다.그때 강홍식이 고세연의 편을 들며 말했다. “됐어, 지아가 몸이 안 좋으니 사람을 시켜 음식이나 갖다 줘. 설날부터 굳이 온 집안 떠들썩하게 하지 말고.”사실 그동안 이런 상황이 강씨 집안에서 수없이 연출되다 보니 송지윤과 강지혁만 빼고 모두 익숙해진 상태였다.강홍식이 입을 열자 작은 집과 강원훈도 더 이상 끼어들지 못했다.강원훈은 이 모든 상황이 자기와 상관없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술잔만 만지작거렸다.강지혁은 고세연을 몇 번 쳐다보더니 당당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한편 강씨 집안의 가장인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반대편 정유진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 상황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정유진은 오늘 흥을 깨려고 작정한 듯 강홍식을 보지 않고 고세연만 차갑게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설날인데 외부인 때문에 지아가 저녁 식사 모임에 오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형준 씨, 고세연 씨 더러 나가라고 해 주세요.”순간 강지찬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리고 갑자기 호명된 장형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
집사는 바로 강지아를 데려와 정유진 옆에 앉혔다.그제야 강씨 집안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정유진은 입맛이 없어 많이 먹지 못했다.그녀와 지아의 뒤에는 시중을 드는 하인이 서 있었고 눈치껏 반찬을 집어주고 국물을 떠 주었다.침묵 속에서 이어가는 저녁 식사 자리는 설맞이 가족 모임이 아니라 마치 조용하고 빈티지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엄숙한 회의 같았다. 정유진은 저도 모르게 친정 부모님이 생각났다. 만약 지금 그녀가 집에 있었다면 아마 부모님과 TV에 설 특집 프로그램을 켠 채 한창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며 일반 가족들처럼 화기애애한 설을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씨 집안의 설맞이 모임은 그저 설날이라 진행하는 상징적인 행사였을 뿐 가족의 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녁을 다 먹은 강홍택은 강지혁이 아직 학생이라고 세뱃돈까지 두둑이 챙겨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알아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밖의 추운 날씨에 정유진이 코트로 몸을 감싸자 옆에 있던 강지현이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 어깨에 걸쳐주려고 했다. 정유진은 깜짝 놀라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괜찮아요. 바로 코앞인데요. 저 상관하지 마시고 빨리 입으세요.”강지현이 남의 몸을 생각할 때가 아님을 정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강지현의 건강은 어쩌면 그녀보다 더 못할 수 있다.하지만 강지현은 계속 고집을 피웠다.“입으세요.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두 사람이 고생하는 거잖아요.”그때 갑자기 조예원이 생각난 정유진이 강지현을 보며 말했다.“예원이가 새해 인사 전해달래요.”그 말에 강지현이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그때 순간 몸이 가벼워진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강지현의 코트가 강지찬의 손에 의해 강지현에게 돌아갔다.강지찬은 마치 그녀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바람을 피운 것처럼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런 강지찬을 상대하기 싫은 정유진은 그저 강지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밖이 추우니 이만 돌아가세요. 디자인 시안은 급하지
호텔로 가는 내내 정유진은 눈을 감은 채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고 강지찬은 또 뭐가 화가 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호텔의 예약한 한 룸에 발을 들인 순간, 정유진은 그곳에 있는 정명학과 이명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그곳에는 정씨 부부뿐만 아니라 경가네 세 식구도 함께 있었다.최효진은 경은우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웃으며 말했다.“유진이 왔어? 우리 아들 소개해 줄게. 이건 우리 아들 경은우. 은우야, 형수님이라고 불러야지.”그러자 경은우가 바로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형수님. 진작부터 뵙고 싶었어요.”고객사 접대인 줄 알고 강지찬에게 끌려온 정유진의 차가웠던 얼굴은 두 집안 사람을 보자 순식간에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여기 계세요? 깜짝 놀랐어요.”정유진의 물음에 최효진이 대답했다.“지찬이가 다 같이 얼굴 본 적 없다고. 설날인데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해서 왔어.”옆에 있던 이명자가 한마디 보탰다.“지찬이가 우리를 데리러까지 왔어. 밥 다 먹고 우리 집에 같이 집에 가자고 했어.”이 순간 정유진의 마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강지찬이 다가와 그녀가 벗은 외투를 받아주자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두 사람 사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이때 최효진이 말했다.“다들 앉으세요. 앉아서 얘기해요.”최효진은 정유진의 손을 잡고 경은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유진아, 오늘 처음 보는 거지? 우리 은우는 변호사야. 귀국한 이후로 계속 고모 사건을 조사하고 있어.”‘경은우의 고모면 강지찬의 엄마가 아닌가?’최효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찬이가 엄마 사건이 조금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다시 증거를 찾는 중이야. 그런데 사건이 10년이나 지났다 보니까 단서를 찾기가 여간 쉽지 않네.”그때 옆에 있는 경은우가 말했다.“단서를 찾긴 찾았는데 일단 비밀이에요.”오늘 식사 자리는 강씨 본가에 모였던 때보다 훨씬 편안하고 화기애애했다. 식사를 마친 후, 강지찬은 정유진과 함께 그
정유진의 친정집 방문은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고급 차 세 대가 들어오고 있었고 그중 한 대는 이명자와 정명학, 다른 한 대는 정유진과 강지찬, 그리고 제일 마지막은 경호원 몇 명이 타고 있었다.물건을 잔뜩 들고 있는 경호원들은 엘리베이터를 한꺼번에 다 타지 못해 여러 번 나눠 타고 올라갔다.위층으로 올라가자 옆집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아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 누가 사진 찍어서 동네 단톡방에 올렸더라고. 다들 어느 집의 사위인지 궁금해하던데. 하하.”정유진은 옆에 있는 경호원의 손에서 선물세트 두 개를 가져와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지도 않고 옆집 아주머니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아주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유진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줘. 괜찮으니까 다시 가져가. 가져가.”하지만 결국에는 정유진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는 선물을 받았다. 집에 들어가 열어보니 안에는 몸에 좋은 고급 약재가 두 세트나 들어가 있었다. 이 두 세트만 해도 족히 천만 원은 훨씬 넘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온 강지찬에게 이명자가 슬리퍼를 가져다주려 하자 정유진이 이명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혼자 하게 내버려 둬요. 우리 집에 시중드는 집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옆에서 강지찬을 도와주려던 장형준도 순간 말문이 막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러자 강지찬이 이명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장모님, 제가 할게요.”이명자도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그 갈색 슬리퍼가 지찬 씨에게 주려고 산 거예요.”“고마워요.”경호원들은 설날 선물세트들을 집안으로 들여놓고 다시 내려갔다. 아무래도 한 식구만 살던 작은 집이다 보니 사람이 많으면 복잡하고 붐벼 정신이 없었다.강지찬은 정명학과 차를 마시며 바둑을 두고 있었고 정유진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이명자가 따라 들어와 정유진을 타이르며 말했다.“강서방의 외숙모에게서 얘기는 들었어. 지찬이도 자기 엄마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 그런 거잖아. 명절인데
구정이 지나고 3일 뒤, 정유진은 경찰로부터 한 번호판의 소유주가 맞느냐는 전화를 받았다.정유진이 맞다고 대답하자 경찰은 정확한 시간을 그녀에게 말하며 이 시간대에 태안병원에 간 적이 있는지, 차에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는지 물었다.경찰의 물음에 일일이 답한 정유진이 한마디 물었다.“무슨 일이 있나요?”사실 경찰에게 묻긴 했지만 정유진은 속으로 그 답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경찰이 전화기 너머 대답했다.“지금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x 월 x일, 정유진 씨 차가 태안병원의 후문으로 나가는 게 CCTV에 찍혔어요. 그리고 그때 옆에 흰색 승용차가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고요...”그러자 정유진이 바로 말했다.“흰색 차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어요.”경찰은 이날 오후 정유진 차 안의 블랙박스를 수거하고 녹취록을 작성했다.정유진은 배가 많이 나온 이후로 운전을 별로 하지 않았기에 그날의 블랙박스 영상은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보나 마나 이제 곧 한씨 집안에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이제는 오성연이 태안병원을 고소하는 문제가 아니라 태안병원에서 오성연과 소희에게 따질 것이 많아졌다.경찰은 당시 소희가 병원에서 딸을 출산한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딸은 어디로 갔을까?아들은 또 어떻게 왔을까?현재 소희는 신생아 유기죄와 인신매매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다행히 정유진의 블랙박스에 녹화 기능이 탑재돼 있어 그날에 찍힌 영상은 경찰에게 핵심 단서를 제공했다.영상에는 당시 소희의 차에서 내린 여자의 손에 들려 있던 큰 가방도 선명하게 찍혔다.경찰이 간 후 이명자는 한참 뒤에야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고 정유진에게 물었다.“소희가 낳은 아이를 버렸다고?”이런 짐승보다 못한 짓은 선생님인 이명자에게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자기가 배 아파 낳은 친딸을 어떻게 버려!”정유진도 믿기 어려운 듯 한마디 했다.“경찰이 수사하는 중이에요. 아이는 괜찮아야 할 텐데...”그런데 이런 추운 날씨에 그 큰 가방 안에 있는 게
정유진은 드레스 위에 패딩을 입고 걸어 나와 단지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장형준의 차에 앉았다.차 안은 에어컨을 미리 틀고 있어 따뜻했고 전혀 춥지 않았다.옆에 앉아 있는 강지찬의 다운된 기분 따위는 정유진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나만 보면 이런 표정인 거예요?”강지찬의 차가운 한마디에 정유진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강지찬 씨, 우리 아직 냉전 중이에요. 오늘은 내가 아내 노릇을 하기 위해 당신을 도와드리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당신이야말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한번 거울 좀 보지 그래요? ‘강지찬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차가운지 생각도 못 하고 정유진만 나무라고 있었다. 정유진의 말에 강지찬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내 노릇이요?”말 그대로였지만 정유진은 이내 상대방의 말뜻을 알아차렸다.그나마 차 안이었기에 다행이었지 염치없는 이 인간은 진짜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강지찬 씨, 나 지금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에요.”임신부들은 원래 정서가 불안정하고 쉽게 우울해진다.그녀의 말에 강지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당신과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에요. 아내로서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할 거면 조금 이따가 이 얼굴로 있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집에서 와이프를 학대하는 줄 알아요.”그 말에 정유진은 마음이 조금 아팠다. “지찬 씨 창피하게 하는 일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한 호텔에서 열리는 리셉션에 참가했다. 호텔 문 앞에 도착한 후 먼저 차에서 내린 강지찬이 차 문밖에서 정유진을 기다렸다.정유진은 내리자마자 강지찬의 손을 잡고 입꼬리를 올렸다.그녀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지찬도 그를 향해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 같이 발연기하는 사람이 연기자가 안 된 게 너무 아쉽네요.”강지찬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정유진을 놀렸다.평소에 절대 웃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고 늘 차갑고 침착한 얼굴만 유지하던 강지찬인지라 오늘같이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정말 보
“지금 뭐 하는 거예요?”정유진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강지찬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서서히 옆으로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서 다른 한쪽으로 멀어지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정유진이 강지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그녀는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강지현?“지... 지현 씨, 언제 왔어요?”정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언가 몸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다름 아닌 그녀를 덮고 있었던 강지현의 코트였다.강지찬의 외투는 옆 소파에 놓여 있었고 그녀의 어깨 또한 어디서 묻혔는지 모를 크림이 묻어 있었다.“들어온 지 10분 정도 됐어요. 휴게실 문이 열려 있어서 봤더니 유진 씨가 잠들어 있기에 저도 쉴 겸 해서 들어왔고요.”강지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지찬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강지현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한 대 쳤다.“지찬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정유진은 순간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강지현은 그저 자기가 임신 중이라 혼자 있는 게 걱정되어 곁에 있었을 뿐인데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기까지 하다니? 간통 현장을 잡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워낙 허약한 강지현이었던지라 강지찬의 주먹에 맞자마자 바로 의자 위로 넘어졌다. 가슴이 답답해진 강지현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강지찬이 계속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정유진이 앞으로 나와 그를 막았다.“그만 하세요!”“그만하라고요? 두 사람이 여기 숨어서 무엇을 했는지 본인들이 더 잘 알 거 아니에요?”강지현을 가리키며 하는 강지찬의 말에 정유진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우리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지찬 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단지 피곤해 여기에서 잠시 쉬었을 뿐인데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미쳐 날뛰고 있냐 말이다. 강지찬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강지찬 씨, 억지 좀 그만 부려요!”그 말에
파티는 그렇게 세 사람 모두 기분 나쁜 상태에서 끝났다. 그날 화가 잔뜩 난 정유진은 집에서 이틀 정도 쉬고 나서야 그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강지현이 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파트 단지 밖에 있는 카페에 있으니 그녀더러 나오라고 했다. 강지현은 창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꽃이 세 송이 놓여 있었다.그는 정유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조금 전에 한 아이가 와서 꽃을 파는데 너무 애원해서 어쩔 수 없이 샀어요.”그는 꽃을 집어 들어 탁자 위의 꽃병에 꽂았다. 사실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다.정유진은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부은 게 아직도 안 내려갔네요?”그날 강지찬에게 두 대를 맞은 강지현의 왼쪽 얼굴은 아직도 좀 부어 있었다.“이제 괜찮아요.”강지현이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했다.정유진은 아이가 너무 커도 안 좋다는 말에 다른 것은 주문하지 않고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다.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가자마자 조금 전 꽃을 팔던 아이가 또다시 두 사람의 테이블로 왔다. 예쁜 치마를 입은 소녀는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꽃이 더 안 필요하세요?”강지현은 그런 소녀가 귀여워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방금 사지 않았어?”“예쁜 아줌마에게는 더 안 사줘요?”순간 강지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러자 옆에 있던 정유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왜 이 아저씨에게만 꽃을 사라고 해?”그 말에 아이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두 분 너무 멋지고 예쁘셔서 커플 같아 보여서요.”정유진은 아이의 엉덩이를 톡톡 두 번 치고는 말했다.“잘못 짚었어. 우리는 친구야. 꽃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소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뒤돌아서 갔다.정유진은 소녀가 간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강지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여기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그 말에 강지현이 바로 대답했다.“오늘은 제 생일이에요.”순간 정유진은 어리둥절해졌다. 오늘이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
이틀이 지나도 강지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흘째 되던 날 강지찬이 전국 뇌과 전문의들을 불러 다시 진료했고 토론 끝에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병원 측 주장과 비슷했다.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지만 강지아가 깨어날 수 있고 또 의식이 또렷하다면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났을 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예를 들어 기억 상실 혹은 이전의 질병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온유한은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실 밖을 지켰지만 온씨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최의현과 한규진조차 그를 보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서원준도 더 이상 온유한을 상대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결국 최금성이 온유한을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데려갔다.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온유한은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으며 덥수룩한 수염도 깎지 않았고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신애는 술 냄새에 기절할 뻔했다.죽은 개처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온유한은 신발 한 짝만 발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다.식탁 위에는 어제 음식들이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온유한, 강지아 따라 죽을 작정이야?”‘강지아'라는 세 글자에 죽은 개처럼 누워있던 온유한이 움직였다.“지아야? 지아야, 어디 있어?”강지아를 부른 뒤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또 마시려 했다.다만 술이 침대에 전부 흘러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그의 곁에 다가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온유한, 더 이상 수술 안 할 거야? 이렇게 마시면 손이 떨려 수술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온유한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실눈을 뜨고 최신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안경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누구세요? 꺼져요! 꺼져!”최신애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남자직원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